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은하제국 로엔그람 왕조는 멸망했지만 로엔그람 왕조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공화국 헌법 초안 4조에는 로엔그람 황실에 대한 예우와 관련된 내용이 삽입되었는데 정식 헌법에서는 내용이 더 추가되어 아얘 헌법 7장에 삽입되는 것으로 격상되었고 여러 조항으로 로엔그람 황실의 권위는 결코 일반 시민의 수준이 아니게 보장도었다.
특히나 '로엔그람 공화국' 이라는 후대의 평가가 있을 정도로 전제군주정과 민주공화정의 과도적 단계에 있던 제1공화국 시절에는 이름만 황족이 아니지 사실상 황족이나 다름없었고 알렉산더와 세바스타인도 황제라는 지위만 없어졌지 새 공화국에서의 권력과 권위가 황제에 못지않았다.
먼저 새 공화국 헌법 4장에서 국가원수의 임기에 대해서 초대 한정으로 7년, 3선까지 허용하며 이후는 7년 재선 가능으로 규정하여 알렉산더는 최장 21년동안 집권이 가능했고 세바스타인이 그 뒤를 이어 최장 14년간 집권이 가능하였는데 이것은 독재에 가까운 임기였지만 새 공화국에서 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는 공화주의 인사가 그 둘밖에 없는 한계에서 오는 문제였다.
공화국이 세워지긴 했지만 초창기의 공화국 내정은 혼란스러웠다. 왕당파, 자유파, 공화파는 각각 보수당, 자유당, 공화당을 창당하였는데 원내 제1당인 보수당은 툭하면 제정을 부활시킬 것을 주장했고 보수당, 자유당은 공화국 수호의 문제에서는 단결했지만 앞으로 공화국의 향방을 두고는 큰 부분에서는 협력했지만 세부적인 부분에서는 대립하였다.
의회 뿐 아니라 관료, 군부, 사법부에서도 구 제국 시절의 인사들이 교체되지 않고 남아있었고 당연히 이들은 공화주의 성향보다는 군주정 성향이 강했고 공화국 정부와 공화국 의회가 아니라 알렉산더와 세바스타인에게 충성할 지경이었다. 이런 식으로 공화 개혁이 이뤄졌지만 새 개혁이 오히려 이전만 못하다고 느낀 시민들과 반면에 정치구조가 이전의 제국 시절과 별 다르지도 않다고 느낀 급진파 공화주의자들은 모두 이에 만족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구 동맹령과 신영토 지역의 시민들, 그리고 구 제국령 내의 일부 민주-공화주의 성향의 시민들 덕분에 공화국은 어찌저찌 유지될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며 공화국은 차츰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고 불만을 가지던 시민들도 서서히 공화국 체제를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시간이 가면서 공화국의 헌법은 점점 더 공화국스럽게 변모해가며 공화국의 체제와 정치는 정교해져갔다. 물론 여전히 제국 시절을 그리워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로엔그람 왕조에서 100년에 가까운 기간동안 암군 하나 안 나온 것이 역사상 보기 드물 정도로 운이 좋았던 것일 뿐 전제정치 자체가 우월한 것은 아니었기에 그런 목소리가 나온다고 공화국이 제국으로 되돌려지는 일은 없었다.
물론 여전히 의회 내에서는 왕당파 성향의 보수당이 큰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래도 멀리 보면 시간이 갈수록 제국의 부활보다는 그저 로엔그람 황가에 대한 수호 성향이 강해지는 쪽으로 변모하였고 공화국 정치가 알렉산더와 세바스타인의 리더십에 자유공화파의 정치력과 제국 시절의 관료들의 노력이 더해지며 안정되면서 알렉산더의 2기 임기가 시작될 무렵에는 많은 시민들이 공화국 체제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2기 임기시절부터는 서서히 공화국 헌법을 과도적인 수준에서 진짜 공화국에 걸맞게 고쳐나갔다. 1기 시절에는 국가원수와 정부수반이 분리되어 있었지만 실권은 거의 국가원수에게 있었고 정부수반은 거의 보조 역할이나 다름없었지만 2기 시절에 둘의 권한을 거의 동등하게 만들고 국가원수 선출은 국민들에 의한 직선제로, 정부수반은 국회에서의 간선제로 선출하는 식으로 변경되었다.
그리고 3기때는 삼권분립의 성립이 완료되었고 국회의 권력을 강화하였으며 마침내 정부수반의 권력이 국가원수를 뛰어넘는데 성공하였고 이 시기부터 왕당파보다 공화파가 더 큰 세를 이루게 되었다. 그리고 21년의 임기를 모두 마치고 물러난 알렉산더를 대신하여 제4대이자 두번째 국가원수가 된 세바스타인 시기에 공화국 헌법에 전면적인 대수술을 가하여 헌법에서 이전 시대의 잔재는 로엔그람 황실에 대한 처우와 관련된 헌법 7장을 조금 손보아 유지하는 것을 빼고는 모두 청산하였다.
또한 공화국은 세바스타인 이후부터 국가원수는 5년 중임제, 정부수반은 3선까지 가능하도록 수정되었고 내각책임제 국가에 가깝게 변모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우주력 921년에 비 로엔그람 황가 출신 인물이 국가원수와 정부수반을 모두 차지하는 것으로 제1공화국 체제는 끝나고 제2공화국 체제, 공화정의 완성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렇게 로엔그람 왕조 은하제국에서 은하 공화국 체제로의 전환이 완료되었다. 이로서 로엔그람 왕조는 영구히 은하제국의 황제 자리를 잃게 되고 황가 일원들은 표면상으로는 공화국의 일개 시민으로 전락하였다. 그러나 로엔그람 왕조는 박수칠 때 떠났으므로 민심을 잃고 라인하르트 생전부터 존재감을 잃고 공화국이 들어서면서 소리소문 없이 일개 시민이 되며 아무 관심도 못 받은 골덴바움의 후예들과는 달리 그들은 은하제국의 황제와 황족이 아니고 표면상 공화국의 시민이지만 동시에 황제와 황족이라는 타이틀은 유지하였고 역사적 악업으로 쥐죽은 듯이 산 카타린 케트헨 1세 일가와 그 후손들, 그 방계들과는 달리 라인하르트 2세 일가와 그 후손들, 그 방계들은 공화국에서도 큰 목소리를 내며 살았다.(물론 베스터란트 사건 같은 흑역사가 세상에 드러나며 비판받기도 했지만)
먼저 라인하르트 2세, 그는 공화 개혁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무리수를 두며 강경하게 반대하지도 않았고 공화정 전환 후에는 공화국 헌법에 따라 '로엔그람 황가의 황제' 라는 이름으로 황제로 복위되어 죽을 때까지 직함을 가지며 왕당파의 구심점이 되었다.
그는 직접적인 정치개입은 없었지만 왕당파를 통해 정계에 영향력을 가졌으나 큰 사고를 치지는 않았고 그의 퇴위를 두고 누구도 폭군에 대한 단죄라기보다는 잘못된 통치로 인한 책임으로 간주하였기에 재위시절의 잘못으로 문제가 되지 않은 채 예술과 취미, 그리고 십대 시절부터 좋아했던 여색을 즐기며 행복하고 편안한 말년을 보냈는데 재위중에 로엔그람 왕조의 문화가 가장 절정에 달하게 한 만큼 높은 예술적 소양으로 평가받는 작품을 남겼다.
알렉산더 2세와 세바스타인 2세는 모든 일을 마치고 정치에서 물러나 로엔그람 황실의 대변인이 되었다. 이들의 공화 개혁은 로엔그람 왕조 스스로의 폭주를 우려하여 스스로 권력을 내려놓은 일로 취급되었기에 재임중이나 그 후에나 큰 존경을 받으며 살았고 아버지가 죽은 후 각각 순서대로 '로엔그람 황가의 황제' 자리를 이어받았다.
그리고 황실 일원들, 갑작스러운 공화정 개혁으로 이들은 졸지에 은하제국의 황족 자격을 잃은 셈이었지만 많은 이들에게는 오히려 기회였다. 로엔그람 왕조는 골덴바움 왕조처럼 많은 황족들이 황제가 되겠다고 궁중음모를 꾸미고 모략을 꾸미는 등의 일을 못하도록 황족들을 통제해 유력한 황위 계승자와 그와 아주 가까운 인물이 아니면 제 기량을 발휘하기 힘들어 정치와 완전히 먼 일에 종사하거나 정치에 참여해도 관료 정도밖에 되지 못했는데 공화국 시기에 이르러 굳이 로엔그람 황실 일원들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제약해야 할 이유가 사라지자 실력있는 황족 출신들이 정계에 진출하여 활약하였다.
이뿐만 아니라 어쩄거나 로엔그람 황실은 제 손으로 주권을 국민에게 준 셈이었으므로 그 반대급부는 제대로 받았다. 로엔그람 황실의 재산을 온전히 보장받았고 각종 공공시설, 공공서비스 이용에서의 우대와 편의를 받을 권리가 있었으며 그 외에도 자잘한 특권이 있었다. 물론 그 특권들이 있다고 해도 그것이 과거 문벌귀족들의 특권에는 비비지 못하였지만.
그래도 아주 특별한 권리라면 황제의 정치 참여가 가능하다는 것으로 공화국에서 내각불신임으로 내각이 무너지고 새 내각이 구성될 때까지 로엔그람 왕조의 황제가 임시로 정부수반의 자격으로서 공화국 정부를 지휘할 수 있는 권한이었다. 이 기간이 그렇게 긴것은 아니라도 선거도 없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은 크나큰 특권임이 틀림없었고 로엔그람 황가의 황제들은 일생에 걸쳐 1~2년은 통치하였기에 그들은 공식적인 통치자가 아니었음에도 엄격한 교육을 받으며 자리에 올랐다. 그 외의 로엔그람 황가 일원들도 공화국에서도 사회 각지에서 큰 역할을 하며 공화국의 평화와 발전에 기여하였다.
그리고 우주력 943년, 제2 은하공화국 정부는 공화국 건국 50주년을 맞아 인류가 우주로 진출한 이래로 이 때까지의 가장 큰 위인들을 기념하여 그들의 동상을 제작하기로 결정하였다. 수많은 논의 끝에 7명을 선정하여 그들의 동상을 제작하였는데 그 7명의 위인이란 다음과 같았다.
첫번째는 초광속항행을 우주성 지구통일정부 우주성 개발진 책임자인 안토넬 아슈노 박사
두번째는 지구 중심의 인류사회를 바꾼 라그랑 그룹의 리더 칼레 팔름그렌 시리우스 성계 정부 정부수반
두번째는 인류 최대의 황금기 중 하나인 은하연방의 건국자 조지 어거스트 커스티스 은하연방 국가원수
세번째는 자유행성동맹의 국부 알레 하이네센
네번째는 150년간 동란의 시대를 마감한 로엔그람 왕조의 국부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 은하제국 황제&그에 맞서 민주공화제를 지키고자 한 양 웬리
다섯번째는 현 공화국의 국부인 알렉산더 2세&세바스타인 2세 은하제국 황제들
이들 7인의 동상은 공화국이 세워짐과 동시에 수도가 된 하이네센폴리스의 중앙 광장에 실제 크기에 맞게 제작되었는데 이들 중 골덴바움 왕조의 인물은 단 한명도 없었지만 로엔그람 왕조의 인물은 세 명이나 있었다는 것에서 로엔그람 왕조가 멸망한지 50년이나 지나고도 로엔그람 황가에 대한 사회적 존경심은 실로 막대하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페잔의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힐데가르트 폰 로엔그람의 영묘는 언제나 참배객들로 미어터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