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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정대부 행 돈녕부도정 지헌선생 최공 묘갈명 병서
(通政大夫 行 敦寧府都正 止軒先生 崔公 墓碣銘 幷序)
지헌 선생(止軒)선생 최공(崔公)이 세상을 떠난지 27년이 되는 병신년(1896, 건양 1)에 공의 손자 시교(旹敎)가 긍암(肯庵, 01) 이공(李公)이 지은 행장을 가지고 나에게 명(銘)을 부탁하였다. 나는 늦게 태어나고 보잘것 없어 사양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삼가 살피건대, 공의 휘는 효술(孝述)이고 자는 치선(稺善)이며 본관은 월성(月城)이다. 세대가 오래된 집안으로, 우리 조선에 와서는 휘 단(鄲)이 태조(太祖)를 도와 개국한 공이 있었고 대사마를 지냈다. 맹연(孟淵)은 지방수령으로 처음으로 대구(大丘)에 거처하였고, 계(誡)는 현령(縣令)으로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이끈 공로가 있어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되었다.
동집(東㠍)은 한강(寒岡, 02) 정 선생(鄭) 선생의 문하에서 공부했으며, 학문과 덕행이 높아 효종(孝宗)의 태자 시절에 사부(師傅)를 맡았으나, 명나라가 망하자 은거하여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수학(壽學)은 감찰(監察)을 지냈고, 고조 정석(鼎錫)은 통덕랑(通德郞)을 지냈으며, 증조 흥원(興遠)은 벼슬이 익찬(翊贊)이고 좌승지에 추증되었으니 이분이 바로 백불암(百弗庵) 선생이다.
조고는 주진(周鎭)으로 대산(大山) 이 선생(李先生)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스승의 인정을 받았으니 호는 동계(東溪)이다. 부친 식(㵓)은 통덕랑을 지냈고 유림의 신망을 받았으며, 모친은 진주정씨(晉州鄭氏)로, 우복(愚伏) 선생의 후손으로 입재(立齋, 03) 종로(宗魯)의 딸이다.
정조 병오년(1786, 정조 10)에 공을 낳았다. 타고난 자질은 청명하고 기상은 우뚝 빼어났으며, 겨우 사물을 분간할 나이에 이미 사랑하고 공경하는 도리를 알았다. 부모의 뜻을 미리 알아서 행하며 뜻에 순종하면서 아이들과 어울려 장난치지 않았다. 10여 세에 문사(文辭)가 숙성하여 어른들이 원대함으로 기대하였다.
처음에는 재종숙 칠실옹(漆室翁)에게 수학하였는데, 성품이 엄격하여 작은 잘못이라도 있으면 일찍이 넘어가는 적이 없었으므로, 공도 한결 같은 뜻으로 공경하고 공손하였다. 일찍이 외가를 왕래할 때, 입재 선생은 매양 백불암 선생이 실천한 것으로 가르쳐주었다.
정묘년(1807, 순조 7)에 이만각(李晩覺)의 가문에서 부인을 맞이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통덕공이 병석에 눕자 공은 밤낮으로 애태우며 직접 약과 음식을 조섭하였고, 세상을 떠나자 염습‧ 빈소를 모시는 예․ 소상과 대상의 제사 등을 한결같이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라 행하였다.
어머니 모시기를 선친을 모시는 것처럼 하면서 매사를 반드시 아뢴 뒤에 행하고, 겨울에는 따뜻하게 여름에는 시원하게 해드리며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여, 정성과 예를 곡진하게 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경오년(1810, 순조 10) 입재 선생을 찾아뵙고 대산루(對山樓)의 강론에 참석하였는데, 백하(白下) 황반로(黃磻老, 04)와 성재(誠齋) 남한호(南漢皜, 05) 등 여러분이 모두 공의 견해가 정밀함을 보고 매우 칭찬하였다.
강론을 마치고 나서는 입재 선생을 모시고 우산(愚山) 12경을 두루 구경하였는데, 선생은 이때 『경재잠(敬齋箴)』․ 『숙흥야매잠夙夜箴』 ․ 시 『분지두설時分地頭說』을 가르쳐주셨다. 병자년(1816, 순조 16) 선생이 세상을 떠나자 공은 의문스러운 점을 물을 곳이 없음을 애통해하고, 인하여 유사(遺事) 한 편을 지어 갱장(羹牆, 06)의 사모를 붙였다.
일생동안 공부한 것은 대부분 사서․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 염락(濂洛, 07)의 여러 서적이고, 또 퇴계 선생과 대산 선생의 문집 중에 가장 중요한 부분을 취하여 자신을 닦아 나아가는 바탕으로 삼았다.
백불암 선생의 경자패(敬字牌)를 책상에 올려놓고, 항상 보면서 엄한 스승이 앞에 계신 듯이 하였다. 부인동(夫仁洞)은 백불암 선생이 규약을 정하여 경영하던 곳으로, 선공고(先公庫). 휼빈고(恤貧庫) 등을 설치하고 또 봄가을로 강회를 열어 강론하였는데, 대략 여씨향약(呂氏鄕約, 08) 의 법도처럼 하였다.
공이 한결 같은 마음으로 받들어 행하며 옛 규약을 따랐다. 계축년(1853, 철종 4) 어머니가 90세로 세상을 떠나자, 공은 70세 가까운 나이에도 불구하고 어린아이처럼 그리워하며 슬퍼했다.
병진년(1856, 철종 7) 관찰사 신석우(申錫愚, 09)가 교궁(校宮)에서 강회를 베풀면서 공을 초대하여 강장(講長)으로 삼으니, 심경(心經)을 강론하였다. 갑인년(1854, 철종 5) 암행어사와 대신들이 서로 번갈아 가며 천거하여 경신년(1860, 철종 11)에 장릉 참봉에 제수되었다.
을축년(1865, 고종 2) 80세가 되자 통정대부의 품계에 오르고, 5월에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에 제수되었으나 상소하여 사임하니 체직되었다. 병인년(1866, 고종 3)에 서양 오랑캐들이 강역을 침범하자 사설(邪說)이 낭자하였는데, 공이 말하기를 “사교(邪敎)를 금지시킴은 유학을 강론하는 것만한 것이 없다.”라고 하고, 이에 동천사(東川社)에서 강회를 열어 상서(尙書) 이원조(李源祚, 10)를 맞아 대학(大學)을 강론하고, 정묘년(1867, 고종 4)에는 유천사(柳川社)에서 모여 중용(中庸)을 강론하였다.
경오년(1870, 고종 7) 7월 병석에 누워 장손인 시교(旹敎)에게 경계하기를 “글을 읽고 행실을 닦아 문호를 저버리지 말라.”라고 하고, 10월 12일 자리를 바르게 하고 세상을 떠나니 향년 85세였다. 광리(廣里) 모향(某向)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가 뒤에 영천(永川) 모사면(毛沙面) 남창(南昌) 병좌(丙坐) 언덕으로 이장하였다.
부인은 숙부인(淑夫人) 광주이씨(廣州李氏)로 석담(石潭) 윤우(潤雨)의 후손이며, 만각재(晩覺齋) 동급(東汲)의 딸이다. 유순하고 정숙하였으며 부인으로서의 덕에 어긋남이 없었다. 2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명덕(命德)‧ 명우(命愚)이고, 딸은 이찬수(李瓚秀)‧ 이연재(李淵在)‧ 정치주(鄭致周)에게 각각 시집갔다.
명덕은 6남을 두었는데, 아들은 시교(旹敎)‧ 남교(南敎)‧ 문교(文敎)‧ 영교(英敎)‧ 원교(元敎)‧ 헌교(憲敎)이고, 딸 하나는 이성구(李性求)에게 시집갔다. 명우는 4남 두었는데 치교(致敎) ‧ 예교(璿敎)‧ 상교(相敎)‧ 동교(東敎)이고, 딸은 둘인데 이철구(李喆久)‧ 손진강(孫晉康)에게 각각 시집갔다.
이찬수는 아들 하나를 두었으니 근창(根昌)이고, 딸은 넷이니 손정은(孫廷誾)‧ 선전관(宣傳官) 장주학(張柱鶴)‧ 손문헌(孫文憲)‧ 이수규(李壽奎)에게 각각 시집갔다. 이연재의 대를 이은 아들은 교리(校理) 장기(章夔)이고, 정치주는 아들은 하나인데 진엽(鎭曄)이다.
공은 백불암의 문헌(文獻)의 뜰에서 태어나, 입재 선생의 연원 깊은 학문을 계승하였다. 일찍부터 도학에 뜻을 두었고 말년까지도 부지런히 힘써, 이미 오래전에 충분한 학식을 갖추니 덕망과 기국이 뭇사람들과는 달랐다.
실천한 것은 법도에 맞았고, 말과 행동에는 모두 위의와 법칙이 있었다. 단아하고 신중하며 온화하고 순수하여 사람들이 바라보면 사랑하고 공경하는 마음이 절로 생겨났으나, 겸손으로 스스로를 기르고 두려움으로 스스로를 지켰다.
일찍이 말하기를 “평소 나의 마음가짐이나 일을 행할 때는 매양 ‘구(懼)’ 자 한 글자를 쫓아서 지낸다.”라고 하였다. 날마다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머리 빗고, 사당에 배알하고 어버이 곁에 나아가 문후하였다. 방과 마루를 깨끗하게 소제하고 책상을 정돈하고, 몸가짐을 엄숙히 하고 단정히 앉아 마음을 가라앉히고 완미하고 궁구하여, 만년에도 오히려 게을리 하지 않고 부지런히 행하였다.
그의 날마다 볼 수 있는 행실은 어버이를 모시는 것으로, 기거와 음식과 이부자리를 펴고 걷는 것도 직접 점검하였으며, 방안과 의복은 추위와 더위에 맞게 해드리고, 매월 초하루에는 반드시 절하고 축수를 올렸다. 저녁에 잠자리를 살핀 뒤에는 늘 침석에서 숨소리를 살폈다.
하루는 숨소리가 들리지 않기에 베갯머리에 앉아서 숨을 멈추고 귀를 쫑긋하여 듣는데, 모친이 공이 옆에 있는 것을 알고서 손을 들어 더듬다가 갑자기 두 어른의 이마가 서로 부딪히게 되니 모자가 함께 다 웃었다. 여기서 공의 효성을 더욱 엿볼 수 있다.
선조의 제삿날에는 기일에 앞서 집안을 정결히 하고 술과 훈채(葷菜)를 먹지 않았으며, 부모 제사에는 참립(黲笠)과 직령(直領)으로 모시되 슬퍼하는 정이 주위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제물에는 모두 정해진 법식이 있어 더함도 덜함도 없었다.
더운 때에는 충분히 익혀 서늘한 곳에 두고 손수 부채질하였다. 만년에 기력이 몸소 제례를 행할 수 없게 되자, 반드시 부축해 일으키게 하고 단정히 앉아서 제사를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 규방은 화목하여 온화하고 따뜻한 기운이 항상 집안에 가득 넘쳤고, 친족들과는 화목하여 있든 없든 서로 돕고 병이 나면 서로 구제하였다.
자식과 조카들에게 잘못이 있을 때는 순순하게 타일러 가르치며, 매양 장공예(張公藝)의 백인자(百忍字)의 뜻으로 힘쓰게 하였다. 하인들을 부릴 때는 은혜와 위엄을 병행하여, 혹 매를 맞고 꾸지람을 들은 자도 원망스럽게 생각하지 않고 정성을 더욱 다하였다.
음식을 먹을 때는 일정한 법도가 있어 두 가지 고기를 허락하지 않았다. 의복은 다만 온전하고 깨끗한 것만 취하였을 뿐이다. 남을 대우할 때면 그와 더불어 경도된 적이 없고 또한 거만한 모습도 없었으니 엄연한 가운데 정성스러운 뜻이 넘쳤다.
자신을 단속함에는 근엄하여 고요히 혼자 있을 때도 혹 소홀하지 않았다. 한가로이 거처할 때도 편리한 복장을 하지 않고 무더운 날에도 반드시 의대(衣帶)를 갖추었다. 하루 종일 반듯이 앉아 어깨와 등을 곧게 세웠고, 밤에 침석에 들 때는 손과 발을 가지런히 하여 측신(側身, 11)으로 누웠으며, 일찍이 갑작스럽게 몸을 함부로 한 적이 없었다.
대개 백불암 선생의 학문은 근본이 있고 말단이 있어 선비들이 우뚝한 종주로 삼는 바이다. 공은 그런 기상을 전수 받고 보고 들을 수 있는 세상에 태어나, 행실을 함은 반드시 효제충신에 근본하고, 도를 구함은 반드시 쇄소응대(灑掃應對)를 먼저 하였다.
평이하면서도 실질적인 일에 힘쓰고 분명한 곳에 더욱 힘을 기울였다. 부지런하고 차근하게 80년을 하루와 같이 하였으니 어찌 대방가에서 잘 계술(繼述)한 분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아! 아름답도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
선각이신 백불암 선생은 / 有覺弗老。
영남 선비들이 종주로 여긴 바이네 / 南士攸宗。
높은 덕망과 훌륭한 말씀을 / 有德有言。
그 손자에게 전하셨네 / 貽厥孫子。
공은 경사를 입은 후손으로 / 公乃嗣慶。
바탕이 남달리 맑고 순수하며 / 異質淸純。
효성은 천지신명을 감동시켰고 / 孝貫神明。
학문은 심오한 이치를 꿰뚫었네 / 學透微奧。
시대를 상심하고 도를 걱정하며 / 傷時憂道。
현송, 12) 소리 양양하네 / 絃誦洋洋。
한결같이 신중함을 생각하면서 / 一念兢存。
공경하게 가학을 계승하였네 / 敬述家學。
구순의 나이에도 개제하고 화락하여 九旬豈樂。
명성을 온전히 하고 돌아가셨네 / 葆歸完名。
나의 글은 과장됨이 없으니 / 我筆非夸。
그 이름 영원토록 밝게 빛나리 / 尙昭千億。
<끝>
[주해]
01) 긍암(肯庵)
이돈우(李敦禹, 1807∼1884)의 호이다. 자는 시능(始能), 본관은 한산(韓山)이다. 류치명의 문인이다. 1850년 증광시에 급제하여
형조 참의와 승정원 동부승지 등을 역임하고 76세 때 이조 참판에 제수되었다. 후학 양성에도 관심을 가져 고산서당․ 고운사(孤雲寺)․
임천(臨川) 등지에서 후학을 가르쳤다. 저서로는 긍암집이 있다.
02)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의 호이다. 자는 도가(道可)․가보(可父), 본관은 청주이다. 유일로 관직에 출사하였고 지평을 거쳐 교정청 낭
청에 제수되어 소학언해 · 사서언해 등의 교열에 참여하였다. 임진왜란 당시에 통천 군수로 의병을 거병하였고 임난 이후에는 강원도 관찰사와 형조 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성리학과 예학뿐만 아니라 제자백가와 역사 및 의약(醫藥)과 복서(卜筮) 등 여러 방면에 걸쳐 박학하였고, 다양한 분야에 걸친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03) 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 1738∼1816)의 호이다. 자는 사앙(士仰), 호는 입재·무적옹(無適翁), 본관은 진주이다. 정경세의 6세손으로 이상정
의 문인이다. 벼슬에 나가지 않고 성리학의 연구에 전념하였으나, 학문과 지조 있는 행실로 여러 번 관직에 천거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저서로는 입재집과 소대명신언행록(昭大名臣言行錄) 등이 있다.
04) 황반로『黃磻老, 1766년(영조 42)∼1840년(헌종 6)』
자는 숙황(叔璜), 호는 백하(白下), 본관은 장수(長水)이다. 정종로의 문인으로 경전뿐만 아니라 시문과 필법에 뛰어났으며 과거의 대
책문에도 능하여 표책에 초빙되기도 하였다.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어버이 상을 당한 후에는 출사의 뜻을 버리고 학문을 연마하였다.
05) 남한호『南漢皜, 1760년(영조 36)∼1821년(순조 21)』
자는 자호(子皜), 호는 성재(誠齋), 본관은 의령(宜寧)이다. 어려서 족 종형 손재(損齋) 남한조(南漢朝)에게 수학하였다. 14∼15세때
이미 성현의 학문에 뜻을 두고 남한조에게 의문점을 물어 바로잡았고, 178년 정종로를 찾아가 공부하였다. 순암(順菴) 안정복(安鼎
福)에게서도 수학하였다.
06) 갱장(羹墻)
죽은 이를 사모한다는 의미로, 후한서(後漢書) 「이고전(李固傳)」에 “옛날에 요임금이 돌아가시자 순임금이 3년 동안 우러러 사모하
였다. 앉아있을 때는 담장에서 요임금을 보았고 먹을 때는 국에서 요임금을 바라보았다.[昔堯殂之後 舜仰慕三年坐則見堯於牆 食則
覩堯於羹]”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07) 염락(濂洛)
염계(濂溪)와 낙수(洛水)를 줄여서 일컫는 말로, 염계(濂溪)에는 주돈이(周敦頤)가 살았고, 낙수(洛水)에는 정호(程顥)와 정이(程
頤) 형제가 살았던 데서 일컫는 말이다.
08) 여씨향약(呂氏鄕約)
중국의 남전 여씨(藍田呂氏) 형제 네 사람이 향인(鄕人)들과 함께 맺은 규약으로, 그 내용은 덕업으로 서로 권할 것[德業相勸], 과실
에 서로 경계할 것[過失相規], 예속으로 서로 사귈 것[禮俗相交], 환난에 서로 도울 것[患亂相恤] 등 네가지이다.
09) 신석우『申錫愚,1805년(순조 5)∼1865년(고종 2)』
자는 성여(聖如), 호는 해장(海藏), 본관은 평산(平山)이다. 1834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검열․정언을 거쳐 병조 참판‧이조 참판‧홍문
관 대제학을 거쳐 경상도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1860년 동지사로 청나라를 다녀왔다. 예조 판서에 이르렀고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
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저서로는 해장집과 청이부지(淸伊府志)가 있다.
10) 이원조(李源祚,1792∼1872)
자는 주현(周賢), 호는 응와(凝窩), 본관은 성산(星山)이다. 정종로의 문인이다. 1809년 문과에 급제하여 주서(注書)로 관직을 시작
하여 경주 부윤‧제주 목사 등을 역임하였고 1871년 판의금부사에 올랐다. 60여 년의 관직생활에서 오로지 충직과 청렴결백으로 일관
한 문신이며, 1,70여 수의 시를 남긴 문인이다.
11) 측신(側身) : 시경 『대아(大雅)·운한(雲漢)』 서(序)에 나오는 말로, 재앙을 만나 백성을 걱정하며 두려운 마음으로 자신을 반성하
고 닦아 나가는 제왕의 자세를 가리키는 말이다. 여기서는 항상 자신을 반성하고 수신한다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12) 현송(絃誦) : 거문고를 타고 시(詩)를 읊조린다는 뜻으로, 학문 수양에 힘쓰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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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通政大夫行敦寧府都正止軒先生崔公墓碣銘 幷序。
止軒先生崔公卒葬之二十七年丙申。其孫旹敎。以肯庵李公之狀。徵銘於興洛。興洛辭以晩生寡陋而不獲命。謹按公諱孝述字稺善。氏出月城。遠有代序。入本朝。有諱鄲佐太祖。有開國功。官大司馬。諱孟淵知縣事。始居大丘。諱誡縣令。以壬辰倡義功。贈兵曹參判。諱東㠍登寒岡鄭先生門。以學行薦授孝廟潛邸時師傅。明社屋。隱不仕。諱壽學監察。高祖諱鼎錫通德郞。曾祖諱興遠官翊贊。贈左承旨。卽百弗庵先生。祖諱周鎭遊大山李先生門。爲師門所推重。號東溪。考諱㵓通德郞。有儒望。妣晉州鄭氏。愚伏先生後。立齋諱宗魯女。以健陵丙午生公。姿質淸明。氣象岐嶷。甫省事。已知愛敬之道。先意順旨。不與羣兒嬉戱。十餘歲。文辭夙就。長者期以遠大。始受學於再從大父漆室翁。性嚴有少過。未嘗假借。公一意恪恭。又嘗往來外庭。立齋先生。每以百弗先生所踐履者敎詔之。丁卯授室于李晩覺門。未幾通德公寢疾。公夙夜焦煎。親調藥餌。及丁憂。殮殯祥祭。一遵家禮。奉母夫人。如事先公。每事必稟而行之。溫凊甘旨。無不曲盡誠禮。庚午往拜立齋先生。參講於對山樓。黃白下磻老,南誠齋漢皜諸公。皆以見解精深稱賞之。講畢陪先生。遍遊愚山十二景。先生授以敬齋,夙夜兩箴時分地頭說以敎之。丙子先生易簀。公痛考問無地。因作遺事一篇。以寓羹牆之慕。一生用工。多在四書及心近濂洛諸書。又取退陶,大山二先生集中最切要處。爲進修之資。置百弗先生敬字牌于案上。常目在之。若嚴師之臨焉。夫仁洞。卽百弗先生設約經理之地。而有先公恤貧等諸庫。且以春秋設會講修。略如呂氏鄕約之法。公一心奉行。克遵舊規。癸丑先夫人九耋終堂。公年幾七十。而哀慕如嬰兒。丙辰申方伯錫愚設講會于校宮。邀公爲講長。講心經。甲寅繡衣大臣交口薦達。庚申除莊陵參奉。乙丑以大耋陞通政階。五月除敦寧府都正。陳疏辭遞。丙寅洋夷犯疆。邪說浪行。公曰禁止邪敎。莫如講明吾學。乃設講會於東川社。邀李尙書源祚。講大學。丁卯會柳川社。講中庸。庚午七月寢疾。戒長孫旹敎。讀書修行。毋負門戶也。以十月十二日。正席而終。享年八十五。葬廣里某向原。後移奉于永川毛沙面南昌丙坐原。配淑夫人廣州李氏。石潭諱潤雨後。晩覺齋東汲女。柔順貞淑。媲德無違。生二男三女。男命德,命愚。女適李瓚秀,李淵在,鄭致周。命德六男旹敎,南敎,文敎,英敎,元敎,憲敎。一女李性求。命愚四男致敎,璿敎,相敎,東敎。二女李喆久,孫晉康。李瓚秀一男根昌。四女孫廷誾,張柱鶴宣傳,孫文憲,李壽奎。李淵在嗣子章夔校理。鄭致周一男鎭曄。公生弗爺文獻之庭。襲立翁淵源之學。早歲嚮道。竆老孜孜。充養旣久。德器異衆。踐履自合繩墨。言動皆有儀則。端重和粹。自然人望而生愛敬之心。以謙遜自牧。兢惕自持。嘗曰吾平生持心行事。每從一懼字過了。逐日早起盥櫛。展拜祠廟。進候親側。淨掃室堂。整頓几案。斂容端坐。潛心究翫。晩年猶不懈益勤。其日可見之行。則事親。起居飮食。枕簟斂設。親自點檢。房室衣服。適其溫凉。月朔必拜而獻壽。昏定後。每候寢席中氣息。一日氣息無聞。因坐枕邊。屛息竦聽。母夫人覺其在傍。擧手探之。忽兩額相摩。母子皆笑。此尤見公之誠孝也。祭先。前期澡潔。不酒不葷。親忌。用黲笠直領行事。而哀情動左右。祭品皆有定式。豐歉無加損。暑月。爛熟而置凉處。手自扇之。晩年不能筋力爲禮。則必扶起危坐。以待祭畢。閨門穆如。和藹之氣。常盈溢宅裡。睦於宗族。有無相資。疾病相救。子姪有過。諄諄誨誘。每以張公藝百忍之意敕勵焉。御婢僕。恩威幷行。被笞譴者。不以爲怨而尤效其誠。飮食有常度。不許重肉。衣服只取完潔。待人未嘗與之傾倒。而亦無惰慢之容。儼然之中。悃愊藹如。律己謹嚴。不以幽獨而或忽。燕處不以便服。盛暑衣帶必飭。危坐終日。肩背竦直。夜而就寢。齊手斂足。側身而臥。未嘗遽放肆也。葢弗翁之學。有本有末。蔚爲士類之宗。公以氣類之傳。生見聞之世。制行必本於孝悌忠信。求道必先於灑掃應對。平實處著力。明白處加工。勉勉循循。八十年如一日。豈非所謂合下門庭善繼述者耶。於乎偉矣。銘曰。
有覺弗老。南士攸宗。有德有言。貽厥孫子。公乃嗣慶。異質淸純。孝貫神明。學透微奧。傷時憂道。絃誦洋洋。一念兢存。敬述家學。九旬豈樂。葆歸完名。我筆非夸。尙昭千億。<끝>
西山先生文集卷之十八 / 墓碣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