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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연년(南延年)
[본관] 의령(宜寧)
[경력] 1727년 청주영장(淸州營將)
[생졸년] 1653년(효종 4)∼1728년(영조 4) / 壽 75歲
남연년(南延年)은 조선 후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의령(宜寧) . 자는 수백(壽伯) .부친은 남두명(南斗明) 이다. 1676년(숙종 2)에 무과에 급제, 선전관 을 거쳐 1727년(영조 3)에 청주영장(淸州營將)이 되어 토포사(討捕使)를 겸하였다.
이듬해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난을 진압하던 중, 청주성이 함락되면서 절도사 이봉상(李鳳祥)과 함께 붙잡혔으나, 반도들에게 굴하지 않고 꾸짖다가 죽었다. 조정에서는 충절을 가상히 여겨 아들 남덕하(南德夏)를 등용하였고, 부인이 죽자 장례물품을 지급하여 치상하였다.
1728년(영조 4)에 좌찬성에 추증되고, 이듬해에 숭선군(崇善君)에 추봉되었으며, 청주의 표충사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남충장공시고(南忠壯公詩稿)』가 있다.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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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암 이재(李縡) 撰비문
영장 증 판서 남공 신도비명(營將贈判書南公神道碑銘)
나는 삼가 다음과 같은 사실을 괴이하게 여겼다. 예로부터 충절을 지킨 선비는 높은 관직과 많은 녹봉을 받는 부류에서 나오질 않고 대부분 평소 낮은 지위에 있어서 군주가 어떻게 생겼는 지도 모르는 부류에서 나오니, 그 까닭이 무엇인가?
높은 관직과 많은 녹봉은 대체로 모두 권세가에게 아첨하여 얻은 것이니, 낙척하여 불우한 자는 필시 시속이 좋아하는 바를 구차하게 따르지 않고 본성을 온전히 지키다가 화란(禍亂)이 닥쳐 우연히 분발하여 성취하였을 것이다. 나는 근세에 이와 같은 한 사람을 보았으니 바로 충장(忠壯) 남공(南公)이다.
공의 휘는 연년(延年)이고 자는 수백(壽伯)으로 의령(宜寧) 사람이다. 우리 태조(太祖) 때 상호군 심(深)이 요동(遼東) 정벌에 종군하여 무공을 세웠는데, 심이 성균관 대사성 상명(尙明)을 낳고, 상명이 병조 참지 질(軼)을 낳으니 공의 9대조이다.
증조의 휘는 홍달(弘達)로 용양위 부호군을 지냈고, 조부의 휘는 유경(有慶)으로 사복시 첨정에 추증되었으며, 부친의 휘는 두명(斗明)으로 승정원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공은 숙종 병진년(1676, 숙종 2)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에 임명되었다.
부친상을 당하여 삼년상을 마친 후에 무신 겸 선전관에 보임되고 비변사 낭관에 차임되었다. 군기시 판관으로 옮겼다가 얼마 뒤에 군기시 첨정에 올랐다. 상원 군수(祥原郡守)로 나갔다가 임기가 만료되어 돌아온 후에 또 고부 군수(古阜郡守)가 되었는데 어떤 일에 연좌되어 파직되었다.
정승 이세백(李世白)이 백성을 잘 다스린다는 공의 명성이 자자하여 파직시킬 수 없다고 말하자 잉임(仍任)하도록 명하였다. 훈련원 판관, 중추부 도사에 제수되었다가 도총부로 바뀌었다. 얼마 뒤에 훈련원 첨정을 거쳐 황해도 병마우후가 되었다.
곰이 고을에 들어와 사람을 잡아먹었는데, 공이 단기(單騎)로 달려가 화살로 쏘아 죽이니 이 때문에 영중(營中)의 군사들이 그의 용맹에 감복하였다. 후에 다시 도총부에 들어와 경력이 되었다가 선전관으로 바뀌었다. 외직으로 나가 이산(理山)과 박천(博川) 두 곳의 군수가 되었다.
박천에 있을 적에 봄가을로 고을의 자제들을 뽑아 문예를 시험하여, 그 가운데 우수한 자를 뽑아 학교에 두고서 감독하고 독서와 작문을 시험하여 상벌을 분명하게 하였다. 매달 초하룻날 선사(先師)를 예로 알현하며 제생들을 이끌고 명륜당(明倫堂)에 앉아서 함께 강론하였다. 고을 사람들이 공이 떠나갈 적에 흥학비(興學碑)를 세워 공의 덕을 칭송하였다.
신축년(辛丑年, 1721, 경종 1) 절충장군에 올라 성진 첨절제사(城津僉節制使)가 되었다. 이듬해 영장(營將)으로 나아가 안동(安東)을 진무하였는데, 한 해 남짓 지나 우림장군으로 돌아왔다. 지금 성상 3년 정미년(丁未年, 1727, 영조 3)에 또 나아가 청주 영장(淸州營將)이 되었다.
이전에 경종이 병이 있는 데다 후사가 없어, 대신 충헌공(忠獻公) 김창집(金昌集) 등이 동조(東朝인원왕후)에게 아뢰어 경종이 지금 성상을 왕세제로 책립하였다. 적신 김일경(金一鏡)과 박필몽(朴弼夢) 등이 몰래 두 마음을 품고 환관 박상검(朴尙儉) 등과 결탁하여사대신을 무함하여 대역죄로 몰아 죽인 다음, 저궁(儲宮영조)을 위해하려고 도모하였지만 실패하였다.
지금 성상이 즉위하자 김일경은 복주(伏誅)를 당하고 박필몽은 유배를 당하였는데, 그의 무리인 이인좌(李麟佐), 정희량(鄭希亮), 남태징(南泰徵), 이사성(李思晟) 등과 함께 안팎으로 연합하여 반역을 도모하니 인심이 흉흉하여 모두 조만간 변고가 생길 것을 알고 있었다.
당시에 충민공(忠愍公) 이봉상(李鳳祥)이 절도사로 있었는데, 공이 충민공에게 말하기를, “어찌하여 대비하지 않습니까?”라고 하자, 충민공이 말하기를, “내가 절도사이니 어찌 환란을 대비하는 방도를 생각하지 않겠는가. 다만 변란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는데 먼저 스스로 계엄하는 것은 내가 감히 못하겠다.”라고 하였다.
무신년(戊申年, 1728, 영조 4) 3월 15일, 이인좌가 군대를 일으켜 청주를 습격하였다. 마침 눈이 내리고 한밤중이었는데 공이 변고를 듣고 놀라서 일어나 검을 잡고 뛰쳐나갔는데, 적들은 이미 침문(寢門)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공이 검으로 적들을 공격하였지만 사로잡혀 적이 관덕당(觀德堂)으로 끌고갔다.
이인좌가 병사들을 늘어놓고 당상에 앉아 공에게 무릎을 꿇으라고 협박하였는데, 공은 꼿꼿이 서서 눈을 부라리며 큰 소리로 꾸짖기를, “나는 세 조종을 모신 구장(舊將)으로 이제 나이가 일흔이 넘었다. 어찌 한 목숨을 아끼자고 네놈에게 굴복하겠느냐. 내 머리는 자를 수 있지만 내 무릎은 굽힐 수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적이 크게 노하여 더욱 맹렬하게 공을 협박하고 심지어 검을 뽑아 공의 두 무릎을 내리쳤지만 공은 끝내 무릎을 굽히지 않고 말하기를, “개새끼, 쥐새끼 같은 놈들아! 빨리 내 머리를 베어라.”라고 하며 꾸짖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다음 날 새벽에 살해되었으니 이때 나이가 76세였다.
성상이 이 소식을 듣고 크게 애도하며 말하기를,“질풍 속에서 비로소 굳게 버티는 풀을 알 수 있다.”라고 하고, 특별히 병조 판서에 추증하고 충장(忠壯)이라는 시호를 내려주었으며, 유사에게 명하여 정려문을 세우게 하였다.절도사 이공 또한 굴복하지 않다가 죽었는데,뒤에 어사 오원(吳瑗)이 서계(書啓)로 주청하여 청주성 안에 사당을 세워 공과 이공을 함께 봉향하였다.
애초에 공이 죽었을 때 자식들은 모두 서울에 있어 오지 못했는데, 오직 사내종 만만(晩萬)과 계집종 헌례(憲禮)만이 공의 시신 곁에 있으면서 차마 떠나지 못하자 적들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종들도 각자 제 주인을 위하는구나.”라고 하고 끝내 그들을 해치지 않았다.
이때 공의 시신이 길가에 방치된 채 한낮이 되었는데도 염빈(殮殯)을 하지 못하여 종들이 매우 서글프게 곡하였는데, 고을 사람들이 그들의 정성에 감동하여 시신을 옮겨 성의 동쪽에 초빈(草殯)하였다. 7일이 지나 적들이 안성(安城)으로 도망가자 공의 조카인 덕기(德基)와 덕승(德升) 등이 비로소 시신을 모시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공이 죽은 지 8일이 지나 염을 하였는데 안색이 살아있을 때처럼 늠름하여 사람들이 모두 기이하게 여겼다. 그해 5월 병인일에 음성현(陰城縣)의 살던 마을 산 북쪽에 안장하였다. 공의 됨됨이는 침착하고 굳세며 용감하였다. 지극한 효성으로 부모를 섬겼으니, 부친이 병이 들었을 때는 목욕재계하고 북극성에 기도하며 자신이 부친을 대신하기를 빌었다.
또 손가락을 베어 피를 부친의 입에 넣어드렸고, 거상할 때는 아침저녁으로 무덤에 가서 슬프게 곡하였는데 풍우가 몰아쳐도 그만둔 적이 없었다. 아우들에게는 우애하여 병이 든 아우는 마음을 다해 구제하였고, 죽은 아우는 남겨진 조카들을 성인이 될 때까지 길러주었다. 집안에서의 독실한 행실이 이와 같았다.
입조한 지 50여 년 동안 청렴하고 방정하며 삼가고 공경스러워 한결같이 바꾸지 않았다. 일찍이 “임금을 부모 사랑하듯 사랑하고, 나라를 집안 걱정하듯 걱정한다.〔愛君如愛父 憂國如憂家〕”라는 열 글자를 잠자리에 걸어놓고 스스로 경계하였다. 공의 후배들은 대부분 곤임(閫任)의 지위에 이르렀으나 공은 홀로 지방 수령의 자리를 부침하여 이름이 알려지지 않아도 태연해하며 개의치 않았다.
항상 술이 거나하게 취하면 제갈량(諸葛亮)의〈출사표(出師表)〉를 노래하며 길게 탄식하였는데, 남들은 공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였다.
기억하기로 공이 박천 군수로 부임할 때 나에게 인사를 하러 왔는데, 단번에 지조가 확고하고 충성스런 사람임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당시엔 또한 예사로 여겼으니 저처럼 우뚝하게 절개를 수립할지 어찌 상상이나 했겠는가.
부인 양씨(楊氏)는 군수 양우한(楊遇漢)의 딸로 공보다 5년 뒤에 세상을 떠났다. 공의 묘를 진천현(鎭川縣) 명신동(明信洞) 해좌(亥坐)의 언덕에 이장할 때 부인을 합장하였다. 2남을 두었으니 덕순(德純)은 지금 용궁 현감(龍宮縣監)이다.
덕하(德夏)는 관직이 함경북도 절도사에 이르렀는데, 일찍이 이삼(李森)에게 하직인사를 하러 가지 않았다고 해서 성상의 견책을 받았지만 끝내 뜻을 굽히지 않았으니,사람들이 부친의 풍모를 지녔다고 하였다. 덕순(德純)이 학사(學士) 황경원(黃景源)이 지은 행장을 가지고 와서 내게 묘비문을 청하기에 마침내 위와 같이 논찬하고 명(銘)을 덧붙인다. 명은 다음과 같다.
굳센 남공이여 / 烈烈南公
나라를 지키는 훌륭한 장수로다 / 干城之良
당시엔 낙척하여 / 當時落拓
평범한 듯 하였네 / 頗似尋常
안고경이 역적을 꾸짖으며 / 杲卿罵賊
비린내 나는 개 같은 오랑캐라 소리쳤지만/ 曰臊羯狗
이 안고경을 공과 비교하면 / 將比於公
백발도 되지 않은 때였네 / 時未白首
팔십의 나이로 / 八十之年
밝은 의리로 죽은 것은 / 明白死者
고금에 드문 일이니 / 事曠今古
그 얼마나 씩씩한가 / 一何壯也
하늘의 올바른 기운이 / 維天正氣
모여서 인걸이 되었네 / 鍾而爲人
이미 크게 쓰이지 않았으니 / 旣不大用
굽혀지면 반드시 펴지기 마련이네 / 屈必有伸
물고기와 웅장의 선택을 / 熊魚取舍
창졸간에 결단하여 / 决於造次
천지 사이에서 / 天地中間
우리 인륜의 기강을 세웠네 / 立我人紀
어찌 알았으랴, 넉넉한 기개가 / 安知餘烈
매서운 위세에도 흔들리지 않을 줄을 / 不化風霆
역란의 기운을 신속히 쓸어버려 / 迅埽逆氛
금세 깨끗해졌네 / 不日廓淸
두 충신이 한 사당에 모셔져 있으니/ 一廟雙忠
선비와 벼슬아치가 몸을 굽혀 정성을 바치네 / 衿紳傴僂
응당 영원토록 / 宜爾億年
변함없이 받들어지리라 / 崇奉無斁
진주의 북쪽에 / 鎭州之北
비석이 무덤 가에 세워져 있네 / 有石在隧
내가 명을 지어 / 我作銘詩
관직에 있는 이들을 깨우치노라 / 以風有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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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脚註]
[주01] 영장 …… 신도비:
남연년(南延年, 1653~1728)의 신도비이다. 남연년의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수백(壽伯),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주02] 사대신:
신임옥사로 죽은 노론 사대신 김창집(金昌集), 이이명(李頤命), 이건명(李健命), 조태채(趙泰采)를 가리킨다.
[주03] 질풍 …… 있다:
어려움 속에서도 절의가 변치 않는 사람을 비유하는 말로, 당 태종(唐太宗)이 소우(蕭瑀)를 칭찬하면서 하사한 시에 “질풍 속에서
굳게 버티는 풀을 알 수 있고, 난리 속에서 충성스러운 신하를 알 수 있다.[疾風知勁草, 板蕩識誠臣.]”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舊唐書 卷63 蕭瑀列傳》
[주04] 절도사 …… 죽었는데:
이봉상(李鳳祥) 또한 이인좌의 무리에게 사로잡혀 굴복하지 않다가 죽음을 당했다. 본서 제30권 〈절도사 증 찬성 이공 신도비(節
度使贈贊成李公神道碑)〉에 자세히 보인다.
[주05] 이삼(李森)에게 …… 않았으니:
남덕하(南德夏)가 황해 수사(黃海水使)에 제수되었을 때, 당시 비변사 수장이던 이삼에게 하직인사를 하러 가지 않았다. 이에 비변
사에서 남덕하를 파직하라고 청하자, 청주에 정배하라는 명이 내려졌다.《英祖實錄 7年 1月 28日》참고로 이삼은 윤증(尹拯)의
문하에서 수학한 소론 측 무관이었다.
[주06] 안고경이 …… 소리쳤지만:
당(唐)나라 충신 안고경(顔杲卿, 692~756)은 안녹산(安祿山)의 난리 때 상산군(常山郡)을 지키고 있던 중 사사명(史思明)의 공
격을 받아 성이 함락되면서 포로로 잡혔다. 동도(東都)로 끌려가서 안녹산을 향해 꾸짖기를, “비린내 나는 개 같은 오랑캐야! 어찌
나를 빨리 죽이지 않느냐.” 하며, 끝내 굴복하지 않아 처형당했다.《新唐書 卷192 顔杲卿列傳》
[주07] 물고기와 웅장의 선택:
목숨보다도 의리를 더 중시한다는 뜻이다.《맹자》〈 고자 상(告子上)〉에, 물고기[魚]보다는 곰 발바닥[熊掌] 요리를 더 좋아하는
것처럼 목숨보다는 의리를 따라야 한다는 취지의 말이 나온다.
[주08] 두 …… 있으니:
청주의 표충사(表忠祠)에 남연년(南延年)과 이봉상(李鳳祥)이 함께 배향되었다.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최예심 장유승 권진옥 이승용 (공역) | 20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