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충공(점필재)김종직과 제자 한훤당 김굉필
김시종(수필가)
도동서원은 한훤당 김굉필의 대표적인 서원이다.
김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된 서원으로 비슬산 기슭에 사당을 지어 향사를 지내다가 쌍계서원으로 사액 되었으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되고 말았다.
지금의 자리에 사당을 재건하고 보로동 서원으로 불리어 오다가 광해군이 도동서원이라 이름 지어 편액(扁額)을 내려던 서원 명이다.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철거되지 않았고 존속한 전국 47개 주요 서원 중 하나이다.
서원 앞으로는 낙동강이 유유히 흐르고 뒤로는 산을 배경으로 한 배산임수 지형으로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한 폭의 동양화를 방불케 하는 명당이다.
사적지에는 사백 수년이 되는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있다. 조선 중기 유학자이며 임란 의병장을 역임한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은 도동서원이 사액 서원이 된 것을 기념 식수한 나무로 오랜 역사를 말하고 있다. 좌현에는 신도비와 사적지가 있고, 외삼문을 들어서면 환주문이 있다. 중앙에는 우람한 중정당(강당)이 있으며 좌 우현에는 거의재와 거인재가 마주 보고 있다. 내삼문을 지나면 사당 앞뜰이다. 사당에는 한훤당 김굉필 선생의 불천위 향사를 모시는 위패를 모신 곳이다.
김굉필(金宏弼)은 단종 2년(1454년) 아버지 김유(金紐)와 청주한씨 한 승순(韓承舜)의 딸 사이에서 조선 한성부 정동에서 출생했다. 본관은 황해도 서흥 김씨다. 김 선생은 조선 전기 문인으로 교육자며 성리학자다. 호는 한훤당(寒暄堂) 사옹(衺翁) 또는 한훤(寒暄)이며 자는 대유(大猷)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증조부 중곤(中坤)이 조선조 참의공 벼슬로 고을 수령과 청환(淸宦)을 역임한 후 처가 곳인 현풍 곽씨의 고향인 현풍에 이주함에 따라 김굉필은 못 골에서 성장했다.
못 골이란 명칭은 마을의 형국이 나비처럼 생겨 마을 앞에 못을 파면 세거지로서 좋을 것이라는 풍수설에 따라 유래 되었다. 오늘날 못 골은 서흥 김씨의 집성촌으로 이루어졌다.
김 선생은 청소년 시절부터 매우 호방하여 놀기를 좋아하였고, 남의 눈치에 거리낌 없이 옳지 못한 일은 그냥 넘기지 못하는 의리를 중시하는 기질이 있었다.
18세에 순천 박씨와의 혼인은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결혼과 더불어 처가 곳인 경남 합천군 야로에 한훤당이라는 서재를 짖고 학문에 열중 하였다. 선생의 세거지 현풍과 처가인 야로, 처외가 곳인 성주 가천 등지를 오가며 사류들과 교유하며 견문을 넓히며 학문에 열중하였다.
무엇보다 문충공(文忠公) 김종직(金宗直) 선생과의 만남은 그 일생을 결정지은 운명적인 사건이었다. 한훤당이 20세(1474년) 되던 봄 김종직 선생이 함양 군수로 재임할 때 찾아가 문안 인사를 올렸다. 총명하게 생긴 청년은 담담한 소리로 자신을 김굉필이라고 소개했었다. 아주 활달하고 강직한 느낌을 주는 청년이었다. 김종직 선생은 그의 절을 받고 물었다.
“그래 공부는 언제부터 했는가?”
“어릴 적부터 책을 읽었습니다.”
“어떤 책을 즐겨 읽었는가?”
“창려집(昌黎集)이 좋아 자주 읽곤 했습니다.”
중당(中唐)의 문호 한유(韓兪)의 문집을 말하자 김종직은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렇군, 어쩐지 젊은이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여겼더니, 역시 그렇군, 한유는 자가 퇴지(退之)이며, 호가 창려로 당나라 때의 문호이자 사상가다. 당시 유행하던 변려 문체에 반대하며 고문(古文)을 주장 새로운 문체의 물꼬를 튼 문호이었다. 특히 도를 숭상하여 삼엄한 바가 있었던 사상가였다.
김종직이 말했다.
“창려집에 귀한이건 착한이건 어른이건 아이이건 구분 없이 도가 있는 곳에 스승이 있다, 라고 했는데 자네도 그 말을 신봉하는가?”
“그 말을 실천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실천이라, 그래, 실천이 특히 중요한 일이지.”
김종직은 다시 젊은이를 찬찬히 바라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자네에게 줄 책이 있네.”
김종직은 책장에서 책 한 권을 꺼내어 김굉필에게 건넸다. 소학(小學)이었다. 천하의 김종직 선생이 준다기에 근사한 책인 줄 기대했는데, 기껏 어린애들이 읽은 소학이니 말이다.
“물론 소학은 다 읽었겠지?”
스승의 의도를 몰라 김굉필은 말없이 책만 바라보기만 했다.
김종직 선생은 웃음을 띠며 말했다.
“자네가 진실로 학문에 뜻이 있다면 소학부터 읽어야 하지 않겠나? 자네도 알겠지만, 소학은 수준이 낮지 않네, 주희선생이 제자 유자징에게 지시하여 뭇 고전의 내용 중 핵심을 뽑아 엮은 것이니, 주희 사상의 핵심이며, 유교의 기반이 되는 것이지, 다시 찬찬히 읽고 생각하게.”
김굉필은 김종직 선생의 간곡한 뜻을 알아듣고 소학을 품었다.
문충공 김종직 선생은 총명하고 의리를 중시하는 제자를 얻게 된 즐거운 마음에 시 한 수를 한훤당에게 보냈다.
窮 苀 何 辛 過 斯 人 : 궁하고 거친 땅에서 그대를 만남은
珠 貝 携 來 爛 熳 陳 : 구슬과 조개를 가지고 와 찬란히 펴 놓은 듯,
好 去 更 尋 韓 吏 部 : 잘 가서 다시 韓退之를 찾으라
愧 余 喪 朽 末 傾 囷 : 썩은 재질 부끄러울 뿐이네.
소학은 한훤당의 필독서로 틈틈이 읽고 또 읽으며 그 뜻을 살피고 실천하는 일에 게을리하지 않았다. 마침내 소학이야말로 사고의 밑바탕을 이루었고, 행동의 지침서가 되었다. 김굉필은 스스로 ‘소학 동자’라고 자부했었다.
김굉필은 소학의 가치를 깨친 후 스승에게 아래의 시 한 수를 보냈다.
學 問 猶 末 識 天 機 : 배움에 오히려 진리를 몰랐는데
小 學 書 中 悟 昨 非 : 소학을 보고 지난 잘못 알았노라,
從 此 自 有 名 敎 藥 : 이제 명교의 약이 있으니
區 區 何 用 羡 經 肥 : 구구하게 어찌 헛된 영화 바라겠는가.
훗날 김굉필은 김종직 선생의 문하에 수제자로 성장함으로써 조선 유학의 도통을 이어받은 영남 사림 학파의 적통을 잇는 영광을 누렸다.
연산군 4년 김일손 등이 사초에 올린 조의제문과 남곤 등의 연산군 비판, 폐비 윤씨 복위 반대를 빌미로 무오사화가 발생했다.
당시 김굉필은 김일손, 권오복, 남곤 등과 동문이며 김종직의 문도로 붕당을 만들었다는 죄목으로 평안도 희천(熙川)에 유배되었다. 그곳에 지방관으로 부임한 조원강의 아들 조광조를 맞나 그에게 학문을 전수 하였다. 2년의 세월이 지난 뒤 또다시 전남 순천으로 유배되어 학문 연구와 인재 양성에 힘썼다.
연산군 10년 (1504년) 갑자사화로 인한 궁중파의 탄핵을 받고 김굉필은 순천 유배지에서 사약을 받았다. 그의 나이 향년 51세였다.
그 후 중종반정이 성공하자 연산군에 피화被禍한 인물들의 신원이 복원되었고, 자손들도 관직에 등용되는 혜택을 받았다. 김굉필의 학문적 업적과 무고하게 피화되었음이 역설되어 의정부 우의정에 추증되었다. 도학을 강론하던 곳에는 사우가 세워져 향사를 지내며 추모하고 있다.
중종 13년(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나 김굉필에게 내려진 증직과 은전에 대한 반대세력에 의해 수정론이 대두하였으나 성균관 유생들의 문묘 종사(文廟從祀) 건의가 계속되자 선조 10년(1577년)에 문경(文敬)이라는 시효가 내려졌다.
광해군 2년(1610년)에 김굉필은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과 더불어 동방 오 현으로 성균관 문묘에 배향되었다.
김굉필 선생이 성장한 못 골의 서흥 김씨 후손들은 스승인 김종직 선생의 사당이 있는 고령 개실 마을의 일선(一善) 김씨와 혼인도 하고, 교분을 돈독히 하며 어려울 때 서로 힘을 모으고 교류도 하고 있다.
도동서원은 깊은 역사를 간직한 편액 서원으로 근세에 서원 전역이 사적지로 보호되고 있다. 특히 아름다운 토담으로 된 담장은 전국 최초로 보물 제350호로 지정되었고, 유물 전시관에는 임금이 하사한 서책과 제기, 경현록 목판이 보존되어 있다.
한훤당 김굉필 선생은 스승의 가르침을 받아 인(人)을 덕(德)의 근본으로 하는 유교 사상을 실천하며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사상을 몸소 실천한 역사적 인물로 추앙받고 있다. (한국경찰문학회 대구,경북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