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을 통해 본 현대예술의 흐름
연극 ‘유령’의 등장인물인 알빙
부인 역의 페닐라 오거스트(왼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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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세계 연극은 순수혈통보다 이종교배에 의한 혼혈, 잡종, 혼종을 선호합니다. 시공간과 매체를 초월해 모든 경계를 허물며 이루어지고 있어 그 조합과 변종이 무한합니다. 의미를 상실한 시대와 혼종의 공연 양식은 불가피한 상호보전이며 동시에 상호반영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한편, 텍스트로부터의 해방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실천하는
포스트모던한 실험들이 점차 변화를 하면서, 상대적으로 고전 텍스트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표현하는 사례도 늘고 있습니다. 수정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나 할까요. 이런 경향을 반영하는 외국 공연으로 스웨덴의 국보 연출가 잉마르 베리만이 연출한 입센의 ‘유령’을, 한국
사례로는 예술의 전당이 제작하고 러시아의 촉망받는 젊은 연출가 유리 부드소프가 연출한 뷔히너의 ‘보이체크’를 리뷰합니다. 김윤철
연극원 교수》
▼스웨덴서 공연중인 '유령'▼
제목:거장다운 단호한 해석, 단순한 표현
잉마르 베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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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마르 베리만 연출의 ‘유령’
영화 ‘제7의 봉인’, ‘페르소나’, ‘화니와 알렉산더’를 감독한
스웨덴의 잉마르 베리만을 기억하시는가. 종교적이면서 존재론적인
인생의 문제들을 진지하고 유머러스하게 그리면서 세계 영화사에 중요한 이정표들을 길이 남긴 명장 중의 명장.
만 여든 넷인 이 거장이 지금은 거의 연극 연출에 전념하고 있는데 그가 연출한 헨리크 입센의 ‘유령’이 지난해 2월 9일 스톡홀름의 국립극장 드라마텐에서 공연을 시작하여 1년 만인 올 2월 6일에 드디어
대단원의 막을 내릴 예정이다.
나는 이 공연을 지난해말 스톡홀름 드라이텐 국립극장에서 보았다.
현지 평론가 친구들이 “올 여든 세 살인 거장의 마지막 작품이 될 수도 있다” “놓치면 평생 후회한다”고 하도 졸라대 큰맘 먹고 현지로 날아갔다. 100여년이 넘은 고풍스러운 극장에 꽉 들어찬 1000여관객. 나는 공연이 진행되는 두시간 동안 극에 몰입한 관객들의 모습에
감동했다. 특히 관객들은 일흔이 넘은 남자배우의 일거수일투족에 청소년팬처럼 열광과 찬사를 보냈다.
노르웨이의 입센이 쓴 ‘유령’은 유전과 환경을 진실의 인과로 파악하면서 증명 가능한 사실과 오감에 의해 경험될 수 있는 현상을 강조했던 사실주의의 결정판으로 19세기 말에 서구의 근대연극을 태동시키는 데 가장 크게 기여한 작품이다. 사실주의 희곡의 대표적인 고전을 같은 스칸디나비아반도의 노장 베리만이 연출한다 했을 때 사실
나는 거친 몸짓과 격렬한 정서의 노골적인 연극보다는 욕망을 억압하며 정서를 내밀하게 드러내는 가장 심리적인 연극을 기대했었다. 어리석게도.
‘유령’은 자신의 진실한 욕망을 포기하고 가부장적 사회규범에 굴복하여 가정을 고수하다가 파멸하는 한 여인을 그린다.
극은 알빙 부인이 남편의 방탕한 생활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파리로
조기유학 보냈던 아들 오스발드가 갑자기 불치의 병을 안고 귀국한
시점부터 시작된다. 현재의 비밀을 캐기 위해 과거로 시간을 역순하면서 오랫동안 숨겨져 왔던 이 가정의 부끄러운 비밀들을 들추어낸다. 오스발드의 병은 아버지의 난잡한 성생활의 결과였던 선천성 매독임이 밝혀지고 하녀 레기나는 아버지와 이전의 하녀 사이에서 난
이복동생임이 고백된다.
남편을 위선적으로 기념하려던 보육원이 불타버리고 오스발드의 유일한 희망이었던 레기나도 제 살길을 찾아 떠나버린 뒤 알빙 부인은
발작적인 통증을 호소하는 아들에게 치명적인 몰핀주사로 안락사를
시킬 것인가, 말 것인가 사이에서 방황하는 가운데 극이 끝난다. 그야말로 사실주의의 강령에 충실한 텍스트다.
베리만은 텍스트의 골격을 따르기는 했지만 몇 가지 근본적인 변화와
재해석을 가한다. 예를 들어 보육원이 불탄 뒤 당황한 만데르스 목사가 원작에서는 “화재보험도 안 들었는데…”하며 세속적으로 반응하는 데 반해서 이 공연에선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십니까?”라며 십자가에 달린 예수처럼 존재론적으로 절규한다.
만데르스 목사가 이 가정사에 사무적으로 개입하는 원작과 달리 정서적으로 전폭 개입하는 것이고 그것은 알빙 부인과의 관계에서도 반복된다. 원작에서처럼 지나간 사랑을 애써 억제하는 대신 베리만의 연극에선 만데르스 목사의 나이를 거의 아버지뻘로 끌어올려 백발이 성성한 노인과 중년부인의 근친상간적 위험한 사랑놀이의 관계로 발전시킨다. 그래서 두 사람은 못 이룬 사랑에 서로 붙잡고 엉엉 울기도 하고 열렬하게 키스도 한다. 가장 놀랍게는 마지막 장면에서 알빙 부인이 통증으로 발작을 일으키는 알몸의 아들에게 샴페인에 몰핀정을 섞어 거의 폭력적으로 퍼부어 먹인다. 피에타와는 사뭇 다른 모자상이다. 불분명한 원작의 오픈 엔딩은 사실 입센의 의도적인 선택인데, 베리만은 극의 결말을 단순하고 단호하게 닫아버렸다.
베리만의 연출에서 현대연극의 큰 특징인 양식적 혼종(hybrid)이 다양하게 구사된다. 온통 초록색 일변도의 무대장치와 무대도구도 사실성을 뛰어넘는 처리이고, 무대 위에 내내 놓여 있는 초록색의 비너스상과 초록색의 괘종시계는 사랑과 시간을 비사실적으로 상징한다.
더구나 괘종시계는 알빙 부인이 아들에게 유전된 방탕 끼를 보고 “유령이에요! 유령이에요!”를 외치는 장면까지는 매우 빠르게 시간을
흘려 보내지만 그 이후부터는 정지시킨다. 위태롭게나마 희망이 남아
있을 때와 어두운 절망만이 남아 있을 때를 그렇게 구분한 것이다. 이
명백한 상징주의, 표현주의는 인물의 분장에까지 확대된다. 오스발드에게 광대 코를 씌운다든지, 그의 머리카락 한 줌을 빨갛게 염색하여
선혈낭자하게 이마를 가로지르게 한 처리는 사실적 차원에선 상상도
못할 일이다.
물론 이전에도 사실주의 연극에 표현주의적 장면을 삽입하는 작품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경우는 사실주의적 장면과 표현주의적 장면이
물리적으로 엄격하게 구분됐었다. 그러나 베리만이 연출한 ‘유령’의 양식엔 둘이 화학적으로 용해되어 있다. 어폐가 있는 말이지만 순수한 혼종주의라고나 할까. 경계를 허물어뜨리는
포스트모더니즘을 베리만은 그렇게 수용했다.
모던한 텍스트에 포스트모던한 양식을 덧입혀
동시대 관객에게 효과적으로 소통하는 노장의
시대의식이 젊은(?) 나보다 더 젊다.
김윤철 연극평론가·연극원 교수
▼예술의 전당서 공연중인 '보이체크'▼
제목:러시아, 유리 부드소프의 ‘보이체크’
꾸준히 공연되는 레퍼토리의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다시 선보인 연극
‘보이체크’는 현대미술 같은 깔끔한 무대에 탱고의 강렬함과 무용 같은 신체동작, 애절한 음악을 통해 다양한 장르를 조화시켜 호평을 받고
있다.사진제공 예술의 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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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의 횡포와 가난은 실존의 부조리한 한계상황으로 확대되고, 사랑은 살인으로 치닫는다…. 어찌 보면 단순한 치정 살인일 수 있는 ‘보이체크’가 오늘날 꾸준히 공연되는 레퍼토리의 하나인 것은, 그를
둘러싼 부조리한 한계상황의 절박성과 그 앞에 무력한 인간 존재를
그려냈기 때문일 것이다.
예술의 전당 토월극장에서 공연중인 ‘보이체크’(1월14일∼2월2일)도 예외 없이 사회라는 상하구조 안에서 무력한 한 개인의 아픔을 진솔하게 그렸다. 러시아 스태프진과 국내 배우들이 함께 작업했던 이번 공연은 연출가 부드소프가 과연 떠오르는 러시아의 차기 연출가임을 확인시키는 동시에 우리 배우들의 저력을 느끼게 했다.
연출가 부드소프는 원작의 복합성을 소위 포스트모던적인 혼종 스타일과 움직이는 신체로 표현했다. 표현주의 기법으로 무대는 위태로운
세상인 양 아찔할 정도로 경사져 있고, 바닥의 군데군데 뚫린 구멍에는 조명을 사용하여 무대 밑 공간까지가 무대로 활용되었다. 한 구석에 설치된 사다리 같은 추상적 가설물은 현대 조각을 연상시킨다.
서 있기도 위태로울 것만 같은 무대에서, 사람들은 경쾌하게 탱고를
춘다. 중심조차 잡을 수 없는 세상과 그 위에서 벌어지는 세상사에 대한 단적인 은유이기도 하다. 여기에 가련한 개인인 보이체크는 놀랄
만큼 리얼하게 묘사된다. 가족을 위한 약간의 돈을 벌기 위해 자신을
의학실험에 내놓은 그는 철저한 생활인이며, 부정한 아내에 대한 질투와 살해는 오셀로의 광기를 능가하고, 자신의 궁핍한 삶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분노하는 그는 부조리의 한계상황마저 보여준다. 또한
연출은 눈에 뜨이게 등장인물 칼을 확대시켜 보이체크의 분신이자 전체의 화자 역할을 담당시켰다.
공연에서 보이체크를 둘러싼 인물들의 움직임은 무용과 연결된다. 특히 군무의 탱고는 그 강렬한 몸짓과 긴장성으로 보이체크를 조여가며
권력층의 권위를 나타낸다. 탱고를 위해 아코디언을 켜는 악사석을
배치했을 정도로 공연의 중심에 있다고 하겠다. 반복되었던 탱고는
타자들의 무심하고 즐거운 일상을 나타내는 동시에 공연 흐름에 일종의 경쾌함을 부여하여 자칫 가라앉았을 분위기를 적절히 끌어올렸다.
또한 간간이 사용된 노래들도 애절한 보이체크의 내면을 잘 표출하였다.
보이체크(박지일 분)나 마리아(김호정 분), 백치 칼(장현성 분) 등 주요 배역진들도 움직이는 공연과 신체언어 표현 등에서 훌륭히 역할들을 소화하였다. 다만 아직도 대사 처리가 아쉬웠는데, 특히 대사 전달이 문제 있었다. 물론 음악을 크게 틀어 놓고 대사가 병행되었다는 변명이 있겠지만 강도 높은 신체훈련을 통해 보다 많은 에너지 방출이
요구된다.
한마디로 이번 공연은 시청각적으로 즐거운 공연이었다. 현대 미술 같은 깔끔한 무대에 탱고의 강렬함 및 무용 같은 신체동작과 애절한 음악을 통해 보여준 ‘보이체크’는 실로 다양한
장르를 조화시켰다. 또한 보이체크의 고뇌는
사회적이며 사실적이고 실존적이다. 이러한 양식적 혼종성과 의미의 다의성에서 과연 우리가
포스트모던 시대의 미학을 향유하고 있음을 절감했다.
이 미 원 연극평론가·한국예술종합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