化城喩品(화성유품) 第七
6. 게송으로 거듭 설하다
그 때 십육 왕자들이 출가(出家)하여 사미가 되어
다 같이 저 부처님께 대승법을 설해 주시기를 청했느니라.
'저희들과 여러 시종들이 모두 다 불도를 이루어
세존과 같이 제일 청정한 지혜의 눈을 얻고자 원합니다.'
16왕자의 희망이 근사하죠.
세존과 같이 제일 청정한 아주 밝은 지혜의 눈을 얻고자 합니다.
여래의 안목이고 부처님의 깨달음이죠.
그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은 동자(童子)들의 마음과 숙세에 수행한 일을 아시고
한량없는 인연과 갖가지 비유들로써 여섯 가지 바라밀과
그 밖의 신통한 일을 설하시며 진실한 법과 보살이 행하는 도를 분별하셨느니라.
그리고 이 묘법연화경의 항하 강의 모래같이 많은 게송을 설하셨느니라.
그 부처님이 법화경을 설하신 뒤에 고요한 방에서 선정(禪定)에 들어
일심으로 한 곳에서 팔만 사천 겁 동안을 앉아 계시니라.
이렇게 법화경이 비로소 설해졌다.
법화경이 설해진 과정을 앞에서도 말씀 드렸지만
이건 우리가 여러 번 듣고 정말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어야 될
그런 내용이기 때문에
여기도 보면 간단하게 이야기가 되었는데
아라한의 경계를 얻었고 또 모든 경계를 받아들이지 않고
그리고 또 그전에는 괴로움을 다 여의고(열반이죠)
그다음에 모든 경계를 받아들이지 않고 경계에 흔들리지 않고
그리고 나서 비로소 16왕자가 법을 청했는데 법화경을 설하게 되었다.
그렇게 법화경이 최후로 설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대통지승불 시대도 그렇고 석가모니불 시대도 그렇고
그것이 똑같다 이거예요.
석가모니불 시대에 이렇게 여러 과정을 거친 뒤에 법화경이 설해진 것은
고대로 부터 정해진 법이다, 석가모니불 혼자만 그렇게 한 법이 아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정말 믿을 만한 법이고 전통이 있고 정통한 법이다.
그런 그 의미가 밑에 깔려있죠.
그러니까 우리는 여기에 대해서 추호도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봅니다.
지난 시간에는 그런 이야기가 있었죠.
말하자면은 공의 이치를 알고 나서 그 다음에 법화경을 설하게 되었다.
공의 이치가 뭡니까?
그건 공성에 대한 이야기고 중도에 대한 이야기고
그다음에 연기에 대한 이야기고, 그렇습니다.
그걸 이제 넘어서 제법실상,
지난 시간에도 이야기 했듯이 제법공상을 졸업하고
그다음에 제법실상을 공부한다.
아주간단하게 표현하면 그렇죠.
제법공상 모든 존재의 공한 모습, 공한 이치를 이해하고 나서
모든 존재의 실다운 이치를 공부한다. 그렇게 알면 됩니다.
제법공상 제법실상 그 뭐 간단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제법의 공상을 이야기 하는 것은
어느 정도 자기 살림살이가 되어 있느냐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말하자면 이치는 그렇게 되어있다는 거죠.
법화경에 분명히 그렇게 되어 있구요.
제법이 공하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다 공부한 뒤에
그 다음에 제법이 실다운 모습이다 라고 하는, 너도 부처요 나도 부처요.
저렇게 금방 흩어져 버리고 사라져 버리는 저녁연기와 아침 이슬까지도
실상이다, 실다운 존재다, 불생불멸의 존재다 하는 것이죠.
그렇게 이해하는 것이 제법실상의 경지이고
그것은 곧 법화경 내지 화엄경 같은 그런 성종계통의 그런 공부입니다.
그럼 선은 뭐냐?
선불교! 도저히 이걸 제대로 이해하지 않고는 안 되게 되어있는 실정입니다.
맨 날 외워놓고 반야심경의 공, 금강경의 공은 뭐냐?
그리고 화엄경이나 법화경은 대승불교의 아주 중요한 경전인데
그들의 경전은 종지가 뭐냐?
이렇게 우리가 문제시해야 되는 거죠.
문제시 해놓고 거기에 대한 그 나름의 답을 모두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그러니까 선은 제법공상을 떠나서
그 다음에 제법실상의 단계에서 다시 선불교의 단계입니다.
선불교의 단계는 ‘공이다’, ‘공한이다’, ‘실상이다’ 그런 이야기 없어요.
‘未出母胎 度人已畢(미출모태 도인이필)’이라.
어머니로 부터 태어나기 이전에 이미 중생을 다 제도 했어요.
그리고 손가락 하나 탁 세우는데 거기에 모든 것이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거기에서 또 눈을 떼야 되는 거죠.
군더더기가 이리 붙고 저리 붙고 해가지고는 아니죠.
그러면 선 생활을 이야기 할 때
주변 환경, 마음 씀씀이, 식사마저도 정말 간단명료한 것, 아주 소박한 것,
이렇게 모든 분야에 그 어떤 선의 정신이 다 표현 될 수가 있습니다.
그게 뭐 ‘선이 표현이 안 된다’ 그것은 잘 모르고 하는 말이예요.
말 한마디, 동작 하나, 차 한 잔, 밥 한 끼,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고 하는 데도 선의 모습으로 표현할 수 있어요.
선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런 생활 속에 선이 배어 있어야 되고
선이 표현되어 져야 된다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모든 존재의 존재 그대로 보는 유의 가르침,
그 다음에는 공의 가르침, 실상의 가르침, 그 다음 선의 가르침,
이렇게 네 단계로 이야기 할 수가 있겠죠.
선이 이야기되기 전에는 상·공·성 이 세 가지 차원의 가르침이었다고
여러 번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가 보는 시각도 그렇죠.
잘 알고 계시는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고 하는 것은 상의 입장이죠.
그 다음에 “산이 산이 아니요 물이 물이 아니다”라고 하는 것은 공의 입장입니다.
그 다음에 “산은 다만 산이요 물은 다만 물일 뿐이다”라고 하는 것은
성의 입장입니다.
화엄경 입장이요, 법화경 입장입니다
“산은 산이 아니요 물이 물이 아니다"라고 하는 것은
반야심경, 금강경 입장이요, 육백부 반야경의 입장입니다.
그 처음에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라고 하는 것은
수많은 아함부의 입장이다.
그렇게 간단명료하게 정리가 되요.
이렇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쭉 하다 보면 그런 이야기 정리가 저절로 될 겁니다.
이런 말은 한번쯤 기억해 두면은 전체 불교의 가르침을 정리하고 추리는데
상당히 도움이 될 줄 믿습니다.
오늘 법화경 공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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