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gelus (프랑스어, L'Angélus)는 1857년에서 1859년 사이에 완성된 Millet의 유화이다.
이 그림은 들판에서 감자 바구니 위에 절을 하는 두 농부를 묘사하고 있다.
Angelus는 수평선에 있는 교회의 종이 울리는 것과 함께 하루 일과의 끝을 알리는 기도이다.
밀레는 미국의 화가, 미술 수집가가 되려는 토마스 골드 애플턴(Thomas Gold Appleton)의 의뢰로 제작되었다.
이 그림은 오늘날 바르비종 학파의 미술품 가격을 19세기 후반에 기록적인 액수까지 끌어올린 것으로 유명하다.
Millet는 'Angelus에 대한 아이디어는 우리가 들에서 일할 때 교회 종이 울리는 소리를 듣고
할머니가 항상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Angelus 기도를 바치기 위해 일을 멈추게 했던 것을
기억했기 때문에 나에게 왔습니다.'라고 말했다.
1870년 밀레는 파리 살롱의 심사위원으로 채택되었다. 이후 그는 가족과 함께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을 피해
Cherbourg(쉐르브르)와 Gréville(그레빌)로 이사를 가게 되며 1871년 때까지 바르비종에 돌아가지 않았다.
그의 노년기는 상업적인 큰 성공과 공식적인 명성의 정점으로 평가되었으나, 밀레는 건강이 악화되어
정부에서 의뢰했던 작업을 더 이상 진행할 수가 없었다.
1875년 1월 20일에 빈곤하였을 때 얻은 결핵이 원인이 되어 61세로 숨을 거두었다.
밀레는 빈센트 반 고흐의 초기 시절 작품에 많은 영향을 준 것으로 유명하다.
밀레와 그의 작품은 반 고흐가 그의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주 등장하고 있다.
노르망디를 그린 클로드 모네의 작품들은 밀레의 풍경화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며,
또한 밀레의 작품들의 구도나 상징적인 요소 등은 쇠라의 작품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The Sower
Oil on canvas
나는 농민으로 태어나
농민으로 죽을 것이다
내 땅을 지키며 한걸음도 떠나지 않을 것이다
Jean-François Mille (1814-1875, French Barbizon school painter)
장 프랑수아 밀레(Jean-François Millet, 1814년 10월 4일 -1875년 1월 20일)는 프랑스의 화가로
프랑스의 한 지방에 위치한 바르비종파(Barbizon School)의 창립자들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이삭 줍기,' '만종,' '씨 뿌리는 사람' 등 농부들의 일상을 그린 작품으로 유명하다.
사실주의(Realism) 혹은 자연주의(Naturalism) 화가라 불리고 있다.
밀레는 소작농에 대한 그의 그림으로 유명하며 유화로 가장 잘 알려져 있지만
파스텔, 콘테 ,크레용, 드로잉 및 에칭 작품도 많이 남겼다.
그는 데생과 동판화에도 뛰어나 많은 걸작품을 남겼다.
밀레의 그림은 19세기 후반의 전통주의로부터 모더니즘으로의 전환을 보여준다.
사실주의, 인상주의, 후기인상주의 화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밀레는 그레빌 아그(Gréville-Hague)에 있는 작은 마을 그뤼시(Gruchy)에서 태어났다.
이곳은 농업이 주된 삶이었던 지역이었기에 그는 어린 시절부터 농부들의 삶을 관찰하며 자라났다.
가톨릭 사제였던 삼촌의 도움으로 밀레는 라틴어와 근대의 문학 작가들에 대해 배웠다.
일찍부터 성인전에 감명을 받아 종교적인 장면의 데생을 즐겨 그렸다.
1833년 그는 재능을 인정한 아버지에 의해 셰르부르 옥트빌(Cherbourg-Octeville)로 보내져
그곳에서 초상화가 폴 뒤무셸(Paul Dumouchel)에게서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의 첫 작품이었던 초상화가 1840년 파리 살롱에 전시되게 되자
셰르부르(Cherbourg)로 돌아가 초상화가로 개업하게 되었다.
이듬해 폴린 비르지니 오노(Pauline-Virginie Ono)와 결혼하였으나 생활이 어려워 다시 파리에 나와
간판, 미인화 등을 그려 생활해 나갔다. 1843년 파리 살롱에서 작품 전시를 거절당하고
아내인 폴린이 폐병으로 죽자, 밀레는 셰르부르로 다시 돌아갔다.
1845년 카트린 르메르(Catherine Lemaire)와 함께 르아브르(Le Havre)로 이사하여 1853년 결혼식을 올렸다.
그들은 9명의 자식을 갖게 되었고 이후 그녀는 밀레의 여생 동안 함께 살게 된다.
르아브르에서 그는 초상화 작품이나 풍속화들을 그리면서 몇 달간을 보내다가 다시 파리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1849년 밀레는 '추수하는 사람들'(The Harvesters)를 그려 국가에 기증하였다.
파리 살롱에서는 '숲의 가장자리에 앉아 있는 양치기'(Shepherdess Sitting at the Edge of the Forest)
작품을 전시했다.
이 작품은 매우 작은 유화작으로 이전까지 그가 그려왔던 미화되고 목가적인 주제에서
보다 더 사실적이고 화가 개성적인 기법을 사용했다. 같은 해 6월 그는 파리에 콜레라가 유행하자
파리의 교외인 바르비종으로 옮기고, 본격적인 농민 화가로서 전원 생활의 정경을 그렸다.
그는 가난에 쪼들렸으나 신념을 굽히지 않고, 농민의 모습을 종교적인 분위기로 심화시켜
소박한 아름다움으로 표현하였다.
1850년에서 1853년까지 그가 가장 중요시했으며 가장 오랫동안 작업하게 된 작품
'추수하는 사람들의 휴식시간'(Harvesters Resting)을 그리게 되었다.
The Gleaners(Des glaneuses)는 1857년에 완성된 Jean-François Millet의 유화이다.
Gleaners는 Millet의 가장 잘 알려진 작품 중 하나이다.
그것은 추수 후에 밀의 밭에서 이삭을 줍는 세 명의 농부 여성을 묘사했다.
이 그림은 당시 농촌 사회의 최하위 계층을 동정적으로 묘사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삭을 줍는 구부린 농민 여성의 이미지는 피사로, 르누아르, 쇠라, 반 고흐와 같은 젊은 예술가들의 작품에서
자주 의역되었다.
타인을 감동시키려면
먼저 자기가 감동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지 못하면
제 아무리 우수한 작품일지라도
생명이 길지 못하다
Jean-François Mille (1814-1875, French Barbizon school painter)
밀레의 그림은 내 고향 아버지 어머니의 일상과 같다.
흙에서 나서 봄에는 씨뿌리고 가을에는 수확하고 이삭을 줍는다.
감자를 심어 감자를 캐 간식을 하고 가족과 나누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