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 아니면 도끼>를 통해 본 창의적 연극 컨셉
-질서와 난장, 그 길항 심리의 연극성
난장과 질서의 충돌 묘미, 감추려는 자와 드러내려는 자 사이의 줄다리기 묘미, 이는 거시적인 극 창조 과정이든 미시적인 극 그림 설계이든 희극 공연에서 염두 해 두어야 할 기본 창작 명제다. 난장과 질서 사이에서 몸부림치다 결국 송두리째 속마음을 드러내는 작업, 그 급전 시점이 맞아떨어질 때 패로디의 힘은 엄청나게 확장된다. 감추기와 속보이기 사이의 줄다리기, 들통나기 직전까지 몰고 가는 연극적 스릴, 이를 부조리극 색조로 승부를 걸면서 속이기, 뒤집기의 묘미를 겨냥한 공연이 있다.
창작극회의 <삽 아니면 도끼>(박근형 작, 홍석찬 연출, 창작소극장, 05년, 4월 23-5월 1일)는 부조리 색조와 난장 이미지를 다채롭게 뒤섞어가면서 속이기 희극의 아름다움을 빚어 가고 있다.
인생은 황당하고 불합리 투성이다. 사람들에게 실수와 약점이 있다 할지라도 그 오류를 이제부터라도 넉넉하게 감싸 안으며 살아갈 필요는 없는가. 이런 메시지를 부조리극 코드와 패로디극 코드로 접근하여 연극적 페이소스와 그 아기자기함을 모색하고자 한 공연 시도, 막판의 기상 천외한 발상은 무얼까.
교도소를 막 출감한 젊은 사내(정민영 분), 누군가를 기다리는 눈치다. 출감한 또 다른 사내(이부열 분)는 맨발 차림이다. 비는 오는데 신발이 없다. 심난한 국면임에도 그의 얼굴은 어둡지 않다. 쇠창살 문 열리는 소리, 감방 공간을 상징하는 조명 설계, 음향과 조명이 상호 맞아떨어지는 지점, 배우들은 막 출감한 상황, 좌절할 힘 마저 상실한 자포자기 이미지, 불안 심리 마저 무디어져 버린 불감증 이미지로 서로 마주한다.
추근거리는 맨발 남자, 마땅치 않은 반응의 젊은 사내, 가방에서 헌 신발을 꺼내 건넨다. 그러나 맨발 남자는 신발에 관심 없다. 남의 신발은 신지 않는다며 상대 쪽으로 내던져버린다. 험한 욕설이 직격탄 식으로 쏟아질 찰나다. 일촉즉발의 위기, 상대를 제압할 듯한 건달 고유의 거친 눈빛과 태도, 그런데 이런 긴장 국면은 곧바로 와해된다. 교도소를 들락거리는 건달 세계의 은어, 별 열두 개, 이 소릴 듣자 젊은 사내의 태도가 바뀐다.
“감독님”
상대를 향해 무릎꿇는 모습, 경외와 충성심으로 가득한 눈길, 이게 만화처럼 과장, 희화되어가기에 관객의 폭소는 그칠 줄 모른다.
젊은 사내, 늦게 마중 나온 가족들을 무시한다. 윗옷을 벗는다. 결전을 앞둔 무협 협객들의 움직임이 재연된다. 가족 협박의 수단이다. 비명을 지르며 어찌할 바 모르는 가족들, 젊은 사내의 우스꽝스런 행동과 가족의 반응, 조롱과 희화의 대상이 된다. 관객의 폭소 그칠 줄 모른다.
무일푼 건달인 맨발(이부열 분)을 향한 ‘감독님’이란 호칭, 이는 젊은 사내에게 그치지 않고 가족들 모두에게 전이된다. 졸지에 들어야 하는 감독님 호칭, 엉겹결에 가짜 감독 연기를 해야하는 딜레마, 이 때부터 극중 이야기는 요지경 상황으로 진입하기 시작한다.
도끼와 삽이란 도구를 들고서 부모는 매일 밭농사, 들농사 터를 향해 나간다. 그러면서 맨발 남자를 향해 그들은 칙사 대접을 한다. 팔푼이 딸은 영화 출연의 환상에 젖어있다. 팔푼이 딸(이혜지 분)과 맨발 남자(이부열 분)와의 데이트, 이를 목격한 부모는 사윗감이라며 기분 좋아한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한다. 맨발 남자의 가족들, 아내와 아이가 나타난 것이다. 몇 년 동안 그를 찾아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다녔다는 눈물겨운 이야기, 이 때부터 이야기는 기이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가족을 따라 이 집을 나가려는 맨발 남자, 그를 붙잡아 두려는 이 집안 사람들, 이들 사이의 줄다리기가 이루어진다. 순정을 바쳤건만 유부남이라니..., 팔푼이 딸은 소주병 나팔을 불며 나동그라져 있다. 그러나 갈등의 연극성은 더 이상 지속되지 않는다.
작가는 이 집안 사람들의 반응을 전혀 예상치 않는 방향으로 몰고 간다. 맨발 남자를 향한 비판적 시선 대신 그를 사모하는 시선을 그들은 초지 일관한다. 맨발 남자만 괜찮다면 그리고 아내와 아이만 동의한다면 이 집에서 함께 살아가자는 입장이다. 식구들 모두의 화목한 동거, 리얼리티를 벗어난 비상식적 행동이 빚어진다.
급기야 맨발의 아내와 아이를 향한 호칭 언어는 황당함 그 자체다. 딸(이혜지 분)은 맨발의 아내(정경선 분)를 향해 ‘형님’이라 부른다. 맨발 남자의 ‘아이’(최항 분)를 향해 농사꾼 노부모는 ‘손자’라 부른다. 부조리, 황당함의 극치다. 관객은 헷갈리기 시작한다. 한 마디로 난장 세계다.
이 난장은 영화 촬영의 장면에서 그 절정에 이른다. 촬영 디데이가 다가온다. 영화감독 행세, 그 허구가 들통나기 직전이다. ‘맨발’ 남자는 좌불안석이다. 결국 무릎꿇고 이실직고하는 맨발, 그런데 노부모(류영규, 전춘근 분)의 반응에 관객은 경악을 금치 못한다.
맨발 사내의 정체를 노부모는 이미 익히 알고 있다. 가짜일지라도 ‘감독님’ 행세를 해달라는 어이없는 부탁, 왜 그럴까.
망나니 아들에게 ‘감독님’이란 호칭을 통해 그 만의 현존 의미를 되찾게 해주려는 의도는 아닐까... 영화에 출연하고픈 팔푼이 딸의 꿈, 이는 환상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환상을 소중한 소망으로 간직하도록 존중하려는 부모의 넉넉한 배려는 아닐까...
가짜일지라도 감독님이란 존재는 가족 구성원들에게 희망의 빛을 던져줄 수 있지 않은가... 실수 투성이의 인생, 부조리와 요지경으로 가득한 삶, 이를 반영하여 줄 영화 촬영 작업, 작가는 비록 그게 허구이자 환상 놀이 일지라도 지금부터라도 그 놀이에 동참할 가치를 제기한다.
인생은 황당함, 요지경으로 가득한 난장판이다. 그 짧은 삶의 기간에 즐거운 마음으로 실수 투성이의 이웃을 넉넉하게 껴안은 채 놀이 연기를 하면 어떨까. 박근형 특유의 부조리극 철학이 절묘한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드디어 막판 난장성 영화 촬영 그림이 전개된다. 촬영 도구가 부족하다. 부족하면 어떤가... 삽 아니면 도끼를 들고서라도 이 허구놀이, 인생 놀이를 빚어가야 하지 않는가...
의아함과 황당함을 유발시키려는 공연 전략, 기존 굳은 인습의 틀을 비틀려 버린 처방, 그리하여 부조리 이미지를 반복, 변조시키는 전략, 관객은 심한 이질감과 더불어 “왜 저래야 하는 거지?” 하며 객관적이고 비판적인 성찰 태도를 취한다. 관객의 이런 능동적 사유가 공연장 밖으로 확장되면서 연극은 수용 미학 차원에서 재생산의 힘을 발하기 시작한다.
연극은 다시 공연 서두 장면으로 돌아간다. 출감하여 비 맞으며 반응하는 젊은 사내, 홍수가 나면 사람들의 머릿속 생각이 이상해진다는 독백, 이를 통해 극중 이야기의 황당함은 자연스레 희석된다. 부조리 투성이의 극중 사건, 이 모든 게 막 출감한 젊은이의 상념 내지 파편 단상에 불과하다. 점점 커지는 빗소리 음향, 지금까지의 극중 이야기가 비 올 때의 몽상에 불과하다. 막판 상징과 암시가 절묘하게 배합하여 부조리 공연의 품격이 살아난다.
빗소리, 감옥을 상징하는 조명 설계와 쇠창살 음향의 조화, 이는 상징 공간 창출에 일정량 기여한다. 비틀림의 모습들, 일그러진 자아들, 이를 상기시킬 대중가요 설정은 각 공연 장면에서 드러난 미시적인 실험 이미지를 하나로 통합시켜 준다.
‘맨발’이란 인물을 막다른 코너로 몰고 갈 속이기 전략 처방, 가짜 영화 감독 행세를 해야할 때의 불안, 초조, 이를 더욱 고조시켜 나갈 주변 인물들의 엉큼한 속내와 교활한 반응, 특히 노부모(류영규, 전춘근 분)의 속이기 연극 전략, 교활성 이미지 창출 과정이 자연스럽다.
맨발과 딸의 동침, 이를 허락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웃지 못할 길항 심리, ‘딸’이라는 인물을 ‘동생’으로 부르기까지의 내면적 갈등, 다시 주변 눈치를 보며 처첩간의 갈등 심리로 몸부림치는 아내(정경선 분)의 모습, 감추려 하지만 관객에게 속보이는 전략이 강화되었다면 희화의 힘은 더욱 커졌을 것이다.
난장 영화 촬영 장면은 상징 이미지를 빚어가야 할 최 절정 버전이다. 문제 투성이의 인물간의 관계, 납득하기 힘든 처첩간의 심리, 가짜 연극놀이의 부조리, 이를 상징적으로 축약시킬 그림에 대한 탐구가 필요하다. 스크린 그림자 이미지 대신 살아 숨쉬는 현장 신체 기호로 승부를 걸었다면 공연의 현장감은 더욱 극대화되었을 것이다.
거듭되는 소극장 공연을 통해 의도적인 빈 틈새 유발, 헷갈림을 향한 급전 시점 설정, 발화와 반응의 정밀 설계 작업이 상호 앙상블을 발휘한다. 난해한 박근형 코드를 무리 없이 재해석, 소화시켜 부조리 공연의 맛이 살아났다는 점에서 창작극회의 소극장 탐색 실험은 일정량 그 유의미와 가치를 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