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종의 청나라 정벌 계획은 성공 가능했다
1. 개방으로 새로운 조선의 건설을 꿈꾸다 비명에 간 소현세자
효종은 조선 제17대 왕이다. 그는 제16대 왕 인조와 인렬왕후 사이에서 1619년 둘째 아들로 태어난 봉림대군이었다. 그의 동복 친형은 소현세자였다.1637년 1월 조선은 청국과 전쟁에서 패배하여 인조가 청 태종 앞에 무릎을 꿇고 최고 복종을 의미하는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땅바닥에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행하였다.
그리고 장남 소현세자와 차남 봉림대군을 인질로 보내는 굴욕을 당했다. 1645년 2월 청국에서 8년간 볼모생활을 하고 돌아온 소현세자는 조선의 굴욕을 갚기 위해서는 강한 청국과 전쟁보다 화친하면서 청국과 서양의 발달한 문물을 받아들여 조선을 중흥시켜 강한 국가로 만들어야 한다는 개방적인 계획을 갖고 있었다. 만약 그가 왕이 되었다면 그렇게 하였을 것이고 보수 세력과의 정면충돌은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청 태종에게 씻을 수 없는 굴욕을 당한 인조는 자신을 “화살을 맞은 새” 라고 하며 청국이라는 말만 들어도 몸서리쳤다. 그런데 세자가 자기에게 굴욕을 준 청국의 관리들과 친하고 심지어 청국이 자기를 밀어내고 소현세자를 왕으로 세운다는 소문이 나돌아 인조는 청국에서 돌아온 소현세자를 미워하며 경계하였다.
소현세자는 귀국한 지 2개월 후 왕의 심정을 잘 읽는 후궁 조귀인이 추천한 의원 이형익의 불침을 맞고 급사했다. 소현세자가 사망했으면 소현세자의 장남이 다음 왕위를 계승하는 것이 조선 왕조의 종법이었다. 그런데 인조는 대신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청국과 전쟁을 해야 한다는 차남 봉림대군을 세자로 봉했다. 인조가 사망한 후 봉림대군은 장조카가 되어야 할 왕이 되어 정통성 문제가 발생하였다.
▲ 청국 태종에게 항복하는 인조의 모습을 나타낸 조각(왼쪽), 효종의 능.
2. 효종은 국가의 치욕을 갚기 위해 북벌계획에 주력
효종은 왕자 시절에 형 소현세자와 함께 청국에 볼모로 잡혀가 8년간 수모를 겪으며 이를 갈았다. 개방적이며 외교적인 소현세자와 달리 효종은 청국에 당한 굴욕을 갚기 위해서는 전쟁을 해 승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부왕과 시각이 다른 형 소현세자와 그 가족의 죽음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는 형의 죽음과 자기 왕위계승의 정당성 확보를 위해서라도 청국을 정벌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기의 세자 책봉에 도움을 준 김자점 등 친청파 세력을 축출하고 재야의 새로운 인재들을 기용했다. 청국 정벌인 북벌을 위해서였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조선은 이씨가 홀로 세운 나라가 아니고 사대부들과 공동으로 창업한 국가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국가 통치는 왕과 사대부들이 협의하여서 하는 것이지 왕이 마음대로 통치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자기 뜻대로 통치하다 쫓겨난 왕이 바로 연산군이었다. 그러나 효종은 사대부들의 생각과 달리 조선은 이씨 왕족의 나라였고 북벌을 성공하기 위해서는 절대 왕권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사대부들과 효종 간의 국가 이념에 대한 인식의 차이로 효종이 가장 중대시하는 북벌계획을 놓고 사대부들은 왕과 충돌하였다.
3. 효종은 북벌에 자신감 넘쳐
효종은 북벌을 위해 체력단련을 하였고 좋아하던 술을 끊고 여색도 멀리하며 기마와 궁술 그리고 무도 연마에 시간을 투자했다. 1659년 기해년 (효종 10년) 3월 효종은 백성의 복지 우선을 주장하면서 속마음으로는 북벌에 반대하던 서인의 지도자 송시열과 북벌에 관한 대타협을 위해 독대를 했다. 조선은 왕과 신하가 단둘이 만나는 것을 경국대전에서 규제하고 있었다.
효종은 법규를 위반해 가며 송시열과 독대를 한 셈이었다. 효종은 송시열에게 이조판서와 병조판서를 겸하는 권력을 주는 대신 북벌 준비의 전책임을 맡기려 했다. 효종의 북벌계획을 마음속으로 반대해 오던 송시열은 왕의 제안을 거절하면 자기 일파가 정치적 기반을 잃을 것 같고 왕의 제안을 받으면 북벌계획을 시행해야 하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상황이 되었다.
이때 효종은 북벌을 위해 10년 더 준비한다면 청국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10년 안에 정예 포수와 포병 10만 명을 양성하여 청국이 방심할 때 기습할 계획이었다. 그러면 중국 민족인 한족이 함께 공격할 것이고 청국으로 잡혀간 조선 포로 수만 명이 청국 내에서 호응한다면 한족 인구의 1% 미만이며 조선 인구의 10% 도 안 되는 인구 100 여만의 만주족 청국은 붕괴할 것이라는 확신에 전략을 수립했다. 이 전략계획은 성공 가능성이 컸다.
그러나 조선의 지배 세력인 사대부들은 겉으로는 치욕을 갚아야 한다지만 마음속으로는 전쟁을 싫어하고 안일하게 백성 위해 군림하면서 즐기자는 이기적인 자들이었다. 이들의 리더가 송시열이었다. 내심 북벌을 싫어하던 송시열은 효종과 독대에서 무거운 짐을 떠맡게 되어 머리가 지끈지끈했다. 그런데 왕이 갑자기 사망해 송시열은 곤경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 북벌문제로 효종과 독대한 송시열(왼쪽), 이조판서 송시결에 대한 임명 교지.
북벌 준비하던 효종 침 맞고 죽자 독살설 퍼져
4. 수전증 환자에게 침 맞고 효종 죽어, 북벌 반대세력의 타살인가?
효종은 북벌을 준비하던 재위 10년이 되는 41세에 의문의 사망을 했다. 송시열과 독대한 지 2개월이 지난 1659년 5월 왕은 머리에 작은 종기가 발생하여 신가귀의 침을 맞았는데 피가 멈추지 않고 출혈되어 사망했다. 침을 놓은 신가귀는 교수형을 당했지만 효종의 죽음에 대한 의문은 한둘이 아니었다. 신가귀는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수전증이 있는 환자로 왕이 명령하여 침을 놓았는데 혈맥에 침을 놓아 피가 쏟아지면서 왕은 곧 사망했다. 그리고 효종의 시체가 들어갈 관을 만들었는데 관의 폭이 작아 시신이 들어가지 못해 널판으로 이었다.
왕의 시신이 들어갈 관을 덧이어 만들었으니 죽은 효종을 사대부들이 푸대접한 것이다. 이러한 내용이 알려지면서 효종의 독살설이 전국에 퍼졌고 지금까지 의문으로 남아 있다. 청국과의 전쟁을 두려워한 사대부 세력의 교사를 받은 신가귀가 일부러 왕의 혈맥에 침을 놓았을 가능성이 있었다. 효종의 사후 북벌 얘기는 바람처럼 사라지고 대비의 상복 문제로 인한 예송논쟁으로 국가 전체가 시달렸다. 그 후 22대 왕 정조가 개혁을 추진하다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정조 사후 조선은 외척 노론의 정권 독점과 부정부패로 썩어가다 결국 멸망하였다.
5. 효종의 북벌계획은 허황한 꿈이었을까?
효종의 북벌계획에 대하여 사학자 이이화 등 많은 학자가 허망한 꿈이라고 폄하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사학자 이덕일은 효종의 조선과 한족 연합전선 구축 전략은 탁월하며 실현가능성이 있었다고 높이 평가했다. 북벌계획은 우리 민족이 동양의 최강자가 될 수 있는 위대한 도전이었고 실현 가능했다. 편히 앉아 백성을 통치하며 뜯어먹는 사대부들은 도전과 개혁을 싫어했고 더욱이 전쟁은 생각하기도 싫었다. 전쟁을 하려면 국력을 한 군데로 집중시켜야 하고 정대 왕권의 리더십이 필요했는데 조선의 왕 효종에게 그런 강력한 리더십이 있었을까?
효종의 왕위계승에 문제는 있었으나 세종도 3남으로 왕이 되었고 왕이 된 지 10년이 지난 효종을 정통성 없다고 하기는 어려웠다. 효종은 무술도 단련하는 강인한 성격이었다. 그러나 목적을 위해 신하와 비밀리에 타협도 하는 유연한 정치인이었다. 많은 신료의 반대를 누르고 김육의 뜻을 수용해 백성을 위한 대동법을 실시하는 과단성도 있었다. 그는 조선 땅에 편히 앉아 입만 놀리는 사대부들과 달리 8년간 만주를 돌아다니며 청국의 전투상황 등을 면밀히 관찰해 청국에 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현명한 군주였으며 결단력도 있는 리더였다.
▲ 북벌계획에 앞장선 이완 장군(왼쪽), 효종 때 사용한 조선의 화포들
6. 당시 청국에선 반청세력의 반란의지 강해 북벌 성공했을 것
장한식에 의하면 1644년의 청국군대는 만주 유목사회를 기반으로 한 기병 중심의 8개의 기(旗) 체제로 1기는 12,000명으로 지금의 사단급 병력이다. 그러므로 만주족의 8기군은 약 96,000명이었다. 그리고 몽골 8기군 39,000명과 한족 8기군 51,000명이 더하여 총병력은 186,000명이며 화포는 명국 기술자에게 배워 만든 홍이포를 사용했다. 내몽골까지 합하여 겨우 인구 150만 명 정도의 민족이 이런 대규모의 군대를 유지했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효종이 더 생존해 청국 정벌을 시도하였다면 청국의 강희제 군대와 전쟁을 하게 된다.
강희제는 1661년 8세에 황제에 올랐다. 효종이 더 살았다면 북벌계획이 완성될 1667-1669년의 강희제는 아직 사춘기 소년이었다. 권력은 병부상서 오배에게 있었으나 강희제 보호 세력도 있어 청국 조정은 권력 투쟁의 장이었다. 더욱이 오배보다 큰 세력의 한족이 지배하는 삼번이 반란을 일으킬 우려가 농후했다. 실제 1673년 오삼계 등이 삼번의 난을 일으키자 여러 곳의 반청세력이 봉기하여 8년 만에 겨우 진압되었다. 노련하고 청국사정과 군대시스템에 밝은 효종이 화포로 무장된 정예 군대 10만 명으로 혼란한 청국을 치면 반청 한족들은 물론 몽골족도 합세하고 조선 포로들이 호응해 준다면 조선이 청국을 붕괴시킬 가능성이 컸다.
조선은 화란인 박연을 활용해 총과 대포 모두를 제작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 그리고 효종은 문신들보다 이완과 유혁연 등 무신들을 북벌준비에 높이 기용했을 것이므로 무신들의 사기가 충천해 청국을 정벌할 전력이 충분했을 것이다. 무신들의 힘이 강해지면 붓대와 입만 갖고 자기주장만 고집하는 문신들이 약해진다는 것은 고구려의 연개소문 때와 고려의 무신정권시대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효종이 10년 더 살았으면 강인한 정신과 유연한 정치수단으로 조정을 휘어잡고 충분히 전쟁을 수행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것을 두려워 한 비겁한 북벌 반대 세력이 효종을 죽게 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아래는 효종의 북벌계획 성공 가능을 그린 것이다.
▲ 효종의 북벌계획 구도
평화는 강한 힘 아래 보장되는 것
7. 효종이 북벌 성공했다면 만주도 우리 영토돼 한국 아시아 최강국 됐을 것
효종의 북벌계획은 동양의 최강국인 청국을 정벌하는 우리 민족의 위대한 도전이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효종이 의문의 죽음을 당하면서 종지부를 찍었다. 역사의 가정은 없다고 하지만 효종의 정벌군이 한족과 함께 청국을 붕괴시켰으면 조선은 아시아의 강자가 되고 승리의 대가로 청국의 본거지였던 만주를 획득했을 것이다.
그리고 문을 기반으로 한 상무국가가 되고 인구가 조선의 10%도 안 되며 혈통이 비슷한 만주족은 문화 국가 조선에 동화되었을 가능성이 컸다. 전쟁을 주관한 조선은 유리한 위치에서 중국과 대등한 국가로 발전하여 서로 win-win 하는 상생관계가 형성되었을 것이다. 그러면 후에 발생하는 한일병탄도 국토분단도 없었을 것이고 지금은 아래와 같이 만주를 한국 영토로 하는 아시아 최강국일 것이다.
도전하는 국가와 민족은 창대하고 안일한 방법으로 살려고 한 민족과 국가가 쇠퇴한다는 것은 인류 역사가 보여주는 진리이다. 지금 한국에선 “국민의 복지와 평화가 최우선” 이라고 하면서 국민의 의식을 해이하게 하는 정치 세력들이 있다. 평화는 우리 힘이 강할 때만 보장된다. 힘이 없을 때는 다른 국가의 무자비한 지배만 있다는 것을 우리 민족은 뼈아프게 경험하였다.
오직 국방력과 경제력의 강화만이 우리의 살길이다. 군 복무 기간을 1년 이상 더 연장하고 군대를 제2의 대학교육기관화하고 군복무시절 근무성적이 우수한 장병을 사회에서 우대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군대가 강해지는 것은 물론 군대에서 인성과 창업 및 기술 교육을 해 많은 일자리가 창출되어 국가 경제도 향상되고 통일의 초석도 될 것이다.
첫댓글 저 때가
사드 배치할
절호의 기회였는데
인조 후
그
권세는
600년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