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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시>, 2012년 겨울호.
시인의 정치의식
―『시와시』 제13호의 머리말을 대신하여
맹문재
1
제18대 대통령 선거가 한 달을 채 남기지 않고 있다. 후보들 가운데 단연히 주목되는 인물이 있는데, 혜성처럼 등장한 그는 젊은이들의 아이콘답게 인기가 높다. 자신의 의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컴퓨터 바이러스를 고치는 데 전문가가 되었고 그것을 시장에 상품으로 팔아 사업가로서 성공했다. 그리고 마침내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선 것이다. 나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신선하기보다는 고도의 전문가가 대통령의 자리까지 차지하는 시대가 오고 있다는 사실에 우려감이 들었다. 국민을 위한다는 명분을 내세운 채 마치 주어진 한 번의 게임에서 이기기만 하면 대통령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단일화를 주력하는 모습에서 무서움마저 들었다. 이제 고도의 전문가가 최고의 권력마저 거머쥐는 시대가 된 것인가. 국민을 섬기는 일꾼이 아니라 전문가가 자신의 계획에 따라 국민을 조종하는 시스템의 시대가 도래하는 것인가.
필자는 이번 가을에 뜻하지 않게 급성위염에 걸려 근 한 달을 아프게 보냈다. 아직도 다 낫지 않을 정도로 후유증이 큰데, 아픈 몸으로 자리에 누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사람의 몸이 아프다는 것이 얼마 힘든 일인지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그리하여 대통령 후보 중에서 국민을 아프게 하는 이는 절대로 뽑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자신의 생각과 다르다고 해서 국민을 강제로 붙들어가 고문과 구타를 하는 대통령이라면 얼마나 공포스러운가. 뿐만 아니라 반대 의견을 가졌다고 해서 국민을 감시하거나 위협한다면 또한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이명박 정부에서 민간인 사찰 문제가 불거졌을 때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21세기가 진행되는 이 시대에 유신 시대의 악습이 여전히 자행되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렇지만 언론의 보도를 보면 그러한 정황들이 충분히 감지되었다. 정말로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국민을 아프게 하는 대통령, 국민에게 공포감을 조성하는 대통령은 정말 최악이다.
2.
『시와시』 제13호의 특집은 시와 정치이다. 다가오는 대선이라는 시기적인 면도 있지만, 한국 시단이 정치적인 문제를 도외시하는 경향이 짙기 때문에 한 번 짚어보려고 했다. 그동안 시단에서 정치적인 면에 관심을 갖지 않은 이유로는 여러 가지를 들 수 있겠지만, 신자유주의 시대의 도래로 인해 모든 가치가 물질적인 면으로 경도된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신자유주의조차 지극히 정치와 관계를 갖지 않는가. 따라서 우리 시단이 정치적인 면을 도외시하고 있는 것은 급속히 보수화되고 있는 사회의 분위기에 빠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시인이 자신이 살아가는 사회와 시대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은 참으로 우려스럽고 슬프다. 시인으로서 직무유기라고밖에 볼 수 없는 것이다.
김응교는 「정치가를 호명하는 화재경보기들」에서 시와 정치는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전제하고 시인들이 어떤 지도자를 호명하고 있는지를 살폈다. 칠레의 혁명과 역사 속에서 시를 쓴 파블로 네루다, 모든 일은 정치라는 말을 남긴 폴란드 시인 비스와 심보르스카, 파시즘과 독재가 독가스를 뿌려 대중의 영혼이 좀비가 되어갈 때 내면에 장착된 ‘집필’이라는 비상경보기를 켜야 한다고 말한 발터 벤야민, 전쟁과 학살이 주범이었던 히틀러를 ‘칠쟁이’로 희화시켰던 브레히트, 이승만의 독재 정권을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라는 시로 저항했던 김수영, 전쟁 없는 평화로운 일상이 존재하는 사회를 꿈꾸었던 신동엽 등의 시 정신을 소개하고 있다. 나는 지극히 거칠다고 느끼고 있었던 김수영의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를 새롭게 읽었다.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
그 지긋지긋한 놈의 사진을 떼어서
조용히 개굴창에 넣고
썩어진 어제와 결별하자
그놈의 동상이 선 곳에는
민주주의의 첫 기둥을 세우고
쓰러진 성스러운 학생들의 웅장한
기념탑을 세우자
아아 어서어서 썩어빠진 어제와 결별하자
내가 이 시를 다시 읽은 이유는 지금의 정치 상황에 대한 혐오감 때문일 것이다. 소통과 원칙을 지키는 정치는 사라지고 오만과 독선과 속임수가 판을 치는 오늘의 정치 현실, 김수영의 일갈에 나는 속 시원함을 느낀 것이다. 5·16쿠데타나 유신 시대와는 다르게 신자주유의 시대를 빌미로 국민의 인권이 유린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따라서 시인들의 정치의식이 필요하다. 사회적 진실이 우리 사회에 정착될 수 있도록 시인들이 비상 경보음을 울려야 하는 것이다.
김용락은 「문학과 정치」에서 시인으로서 현실 정치에 뛰어든 경험담을 얘기해주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시인으로서 현실 정치에 뛰어는 경우가 많지 않기 때문에 경험담 자체가 관심거리였다. 시인은 휘두르기 위한 권력이 아니라 잘못된 법과 제도와 관행 등을 고칠 수 있는 권력이 필요해서 선거판에 뛰어들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렇지만 계속해서 낙선하는 바람에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한 모습을 보면서 현실 정치에 뛰어든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깨달았다. 시인은 그와 같은 상황에서도 현실 정치에 참여해본 결과 세상을 보는 안목이 넓어지고 자신의 인격이 향상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와 같은 마음으로 역사의 발전을 인식하고 있다면 벌써 현실 정치의 뜻을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송경동은 「저마다의 강령인 시」에서 문학과 정치를 연결시키는 시도를 불순하거나 불온한 것으로 매도하는 우리 사회의 모습을 날카롭게 포착해서 비판하고 있다. 문학과 정치를 연계하는 것은 순수한 문학을 세속화한다거나 단순화한다거나 수단화하는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우리 사회에는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시인은 문학과 정치를 떼어놓으려고 하는 그 의도들이야말로 반사회적이고 반민중적이며 반역사적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따라서 모든 문학은 정치적이고 저마다의 강령이라고 주장한다. 진정 문학과 정치를 연결시키는 것이 문학의 미학을 떨어뜨린다거나 문학의 자유를 방해한다는 등의 주장은 동의할 수 없다. 그들은 소위 순수문학을 한다는 이들로 주로 교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이 학생들의 교육은 물론이고 문학상 심사를 비롯해 각종 심의를 장악하고 있는 한 우리 문학의 역사성이나 역동성을 기대하기는 힘들다. 따라서 이번 대통령 선거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금 생각한다.
임성용은 「시의 정치성」에서 이명박 정권 이후 우리 문단에 등장한 문학의 정치성 논쟁을 살펴본 뒤 시인이나 평론가들의 말만 무성했지 눈의 띄는 작품이 없는 현실을 짚어주고 있다. 실제로 평론가의 글이 해당 문예지의 권력자를 찬양하는 박수부대의 역할에 불과하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한 글을 읽은 때마다 얼굴이 달아오르고, 과연 우리 사회에 지식인이 존재하는지를 회의한다. 임성용 시인은 “시는 솔직히 자기기만에서 출발하지만 자기반성으로 끝나는 것이다. 시의 정치성이란 다름 아닌 시의 기만을 벗어던지는 일”이라고 말했다. 시인의 이 자각이 노동과 정치의식을 보다 견고하게 담아내는 산물을 우리에게 보여줄 수 있기를 기대한다. 생산 없는 비판은 야유나 투정에 불과하다. 정치의식이 깊은 노동시를 생산해 우리 시단을 이끌어주길 기대하는 것이다.
김사이는 「거대한 일상」에서 구로노동자문학회에서 시 공부를 한 것이며 집회에 나가 시 낭송을 하면서 느끼는 고민 등을 솔직하게 말해주고 있다. 그러면서 정치적인 시 쓰기에 대한 다짐을 들려주고 있다. “시를 쓰면서 내 심장박동이 아직 힘차게 살아 있음을 느낀다. 이후에 시와 정치에 대한 논의가 사그라진다 해도 내 시 쓰기는 휘둘리지 않을 것이다. 내 시가 어떤 때는 지나치게 정치적이라고 비난받을 수도 있겠지만 난 여전히 불평등한 자본주의 시대에 살고 있고 꿈이 사라진 자리에 생존을 위한 생존만이 남은 고통스러운 삶을 사는 사람들과 같이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다짐으로 개인의 감정 차원을 넘는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는 시를 쓴다면 더욱 시인의 긍지를 가질 것이다. 시도 정치도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3.
『시와시』제13호에 실린 시들을 읽다가 다음의 작품을 주목했다. 좀 더 구체성 을 띠었으면 힘을 낼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기도 했지만, 이 정도의 문제의식이라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만큼 지금의 우리 시단은 비정치적 혹은 반정치적인 성향이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철근처럼 무겁다 그는 철모처럼 답답하다
그는 난간처럼 위험하다 그는 망치처럼 힘겹다
그는 못처럼 아프다 그는 콘크리트처럼 우직하다
그는 밥처럼 쓸쓸하다 그는 작업복처럼 늙었다
그는 의자처럼 쉬고 싶다
―손순미, 「붉은 치마를 입은 소녀― 노동자」 전문
노동자는 왜 무겁고 답답하고 위험하고 힘겨운 존재일까. 우직하지만 왜 아프고 쓸쓸하고 늙은 존재일까. 그래서 쉬고 싶어 할까. 노동은 실제로 힘들다. 야근과 채워야 할 업무량과 위험한 작업환경과 벗어날 수 없는 조직 관계 등이 노동자를 억누른다. 따라서 노동자가 자신의 일을 천직으로 여기기보다는 양식을 구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 경향이 짙다. 그리하여 노동하는 과정이나 노동 생산물로부터 소외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노동자에 대한 이와 같은 인식은 재고할 필요가 있다.
회식이 별건가,
커팅기에 나무를 퍽퍽 잘라서리
숭숭 구멍 낸 드럼통 안에다가
엇대고 기대고 가새지르고 포개서 올려놓고설라무네,
설렁설렁 신나 좀 뿌리고 산소 불대를 솔솔 들이대면
아무리 지가 강철 철판이라도 안 오그라지고 배길 것이여.
몇 방 용접 붕붕 지져 스텐 석쇠 만들어놓았겠다
마늘 까놓았겠다
고추, 상추, 깻잎 씻어놓았겠다, 초장, 된장 사왔겠다
개뿔이나 뭐가 걱정일 것이여.
탄다, 장작이.
숯불은 일렁거리고, 조개는 쓱 아가리를 벌리고, 소라는 거품을 내뿜고
바지락은 뱃살을 오므리고, 낙지는 쩍쩍 입에 달라붙는데
새뜻하게 만든 기계
시운전 끝냈겠다, 술술 물건 잘 뽑아 나오겠다,
덜컥 기분이 좋아버린 우리 공장장,
대천 웅천 시장 바닥을 뱅뱅 돌고 후비고 누벼서
바리바리 훑어온
조개, 소라, 바지락, 낙지와 전어.
바쁘다, 바빠 술잔이 바빠.
벌건 코가 벌룽벌룽, 눈알이 찔끔찔끔
고소하고 달고 매콤하고 쌉쓰름하고
손가락, 젓가락이 주책없이 바쁘구나, 바빠.
고놈의 것 잘 시집보냈으면 됐지, 줄창
야근한 것이 뭐가 그리 대수여.
이번 월급은 제 날짜에 나오려나부지.
어서 술이나 한잔 푸셔.
똥구멍까지 쉬훤하게 찬술이 넘어 넘어가는데
사모님은 경리 아니랄까 봐 에쿠, 술보초를 섰구나.
흐흐흐 덤벼라 덤벼,
종이컵이면 어때, 길 건너 매점의 배 사장도 덤비고,
깔고 앉은 각목에다가 말만한 궁둥이 좀 치받히면 어떠냐
밥집 아줌마도 덤비고,
크으, 덤벼라 덤벼,
카센터 느림보 사장 박가도 기름 장갑, 스패너 후다닥 던져버리고
목장갑 한 켤레 끼고 덤비고,
군포, 시흥, 부천을 두루두루 찍고 다시 돌아온
별수 없는 중국집 대머리 주방장 최가도 헐레벌레 덤비고,
사이사이 둘레둘레 서고 앉고 좁히고 들이밀고, 후루룩 크으,
고철, 철판, 기계 줄줄이 늘어선 좁은 공장을 홀랑 들어낼 듯
공장 마당이 요란 방자하게 뜰썩뜰썩하는데
길가 담벼락마다 벚꽃으로 목련으로
사방 천지가 환한 것까지 얼씨구나 좋구나.
2차 어때,
아니 노래방부터, 아니야 당구장이 순서지,
들썽들썽 주장도 많고 사설도 많은
우리 청춘의 봄날은 이렇게 깊어 깊어만 갔는데
그날, 우리 가슴에는 벚꽃보다 더 희고
명주조개보다도 속살 부드러운 것들이 소록소록 살았더라.
―조영관, 「마당회식」 전문
노동자들의 세계를 너무 부정적이거나 안쓰러운 대상으로 볼 필요는 없다. 노동자를 선입견을 가지고 바라보거나 이분법적인 대상으로 여길 필요는 없는 것이다. 노동자들도 그들 나름대로 즐거움이 있고 자부심이 있고 또 살아가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또한 그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질서와 예의와 가치 기준이 있다. 그리하여 그들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와 같은 노동자들의 세계를 보편적인 상황으로 간주하는 것은 위험하다. 노동자들의 주체성을 인정할 필요는 있지만, 마치 계급 관계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것으로 보아서는 곤란하다. 노동자는 어디까지나 고용인과의 관계에서 약자에 속한다. 자신의 노동을 팔아야만 생을 영위할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정치의식을 가지고 노동자와 연대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4.
근래에 읽은 홍형진의 「자살 경제학」은 상부구조의 특별명령에 의해 전 세계의 국가들에서 은밀히 시행되고 있는 자살촉진정책을 그린 소설이다. 의학의 발전으로 인해 세계의 사람들이 이전 시대보다 비약적으로 오래 살게 됨으로써 인구를 최적화하려는 이 정책은 각국의 헌법 위에 놓일 만큼 다급하고 중요하다. 인구의 사망률이 감소하는 것뿐만 출산율 또한 감소하고 있어 자살촉진정책이란 곧 노령화를 해결하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정부가 나서서 국민을 직접 죽일 수는 없기 때문에 노인들의 자살을 유도하는 것이다.
나는 다소 황당한 이 소설을 읽는 동안 자살촉진정책보다도 ‘상부구조’에 관심을 두었다. 세계의 인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각국의 정부를 지배하고 있는 상부구조. 보이지 않는 그 권력의 존재에 의해 세계의 국가는 조종되는데, 한국 대통령도 그에게 문책당하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결국 개인의 생명, 행복, 자유 등의 가치를 상부구조를 위해 헌신하는 거대한 빅브라더 체계가 도래된 것이다. 작가는 조지 오웰의 『1984』년에 나오는 빅브라더를 마르크스주의의 유물사관에서 경제적 구조에 의해 형성되는 사회 제도, 법률, 종교, 정치, 철학 등의 사회적 의식 형태인 상부구조로 대체했는데, 기발한 착상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우리의 미래는 상부구조에 감시당하고 지배받고 조종당하는 처지에 처할지 모른다. 지금까지의 삶이 아날로그적인 형태였다면 미래는 디지털적인 형태여서 고도의 전문가에 의해 철저히 감시받고 조종당할지 모른다. 참으로 무서운 현실이다. 이런 점에서 전문가의 출현이란 좋은 것만이 아니다. 오히려 상부구조가 탄생하는 것으로, 곧 무서운 체제가 도래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막을 수도 없다. 이미 자본주의는 고도의 전문가가 도래할 수 있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기 때문이다. 진정 자본주의는 어떤 방향으로 진행될 것인가? 어떤 속도로 진행될 것인가? 어디까지 확장될 것인가?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시인의 적극적인 세계 인식이 요구된다. 곧 정치의식이 필요한 것이다. 이와 같은 차원에서 김남주의 시 한 편을 읽어본다.
혈압이 뚝 떨어졌소
즉시 나는 병동 중병실로 옮겨졌소
고혈압에는 약이 있지만 저혈압에는 약도 없다고 하는
간병의 말에 나는 덜컥 겁이 나는 것이었소
제기랄 까딱하다가는 옥사하는 게 아닐까 하고 말이오
내가 죽으면 여보(엄살이 아니오)
내 사랑하는 친구들에게 전해주오
자본주의를 저주하다 남주는 죽었다고
그놈과 싸우다 져서 당신 남편은 최후를 마쳤다고
여보 자본주의는 자유의 집단수용소라오
모든 것이 허용되지만 자본가들에게는
인간을 상품처럼 매매할 수 있는 자유
인간을 가축처럼 기계처럼 부려먹을 수 있는 자유
수지타산이 안 맞으면 모가지를 삐틀어 그 인간을
공장 밖으로 추위와 굶주림 속으로 내몰 수 있는 자유까지 허용되지만
노동자에게는 굴욕의 세계를 짊어지고 굶어 죽을 자유밖에 없다오
시장에서 매매되는 말하는 가축이기를 거부하고
기계처럼 혹사당하는 노예이기를 거부하고 노동자들이
한 사람의 인간성으로 일어서기라도 할라치면
자본가들은 그들이 길러 놓은 경찰견을 풀어 노동자를 물어뜯게 하고
상비군을 무장시켜 노동자들을 대량 학살케 한다오
여보 자본주의 그것은 인간성의 공동묘지
역사가 뛰어넘어야 할 지옥이라오 아비규환이라오
노동자를 깔아뭉개고 마천루(魔天樓)로 솟아올라
천만근 만만근 무게로 찍어누르는 마(魔)의 산(山)이라오
무너져야 할 한시 바삐 무너뜨려야 할.
―김남주, 「자본주의」 전문
확실히 자본주의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완벽한 체제가 못된다. 자본주의는 공공의 이익보다는 자신의 이익에 우선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고, 평등의 가치를 추구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불평등의 상황이 점점 확대되어 부유층과 빈곤층의 소득 격차는 계속 벌어지고 있다. 소수의 부유층이 소유하는 부는 점점 늘어나는 데 비해 그렇지 못한 다수의 사람들은 살아가기가 힘들다. 노동 시간은 증가하는데 실질적인 가계 소득은 감소하고 있다. 조건이 보다 열악한 사람들은 아예 자본주를 이탈하고 있다. 그들은 경쟁력 있는 기술을 가지고 있지 못하므로 자본주의가 내버렸다고 볼 수 있다. 점점 늘어나는 노숙자들이나 취업을 포기하는 사람들이나 노동을 거부하는 사람들이나 현실 세계를 거부하는 종교에 빠진 사람들이나 심지어 자신의 생명력을 끊는 사람들이 이 범주에 속한다. 그들의 수가 현재는 자본주의를 위협할 만큼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있지만, 시간이 갈수록 문제가 될 것이다.
그리하여 자본주의는 언젠가 붕괴되고 말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를 대체할 새로운 체제가 없는 한 자본주의의 종말을 함부로 말할 수는 없다. 설령 백년 뒤에 일어난다거나 천년 뒤에 일어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우리의 관심사가 되지 못한다. 우리는 미래에 살아가기보다는 현재에 살아가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야말로 미래에 관심이 없고 현재의 이익에 관심을 둔다. 현재적 존재인 인간의 속성을 철저히 파악하고 이용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정치의식을 보다 견고하게 가져야 한다. 타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나서고 연대해서 불평등한 구조를 개선시켜 나가야 하는 것이다. 더 이상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사적인 이익에 휘둘리지 말고 공동체의 이익을 추구해야 한다. 이타주의를 증대시키고 환경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소비를 줄이고 사람이 중심이 되는 체제를 모색하고 생산과 분배의 조화를 위해 노력하고…… 시인의 정치의식이 얼마나 중요한지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
『시와시』는 제13호부터 많은 변화가 있다. 무엇보다도 그동안 이은봉 선생님께서 주간을 맡아 고군분투해오셨는데, 할 일이 많으셔서 자문위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함께 편집위원으로 활동했던 김종훈 평론가와 이은규 시인 역시 기획위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동안 자문위원으로 모셨던 분들과 나민애 평론가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새로운 편집위원으로 김응교 시인, 문혜원 평론가를 모셨다. 『시와시』는 더욱 새로운 세계인식으로 시 전문지의 성격을 살려 나갈 것이다.
그동안 「시와 자연-생태 에세이」를 연재해주신 정우영 시인께서 이번 호를 끝으로 마무리 짓는다. 결코 짧지 않는 기간이었는데, 성실하게 원고를 써주셨기에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또 다른 기획이 있다면 언제든지 모실 생각이다.
이밖에 신인상 제도를 1년에 2회 모집하던 것을 1회로 줄였다. 시와시 작품상은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내년 봄호부터는 내용 면에서도 많은 변화가 있을 것이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참여를 부탁드린다.
맹문재
저서로 『한국 민중시 문학사』『패스카드 시대의 휴머니즘 시』『지식인 시의 대상애』『현대시의 성숙과 지향』『시학의 변주』『만인보의 시학』『여성시의 대문자』, 시집으로 『먼 길을 움직인다』『물고기에게 배우다』『책이 무거운 이유』『사과를 내밀다』 등. 현재 안양대 국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