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는 옛날 대전 충남 교육계 인사들
내가 1949년 대전 삼성학교에 입학 할 당시 교장은 권기혁이었다. 그는 경성사범 출신으로 일본의 교사들이 본국으로 물러난 후에, 우리 민족으로 남은 선생들 중에 명문 출신으로 약관 28세에 교장으로 발령 나 평생을 교장으로 재직했다. 그는 줄넘기 교재를 출간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으나, 학교 재정을 파탄으로 몰 정도로 교장실을 호화롭게 꾸민다는 구설수에 오르기도 하였다.
류승희 충남 교육청 초등계장(오늘 날 초등국장)은 삼남의 수재가 모인다는 대구 사범 출신으로 오랜 동안 충남 교육을 좌지우지했다. 인사 철이 되면 그의 낙점을 받기 위해 충남의 선생들이 몰렸으나, 그는 확답을 주지 않고 <되는 일도 없고, 안 되는 일도 없다>라는 풍설을 만들었다. 정년 즈음 그는 대전 원동학교 교장으로 내려왔다. 오후 5시가 되면 바람처럼 퇴근을 했고 선생들을 붙잡고 술놀음을 하지 않았다. 종례 시에 그는 <수고 했습니다> 그 한 마디 뿐이었다. 되지 않은 잡설로 시간을 끌지 않았다. 당시 각 반 교실에서는 <돼지 새끼-과외학생>를 키우고 있었는데, 어쩌다 교내를 순시하다 그 모습을 보았지만 군소리 한 번 없었다. 대인 풍모였다.
윤병혁은 대전 사범 강습과 출신으로 대전 대흥학교에서 대전 중학을 가장 많이 보내는 잘 가르치는 선생이었다. 당시 학교나 선생의 평가는 오직 대전 중학과 대전 여중을 누가 많이 보내는 것으로 평판이 났다. 대전시내 학교는 물론 대전 인근의 郡에서도 대전중학을 누가 많이 보내느냐의 경쟁이었다. 그는 충남교육위 의장을 지냈다. 그는 입시뿐만 아니라 교육과정에도 통달하여 장학사 시절 각 학급의 수업을 2-3분 보고도 교육과정에 입각한 수업이었는지 평가했다. 저 학년 음악수업에서 바장조나 사장조의 음계를 가르치려는 선생의 과욕을 제지 시켰다.
1950년대는 초등학교가 입시열풍에 휩싸였다. 서울에서는 경기중학에 누가 가는가의 경쟁이었다. 입시의 과열로 입학시험 문제에 소화제를 묻는 물음에 정답 논쟁이 붙어 소위 <무즙 파동>이 벌어졌다. 당시 선생은 6학년 담임을 선호했다. 주말이면 시내 맥주 집에서 술 먹는 사람은 초등학교 6학년 선생과 세무서원 뿐이라는 말이 있었다. 일 년 하면 조그만 집 한 채가 생긴다고 과장되기도 했다. 6학년을 했던 사람은 다음해에도 또 6학년이다. 실적이 따르면 연속으로 같은 학년을 맡는 <모찌 아가리>다.
그러다 전격적으로 중학교 無試驗 검정이 시행되었다. 중학교 배정은 각 학교에서 뽑을 학생 수에 맞게 학교 번호를 적어 통 속에 넣고 뺑뺑이를 돌리면 은행 알이 하나씩 떨어지게 하여 학교를 배정했다. 컴퓨터가 없던 시절 풍경이다. 도시 변두리의 형편 없던 사립중학도 입시 체재로 들어와 시행되었기 때문에 그런 학교에 배정된 학생과 부모는 실망이 대단했다. 입시경쟁은 잠시 고교 입시를 거쳐, 이후 고교 평준화로 지금은 대학입시가 국민의 관심사가 되었다.
이덕재는 대덕군 기성면 출신으로 동네에서는 <바보>로 불렸지만 김용태라는 대덕 출신 국회의원 덕분에 출세가도를 달렸고, 평생 교육귀족으로 행세했다. 대전 대동 교장으로 잠시 나왔다가 다시 충남 교육청으로 복귀했고, 금산교육장 윤병혁을 청양 출신이라는 이유로 청양교육장으로 보내고 자기가 금산 교육장으로 나갔다. 대덕과 금산이 같은 국회의원 지역구라나? 뭐라 하면서. 대전이 직할시가 되자 충남 초등국장과 대전 삼천학교 교장을 맞바꾸는 편법으로 그는 그곳에서 퇴직했다. 그가 친상을 당했을 때 선생들이 그의 집이 있는 대동으로 구름처럼 몰렸었단다.
당시 대전시 교육청에는 윤병혁, 김동신, 신동헌, 이덕재, 송근영, 함흥 사범 출신 인사 등이 장학사로 있었다.
김동신은 대전 사범 1회 출신으로 장학사나 교장을 하면서 맥주와 양주 이외에는 대접 받지 않는다는 풍문이 돌았다. 역시 대전 사범 1회 출신 신동헌은 대전 교육청 장학사로 마지막에는 대전 석교 교장으로 있었는데, 중풍으로 쓰러졌음에도 퇴직을 미뤄 구설수에 올랐다. 그의 초임 논산 가야곡학교 기록에는 그가 양반으로 기록 되었던데, 양반의 풍모는 아니었다. 송근영은 대전 사범부속학교에서 <장발장>이란 별명을 얻으며 대전중학에 적잖은 애들을 보냈다.
대전 교육은 대전 사범 출신이 주름을 잡았으니, 공주 사범 출신 이무나 신달웅 등은 주변 인사였다.
최영규 선생은 내 사는 성남동에 집이 있었고, 내가 다니던 홍도 학교의 선생님이셨다. 그는 전주 사범 출신으로 평교사에서 당시 개교했던 문창학교 교감으로 直 발령을 받은 유일무이한 선생이었다. 다른 시 군으로 발령 내는 관례를 넘어 선 것이었다. 그는 청렴결백의 상징이었다. 대부분의 인사들이 청탁을 주고받으면서 인사를 흐렸지만, 그는 대덕군 장학사 때도 어떤 직책에 있었던 때도 돈 한 푼 받지 않았다. 대덕군 내의 학교를 출퇴근 할 때 선생들이 내 주는 버스표도 버스 밖으로 던졌으며, 촌지로 받은 봉투(돈)는 반송했다. 황금 보기를 돌 같이 하라는 최영 장군 후손다웠다.
내 6학년 때 선생님이셨던 박철우 선생님은 대전 사범 강습과 출신이었지만, 가르치는 열정만큼은 대단하셨다. 선생님은 대덕군 기성학교에서 잘 가르친다는 명성으로 대전으로 전입되셨고, 곧바로 6학년 담임을 맡았다. 위로부터 내려 꽂혀 6학년 담임이 됐다고, 당시 교장 선생 이규방으로 부터 많은 미움을 받았지만 변두리 학교 홍도학교 1개 반에서 한꺼번에 대전 중학을 6명 입학 시켜 교장 코를 눌러 주셨다. 선생님은 학기 초에 기초 학력을 착실하게 굳히기 위해 서너 달을 기본 연산에 힘을 쏟았다. 교과서에는 당시 입시에 나올 만한 내용들을 빽빽하게 적어 놓으셨고 시사문제도 반드시 출제된다며 해방 후 산업철도로는 처음 개통되는 강원도 탄광의 철도 이름을 기억하도록 빼 놓지 않으셨다. 선생님은 우리 집에 잠시 기거하셨는데, 학교 공부가 끝난 이후에도 집에서 대 여섯 명이 모여 지도를 받았다. 선생님과 함께 삼성동의 공중목욕탕을 처음 가 보았다. 선생님의 동생 박종우 선생은 대전 삼성 학교 교무였는데, 대전 사범 3회로 당시 교장 교감을 제치고 대 삼성학교를 주물렀지만 연탄가스로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내가 첫 발령을 받은 대전 문화 학교 교장 김일배 선생님은 일제 시 視學官을 지낸 분으로 파쑈의 대명사였다. 나의 호칭은 <진 군>이었고, 아이들 앞에서도 선생은 호랑이 앞의 쥐였다. 아침 조회 때 조금 늦게 나오는 선생 보고 전교생이 보는데도 <못 뛰어!>하며 소리쳤고, 가을 운동회에 질서가 어지럽다고 체육 담당 선생을 패기 위해 운동장 트랙 밖에 에 박혀 있던 몽둥이를 빼 들고 쫒고 선생은 도망 다녔다.
제대 후 복직한 대전 오정학교 교장 이종문은 주독이 걸려 <코주부>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술을 즐겼으며, 직원 배구는 빼지 않고 하려 했다. 학교 대항 교직원 배구시합 때는 양복 상의를 뒤집어 입고 응원을 하는 다혈질 인사였다. 비리비리하던 내가 대전시 교육청에서 주최하는 <사례발표 보고대회>에서 고아원에 수용된 아이들의 사례로 발표할 때 주눅 들지 않고 유머스럽게 잘 발표했다고 이종문 교장은 우리 학교에서 참석한 사람들을 모아 선화동 술집에서 회식도 시켜 주었다. 나는 많은 사람 앞에서 말하는 것이 전혀 부담스럽지 않으며 비교적 조리 있게 말을 잘 하는 편이다. 그날은 각 학교 교장, 교무만 참석하는 방학 중의 행사였다.
2018. 10. 5
儒廣 陳 萬 錫
첫댓글 윤병혁선생님은 6학년3반 담임으로 대나무 회초리로 오늘에 나을 만드신 존경 하는 분 임니다 정말 공부을 못해 거든요
새삼스러히 그립군요.
좋은 추억을 상기 시켜주어 감사 합니다
유광. 잘 보고 갑니다. 자상하고 치밀하시고 대단하십니다.
대전 대흥 출신은 윤병혁 선생님을 모두 잘 아시리라 생각됩니다. 입시의 달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