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5백여 년 동안 해마다 몇 차례씩 중국 베이징(北京)에 가는 조선 사절단은 본래의 사명인 외교임무 외에 다양한 경제.문화활동을 폈다. 더욱이 17세기에 들어서면서 전통적인 중국문명이 아닌 서양문명을 만나게 된다. 그것은 정신적 가치인 종교와 물질적 가치인 자연과학으로 구성된 서양의 가톨릭 문명이다. 중국으로 예수회 선교사의 진출이 활발해지면서 조선은 정보의 접촉에서 인적(人的)접촉으로 나아간다.
가톨릭이 대표하는 서양문명의 '분자식(分子式)'은 기존의 동아시아 문명과는 판이한 것으로 조선 지식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가톨릭과의 만남은 한국 정신사상 획기적인 대사건이었으며, 이 때문에 엄청난 이문화(異文化)의 수용과 충돌 현상이 빚어졌다. 조선조 후기의 개혁적 지식인은 가톨릭의 사상과 과학을 자신의 삶과 사회개혁의 구원의 메시지로 받아들인 것이다.
18세기 중엽에 이르러 중국 청(淸)나라의 신문화(새로운 고증학 학풍, 시장경제, 사회의 개방성 등)발달을 촉매로 우리의 실학이 싹트고, 한편 동아시아의 상대적 안정 때문에 전통문화의 '등질 확인 작업'인 문화교류 사업도 활발히 전개된 것이다.
이즈음 조선은 베이징을 장(場)으로 서양문명의 또 하나의 갈래인 러시아의 '정교(Orthodox Church)'를 만나게 된다. 러시아 정교 문명은 서구 가톨릭 문명의 역사적 맞수이지만 보편성과 강력한 전도력이 뒤져 우리 역사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했다. 그러나 '문명의 조우(遭遇)'라는 점에서 간과할 수 없는 역사적 사안이다. 18세기 전반부터 19세기 중엽까지 약 1세기반 동안 두 나라의 평화적이고 지속적인 만남의 흔적이 우리의 사행기록인 '연행록(燕行錄)'과 러시아측 기록이 적지 않게 남아 있어 이를 일궈내고 엮는 작업이 필요하다.
처음 중국과 러시아는 국가와 문명의 대립으로 갈등을 빚었지만 네르친스크조약(1689년), 카흐타조약(1727년)을 맺고 평화적인 공존체제로 들어갔다. 수평적 문명의 존재를 부인하는 중화문명과 슬라브 문명은 힘의 균형에 의해 할 수 없이 타협한 것이었다. 두 문명의 자존심이 얼마나 고고한지 한 예를 들어본다.
절대군주인 중국 황제의 타이틀에는 '존호(尊號)'가 있는데, 황제의 존엄과 덕성을 찬양하는 글귀로 많게는 24자나 된다. 인간이 작문할 수 있는 최상급의 찬사를 붙인 것이다.
한편 러시아의 경우 1675년 러시아황제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Alekesei Mikhailovich)가 청나라 강희제(康熙帝)에게 보낸 국서에 실린 자신의 타이틀에 대러시아.소러시아.백러시아.모스크바 등 무려 29개의 통치구역을 나열하고 동.서.북쪽의 황제라고 자칭했다. 통치자의 호칭도 tsar(황제), gosudar(군주) 등 네 가지 호칭을 아울러 섰다.
조선사절과 러시아인과의 만남의 장(場)은 베이징의 이른바 아라사관(俄羅斯館)이었다. 1827년 카흐타조약 제5조에 따라 러시아정교회 북경전도단이 제14차 전도단(1858~1864)때까지 체류한 곳이다. 1860년 베이징조약이 체결된 뒤 전도단은 이전하고 러시아공사관으로 바뀌었다.
이곳은 예전에 조선 사절이 1408년께부터 약 3백20년 동안 사용하던 조선공관이며 규모는 3백87칸으로 매우 컸다. 정식 호칭은 회동사역관(會同四譯館)이다. 오랜 세월 써오던 이 조선공관이 청나라의 대국주의적 횡포로 러시아에 주어지고 조선은 남쪽 성벽가의 72칸짜리 새로운 공관으로 물러나 앉게 됐다. 전자를 '옥하관(玉河館, 중옥하교 서쪽)', 후자를 '남소관(南小館, 하옥하교 서쪽)'이라 일컫는다.
조선과 러시아의 만남의 백미(白眉)는 1816년(순조16) 조인영(趙寅永)과 제9차 러시아정교회 북경전도단장 비추린과의 만남이다. 비추린은 러시아 동양학과 중국학의 대가이며 아울러 처음으로 조선을 학술적으로 접근한 러시아 한국학의 개척자이기도 하다. 조선에 관한 그의 두편의 저작-'중화제국의 통계적 개론'(1842년), '고대중앙아시아 민족자료집'(1851년)에 각각 수록-은 기념비적인 업적이다. 젊은 날의 조인영은 아라사관을 방문하고 비추린에게 전별의 시로 오언절구 한 수를 지어보냈다.
수만 리나 떨어져 있어도 / 같은 하늘 아래 있다네. / 먼 훗날 그리울 때면 / 천마를 타고 가야지.
노랫말은 쉽지만 마음은 가없이 진솔하다. 이문화(異文化)와 공간의 장벽을 뛰어넘은 젊은이의 정열이 넘쳐 흐른다. 이 시는 조인영의 문집 '운석유고(雲石遺稿)'에 들어 있지 않아 지금까지 알 수가 없었다. 뒷날 고관대작으로 체제유지자가 되어 천주교를 탄압한 그는 젊은 날의 이 위험한 시를 말살한 것이다.
무릇 정신의 결정(結晶)인 글엔 지은이, 보는이가 멋대로 지워버릴 수 없는 생명의 섭리가 있는 것 같다. 신부이며 대학자인 비추린이 베이징에서 러시아로 귀국할 때 책 12상자, 지도 6통 등 총무게 1만4천 파운드의 문헌자료를 싣고 갔다고 한다. 이 방대한 자료더미는 뒷날 러시아 동양학의 귀중한 밑거름이 됐다.
이 속에 조선 젊은이 조인영의 한 장의 시편이 버려지지 않고 고이 간직된 것이다. 지금 원본은 러시아동방학연구소 페테르부르크 지부에 보관 중이며 연전에 페트로샨 연구소장이 서울방문 때 사본을 명지학원 유영구 이사장에게 기증한 것이다.
1821년 비추린은 조선정사(正使) 이조원(李肇源)을 만났는데 이 자리에 때마침 베이징에 온 러시아 외교부 관리인 팀코프스키도 함께했다. 이조원은 과거에 장원급제한 후 육조판서(六曹判書)를 두루 지낸 당대의 명사이며 문한가(文翰家)이다. 이 역사적 만남의 장면을 팀코프스키는 저서 '몽골, 베이징 기행 1824'에서 감격 어린 필치로 서술했다.
그는 처음 만난 조선 고관인 이조원의 고매하고 지성적인 풍모에 심취해 자신의 패도(佩刀)를 풀어 선사하기까지 했다. 나라와 나이를 뛰어넘은 참된 우정이다. 은둔의 나라 조선 선비의 멋진 이미지는 유럽 각국에서 펴낸 팀코프스키의 베스트 셀러를 통해 유럽 전역에 펼쳐졌다.
조선은 작은 나라로 비록 가진 것은 많지 않았지만 지성의 자산(資産)은 우뚝했던 것이다. 팀코프스키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러시아와 조선간의 외교통상을 정부에 건의하기도 했다. 이것은 비록 시기상조 미완에 그쳤지만 러시아 외교사상 첫 번째 조선개항의 역사적 플랜으로 평가된다.
다음 1827년(순조27)에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의 저자 홍석모(洪錫謨)가 제10차 전도단장 카멘스키 등을 만난 것도 눈길을 끈다. 이 만남을 묘사한 그의 시 한편이 남아 있다.
조선에서 그 유명한 아라사 거울을 보고 / 만리 밖 그들을 북경에서 만났네. / 옥문관(玉門關) 밖이라도 못 올 리 없다지만 / 장건(張騫)도 못 가본 사막 저편 먼 곳이라오. / 그곳은 하늘의 천주를 섬기는 나라 / 중국말을 배우려고 수재를 보냈다네. / 서로가 타향살이 필담을 나누면서 / 오가는 보라 술, 쪽빛 술잔 한없이 정겨워라.
아라사관 자리에는 지금 중국의 국가안전부 후면과 최고인민법원(대법원)이 들어서고(국가안전부는 동교민항 25번지, 최고인민법원은 27번지) 남소관 자리는 베이징시 우체국 속달센터가 되어 옛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어 그야말로 상전벽해의 감이 있다. 옥하는 복개되어 지금은 정의로(正義路)로 불리고 천안문 동쪽 베이징호텔 앞에서 남쪽으로 뚫려 있다.
서쪽에 국가안전부, 동쪽에 베이징시인민정부, 베이징 인민해방군 사령부, 베이징 위수사령부가 있다.
▶ 박태근 명지대 LG연암문고 상임연구위원
연전에 아라사관 맞은편에 대우의 오피스가 있어 금석지감을 느끼게 했지만 올해 8월 다시 가보니 대우는 사라지고, 아라사관 자리가 모두 부서져 건축공사가 한창인 어수선한 풍경이다. 최고인민법원도 그 자리에 없다. 요 몇해 사이에 또다시 모습이 달라지고 있다. 역사의 유적이 이 땅에서 마음 속으로 퇴행(退行)하는 것이 문명의 섭리인가!
첫댓글 영화<스틸라이프>가 생각나네요~ 계속되는 개발로 중국인지 뉴욕인지 모를 날이 머지 않았으니, 이번 답사는 좀 덜 개발된 중국을 보는 횡재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