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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에는 이대호와 강민호, 가르시아처럼 돋보이지는 않지만 묵묵히 제 몫을 다하는 선수가 있다. 3번 타자 조성환이다. |
돌아온 조성환야구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죄를 지었다. 그 때문에 야구장을 떠났다. 우여곡절을 거쳐 야구장에 돌아왔다. 그는 지금 행복하다. 롯데 자이언츠의 3번 타자이자 2루수인 조성환(32)의 이야기다.
2004년 9월 4일 서울지방경찰청은 LG 트윈스 투수 김광수를 전격 구속했다. 김광수는 함께 구속된 병역 브로커 우 모 씨에게 돈을 주고 소변 검사 자료를 조작해 병역 면제 판정을 받은 혐의를 받았다.
김광수는 시작일 뿐이었다. 야구만이 아니라 스포츠계에서 병역 비리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혐의 선수들이 줄줄이 소환됐다. 구단들과 한국야구위원회(KBO)는 ‘올 게 왔다’는 심정이었다.
서울지방경찰청은 9월 12일 1차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입건 또는 구속 영장이 신청된 선수는 54명이었다.
이 가운데 롯데 선수는 다섯 명이었다. 그러나 실은 여섯 명이었다. 나머지 한 명은 잠적 중이었기에 검거되지 않았다. 조성환이었다.
병역법상 병역 비리 사건의 공소시효는 3년이다. 시효가 만료되면 검사는 공소를 제기할 수 없어 법적 처벌이 불가능해진다.
공소시효는 범죄행위가 끝난 시점부터 시작된다. 조성환이 병역 브로커에게 돈을 주고 병역 면제를 청탁한 때는 2001년이었다.
공소시효 만료가 가까운 시기였다. 그러나 경찰과 검찰은 단호했다. 조성환과 LG 박용진 등 잠적 선수에 대해서 검거 전 공소를 제기해 시효를 정지시키기로 했다.
그러나 조성환은 6개월가량 전국을 떠돌며 ‘잠수’를 탔다. 시효가 정지된 이상 시간이 흐르더라도 사법 처리는 피할 수 없었다.
5월 28일 사직구장에서 조성환은 그때를 떠올리며 “너무 두려웠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꿈을 키우다조성환은 원광대 4학년이던 1998년 8월 신인 드래프트에서 롯데에 지명됐다. 전체 57위인 8라운드 지명이었다.
8라운드의 대졸 내야수라면 구단이 거는 기대는 뻔했다. “내가 뛰어난 선수라고 생각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운이 좋았다.” 충암고 3학년이던 1994년에는 지명도 받지 못했다.
아마추어 시절 조성환은 재능보다는 노력이 더 돋보이는 선수였다. 프로에 대해 별다른 생각은 없었다.
조성환은 “재능이 부족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프로야구는 내게 먼 나라 얘기일 뿐이었다. 한 경기 한 경기 최선을 다하자는 생각뿐이었다. 열심히 하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야구는 재미있었다”고 말했다. 충암고와 원광대는 훈련량이 많기로 소문난 학교다.
조성우 롯데 스카우트는 “현재 2군 매니저로 있는 김태민 스카우트와 함께 두 번 정도 원광대를 찾았다. 조성환과 김경진이 지명 후보였다.
김경진은 유격수였고 조성환은 2루수와 3루수로 기용되고 있었다. 조성환은 공을 맞추는 능력은 있지만 타자로서는 높은 점수를 주기 어려웠다. 하지만 발이 빨랐고 수비에서는 공을 따라가는 능력이 있었다”고 말했다.
신인 조성환에 대한 기대치는 대주자 또는 대수비 요원이었다. 김경진은 그해 2차 지명에서 해태 타이거즈에 7라운드로 뽑혔다. 김경진은 현재 KIA의 스카우트다. 그는 ‘성실’이라는 단어로 대학 시절 조성환에 대한 회상을 시작했다.
“주장으로서 리더십이 뛰어났다. 남들 앞에서 실수를 하는 걸 매우 싫어했다. 타격 성적은 썩 좋지 않았지만 직구는 잘 때렸다. 배트 스피드가 빨랐기 때문이다.”
프로야구는 열심히 하는 선수를 원하지 않는다. 잘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경쟁이 치열하고 수준이 높다. 조성환이 입단한 1999년 롯데 내야진은 꽉 차 있었다.
1루에는 4번 타자 마해영이 버티고 있었고 2루에는 팀의 중심인 박정태가 있었다. 유격수는 김민재가 그해 130경기에 출전했고 3루는 박현승과 공필성이 번갈아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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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는 4월 25일 사직구장에서 열린 삼성과의 경기에서 조성환의 끝내기 2루타로 4-3 역전승했다. |
그런데 8라운드 지명 신인 조성환은 용케도 1군에 이름을 올렸다. 2군에서 타율 3할2푼을 기록하며 좋은 타격을 했다. 1군에서는 25경기에 주로 교체 요원으로 뛰었다.
간간이 타석에도 나서 10타수 4안타를 쳤다. 조성환은 “처음에는 스윙도 제대로 못할 정도로 긴장했다”고 했지만 나쁘지 않은 데뷔 시즌이었다.
조성환은 1군에서 선배 박정태와 마해영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다. “두 선배는 얼굴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할 스타였다.
하지만 늘 경기가 끝난 뒤 한두 시간씩 스윙 훈련을 했다. 스타가 괜히 스타가 되는 게 아니구나 싶었다. 충격을 받았다.”
충격 다음에는 자신감이 찾아왔다. 스타가 재능이 아니라 노력으로 만들어진다면 자기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노력에서는 남들에게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조성환은 “남모르게 노력을 하면 좋은 선수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고 말했다.
신인선수가 1군에 자리를 굳히는 건 쉽지 않다. 다시 2군으로 내려간 조성환에게 어느 날 중요한 순간이 찾아왔다.
우용득 2군 감독의 한마디가 계기였다. 우감독은 조성환에게 “야구 선수에게 빠른 발은 매우 큰 장점이다. 넌 발이 빠르다. 장점을 살리면서 경기를 해라”라고 했다.
조성환은 우감독의 이 말이 야구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됐다고 말했다. “마침 내야에 발이 빠른 선배가 많지 않았다. ‘그래, 이걸 살려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내 장점이 뭔지도 제대로 몰랐다. 고마운 조언이었다.”
조성환의 출전 경기수는 2000년 57경기, 2001년 88경기, 2002년 104경기로 점점 늘었다.
우감독의 조언을 조성환이 전환점으로 생각하는 이유다. 타격은 신통치 않았다. 그러나 빠른 발을 이용한 주루 플레이와 수비는 인정을 받았다.
2001년에는 88경기 112타석에 그쳤지만 23득점을 했다. 1군에 오래 머무를 기회를 얻었다는 얘기다. 그리고 2003년 조성환은 멋지게 기회를 살렸다.
그해 롯데는 주전 2루수 교체를 결정했다. 박정태와 프리에이전트(FA) 2년 계약을 했지만 계약 과정에서 구단과 마찰이 심했다.
박정태는 수비 범위가 전성기에 비해 크게 줄어 있었다. 새로운 주전 2루수 1순위 후보는 국가대표 출신 신명철이었다. 신명철은 2001년 롯데에 계약금 3억2천만 원을 받고 입단한 기대주였다.
그러나 2003년은 조성환의 해였다. 팀은 39승91패3무로 창단 이래 최악의 시즌을 보냈지만 조성환은 팀 내 최다 경기(129), 최다 타석(543)을 기록하며 타율 3할7리를 기록했다. 도루도 23개를 했다. 입단 5년째 만에 조성환은 스타로 떠올랐다. 2004년은 한없이 밝아 보였다.
시련의 4년그러나 2004년은 시련의 해였다. 4월 24일 사직구장 LG전에서 박만채의 공에 오른쪽 손목 척골이 부러지는 중상을 당했다. 조성환의 2004년 시즌은 그 경기로 끝이었다. 그리고 9월 병역 비리 사건이 터졌다.
조성환은 잠적 이유에 대해 “현실을 피해 달아나고 싶었다. 공소시효 만료를 16일 남겨 놓은 때였다. 잘 아는 변호사가 ‘잠시 피해 있는 게 좋겠다’는 조언을 하기도 했다. 어쩌다 보니 6개월이 지나 버렸다. 어리석은 선택이었다”고 말했다.
결국 조성환은 6개월 만에 경찰에 자수했다. 법정에서는 6개월 실형 선고가 떨어졌다. 2005년 감방에서 풀려난 뒤에는 부산 동래구청에서 공익근무를 했다. 정상적으로 입대한 선수들에 비해 1년을 허비해 버린 셈이다.
조성환은 “도망자 신세였을 때 너무도 괴로웠다. 누구에게 쫓긴다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알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가족들도 경찰이나 병무청 관계자들에게 시달려야 했다. 나보다 더 힘들었을 것이다. 그 생각을 하면 지금도 그저 미안할 뿐”이라며 말꼬리를 흐렸다.
수원구치소에서 여섯 달을 있는 동안 조성환은 동료 수감자들에게 날아오는 이혼 서류를 숱하게 봤다.
그는 “‘나도 아내가 이혼을 요구하면 꼼짝없이 도장을 찍어 줘야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었다. 정말 괴로운 나날이었다”며 쓰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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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환은 배트를 잡고 경기에 나서기 위해 4년을 기다렸다. |
조성환은 “프로야구의 이미지를 떨어뜨린 점은 지금도 깊이 반성한다. 죄를 지었으니 벌을 받아야 한다. 범죄자라는 낙인은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병역 비리가 터진 뒤 가장 괴로웠던 것은 ‘앞으로 더 이상 야구를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고 말했다.
공익근무요원 시절에도 두려움은 가시지 않았다. 야구를 계속 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4년을 쉬고 과연 뛸 수 있을까. 과연 구단이 다시 받아줄 수나 있을까.
어쨌든 선수 시절에 비해 시간은 많았다. 차근차근 계획을 세웠다. 체력을 단련하는 게 먼저였다. 점심시간이나 근무를 마친 뒤 구단에서 소개한 피트니스 클럽을 찾아 웨이트트레이닝을 했다.
조성환은 “사람들이 나를 보면서 ‘그래도 운동을 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원래 내 장점은 빠른 발이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 다리가 느려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힘을 길러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노력 하나만큼은 자신이 있었다”고 말했다.
사직구장도 찾았다. 관중석에서 그를 알아보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고 한다. 그라운드가 아닌 관중석에 앉아 있어야 하는 현실을 처음에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동료 선수들의 플레이를 지켜보다 보면 당장이라도 그라운드로 뛰어 내려가고 싶었다. 조성환은 목적 없이 경기장을 찾지는 않았다.
“2003년에 3할을 치긴 했지만 2008년에 상대할 투수들은 그때 그들이 아니었다. 투수들의 투구 패턴을 유심히 살펴봤다. 또 상대 팀들이 어떤 색깔의 야구를 하는지도 관찰했다”고 말했다.
당시 조성환의 신분은 군 보류선수였다. 입대한 선수에게는 유니폼을 따로 지급하지 않는다. “동료들이 유니폼 받을 때 늘 내 유니폼은 없다는 게 정말 서러웠다. 구단의 처지도 있으니 무작정 조를 수도 없었다. 결국 공익근무가 끝나갈 무렵 우기고 우겨서 유니폼을 받았다. ‘정말 열심히 하겠다’고 졸랐다. 선수로 뛸 때는 유니폼의 소중한 가치를 알지 못했다.”
복귀공익근무를 마칠 무렵인 지난해 10월. 조성환은 그동안 쓰지 않았던 휴가를 몰아서 신청했다.
그리고 장비와 유니폼을 챙긴 뒤 롯데의 마무리 훈련이 열리고 있는 김해 상동야구장으로 향했다. 팀 분위기는 어수선했다. 정규시즌을 7위로 마친 뒤 강병철 감독은 해임됐다. 새 감독은 소문만 무성할 뿐 결정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조성환에게 이런 상황은 오히려 약이 됐다. 감독이 자리를 비워 훈련은 자체 청백전 중심이었다. 3년 공백이 있던 조성환에게 가장 필요한 게 실전이었다.
조성환은 “정말 운이 좋았다. 무뎌진 감각을 되찾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감독이 일찍 정해졌다면 훈련 내용이 달라졌을 것이다. 청백전이지만 한 경기라도 더 뛰는 게 소중했다”고 말했다.
롯데는 11월 미국인 제리 로이스터를 감독으로 임명했다. 조성환은 로이스터 감독의 배려를 잊지 못한다.
“오랜만에 경기에 나서다 보니 나도 모르게 무리한 플레이를 했다. 공익근무 시절 몸을 만들기는 했지만 역시 부족했다. 전지훈련 때 훈련 프로그램을 따라가기 쉽지 않았다. 하지만 감독이 ‘무리하지 말라’고 말했다.”
로이스터 감독은 조성환에게 조급하게 몸을 만들지 말 것을 지시했다. 운동을 쉬었다 다시 하는 선수와 꾸준히 해 온 선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로이스터 감독은 “오버 페이스를 하지 말고 천천히 페이스를 끌어올려라. 기회는 얼마든지 있을 것”이라고 격려했다. 조성환은 그 격려를 ‘너를 믿겠다’는 뜻으로 해석했다.
타격 폼도 바꿨다. 롯데 김무관 타격 코치는 2001년부터 2003년까지 롯데 타격 코치였다.
공교롭게도 조성환처럼 공백기를 가진 뒤 2006년 롯데 코치로 복귀했다. 2001~2003년은 조성환이 그저 그런 백업요원에서 3할 타자로 변신한 시기다.
김코치는 “너의 나빴을 때와 좋았을 때 타격 자세를 알고 있다. 걱정하지 말고 도전해 보자”고 말했다. 조성환은 “김코치는 나를 잘 아는 분이다. 그래서 믿음이 갔다”고 말했다.
조성환은 타격폼의 수정을 두 가지로 요약했다. 우선 다소 뻣뻣했던 대기 동작을 약간 편하게 바꿨다.
김코치는 ‘가장 편안한 자세에서 좋은 스윙이 나온다’는 지론을 갖고 있다. 다음으로 타격 때 왼발을 약간 들어 올리며 히팅 포인트를 뒤에 뒀다. 변화구를 치기 위해서였다.
조성환의 히팅 포인트는 원래 앞에 있었다. 대학 동기인 김경진은 “(조성환이) 히팅 포인트가 앞에 있어 직구에는 강했지만 변화구에는 약했다”고 기억했다.
조성환은 “예전에는 다소 성급한 타격을 했다. 상체가 앞으로 많이 나갔다. 3할을 쳤던 건 그나마 맞추는 데 소질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변화구는 제대로 치지 못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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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환의 방망이는 여전히 날카롭게 돌고 있다. |
2003년에 비해 요즘 투수들은 포크볼, 체인지업 등 떨어지는 공을 더 많이 던진다. 3년 공백을 가진 타자라면 대처하기 어렵다.
올해 조성환이 3할 타율을 기록하며 승승장구하리라고 예상한 이가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조성환은 “타격 자세를 바꾸니 변화구 대응력이 높아지고 있다. 새로운 폼에 점점 적응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올스타급 2루수롯데는 올 시즌 개막 이후 줄곧 상위권을 달리고 있다. 롯데 돌풍의 핵심에 조성환이 있다.
4년 만의 복귀전은 놀라웠다. 3월 29일 대전구장 한화전에서 8번 타자 2루수로 출전해 첫 타석에서는 좌익수 플라이로 물러났지만 다음 타석에선 빗맞은 중전 안타를 날리며 복귀 뒤 첫 안타를 신고했다.
한화의 선발 투수는 국가대표 에이스 류현진이었다. 조성환은 6회초 세 번째 타석에서도 류현진에게서 중전안타를 뽑았다. 이번에는 배트 중심에 제대로 맞은 깨끗한 타구였다.
5타수 3안타에 2득점은 우연이 아니었다. 조성환의 배트는 식을 줄 몰랐다. 4월 1~3일 사직구장에서 롯데를 상대한 뒤 SK 전력분석팀 김정준 과장은 “조성환이 돌아온 게 올해 롯데의 가장 큰 변화”라고 말했다.
7, 8번이던 타순은 4월 23일 문학구장 SK전부터 3번으로 뛰어올랐다. 그 뒤 롯데의 3번 타자는 조성환이다.
5월 29일 현재 타율 3할4푼5리로 이 부문 5위다. 도루 10개에 실패는 하나밖에 없다. 박현승을 대신한 2루 수비는 올해 롯데에서 가장 향상된 분야로 꼽힌다.
조성환은 “그동안 야구가 하고 싶었다. 긴 공백 끝에 돌아왔더니 롯데가 내가 예전부터 뛰고 싶었던 그런 팀이 돼 있었다”며 웃었다.
프로 입문 동기인 주장 정수근에 대해서는 “내가 할 일이 많을 줄 알았는데 수근이가 참 잘하고 있다. 진작 주장을 시킬 걸 그랬다”며 “경기 뒤 구장 밖에서 팬들에게 10분 동안 사인해 주는 선수는 수근이뿐”이라고 귀띔했다.
롯데는 5월 들어 불펜의 약점이 드러나며 상승세가 꺾였다. 5월 20일 광주구장에서 KIA에게 2-3으로 져 20승20패가 됐다. 시즌 들어 처음으로 5할 승률 아래로 떨어질 위기였다.
그러나 그 뒤 6연승을 달리며 분위기를 반전했다. 조성환은 “이게 롯데의 힘이다. 우리 팀은 달라졌다”고 말했다.
그는 “5월 20일 KIA전에서 진 뒤에도 선수들이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코칭스태프도 선수들을 믿었다. ‘우리는 연패할 팀이 아니다. 연패했어도 곧 치고 올라갈 수 있다’고 격려했다. 그래서 다시 연승을 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조성환은 경기에 나서는 게 꿈만 같다. 주전이든 백업이든 3번이든 8번이든 중요치 않다. 팀에 도움이 되는 선수가 되고 싶을 뿐이다.
로이스터 감독은 조성환에 대해 “올해 롯데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발전이다. 그는 전지훈련 때부터 자신이 가진 기량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했다.
로이스터 감독은 이어 “사실 처음에는 조성환이 주전급 선수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꾸준한 노력으로 지금은 타격과 수비에서 완벽한 올스타급 2루수가 됐다. 찬스를 놓치지 않는 최고의 클러치 히터”라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조성환은 부산 팬들에게 감사하고 있다. “병역 비리라는 어두운 과거를 감싸주고 응원해 주시는 분들이 정말 고맙다. 2년 동안 죗값을 치렀지만 부족하다. 더 좋은 플레이로 보답하는 게 선수로서 도리라고 생각한다.”
조성환은 올 시즌 관중 2만 명 이상인 경기에서 3할8푼7리의 타율을 기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