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새 종착역 07 (2019 사토 아이코)
07 엄마와 딸 그리고 나, 소용돌이치는 혈기 속에 (72세 부인공론 1996년 9월호)
07-1 딸 일가와 2세대 주택
2년 전에 집을 고쳐 짓고 완전 분리형 2세대 주택에 딸 가족들과 살고 있습니다. 딸이 시집가고 나서 3년간은 혼자 살면서 고독한 죽음을 진작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3년 전 엄동설한에 욕실에서 뒤로 넘어져 움직일 수 없게 된 일이 있은 후 오래된 집을 헐고 현재 형태의 집을 짓게 되었습니다.
2층에 딸 부부와 손자 등 셋이 살고 있고, 아래층에 저가 살고 있습니다. 계획 단계에서는 저가 2층에 살 생각이었습니다. 계속 30년 동안 2층을 서재로 하여 일해 왔기 때문에 그렇게 하고 싶었는데 딸이 "엄마는 이제 아래층이 좋을 것 같다. 왜냐하면 조만간 휠체어를 탈 사람이 되잖아요. 게다가 비상시 들것으로 운반될 때도 계단으로 내리기는 어렵기도 하고" 라는 말을 듣고 "흠..."하고 나는 신음소리를 내며 딸의 의견에 따랐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저라도 "한마디로 그런 일 없을 것이다"라고 단언할 수 없으니까요. 딸가족과는 부엌도 목욕탕도 화장실도 현관도 따로 있어 서로 침범하지도 침범받지도 않고 간섭하지도 간섭받지도 않는다는 것에 서로가 동의하고 있었습니다.
딸이 결혼할 때까지는 이것저것 잔소리를 하였지만, 지금은 출가외인이라고 생각해서 잔소리도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건 저의 일이 바쁘기 때문이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한가해지면 한꺼번에 쌓여 있던 것이 폭발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어머니의 마음이라기보다는 여성 선배로서, 혹은 공동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사람끼리의 입장에서 지켜야할 주의사항같은 것입니다.
사소한 얘기지만 사위는 오이절임을 좋아해요. 그래서 제가 담근 오이절임을 "장모님 맛있습니다"라고 말하며 맛있게 먹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신의 남편이 아니더라도 맛있게 절인 오이절임을 먹이고 싶은 생각이 들게 됩니다.
그런데 딸에게 사위가 오이절임을 좋아하니 신경 좀 써서 준비하라고 해도 귀찮아서 인지 모르지만 그런 마음 씀씀이가 없는 것이 마음에 거슬리는 것입니다.
나는 악처였지만, 구시대 태생의 아내가 가지고 있는 "남편의 기뻐하는 얼굴을 보고 싶다."는 마음을, 아직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게 옛날 주부들의 의무이자 기쁨이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설음식을 만드는데 해질녘부터 검정콩을 삶거나 다시마를 다지거나 하며 가족을 위해 바쁘게 일하는 것이 왠지 축제 같아 좋았습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게 기쁘게 느껴지는 그런 마음이 자연스럽게 몸에 배 있었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귀찮아하지만 우리는 그다지 고통스러워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풍속인지는 모르지만 그런 노력이 딸한테는 부족힌 게 아쉬운 것입니다.
딸은 아이의 유치원 도시락 반찬 때문에 신경을 쓰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것에 너무 신경쓰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골머리를 앓는다는 건 옛날엔 생각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걸 미적 감각을 기르기 위해서라고 해서 인삼을 매실 모양으로 자르는 엄마가 있다든가 하는 일 따위 말입니다.
그것을 감탄하는 사람들이 있다니 뭐가 미적 감각이야, 라고 나는 고함을 지르고 싶습니다. 딸 쪽은 또 잔소리가 시작됐다며 마이동풍입니다.
우리집 손자는 여름이 되어도 양말을 신고 있습니다.
"왜 맨발로 다니게 하지 않느냐" 고 나는 화를 냅니다. 아이는 맨발로 흙을 밟아 대지의 기를 흡수해야 한다는 것이 저의 지론입니다.
우리집 손자는 항상 양말과 슬리퍼를 신고 다니기 때문에 맨발로 땅을 걸을 기회가 없습니다. 내가 자주 화를 내니까 손자는 내 방에 오면 발을 보이며 말합니다. "할머니, 봐봐, 맨발이야"라고 말합니다.
이런 말들을 하기 시작하면 끝이없어 밤새도록 말하고 싶지만, 말해도 어쩔 수 없기 때문에 그만두겠습니다. (웃음)
07-2 딸의 꿈은 평범한 엄마였다.
손자의 이름은 '시누꼬'라고 합니다. 딸이 지은 이름입니다. 딸은 어렸을 때부터 모모코라는 이름을 좋아해서 엄마놀이의 인형도 모모코짱이라고 불렀습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딸이 자랄 무렵에는 없어진 아버지 몫만큼 저는 일을 많이 해야 했고 아이보다 일이 중요한 나날이었습니다. 시치고산(七五三 일본의 아이들 명절)이 되어도 나들이옷을 입혀 주지도 못했고, 머리를 리본으로 장식해준다는 것은 생각해 보지도 못했습니다.
입힌 옷이라곤 자신이 입던 낡은 원피스를 적당히 잘라 양재 지식이 없는 내가 서툰 솜씨로 재봉틀을 돌려 만든 볼품없는 헐렁한 옷이었습니다.
이렇게 만든 옷은 무려 4세부터 9세까지 계속 입힐 수가 있어, 딸도 "오랫동안 입을 수 있네, 이 옷. 마법의 옷 같다" 고 천진난만하게 말했습니다.
대체로 저는 아이들의 옷치장을 싫어하였습니다. 맨발로 달리고 있는 코흘리게 아이를 보면, 미소를 지으며 "힘내라, 무럭무럭 자라라" 라고 말을 걸고 싶어지고, 잘 차려입은 아이를 보면 "쳇!" 하고 심통을 부리고 싶어 집니다.
딸은 어쩔 수 없이 시키는 대로 했지만, 마음속으로 "커서 결혼하고, 여자 아이가가 태어나면 귀여운 옷이나 모자나 리본으로 ○○짱처럼 차려입게 하고 싶다." 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짱이라는 아이는 제가 항상 "쳇!" 하고 심통스럽게 생각했던 유치원 여자아이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마음 아픈 짓을 했다고 생각합니다만. 하지만 이런 엄마의 자식으로 태어난 이상 불운한 처지라고 체념하고 사는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헤어진 전 남편이 회사 경영에 실패하여 도산하고 집을 나간 것은 딸이 초등학교 2학년 때였습니다. 이후 저는 억척스런 가장이 되어 살기 위해 분투했고, 딸에게는 신경을 쓰지 못했습니다.
어쨌든 공부를 도와 줄 틈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언제 시험이 시작되고 언제 끝났는 지도 모르는 상태였습니다. 딸은 혼자 자는 것이 외로워서 항상 내가 원고를 쓰고 있는 책상 옆으로 와서 책을 읽다가 잠들어 버리곤 합니다.
그 몸에 담요를 덮어준 채 저는 원고를 쓰고, 다 쓰고 잠자리에 들 때 깨워서 잠자리로 데려가곤 했습니다. 분투하고 있었던 것은 저 혼자만이 아니라 딸도 함께 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연한 결과로 딸의 성적은 신통치 않았고, 게다가 그것을 저는 걱정하기는커녕 "통신부 점수 같은 것으로 인생이 결정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초등학교 때 딸은 당시로서는 이지메(왕따)의 효시격인 왕따를 당하고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저는 딸이 의기소침하지 않게 하기 위해 대수롭지 않게 대하였습니다만 딸은 마음에 두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괴롭힘을 당했는지 지금 잘 관찰하고 기록해 두었다가 어른이 되고 나서 그 내용을 발표하면 대박이 날지도 모른다." 고 농담삼아 말했습니다.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아이는 곤란해 하겠지만.
07-3 낙천성이야말로 삶의 힘
엄마로서의 저는 아이의 입장이 되어 생각하는 일을 하지 않고 제 가치관으로만 돌진하고 있었습니다. 보통 엄마들이라면 아이들과 함께 일심동체가 되어 울기도하고 웃기도 해 줌으로써 아이들에게 큰 위로가 되어 주었겠지만 저는 그런 생각을 못 했습니다.
저가 자랄 때는 전국시대였기 때문에 가정생활 뿐만 아니라 부모와 자식 사이도 평화로운 분위기로는 지낼 수 없는 시대였습니다. 내가 딸에게 원했던 것은 긴 인생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도 기죽지 않고 헤쳐나가는 힘을 익혀 두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낙천성이라고 할까, 매사를 비관적으로 생각하지 않는 사고방식을 몸에 익히게 하고 싶었습니다. 제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원망하는 마음가짐입니다. 원망의 마음이 가슴 속에 차 있으면 도저히 행복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남편의 회사가 도산했을 때 빚쟁이들이 들이닥쳤지만, 저는 "큰 불행이 닥쳤구나" 하는 표정을 짓지 않았습니다. 왠지 비장한 기분으로 딸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아빠는 사업을 실패해서 이렇게 됐지만 이건 아빠가 잘못해서 이렇게 된 것이 아니다. 인간이란, 열심히 해도 실패할 수 있단다. 특히 사업이라는 것은 인격과는 관계가 없으니까. 그리고 가난이라는 것은 결코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란다." 라고 말해주었습니다.
남편과 헤어지고 나서 그에게 다른 여자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런 줄도 모르고 그의 빚을 대신 갚고 있었습니다. 그 때부터 그를 쓰레기 같은 인간이라고 말하게 되었습니다만. (웃음)
그런 사정 속에서 딸은 혼란스럽게 자라고 있었습니다. 뭐랄까, 싸움터의 선봉에 서서 칼을 휘두르며 돌진해 가는 일상이었기 때문에, 뒤에 있는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있는가 하는 것은, 돌진하고 있는 대장은 생각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웃음).
많은 고통스러운 지난 일들을 생각하면 견딜 수 없기 때문에 앞만 보고 달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속에서 딸이 성장해 나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07-4 결혼을 계속 한탄한 어머니
강골 일변도로 살아온 저이지만, 어렸을 때는 응석받이로 자라, 밖에 나가면 사람들의 그늘에 숨어 바로 눈물을 글썽일 만큼 마음이 여렸습니다.
게다가 저는 구시대 태생으로 수동적인 여자이기 때문에, 만약 계속 평온 무사한 생활이 계속되었다면, 자신의 능력 따위는 평생 발휘할 수 없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강해진 것은 두 번이나 이혼을 해야 했던 덕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첫 남편은 약물 중독, 두 번째 남편은 회사 도산, 그런 다급한 상황에 빠져, 예를 들어 수영 할 줄 모르는 사람이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몸부림치는 사이에 수영을 배우는 그런 단계에서 몸에 익혀간 강인함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희 어머니는 저보다 더 구시대 태생의 여자였지만 주체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여자가 결혼이라는 형태로 남자에게 예속되어 산다는 삶에 회의를 가지고 여배우에 뜻을 두고 있었습니다. 그 배우수업 도중에 아버지를 만나 반쯤 억지로 결혼을 하게 된 것입니다.
저희 아버지는 성격이 격정적이고 제멋대로인 사람이었습니다. 어쨌든 젊었을 때의 정념을 불태우는 방법이 남달랐습니다. 뭔가에 홀린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웃음). 어머니를 만났을 무렵의 아버지는 여자 천 명 경험을 목표로 한다는 따위의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있었는데, 어머니와 만난 후 인격이 확 바뀌어 버린 것입니다.
그때까지 아버지는 여자들이 반할 수 있는 타입의 남자였는데 하필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여자에게 몰두하고 말았거든요. 어머니는 무뚝뚝하고 과묵한, 남자에게 무관심한 여자였습니다. 돌은 태양의 열을 받으면 뜨거워지지만 해가 지면 차가워지지요.
어머니는 그런 돌 같은 여자였던 것입니다. 남편인 사토 코로쿠(*佐藤紅緑1874~1949)라는 태양이 있기 때문에 뜨거워지는 것입니다. 없으면 식어버리니까 한시도 방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어머니의 성격이 아버지의 정복욕을 자극한 것입니다.
어머니는 한 번도 남자를 갈망한 적이 없고 결혼하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연극일을 계속하고 싶은 일념으로 아버지를 가까이 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도 어머니가 여배우를 계속하게 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결혼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하자 남자의 이기주의가 어머니를 속박했기 때문에 어머니에게는 그것이 평생의 원한이 되었습니다. 저는 어머니가 마치 노래라도 부르듯이 "여자로 태어난 것도 결혼도 모두 부질없다." 라는 신세타령을 들으며 자랐습니다.
07-5 엄마, 나, 딸 3대의 피.
어머니는 참다 참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때가 되면 힘을 내는 사람이었습니다. 여차하면 힘을 낸다... 그런 어머니의 성격을 저는 물려받은 것 같습니다.
평소에는 과묵하고 얌전하다가 여차하면 결심한 일을 뚝딱 해치웁니다. 나는 별 할일이 없을 때는 그냥 빈둥거리며 보냅니다.
하지만 일단 일이 생기면 맹렬하게 매달립니다. 그런 점이 어머니와 닮았습니다. 어머니는 저에게 매사를 이성적인 안목으로 보게 하고, 대국적으로 사물을 판단하게 하는 것 등을 반복해서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내 피 속에는 아버지로부터 받은 열정적이고 투쟁적인 성격이 긷들어 있는 것 같습니다. 이 모순된 두 가지 요소가 저를 작가의 길로 끌어들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응석받이로 자랐기 때문에, 초등학교에 들어갔을 때, 학교가 무서웠고 다른 사람과의 교류에 익숙해지지 않았습니다. 옛날의 남자애들은 악동들이었으니까요.
괜히 막대기튼 휘두르기도 하고 길을 가로막기도 해서 학교에 가는 것이 싫었고 교장 선생님이 쓴 모자가 멀리서 보이기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리곤 했습니다.
그런 마음을 어머니에게 토로하면, 교장 선생님도 우리집에 거름 퍼내러 오는 아저씨와 똑 같은 사람이야, 교장 선생님이 뭐가 무서워, 아무것도 두려울 것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훌륭한 사람인지 아닌지는 스스로 사귀어 보지 않으면 모르는 것이며 지위나 재산으로는 결정할 수 없다고 자주 말했습니다. 그것은 제가 사람을 판단하는 견해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대체로 유명인 등을 부러워하는 사람들을 바보 취급하는 나쁜 버릇도 어머니의 영향인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도망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엉석받이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뭘 해 주어도 기쁜 표정을 짓지 않는, 감사함을 모르는 여자라고 푸념을 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정서적인 사람이 아니었던 대신 의무감과 책임감만큼은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병에 걸렸을 때 몇 달 동안이나 곁을 떠나지 않고 간병하는 것을 병문안 온 사람들이 보고 매우 감탄하였습니다.
제 첫 결혼 상대가 모르핀에 중독되었을 때, 그 무렵은 이혼이라는 것이 아직 부끄러운 일처럼 여겨지던 시절이었지만, 어머니는 일찍부터 이혼을 저에게 권하고 있었습니다. 세상의 소문 같은 그런 것, 신경 쓸 것 없다, 라는 생각은 어머니의 연령대에서는 드물었다고 생각합니다.
"아빠는 남들과 뭔가 같이 하면 꼭 싸우고 헤어지곤 하셨는데 소설을 쓰게 되면서 누구와도 타협할 필요도 없고,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으니 역시 안정되었단다. 너도 아빠를 닮아서 협조성이 없는 것 같다. 취직한 지 한 달을 못 채우기도 하고, 재혼을 한들 또 헤어질 것 같구나. 그래서 혼자 하는 일이 제일 적성에 맞을 것 같다."고 어머니는 그렇게 말하며 소설을 쓸 것을 권했습니다.
어머니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면 저는 작가 되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딱히 소설 쓰는 걸 좋아했던 건 아니었으니까요.
정반대의 성격의 부부였던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을 전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버지는 어느 시기 몇 마리의 경주마를 가지고 있었는데 당시의 마주는 자신의 말이 달릴 때는 축의금조로 마권 한장을 구입하곤 하였습니다
당시의 마권은 장당 20엔이었습니다. 가정부의 월급이 5엔할 때이기 때문에 20엔은 상당한 금액이었습니다. 그 무렵 아버지의 마권 심부름을 하던 오쿠보라는 아저씨가 있었는데, 어느 날 아버지의 말이 일등이 되어 대박이 나 200엔이 되었습니다. 마주석에서 아버지는 "대박이다!" 라고 외치며 미친듯이 기뻐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어머니가 문득 오쿠보 씨의 얼굴을 보니 새파랗게 질려 있었습니다. 눈치 빠른 어머니는 아마 오쿠보 씨는 주인 말이 일등을 할 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마권을 산 척하고 20엔을 자신의 주머니에 넣은 것이 틀림없다고 직감한 것입니다.
만약 이 사실이 아버지에게 알려지면 많은 사람들이 보는 속에서 미친듯이 화를 낼 것이라고 짐작하고, 바로 오쿠보 씨에게 200엔을 건네며 "이것을 주인에게 건네 주세요" 라고 귀띔해 위기를 면하게 했습니다.
어머니는 이 이야기를 저에게 몇 번이나 자랑스럽게 말했습니다. "또 그 자랑이네" 라고 심퉁스러워 하면서도 저는 어머니를 역시 훌륭한 사람이라고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의 소설 쓰는 재능은 아버지로부터 받은 것이겠지만, 사물을 판단하는 식견은 어머니로부터 받은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없었다면 나는 작가가 될 수 없었을 것이고, 어머니가 없었어도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지금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극적인 해후의 결과 사토 아이코라는 개성이 생긴 것을 어쩌면 숙명처럼 느끼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개성의 융화가 또 다시 어떤 형태로 나의 딸에게 전해질지 기대가 되면서도 두려운 생각이 듭니다.
(72세 부인공론 1996년 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