ㅁ 남한산성의 자연환경 from 위키백과 남한산성
ㅇ남한산성의 지형은 청량산(497m)과 남한산(480m)을 중심으로 급경사로 된 화강편마암의 융기 준평원으로서, 주봉인 청량산(482.6m)을 중심으로 북쪽의 연주봉(467.6m), 동쪽으로 남한산의 주봉인 벌봉(522m)과 망월봉(502m), 남쪽으로 한봉(414m)을 비롯한 몇 개의 봉우리를 연결하여 쌓은 성이다.
ㅇ남한산은 풍화에 강한 경기변성암 복합체로 이루어져있다. 산아래 해발 400m 내외의 고도에는 북동-남서 방향으로 비교적 넓은 면적의 평지가 펼쳐저있으며, 고위평탄면으로 알려져 있다. 이 평지는 화강 편마암의 융기 준평원으로 넓은 구릉성 분지를 이룬다. 남한산 주변은 서고동저의 기복을 형성하며, 서쪽은 대체로 경사가 급하고 험하지만, 내부의 평지를 지나 동남쪽으로 내려가는 길은 대체로 완만한 편이다.
ㅇ성안에는 45개의 연못과 80여 개에 달하는 샘이 있어서 사시사철 물이 마르지 않지만 분지 내에는 고산지대인 관계로 하천발달이 미약하여 유일한 하천인 산성천이 북동-남서 방향으로 고을을 관통한 뒤 동문 옆 수문을 통하여 동쪽으로 흘러가면서 산성리에서 엄미리에 이르는 약 8 km 구간이 침식곡을 이루고 있다.
ㅇ산정을 중심으로 서쪽 저지에는 한강의 지류인 탄천, 동쪽에는 또다른 지류인 광안천이 북으로 흘러 본류와 합류한다. 결코 완만하지 않은 산 자체의 경사가 성벽과 결합하여 단단한 자연 방어선을 이루는 관계로 공격자의 입장에서 굉장히 공략하기 어려운 천혜의 전략적 요충지이다.
ㅁ 남한산성 역사 from 네이버 지식백과 남한산성(Namhansanseong Fortress, 南漢山城)
ㅇ남한산성(南漢山城)은 대한민국 경기도 광주시, 성남시, 하남시에 걸쳐 있는 남한산을 중심으로 하는 산성이다. 병자호란 때 조선의 16대 왕 인조가 청나라에 대항한 곳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1950년대에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공원화된 후 현재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남한산성은 군사적 침략으로 단 1번도 함락되지 않았는데, 병자호란 당시 침략때는 군사적으로 싸움에서 이겨 성을 차지한 것이 아니라 항복을 해서 차지했으므로 남한산성은 단 한번도 적에게 군사적으로 함락되지 않았다. 인조는 이곳에서 청나라 황제에게 삼배구두절을 하고 임금의 나라로 섬겼다.
ㅇ1963년 1월 21일 사적 제57호로 지정되었고 2014년에는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북한산성(北漢山城)과 더불어 서울을 남북으로 지키는 산성 중의 하나로, 신라 문무왕(文武王) 때 쌓은 주장성(晝長城)의 옛터를 활용하여 1624년(인조 2)에 축성(築城)하였다. 《남한지(南漢志)》에 따르면, 원래 심기원(沈器遠)이 축성을 맡았으나 그의 부친상으로 인하여 이서(李曙)가 총융사(摠戎使)가 되어 공사를 시작하여, 1626년 7월에 끝마쳤다. 공사의 부역(賦役)은 주로 승려가 맡아 하였다. 성가퀴는 1,700첩(堞)이고, 4문(門)과 8암문(暗門)이 있으며 성안에는 관아(官衙)와 창고 등, 국가의 유사시에 대비하여 모든 시설을 갖추었고, 7개의 절까지 세웠다. 다만 성의 둘레가 6,297보(步), 성가퀴는 1,897보라고 하는 등 문헌에 따라 차이가 있다.
ㅇ이러한 기본적인 시설외에, 인조 때부터 순조 때에 이르기까지 성내의 시설 확장은 계속되었다. 임금이 거처할 행궁(行宮)은 상궐(上闕) 73간(間) 반, 하궐(下闕) 154간이었다. 재덕당(在德堂)은 1688년(숙종 l4)에 세웠고, 1711년에는 종묘를 모실 좌전(左殿)을 세웠다. 그리고 사직단(社稷壇)을 옮길 우실(右室)도 세웠다. 1624년에 건립된 객관(客館:人和館)은 1829년(순조 29)에 수리되었다.
ㅇ관아로는 좌승당(坐勝堂), 일장각(日長閣), 수어청(守禦廳), 제승헌(制勝軒) 등이, 군사기관으로는 비장청(裨將廳), 교련관청(敎練官廳), 기패관청(旗牌官廳) 등을 비롯한 20여 시설과 더불어 종각(鐘閣), 마랑(馬廊), 뇌옥(牢獄),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묘(溫祚王廟), 서낭당, 여단(厲壇) 등이 들어서고, 승도청(僧徒廳)을 두어 승군(僧軍)을 총괄하였다. 당시에 나라를 지키는 성군(聖軍)으로서의 불도(佛徒)의 힘은 대단히 컸기 때문이다.
ㅇ그러기에 이 산성의 축성에도 승려 각성(覺性)이 도총섭(都摠攝)이 되어 8도의 승군(僧軍)을 동원하였고, 이들의 뒷바라지를 위하여 전부터 있던 망월사(望月寺), 옥정사(玉井寺) 외에 개원(開元), 한흥(漢興), 국청(國淸), 장경(長慶), 천주(天柱), 동림(東林), 동단(東壇)의 7사(寺)가 창건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장경사만이 남아 있다.
ㅇ남한산성의 수비는 처음에는 총융청에서 맡았다가 성이 완성되자 수어청이 따로 설치되었고, 여기에는 전(前), 좌, 중, 우, 후의 5영(營)이 소속되었는데, 전영장(前營將)은 남장대(南將臺)에, 중영장은 북장대에, 후영장과 좌영장은 동장대에, 우영장은 서장대에 진(陣)을 쳤다. 현재는 서장대(守禦將臺라고도 함) 하나만이 남아 있다. 장대는 높은 섬돌 위에 2층으로 지었는데, 아래층은 정면 5칸, 측면 3칸이고, 위층은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지붕은 팔작(八作)이며 겹처마에 위층은 판문(板門)으로 막았으나 아래층은 틔어 있다. 성문은 홍예문(虹霓門) 위에 성가퀴를 두르고 단층(單層) 문루(門樓)를 위엄있게 올려 세웠다.
ㅇ수어사(守禦使) 이시백(李時白)이 축성 뒤에 처음으로 유사시에 대비할 기동훈련의 실시를 건의하여, 1636년(인조 14)에 1만 2,700명을 동원하여 훈련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그 해 12월에 막상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여러 가지 여건으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성문을 열어 화의(和議)하고 말았다. 결국 막대한 비용과 노력을 들여서 쌓은 성이었으나 제구실을 하지 못한 뼈아픈 역사(役事)였다.
ㅇ남한산성은 한때 백제의 수도 하남위례성으로 추정되기도 하여 백제의 시조 온조왕(溫祚王)이 세운 성으로 알려졌으나, 신라 시대에 쌓은 주장성이라는 설도 있다. 조선 시대에 인조와 숙종 때에 각종 시설물을 세우고 성을 증축하여 오늘날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으나 일제 강점기 직전인 1907년에 일본군에 의해 다수의 건물이 훼손되기도 하였다.
ㅇ남한산성 성곽의 전체 길이는 11.76km이고 면적은 2.3㎢이다. 내부가 넓고 평탄하여 80여군데가 넘는 우물과 45개의 연못이 있을 정도로 물이 풍부하여 가지고 있는 식량이 충분하다면 수만명의 병력도 수용이 가능할 정도이다.
ㅁ 남한산성 행궁
ㅇ행궁이란 임금이 궁궐을 떠나 도성밖으로 행차하는 경우에 임시로 거처하는 곳을 말하는데, 남한산성 행궁은 전쟁이나 내란등 유사시 후방의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한양 도성의 궁궐을 대신할 피난처로 사용하기 위하여 1626년 건립되었다.
ㅇ인조 14년 1636년 병자호란이 발생하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여 47일간 싸웠다. 이후에도 숙종, 영조, 정조, 철종, 고종이 여주, 이천등의 능행길에 머물러 이용하였다. 남한산성 행궁은 우리나라 행궁중에서 종묘[좌전]와 사직[우실]을 두고있는 유일한 행궁으로 유사시 임시수도의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곳이다.
첫댓글 무더운 여름 장마철에 회원님들 건강하게 잘 지내시는지요~?
역사의 얼이 새겨있는 금번 남한산성 산행은 더위에 지친 산우님들의 기분을 전환하는 좋은 기회가되리라
생각됩니다. 후텁지근한 도심의 아스팔트 열기를 떠나서 맑은 공기와 함께하는 산행에 회원님들과 함께 할 수 있기를
기대하며, 많은 흔적들 남겨주세요~~^^_^^
그날 뵈요!!
박경규님이 이번 남한산성 트레킹에 첫 참여를 하십니다. 감사하고 축하할 일입니다.
곽용완님도 7월 정기산행에 참가하십니다.
둥산참석합니다
전수동 전회장님, 이수영님이 7월 산행에 참석하십니다. 감사합니다.
저는 아직 참가가 불확실합니다~~~빠른시일내 결정토록 하겠습니다~~~
우째 뭔 일이 있나봐요??
@유인걸 예~~참석하겠습니다~~
@압록강 그리유! 감사합니다! 낼 봅시다!
김영근 전회장님, 한덕규님이 산행에 참여하십니다. 시골에 머물고 있는 정낙훈님은 7월 산행에 참여코자 노력하시겠다고 전해오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박동원님께서 7월 남한산성 산행에 참여하십니다. 감사합니다.
정낙훈,고귀종,유병훈,이태진님들께서 7월 산행에 참여 참여하십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