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우연한 기회에 존 파이퍼 목사를 만나게 되었고, 그의 주요 논문과 사역, 그리고 저서들을 접하게 되었다.
그는 저서에서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만족할 때, 가장 큰 영광을 받으신다"고 말했다. 나는 그의 책을 통해서 영광받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은 기쁨과 행복을 추구하는 우리의 욕망과는 결코 비교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는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다. 둘 다가 공존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의 기쁨 중 어느 하나가 배제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본 장의 목표는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만족할 때, 하나님 역시 우리 안에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명제를 용서라는 측면에 적용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때, 우리의 기쁨 역시 극대화될 것임을 알기 때문에,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한다. 다시 말해서 용서를 함으로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고 우리 역시 기뻐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용서해야 한다.
이 진리는 한 번 읽어서 소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좀 더 깊이 묵상해보자.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만족할 때, 하나님 역시 우리 안에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이 말은 두 가지 진리를 포함하고 있다. 그 첫째 진리는 하나님의 영광이 핵심이라는 것이다. 즉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는 거울이 되기 위해 부름받은 것이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전 10:31).
*둘째 질리는 모든 사람은 기쁨이나 행복을 추구한다는 것인데 이는 이 지구상의 모든 사람에게 사용되는 진리다. 위대한 사상가 파스같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모든 사람은 행복을 추구한다. 여기에는 예외가 없다. 방법은 다를지라도 모든 사람은 행복이라는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 전쟁에 나가는 이유도 전쟁을 피하는 이유도 관점만이 다를 뿐 그 "동기는 똑같다."
인간은 본래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다. 그래서 행복이 있다고 믿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 떠난다. 파이퍼는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망을 자연계에 중력의 법칙과도 같은 마음의 법칙"이라고 표현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이 진리가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굳이 하나님의 영광이나 우리의 행복이냐를 택해야 하는 기로에서 고민할 필요가 없다. 양자의 공존 없이는 어느 것 하나도 온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용서함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면 그것이 바로 나의 기쁨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가르치는 용서에 대한 바른 이해다. 따라서 용서란 당신이 삼켜야 할 쓴 알약도 아니고, 해묵은 원한이나 무거운 짐도 아니다. 그 이상의 것을 갈망하기 때문에 내가 기쁨으로 행하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열망하고 더 좋은 나라, 더 아늑한 곳을 사모하는 것. 이것이 바로 용서의 동기다.
*하나님의 용서는 조건적이다. 회개하고 믿는 자만구원받는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용서의 선물을 건네신다. 그렇다면 이는 모든 사람이 용서 받았다는 의미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단연코
'아니오'다. 어떤 선물이나 마찬가지로, 용서라는 선물도 그 포장을 뜯어야 한다. 용서는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돌아옴으로 받는 것이다.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서는 데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첫째,자신의 선행이 구원의 근거라는 생각에서 돌아서는 것이다. 이는 죄에서 돌아서는 것을 말하며, 성경에서 말하는 회개다.
둘째,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와 그분만을 의지하는 것이다. 성경은 이것을 믿음이라 한다. 회개와 믿음, 이 두 용어는 성경 여러 곳에서 강조되고 있다. 사도바울은 그의 사역을 이렇게 요약한다.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행20:21).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를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 하나님의 용서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 회개하고 믿는 자를 당신과 화목케하기 위하여 자비롭게 용서하신다는 약속이다. 그러나이 약속이 죄에 대한 대가를 면제하는 것은 아니다.
첫째, 하나님의 용서는 너그럽다. 하나님은 용서를 공짜로 주신다. 이는 용서가 값으로 환산할 만한 가치가 없어서가 아니다. 용서는 하나님이 그 아들 독생자를 보내셔서 그 값을 치르게 할 만큼 우리를 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에 거저 주시는 매우 값비싼 선물이다.
둘째, 하나님의 용서는 하나의 약속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실 때 우리는 죄에서 용서받은 것이며, 더이상 우리에게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
셋째, 하나님의 용서는 조건적이다. 오직 회개하고 구원의 믿음을 소유한 자만 용서받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용서는 화해의 기초를 놓고 그 화해의 과정을 시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시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회복된다. 그렇다고 죄의 대가가 즉시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아버지가 그의 자녀들을 징계하는 것같이 당신의 자녀들을 징계하신다(잠 3:12).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
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
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하
시더라” (눅 17:3-4).
회개의 성경적 의미는 생각과 함께 행동이 변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종종 회개를 감정에만 국한시키는데, 회개란 근본적으로 행동과 태도가 바뀌는 것이다. 이처럼 진정으로 회개한 사람을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용서해야 한다.
용서는 또한 화해와 연결된다. 하나님은 죄인을 용서하신 후 그와 더불어 새로운 관계를 맺으셨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용서를 화해와 분리시키지 않는다. 그런데 사람들은 말로는 용서했다면서 결코 화해하려 들지는 않는다. 이는 마치 선물을 상대방의 집 현관문 앞에 놓아둔 채, 초인종을 누르고는 그냥 가버리는 것과 같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심 같이 우리도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한다는 것을 꼭 기억하자.
또한 하나님은 화해 없이는 아무도 용서하지 않으신다. 이 사실을 가슴 깊이 새기길 바란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용서란 잘못으로 인한 결과까지 다 면제한다는 뜻은 아니다. 이 사실은 사람들이 용서하는 것을 망설이는 중요한 요인이다. 한 번은 우리 교회에서 어떤 교역자가 모임 중에 "용서가 결과를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말을 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대번에 "그렇다면 그것은 용서한 것이 아니지요."라고 거칠게 항변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 결과는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중요하다. 악한 행동에 대한 결과를 기꺼이 수용하는 것이야말로 가해자가 진심으로 회개했다는 올바른 증거이기 때문이다.
*피해자가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는 회개한 강간범을 긍휼히 여기면서 기꺼이 용서해야 한다. 사실 이 말을 글로 쓰기가 상당히 조심스럽다. 이런 고통을 감수한다는 것이 과연 어떤건지 내겐 감이 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그들을 용서하심과 같이 다른 사람을 용서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이와 같은 경우에, 피해자는 편지로나 또는 면회를 통해 의사소통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면, 항상 이것을 기억하라.
즉 누군가로 인해 당신이 입은 상처가 어느 정도이던지 간에, 그것은 당신이 거룩한 하나님께 저지른 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동시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위대함을 추구하는 일을 포기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제자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진 것은 그들의 시선이 위대함에 고정됐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은 그들이 어떤 지위를 열망하는 것이 죄라고 말씀하시는 대신 높아짐의 의미를 새롭게 정의하면서 그것을 추구하는 방법을 가르치셨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행복이나 보상을 원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해준다. 예수님은 위대함이나 명예를 추구하는 것을 금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진정한 위대함이 어떤 것이며 어떻게 이룰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신다. 마가복음 10장 43-45절을 묵상해 보라!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니라”
이 구절들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위대함을 추구하도록 격려하셨으며, 진정으로 위대한 사람은 겸손히 다른 사람을 섬긴다고 말씀하셨다. 바로 참된 겸손이 위대함에 이르는 지름길임을 가르쳐주신 것이다. 아울러서 잠언서는 진정한 명예가 무엇이며, 어떻게 얻는지에 대해 반복해서 설명하고 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지혜의 훈계라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잠 15:33)”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 (잠 29:23)”
존귀를 얻기 위한 방법이 있다. 그것은 돋보이는 자리를 스스로 탐하기보다 어린아이 같이 되고, 자신을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철저히 그리고 전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다른 사람을 섬길 때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하나님을 통해서 오는 존귀를 얻을 수 있게 된다.
*• 교만은 당신을 지나치게 비판적으로 만든다(빌 1:9-11: 롬 12:1-2). 분별력은 좋은 것이지만 사람을 분별하다보면 때로는 비판을 피할 수 없기 때문에 감정이 지나칠 때가 생기게 된다. 그래서 교만은 근본적인 문제다.
• 교만은 불안하게 한다. 이 불안감은 자아에 집착할 때 더 커지며 이로 인해 가끔 다른 사람을 배신하게 된다.
• 교만은 수줍게 한다. 예를들어 사람들 앞에서 기도하기를 꺼리는가? 그 이유는 당신의 주된 관심사가 다른 사람들에게 당신이 어떻게 비쳐질까에 집중되기 때문이다.
• 교만은 지나치게 민감하게 만든다. 지나치게 예민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오해하고 억측을 자아낸다.
• 교만은 다른 사람을 무시하게끔 한다. 다른 사람과 함께 문제를 끝까지 해결하는 것을 꺼리거나 답변에 불성실하다면 늘 자신이 남들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 교만은 친구나 가족들 앞에서 무안해하는 감정을 느끼게 한다. 이 역시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어떻게 볼지 지나치게 예민하기 때문이다.
• 교만은 또한 염려하게 한다. 이것은 자존감의 결핍이자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당신이 위 항목 중 해당사항이 하나도 없다고 해서 교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우리 모두는 어떤 방식으로든 지나칠 만큼 자기 중심적이다. C.S. 루이스는 스스로 자만심이 강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야말로 진짜 자만심이 강한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한 자신에 대해 무지한 것보다 더 무지한 것은 없다"라고도 했다. 그러므로 문제는 교만과 씨름하느냐 않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씨름하느냐인 것이다.
*교만이 우리의 삶 속 어디에서 어떤 모양으로 나타나는지를 알게 되면 우리는 마음을 새롭게 하기 위해 악한 행동을 억제하고 옳은 행동을 하도록 결심하게 된다(엡 4:22-24). 그러나 우리의 의지만으로 겸손해질 수는 없다. 좀더 겸손해야지"라는 말만 반복한다고 겸손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교만과 씨름하는 근본 원인이 바로 교만으로 똘똘 뭉쳐진 자아이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겸손해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시선을 자신에게서 돌려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움과 영광을 묵상하는 것이다. 겸손은 관점의 문제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서 우리 자신을 보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대면한 이사야는 스스로 겸손해지려 하지 않았다.
당신이 겸손하기를 원한다면, 먼저 하나님의 위엄과 위대하심에 대한 당신의 이해의 폭을 넓히라. 그리고 이사야서 40장 말씀을 찾아 소리 내서 읽어보라. 한 번 이상 읽으라. 주님의 광대하심을 깊이 묵상하라. 그리고 성부하나님과 그분의 역사에 대한 다음 질문들을 음미해보자.
“누가 손바닥으로 바닷물을 헤아렸으며 뼘으로 하늘을 쟀으며, 땅의 티끌에 되에 담아보았으며 접시저울로 산들을 막대저울로 언덕들을 담아보았으랴 누가 여호와의 영을 지도하였으며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라 그가 누구와 더불어 의논하셨으며, 누가 그를 교훈하였으며 그에게 정의의 길로 가르쳤으며 지식을 가르쳤으며 통달의 도를 보여 주었느냐 보라 그에게는 열방이 못의 한방울 물과 같고 저울의 작은 타끌 같으며 섬들은 떠오르는 먼지 같으리니”(사 40:12-15)
*유진 피터슨은 메시지(The Message, 유진 피터슨이 직접 번역한 현대어성경에서, 다툼의 시작은 물이 새는 댐의 틈새와 같다. 그러므로 터지기 전에 그치라"고 부연 설명한다. 다툼을 시작하는 것은 댐 아래서 폭약을 가지고 노는 것과 같다. 조심하지 않으면 댐이 터질 수 있고, 그 후에는 천군만마를 동원한들 수습할 방법이 없을 것이다. 다툼을 시작하는 것은 물이 들어 있는 컵을 내던지는 것과 같다. 한번 쏟아진 물은 쓸어담을 수 없다. 여기에 비슷한 구절들을 적어 둔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잠 19:11).
• 미련한 자는 당장 분노를 나타내거니와 슬기로운 자는 수욕을 참느니라(잠 12:16).
• 다툼을 멀리 하는 것이 사람에게 영광이거늘 미련한 자마다 다툼을 일으키느니라(잠 203)
•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 4:8).
*. 문제에 직면하기 전에 자신을 성찰해보라.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는 마태복음 7장 1절은 누구나 다 잘 아는 말씀이다. 심지어는 불신자들도 이 구절을 인용한다. 유감스럽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구절을 근거로 다른 사람의 영적 상태에 대해 어떤 개입이나 분별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분명히 말하는데 예수님의 의도는 그게 아니다. 뒤이어 6절에서 예수님은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고 경계하셨다. 이 구절을 실천하려면 개와 돼지에 해당되는 상징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예수님은 판단이나 평가하는 일 자체를 단적으로 경고하신 것이 아니다. 도리어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삶을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자신의 큰 결점은 간과하면서 남의 작은 문제를 들춰내는 잘못을 지적하신 것이다.
*너그럽게 대하라.
상처에 관한 두 번째 지침은 상대방을 너그럽게 대하는 것이다. 너그럽게 대한다는 것은 용서는 선물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면서 상대방에게 용서의 대가를 지불하라고 요구하지 않겠다는 의미다. 상대방이 당신에게 용서해달라고 빌지 않도록 하라. 주님께서는 "여러분은 서로 너그럽고 따뜻하게 대해 주며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서로 용서하십시오" (엡 4:32, 공동번역)라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인은 상처에 대한 대가를 자신이 부담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렇다.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면, 다른 사람이 당신에게 어떤 상처를 입혔던지간에 당신이 하나님께 끼친 상처에 비하면 당신의 상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상대방이 "미안합니다”라고 말하면, 손을 내밀어 "당신을 용서합니다”라고 말하라.
*딸들을 잃고 슬퍼하는 아미쉬 가족들이나 911 테러 희생자 가족 그룹 그리고 콜롬비아 참사로 고통을 당한 가족들을 떠올릴 때마다 성경은 이 사건에 관련된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범인들을 정의롭게 처리하실 것임을 믿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보복은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기억할 때 비로소 복수하고 싶은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것이다. 스스로 보복하려는 사람들은 결국 하나님의 역할을 부정하는 셈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정의를 꼭 성취하시리라는 사실을 기억할 때, 우리는 복수하고 싶은 유혹을 덜 받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어야 한다. 또한 용서받으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들의 과실은 개의치 말고, 받을 수 있게 해 주어야 한다. 용서받기 위해서는 그가 회개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다.
*비통함이란 근본적으로 불공평한 사실이나 불공평하다는 느낌에
대한 죄악된 반응이다. 어쩌면 당신은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나 지금 비통해지기 일보직전이라는 거 나도 알아. 그렇지만 어떻게 내가 그것을 지나칠 수 있겠어? 이용당했다는 생각을 어떻게 떨쳐 버릴 수 있는 거냐구! 어떻게 기만당했다는 걸 내가 잊을 수 있단 말이야? 말도 안돼"
이 점에 대해 아삽이 우리에게 답을 제시해준다. 아삽이 자신에 대한 집착과 인생을 쉽게 살아가려는 악한 사람들의 부당함에 대한 불평을 멈추고 하나님께 집중하기 시작했을 때, 그 전환점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주께서 참으로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그들이 어찌하여 그리 갑자기 황폐되었는가 놀랄 정도로 그들은 전멸하였나이다.… 무릇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같이 주를 떠난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17-27절)
이 말씀을 통해 아삽이 하나님께 집중했을 때 비로소 그는 주께서 그분의 때에 악인을 다루신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처럼 아삽은 하나님의 정의로 인해 위로를 받는다. 그러나 악인은 그것을 피할 수 없다. 하나님은 정확한 분이시며 항상 옳게 행하시기에, 악한 사람들을 분명히 처벌하신다. 따라서 누군가가 당신에게 잘못을 저질렀다면, 하나님이 그 문제를 분명히 처리하시리라는 것을 확신해야 한다. 이 사실에 위로를 받으라
이처럼 믿는 자는 하나님이 악인을 직접 다루신다는 사실을 확신할 때 비로소 비통함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고 성경은 수많은 구절을 통해서 증언하고 있다.
*그러면 어떻게 이 마음의 다람쥐 쳇바퀴(용서하는 것, 비통함을 떨쳐내지 못하고 그 사건에 대한 기억을 지우지 못하고 반복함)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 먼저 신학적 과정에서 볼 때, 어떻게 용서할 수 있으며 또 어떻게 과거의 부당함을 떨쳐 버릴 수 있느냐의 문제는 성화의 영역에 속한다. 성화란 우리가 점진적으로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과정을 말한다. 그리스도와 같은 반응을 나타내고 비통함과 상처를 극복하는 정신적 승리의 비결은 우리의 시선을 항상 예수 그리스도에게 고정시키는 것이다.
물론 예수님은 자기에게 해를 끼친 사람들에게 완벽하게 대하셨다.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전 2:23)
예수님은 마음의 다람쥐 쳇바퀴를 도는 대신에 하나님 아버지의 공의에 자신을 맡기셨다. 그분의 마음은 평안 그 자체였다. 그러니 우리의 목표는 그분을 닮아가는 것일 수밖에 없다. 성경은 성화의 과정을 가르친다. 순식간에 우리가 예수님처럼 될 수는 없지만, 우리가 눈을 예수님께 고정시킬 때,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조금씩 그러나 점진적으로 그분의 형상으로 변화돼 가는 것이다.
*하나님이 의도하신 은혜에 참여하라.
1장에서 강조했듯이, 예수님은 마음이 지친 사람들에게 안식을 주신다. 그러나 그는 내게 와서 잠자라고 명하지 않으셨다. 도리어 예수님은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마 11:29) 말씀하셨다. 그리스도의 멍에를 메는 일은 수고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의 말씀을 탐구하고 경청하며, 그의 백성들과 교제하고, 예배에 참석하며, 그리고 기도하는 것 같은 수고 말이다.
*수용하라. 난국은 닥치게 마련이다.
일은 이미 벌어졌다. 교회 역사상 최초의 선교사들이 서로 심하게 다투고 갈라섰다. 만일 당신이나 내가 초대교회의 역사를 기록했더라면, 바울과 바나바의 분쟁을 생략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전혀 큰소리 내지 않고 문제들을 처리했던 지도자들의 아름다운 모습만을 기록하고 싶은 유혹에 빠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누가의 목표는 바울과 바나바를 칭송하는 데 있지 않았다. 오히려 누가는 교회의 시작과 말씀의 진보가 어떻게 성령의 은혜로운 역사로 이루어졌는지를 설명하기 원했다. 교회와 말씀의 진보는 사람들에 의한 것이 아님을 보여주려 했던 것이다. 이런 식의 갈등이 바울과 바나바에게 생길 수 있었다면, 우리에게도 얼마든지 생길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놀라지 말라. 갈등과 곤경은 언제나 있기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