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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2 - 금관가야 왕 오진(응신) 야마토(대화 大和) 왜국 왕조를 세우다!
712년 고사기와 720년 일본서기에 진무(神武 신무)는 규슈 미야자키현의 휴가(日向)국을
떠나 가와치국(오사카)에 입성후 토착세력을 정복하고, 기원전 660년 가시하라노미야
(橿原宮) 에서 천황(일왕) 으로 즉위했으며... 메이지 유신후 2월 11일이 일본 건국일로
간주되지만, 나로서는 진무는 10대 스진왕과 동일 인물이니 일본 건국을 천년 정도는
소급한 것으로 보는데.... 하기사 고조선도 2천년을 올려 잡았으니 피장파장인가 합니다?
오사카대 고하마 모토쓰구 교수는 1949년 부터 수만명의 유골을 조사했으니 원주민인
조몬인과 청동기시대인 한반도 도래인의 비율이 “1: 8.6” 이라고 밝혔으니 일본인
의 피 속에 원주민인 “조몬인의 비율은 겨우 10%” 라는 얘기인데, 이는 조몬인들이
신석기문화로 벼농사를 모르니 생산력이 극히 낮은지라 인구가 매우 적었기 때문
으로 원시시대에 7만 6천명 정도이던 일본 인구는 7세기에는 540만명으로 급증 합니다.
(1) 스진은 가야인 그리고 오진은 백제인?
진무와 10대 스진은 같은 사람이며 2~9대 왕은 연대를 올리기 위한 가공인물이니, 규슈
왜국을 건설한 10대 스진왕(崇神 숭신)의 후손으로 15대 오진왕(應神 응신천황) 에
이르러 규슈를 출발해 세토나이카이를 거쳐 오오사카에 상륙해 나가스네히코와 싸워
굴복시킨 후에, 동쪽 가시하라에 야마토(대화 大和) 조정을 열었는데.... 고 최인호씨는
파형동기가 출토된 김해 대성동고분 13호분의 주인이 가야~왜왕인 스진이라고 말합니다.
57년에 후한 광무제가 왜노(倭奴)국의 왕에게 금인을 하사했다는 왜노국은 성읍국가에 불과하고,
238년에서 247년 사이에 중국 조씨의 위나라에 사신을 파견했던 여왕 히미코가 다스리던
야마대국(邪馬臺國) 은 규슈지방의 부족국가 연맹국으로 보니.... 통일왕조로는 초대 진무왕 부터
9대 가이카왕 까지는 가공 인물로 10대 스진(崇神 숭신)을 사실상 왜 왕조 창시자로 보기도 합니다.
이때 오진(應神)을 스진(崇神)의 후손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다른 학설로는 혈연관계
가 없는 다른 씨족으로 보기도 하는데.... 왜(倭)는 3세기에 편찬된 중국의 삼국지 위지
(魏志) 왜인전에 처음 나오며, 한사군(漢四郡)의 대방으로 부터 한반도의 해안지방을
거쳐 대마도와 일기도를 지나 큐슈 중부의 야마대국에 이르는 노정이 자세히 적혀있습니다.
15대 오진(應神)을 10대 스진(崇神)의 후손으로 보는 경우에는 일본 주류쪽에서는 물론 일본
본토 태생으로 보지만.... 그외에는 다시 두 왕을 가야계, 백제계, 부여계(에가미 나미오)
로 보는 3가지 학설이 있으며, 전혀 다른 혈족으로 보는 경우에는 스진(숭신)을
가야계로, 오진(응신)을 백제계로 보는데 아예 15대 오진을 첫 천황(일왕)으로 보기도 합니다.
오진은 270년부터 310년까지 즉위했다지만 실존 인물로서는, 일본서기 저자가 신공황후를
히미코와 동일 인물로 설정하기 이해 연대를 2갑자 120년을 올린지라 120년을
내리면 390년부터 430년까지 즉위한 것으로 보는데.... 오진(應神)은 중국식 시호이며
일본식 시호는 호무다와케노미코토(譽田別尊) 이니, 그 전에 김해 금관가야 왕인
스진(숭신)이 규슈로 건너가서 왜 소국을 통합하니 “왜와 가야 연합 왕” 이라고 여겨집니다.
스진의 후손인 오진(혹은 백제인 오진)이 390년에 왜국 왕에 오른후 신묘년인 391년에 왜군을
이끌고 한반도로 나와 김해가야 및 아라가야와 연합해서는 393년에 내물왕의 신라 수도
서라벌을 포위했으니, 이 때는 신라가 자력으로 격퇴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후 일본에서
증원군이 와서 399년 왜군과 가야 연합군은 재차 서라벌을 포위해 함락 직전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자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내려 보낸 5만 대군에 왜군은 패퇴해 김해가야 종발성이 함락되자 왜군과
가야인들은 일본으로 후퇴하는데... 고구려 원군이 없었다면 신라는 망하고 가야~왜 연합왕국의 땅
이 되었을 것인데, 왜군은 일본에서 재정비 한후 404년에 백제의 도움으로 고구려 황해도 땅을 공격
했으나 광개토대왕에게 패한 후에는 오사카에 상륙해서 “야마토(大和) 왜국 왕조”를 연 것으로 봅니다.
한국외대 홍윤기 교수는 오진을 백제계로 보는데, 오진(應神, 4세기경) 천황(일왕)과 그의 아들 닌토쿠
(仁德, 5세기)왕 부자에 의해서 고대 일본의 가와우치왕조(河內王朝) 가 세워졌으니 이들 정복왕은
백제인이었다 (井上光貞‘日本國家の 岩源’巖波書店 1967, 水野裕‘日本古代國家の 形成’講談社 1978).
백제의 정복왕들에 의해 성립된 가와우치 왕조는 나라현이 아닌 오사카 지방을 중심무대로 삼았습니다.
(2) 닌토쿠 왕실로 건너온 백제신(百濟神)
백제인 왕가가 형성된 시기로 추정되는 4~ 5세기‘난바(오사카)’의‘구다라스(百濟洲)’시대를 살펴보면
백제인들이 가야인을 제치고 일본의 지배 세력으로 등장한 것은 오진(應神)왕 때 부터 라는게
통설이니.... 오진천황(일왕) 전신 초상화를 보면, 도포를 입은 천황(일왕)이 머리에 남바위를
쓰고 있는데, 남바위는 가죽을 댄 기다란 모자로 우리 조상들이 겨울철 방한모로 착용해 왔습니다.
‘일본서기’는 백제의 학자 왕인이 15대 오진왕(應神)의 초청을 받고 왜 왕실로 건너왔다
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왕인은 제4 왕자 오사사기 왕자에게 글을 가르쳤으니...
오진왕이 서거한 뒤 3년째 되던 해에는 왕인이 오사사기 왕자를 “닌토쿠천황(일왕)”
지위에 올려놓았다는데 이 같은 사실은 805년에 씌어진 고대 문헌에 기록돼 있습니다.
“왕인이 어대에 와카(和歌) ‘나니와쓰노우타(難波津歌)’를 지어 닌토쿠 천황을 왕위에 천거하였다.”
(紀貫之 ‘古今集’) 오사카의 고대 나루터 이름인 ‘나니와쓰(難波)’는 왕인이 지은 와카에서 유래
했다는데, 이 지명은 현재 오사카 중심 번화가인 ‘나니와(難波 난바)’ 로 그대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또 “닌토쿠 천황(일왕) 이 모국 백제로 부터 백제신(百濟神) 의 신주를 왕실로 모셔왔다”
(‘風土記’ 8~10C 편찬)는 점인데 “백제신 신주를 모셔왔다” 는건 조상신을 숭경하는
종묘사직 신앙행위 라고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며, 이는 곧 닌토쿠왕이 백제인임을
입증하니 닌토쿠왕과 그의 부왕 오진왕이 백제인이라고 주장한 사학자는 한둘이 아닙니다.
와세다대 미즈노 유 교수는 “오진 천황과 아들 닌토쿠 천황은 구다라국(백제국) 왕가로 부터 건너와
일본 정복왕조를 이루었다”(1978)고 단정한 바 있으며, 도쿄대 사학과 이노우에 미쓰사다 교수
도 이보다 앞서“백제 사신으로 부터 칠지도(七支刀)를 전해 받은 왜왕 오진 천황은 구다라(백제)
왕족이며, 천황씨(天皇氏) 자체가 조선으로 부터 건너온 일본 이주자 였다” (1960) 고 밝혔습니다.
일본 고대사학자 이시와타리 신이치로의 저서‘구다라에서 건너온 오진 천황’(2001) 또한 일본
사학계의 이목을 집중시켰으니... 저자는 이 책에서 오사카부 하비키노시에 있는 “오진릉
(應神陵)에 매장된 시신은 5세기 후반에 건너온 구다라의 곤지왕자(昆支王子)이니 그는
5세기말에 일본에서 구다라계 왕조(百濟系王朝 백제계왕조) 를 수립했다”고 주장 했습니다.
(3) 최초의 백제신 사당 오사카의‘미시마카모신사(三島鴨神社)
백제신을 왕실로 모셔온 닌토쿠왕은 왕도에 사당을 지었으니 오사카‘미시마카모
신사(三島鴨神社)’ 의 마쓰이 나리후사(松井位幾) 궁사는“이곳에서는 5세기
닌토쿠(仁德) 어대 때, 백제에서 일본 왕실로 건너오신 백제대신(百濟大神)
오야마쓰미노카미 (大山積神) 신주의 제사를 모시고 있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조상 대대로 백제신 제사를 모셔왔다는 마쓰이 나리후사 궁사는 이 고장 오사카 요도가와
(淀川) 상류 동쪽에서 사당을 지켜온 백제인 후손 이구치 아키오(伊口明生) 등
열여섯 가문 대표들과 함께 5년의 노력 끝에 2006년 사당 역사에 관한 책을
펴냈으니, 이 책 ‘三島鴨神社史(삼도압신사)’의 서두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습니다.
“닌토쿠 천황은 가와치(河內·오사카 옛 지명)에‘만다 큰제방’을 쌓으시는 동시에 요도가와
강변 터전을 지켜주시는 신(神)으로서 백제로 부터 오야마쓰미노카미를 400년대에
이 고장 미시마(御島·三島 의 이두식 한자어와 같은 의미) 로 모셨습니다.
왕도 난바 (難波) 를 지켜 주시는 수호신으로서 이 신사를 계속해서 모셔 왔습니다.”
마쓰이 나리후사 궁사는 일본인 중에도 이곳이 일본 왕실로 건너온 백제대신의 사당
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으며... 열심히 참배하는 신자도 많고 개중에는
2007년 10월 충남 부여에서 열린‘백제문화제’에 다녀온 분들도 있으며,
해마다 조상의 고국 백제땅 부여, 공주 등을 찾아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닌토쿠왕 시대에 백제로 부터 건너온 백제신을 ‘미시마카모신사(三島鴨神社史)’에서
제사지내게 된 연유를 일본 고대사 문헌‘風土記(풍토기)’는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御嶋 坐神御名 大山積神 一名和多志大神也 是神者 所顯難波
高津宮御宇天皇御世 此神者百濟國渡來坐 而津國御嶋坐’
‘미시마에 계신 신의 어명(御名)은 오야마쓰미노카미다. 일명 와다시노오카미(和多志大神)이시다.
이 신은 나니와의 다카쓰노미야(高津宮) 궁에 천황(닌토쿠왕)이 계시던 어세(御世)에 나타나셨다.
이 신께서는 구다라국(百濟國 백제국) 으로 부터 건너 오셔서 나니와쓰의 미시마에 계시게 되었다.’
한편 닌토쿠왕 때 일본 왕실로 건너온 백제신의 이름이 ‘和多志(화다지)’인데, 무령왕의 왕성이
‘화(和)’씨이며, 일본 제50대 간무왕의 생모가 백제 왕족인‘화신립(和新笠 야마토
니이가사)’ 황태후인 것은 백제 왕가의 성(姓)이 백제신의 성과 일맥상통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미시마카모신사 유서략기’에는 “닌토쿠 천황 시대에 미시마에 살던 왕족들이 이 고장
다카쓰기(高槻)의 벤텐산(辯天山) 에 3대에 걸친 고분을 만들었는데, 그때 모노노베
가문의 가라쿠니무라지(韓國連·한국 귀족 씨족) 들이 협력했다” 는 내용도 실려 있습니다.
(4) 칠지도(七支刀) 와 인물화상경!
일본 왕실이 백제인에 의해 형성됐다는 문헌 기록 외에도 고고학적 자료로는 백제
‘칠지도(七支刀)’ 와 ‘인물화상경(人物畵像鏡)’ 의 금석문이 있으니, 백제 제20대
비유왕(毗有王·427~455 재위)과 세자(개로왕)가 왜를 다스리던 백제 왕족 후왕
(侯王) 오진왕(應神·4~ 5C초)에게 429년에 보낸 백제 왕실의 ‘칠지도’ 가 있습니다.
‘일본서기’는 왜의 제15대‘오진 천황’이 270~310년까지 재위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2갑자
120년을 내리면 오진왕은 5세기경의 백제인이 맞고,‘백제 비유왕이 하사한 칠지도
(74.9cm 길이)를 받은 백제의 후왕(侯王)이다’라는 것이 칠지도(일본 나라현 덴리시 이소노카미
신궁(石上神宮) 소장, 일본 국보)에 음각으로 새겨져 있으니 백제 왕실에서 칼에 새긴 글입니다.
‘泰和四年五月十一日丙午 正陽造百練鐵七支刀 以?百兵 宜供供候王 □□□□作’(칼의 앞면)
‘世以來未有此刀 百慈王世子寄生聖音 故爲倭王旨造 傳示後世’(칼의 뒷면)
우리말로 옮기면 ‘태화 4년(서기 429년) 5월11일 병오날 정양 때에 무수히 담금질한
쇠로 칠지도를 만들어 모든 적병을 물리치도록 후왕에게 주노라’(앞면), ‘선대
이래로 아직 볼 수 없었던 이 칼을 백제왕(비유왕) 및 세자(개로왕)는 성스러운
말씀으로 왜왕을 위해 만들었도다. 후세에 까지 잘 전해서 보이도록 하라’(뒷면) 입니다.
우에다 마사키 교수는 이 칼을 3번이나 조사하고 쓴 연구론에서 “그 당시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백제왕이 후왕인 왜왕에게 보내줬음을 밝힌 것이며... 칼에 새긴 글투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전하는 하행문서(下行文書) 형식의 명문이다”라고 단정했으니, 백제 비유왕이 왜나라에 건너가
왜국을 지배하던 백제의 후왕에게 왜나라를 잘 지켜 백제의 속령으로 번창할 것을 명한 것입니다.
도쿄대 사학과 이노우에 미쓰사다 교수도, 그 당시 백제 사신으로 부터 칠지도를 전해 받은 오진
천황은 백제 왕족이며... “천황씨(天皇氏) 자체가 조선으로부터 건너온 일본 이주자였기
때문에 조선에서 건너온 많은 사람을 간무 천황이 조정에 등용시킨 것”이라고 밝힌 바 있으며,
고대사 학자 이시와타리 신이치로의 저서 “구다라에서 건너온 오진 천황(2001)” 책도 있습니다.
저자 이시와타리 신이치로는 이 책에서 오사카부 히비키노시에 있는 오진릉(應神陵)
에 매장된 시신은 5세기말에 구다라(백제)에서 건너온 곤지(昆支) 왕자이며
5세기 말에 일본에서 구다라(백제) 왕조를 수립했다고 주장했는데..... 물론
일본 주류 사학계에서는 일본 천황이 백제인이라는 사실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게이타이왕(継体天皇 게체천황) 은 제26대 천황으로 507년부터 531년까지 재위했는데
‘신찬성씨록’이 백제왕족이라고 명기한 비타쓰왕의 할아버지로 오진(응신)의 5대손
으로 방계인지라 극적으로 왕위를 이었으니... 오진의 아들 닌토쿠가 16대 왕에 오른후
17대에서 25대까지 10명의 후손이 왕위를 잇다가 25대 부레츠왕이 후사없이 죽자 일본
왜왕조 창시자라 할수 있는 15대 오진의 5대손으로 방계 게이타이가 왕에 오른 것입니다.
패전 후인 1953년, 미즈노 유우(水野祐)는 3왕조 교체설(三王朝交替説)을 제기하여,
일본 황실이 기존의 '만세일계' 의 신화와 같이 하나의 혈통이 끊어지지
않고 유지된 것이 아니라.... 세번의 왕조 교체가 있었고 최종적으로 게이타이
천황(일왕)을 초대로 하는 신왕조가 바로 현 황실의 직계라고 주장 하였습니다.
26대 게이타이왕의 휘는 오호도(オホド) 로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오오도노오키미(男大迹王)
라 기록되어 있으며, 스다 하치만 신사(隅田八幡神社)에 소장된 인물화상경에 나오는 孚弟王
(男弟王?)이 게이타이왕을 가리킨다는 설이 있는데 히코후토노미코토(彦太尊) 라고도 합니다.
(5) 일본서기에 적힌 도래인(渡來人: 한반도에서의 이주민)
1) 서기 398년 고구려, 백제, 임나 및 신라사람 등 한인(韓人)들을 동원하여
연못을 판후 한인지(韓人池) 라고 불렀다.
2) 서기 400년 고구려군의 남정(南征)으로, 신라로 쳐들어 갔던
가야와 왜군의 연합군이 패퇴하므로 많은 가야인들이 왜국으로 망명했다.
3) 서기 403년 궁월군(弓月君)이 백제로 부터 도착했는데 120현의 사람들이 신라에 의해 길이 막혀
가라에 머물고 있다고 하므로... 정예 병사를 보내 405년에 왜국으로 데려왔으니 후일 하타(秦)
씨족의 시조가 되었는데, 우두머리는 미야쯔코(國造)로 양잠, 직조(비단), 야금등 기술자 집단이었다.
7세기 초에 후손인 하타노 카와카쓰가 교토에 고류지(광륭사 廣隆寺) 를 건축했는데...
절에 있는 목제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 : 백제에서 보내왔다는 설이 있다) 이 일본
국보 제1호로 우리나라의 금동 미륵보살 반가사유상과 그 모습이 너무나도 흡사합니다.
4) 서기 404년 백제왕이 아직기와 말 1쌍을 보내 왔으므로 태자의 스승으로 삼았는데
아지키노 후히토의 조상이 되었다. 이어 사신을 보내 왕인(王仁)을 데려오게
하니 논어 10권과 천자문 1권을 가져왔는데 후미노오비토(文首 문수)의 조상이 되었다
5) 서기 409년에 아찌노 오미(阿知使主)가 17현의 사람들을
거느리고 이주해 왔으니 야마토노 아야노 아타헤(倭漢直)의 시조가 되었다.
6) 이마키(今來 : 새로온 사람) : 서기 463년 엣날에 이주해온 간인지리가 백제에는 자기
보다 훌륭한 장인이 많다고 조정에 고한다. 오토키미를 보내 백제로 부터 많은
장인을 데려 왔는데.... 옛날에 온 사람과 구분하기 위해 이마키(今來 금래)라고 불렀다.
7) 513년 백재가 단양니 라는 오경박사를 보내왔는데 516년에 고안무로 교체하여 보내왔다.
의박사, 와박사, 역박사등 이런 학자와 장인은 여러차례 도래했으며 왜국은 군사(554년등)
와 무기 및 말등을 보내 백제를 도왔다. 예) 서기 554년 위덕왕이 전투중 신라군에 포위
되었을 때 쓰쿠시의 구니노 미야쯔코의 할솜씨로 포위를 풀고 샛길로 탈출하였다.
8) 663년 백제 멸망후 무수히 많은 백제인들이 패주하는 왜군을 따라 일본으로 이주하였다.
(6) 중국 남조에 조공한 왜의 5왕
5호 16국 시대에 강남의 남조 동진을 이은 중국의 송(劉宋 유송)서 이만전(夷蠻傳)과
남제서 및 양서에 왜국의 다섯왕이 조공을 바쳤기로 책봉했다는 기사가 나오는
데... 그 계보는 산(讚 찬)- 친(珍 진)- 사이( 濟 제)- 고오( 興 흥)- 부( 武 무) 입니다.
413년과 421년, 425년과 430년에 왱국왕 찬(讚 오오진이나 닌토쿠 천황으로 본다) 이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으며, 438년에 찬의 뒤를 친(珍 진)이 송에 사신을 보내 자신을
使持節都督(사지절도독) 倭百濟新羅任那秦韓慕韓(왜, 백제, 신라, 임나, 진한, 모한)
六國諸軍事 (육국제군사) 安東大將軍 (안동대장군) 倭國王 (왜국왕)으로 자칭합니다.
왜국왕이 이를 인정해 줄 것을 송에게 요청하나 거절당하고 안동장군 왜국왕의 직위만 수여
했는데 이게 무슨 뜻이냐면 한반도 남부 지역이 자신의 속국이라고 주장한 것이니 당시
백제 또한 남조와 교류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정을 알고 있는 송이 거부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후 3번째 왕 제(濟) 는 443년 송에 사신을 보내 안동대장군 왜국왕의 지위를 받았으며 이후
451년 사지절 도독 왜·신라·임나·가라 진한·모한 육국제군사 (使持節都督倭新羅任那
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 에 임명되고, 그의 신하 23인은 군(軍)과 군(郡)을 제수받았습니다.
앞에서 2번째 왜왕 진(珍)이 요구했던 이름과 비슷하지만 백제 하나만 빠진 것인데.... 이미 백제는
중국 남조와 황해 건너 조공하고 있었고 425년에 사지절 도독 진동대장군 백제 제군사 직위를
받았기 때문에, 송에서도 일본이 주장한 칭호가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신라와 가야
등은 중국과 거리가 너무 멀어 교류가 드물었기에 왜왕의 관할 지역을 잘 몰랐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후 4번째 고오( 興 흥)는 462년 송에 사신을 보내 직위를 승계받았으며 477년 사망하고
동생인 왜왕 무(武)가 왕위를 이었는데, 5번째 왜왕인 무(武 유랴쿠천황)는 478년에 조공
하면서 사지절 도독 왜·백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 칠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국왕
(使持節都督倭百濟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七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國王) 이라고 자칭 했습니다.
개부의동삼사를 자칭하고 인정해 줄 것을 송에 요청했지만 이번에도 백제는 빠지고 육국제군사
로 수정해서 받게 되는데 이 역시 중국과 가까운 서해안에 영토가 없는 신라나 가야는
중국과 교류가 거의 없는 시절이었기 때문에 중국 측이 잘 몰라서, 일단 자기들도 잘 알고
확실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독립국 백제는 뺐고, 신라나 가야는 일본의 주장대로 수락한 것입니다.
가야는 왜왕이 사신을 보낸 478년 다음해인 479년에 대가야의 하지왕이 처음으로 중국에 사절단을
보내기 때문에 적어도 가야가 왜국의 속국이 아니라는 것을 479년에는 중국도 알게 되었을 것
으로 보는데 중국 사서에 478년에 왜왕 무가 보낸 국서가 실려있는데 양이 너무 많은지라 줄입니다.
"봉해진 나라가 먼 곳에 번국을 이루고 있는데 조상부터 갑옷과 투구를 걸치고는 산천을 누비느라
편안히 거처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동으로 모인(毛人)55국을 정벌하였고 서로는 중이(衆夷) 66국
을 복종시켰으며 바다 건너 해북(海北) 95국을 평정하니, 왕도는 화락하고 편안하며 땅을 넓히고
왕기를 아득히 크게 하였으며, 여러 대에 걸쳐 조종(朝宗) 하여 해마다 어긋나는 일이 없었습니다.“
“ 길이 백제를 거쳐니 큰 배를 준비했는데 구려(句驪)가 무도하여 집어삼키려 하고, 변방을 노략질하며
살육을 그치지 않으니 지체되어 좋은 바람을 놓치게 됩니다. 신의 돌아가신 아버지 제(濟)가 원수가
천로(天路)를 막는 것에 분노해 활 쏘는 병사 100만이 의로운 소리에 감격해 일어나고자 했으나
아버지와 형을 잃으니 수성(垂成)의 공을 이루고자 하였으나 마지막 한 삼태기를 얻지 못하였습니다.”
“상중에 있어 병사를 움직이지 못하고 쉬고 있었으므로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지금에 이르러 갑옷과
무기를 갖추어 부형의 뜻을 펼치고자 하니, 의롭고 용맹스러운 병사들이 문무로 공을 이루어
번쩍이는 칼날이 눈앞에 닥쳐도 또한 눈을 딴 곳으로 돌리지 않습니다. 만약 황제의 세상을 뒤
덮는 덕으로써 이 강적을 무찔러 온갖 어려움을 극복한다면, 이전의 공을 바꾸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삼가 스스로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를 가수(假授)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모두 각각
(적당한 관작을) 가수하여, 충절을 권유하였습니다." 라고 하였다. 조하여 왜왕 무(武)
를 사지절 도독 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육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왕에 제수하였다.
장수왕은 북위에서 도독요해제군사 정동장군 중랑장 고구려왕에 책봉 되었고, 남조인
동진에서 사지절 도독 정동장군 낙랑왕에 책봉된후 다음 왕조인 송나라에서
정동대장군으로 승급되었으며... 590년 영양왕은 수나라에서 상개부의동삼사
요동군공, 다음해 고구려왕에 책봉되고 동생 영류왕까지 모두 중국의 책봉을 받습니다.
한편 왜국 왕조에 의해 대왕(大王)으로 불리우던 백제는 동성왕때 중국 남제국에 청하여
왕자와 신하에게 주기 위해 왕의 칭호 5명, 제후 칭호 3명, 태수칭호 7명을 하사 받습니다.
다섯명의 왜왕은 중국에 여러차례 거듭해서 사신을 보내 신라, 임나, 진한, 마한왕,
안동대장군을 끈질기게 요구해 마침내 관철하는데.... 문제는 왜국왕들이
자신들의 나라도 아닌 한반도 여러나라의 관직과 칭호를 왜 중국에 요청했느냐?
김해 금관가야가 규슈에 진출해 가야-왜 연합왕국을 세우고 391년에 왜군을 이끌고 한반도에
상륙해 가야군과 연합해 399년에 서라벌을 포위하니 함락 직전에 신라 내물왕이 애걸한
결과 고구려군 5만이 남하해 김해 종발성까지 하락되자 왜군과 김해가야는 일본으로 도주
한지라 그 후손들이 세운 왜국은 조상들이 한반도인이라 연고권(?)을 주장한 것으로 보입니다.
다시 말해서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남침으로 백제가 거의 멸망할 지경에 이르자 왜국에서는
장차 모국 백제가 망한다면 이를 부흥하기 위해 왜군이 한반도로 진출해야 하는데,
그때 한반도의 가야와 신라 및 백제 땅에서 현지인들을 모병 내지 징집해 고구려군과
싸우기 위한 명분으로 권한(직위)이 필요한지라..... 계속해서 중국에 요구한 것으로 봅니다.
477년 문주왕이 해씨들에게 살해되고 479년에는 삼근왕이 진씨들에게 살해되자 왜국 웅략천황
(일왕)은 일본에서 태어나서 자란 열다섯살 동성의 머리를 쓰담으며 격려한후, 왜군 500명의
호위를 붙여 한반도로 내 보내 백제왕위를 잇게하니.... 동성대왕 때에 백제가 안정을 되찾자
고구려에 의해 망할 염려가 없어지니 왜국은 중국에 더 이상 저런 직위를 요구하지 않게 됩니다.
그 전인 461년 백제 개로왕은 고구려의 침공을 염려해 동생 곤지에게 임신한 후궁을 내어주며
왜국으로 도피시키는데 바다를 건너는 중에 후궁은 태기를 느껴 규슈 가라쓰 가카라시마
동굴에서 왕자를 출산하니..... 섬에서 태어났다고 섬왕, 시마(사마) 로 부르니 무령왕 입니다.
곤지가 왜국에서 16년동안 살다가 귀국할때 장남 무령왕을 대동했으나 진씨들은 궂이 번거롭게도
멀리 일본에 살고있는 곤지의 차남인 어린 동성을 왕으로 세운 것인데, 남제에서 "사지절도독
백제제군사 진동대장군 백제왕" 에 봉해졌지만 501년에 위사좌평에서 지방의 가림성주로 좌천
된 백가가 보낸 자객에게 살해되자... 이부형인 무령왕이 백제 왕위에 오르는데 1145년 삼국사기
는 무령을 동성왕의 차남으로 기록했고 720년 일본서기는 형으로 기록했으니 어느 기록이 맞을까요?
1971년 충남 공주시 에서 한국 고고학계를 뒤흔드는 일대 사건이 일어나니 송산리 고분 에서
벽돌 무덤을 발견했는데, 지석에는 글자들이 새겨져 있었으니 462년에 태어나 523년에
죽었고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 (寧東大將軍 百濟 斯麻王)” 이라!!! 사마 斯麻 는
백제 25대 무령왕의 본명이고 영동대장군은 무령왕이 521년에 중국 양나라의 임금 무제로
부터 책봉받은 관직이라 무령왕의 무덤이 확실한 것이니 일본서기의 기록이 정확한 것입니다!
(7) 인물화상경(人物畵像鏡)의 계미년 수수께끼
일본 국보가 된 청동 거울인‘인물화상경’은 503년에 백제 제25대 무령왕이 직접 제작을 지휘해 완성한
다음, 왜나라 왕실의 친동생(男大迹, 오호도 왕자, 훗날 게이타이왕 繼體王)에게 보내준 것이니 지름
19.8cm 로 둥글게 만든 청동거울에는 말을 탄 백제왕이며 신하들의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어
인물화상경이라고 통칭되는데, 일본 와카야마현 하시모토시‘스다하치만신사’에서 보존하고 있습니다.
스다하치만 신사의 데라모토 요시유키 궁사는 육중한 금고 깊숙이 들어있는 ‘인물화상경
(人物畵像鏡)’ 에 대해 “이 거울은 503년 백제 무령왕께서 일본 왕실로 보내주신 겁니다”
라고 진지하게 말하는데, 일본 학자들은 거울이 백제로 부터 건너온 사실을 부인하기
위해 ‘연대 조작’ 등으로 역사를 왜곡해왔는데 48개의 한자어로 된 명문(銘文)이 있습니다.
‘癸未年八月日十大王年男弟王在意柴沙加宮時斯麻念長壽遺開中費直
穢人今州利二人等取白上銅二百旱作此鏡’
‘서기 503년(癸未年) 8월10일 대왕(백제 무령왕) 시대에, 오시사카궁에 있는 오호도 왕자에게,
무령왕(斯麻 사마는 무령왕의 휘)께서 아우의 장수를 바라시면서 개중비직과 예인
금주리 등 2인을 파견하여 거울을 보내시는바 거울은 좋은 구리쇠 200한(旱)으로 만들었노라.’
동생을 향한 무령왕의 애정이 담겨 있지만 일본 사학자들은 명문에 대해 다른 해석을 내놓았으니
일본 천황이 무령왕의 친동생이라는 사실을 부정하기 위해 60년에 한번 돌아오는 간지(干支)
연대를 왜곡했으니, 거울 제작 연대로 새겨진 ‘계미년’을 서기 263과 443년으로 몰고 간 것입니다.
인물화상경을 스다하치만 신사의 창고에서 최초로 발견한 이는 사학자 다카하시 겐지 박사
인데... 최초 발견자는 이 거울 명문에 나타나 있는 계미년이 서기 263년이라고
주장했으니 이에 대해 교토교육대 사학과 와다 아쓰무 교수는 다음과 같이 비판했습니다.
“다카하시설(說)은, 명문에 보이는 시마(斯麻 사마)를‘일본서기’의 ‘신공기(神功紀)’ 에 등장
하는 시마노스쿠네(斯麻宿) 와 연결 지으며 계미년에 대해 고증하는데 여기엔 무리가
있다.” ‘일본서기’ 에 근거해 일개 조신(朝臣)인 신하가 감히 청동거울을 만들어
왕자에게 하사할 수 없는 노릇이며 또 ‘신공기’는 가공의 조작된 것이라는 게 통설입니다.
(8) 게이타이천황(일왕)은 무령왕의 동생인가?
다카하시 박사에 의해 최초로 제기된‘계미년 263년설’외에 443년설은 미즈노 유 교수의
주장이고 503년설은 후쿠야마 도시오 교수의 주장인데, 미즈노 교수는‘ 서기
443년 8월, 윤공 천황(允恭天皇·412~453 재위)이 남동생(男弟)과 함께 황후(皇后)
의 오시사카궁(忍坂宮)에 있을 때, 사마(斯麻)가 장수를 염원해서…’ 라고 해석 했습니다.
후쿠야마 교수는‘서기 503년 8월 인현대왕(仁賢大王)의 시대, (왕자시대의) 게이타이왕
(男弟王)이 오시사카궁에 있을 때, 사마가…’라고 해석했는데 후쿠야마 교수는 ‘男弟王’
을 즉위 전의 게이타이왕으로 지목하고, 계미년을 503년으로 짚어내는 데까지는
정확했으나...... 그 시기를 백제 무령왕이 아닌 왜의 닌켄대왕 시대라고 곡해했습니다.
오호도(26대 게이타이왕)는 무령왕의 친동생이 맞는가? 게이타이왕은 백제 제24대 동성왕
(東成王·479~500 재위)의 제3왕자 인가? 왜국에서 태어난 동성왕은 이름이 무대(牟大)
여서, 왜나라에서 성장할 때 무대왕(牟大王 모대왕)으로도 불렸는데 동성왕은
백제 개로왕(蓋鹵王·455~474 재위) 의 제2 왕자 (동생?) 인 곤지(昆支) 왕자의 아들 입니다.
475년 백제 개로왕이 고구려 장수왕의 남침으로 죽자 첫아들 문주왕(文周王·475~476 재위)이
남쪽 웅진(공주)에서 왕위를 이었으며, 해씨들에게 암살된후 아들 삼근왕(三斤王·477~479
재위)이 왕위에 올랐는데, 왕이 진씨들에게 암살되자 일본에서 태어나서 자라고 있던 곤지
의 15살 아들이 왜군 500명의 호위를 받고 한반도로 나와 백제 왕위에 오르니 동성왕 입니다.
당시‘일본서기’에는‘25대 부레츠 천황(武烈王 무열왕·498~506 재위)이 서거했으나 후사가
없는지라 대신들이 서둘러 왕위 계승자를 찾던 중에 15대 오진(응신)왕의 5대손인
남대적(男大迹, 男弟, 오호도)을 왕위에 등극시켰다.’ 남대적은 우시왕(汚斯王)의
2 왕자이며, 우시(汚斯, うし)왕이 바로 동성(牟大)왕이라는 설도 있는데 믿기는 어렵습니다.
1971년 7월8일 충남 공주에서 왜국에서 태어나서 자란 백제 무령왕릉이 발굴됨에 따라 비로소
무령왕의 휘가‘인물화상경’에 새겨진‘시마(斯麻 사마)’임이 고고학적으로 확인됐으며.... 또한
무령왕과 왕비를 모신 2개 묘지석(墓誌石)은, 무령왕이 523년 5월3일에 승하했음을 입증했으니
계미년은 263년을 가리킨다고 했지만 무령왕릉이 발굴됨으로써 계미년은 503년임이 확인됐습니다.
(9) 게이타이왕과 무녕왕 그리고 인물화상경!
일본서기에는 528년 26대 게이타이왕(継体 계체천황) 때에 야마토의 천황군(백제계)이 규슈의
반정세력(구주왕조: 기야계) 과 츠쿠시(축자 : 큐슈북부) 에서 국가의 존망을 걸고 대격돌
하여 승리하는데.... 이 전쟁에서 패배한 사람들은 옛날에 오진왕(응신천황)을 따라 오사카로
가지 않고 규슈에 남았던 스진왕(숭신청황)의 후손인 구주왕조 세력을 뜻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25세 무열왕이 재위 8년 만에 후사 없이 갑자기 죽자 조정에서는 14세
중애(仲哀)왕의 5대손인 왜언(倭彦)왕을 다음 보위로 추대하기 위해 영접사와 호위무사
들을 보냈는데... 멀리서 오는 일행을 본 왜언왕은 자신을 잡으러 오는 병사들로 오인해
겁을 먹고는 산속으로 숨어버려 찾지를 못하자, 조정에서는 57세인 남대적(男大迹)
왕을 추대했으나 몇번을 사양하다가 즉위했는데 이가 게1이타이왕(繼體 계체) 왕 입니다.
일본서기에 “남대적왕은 응신왕 5세손이며 언주인왕(彦主人王)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11세 수인(垂仁)
왕의 7세손인 진원(振媛)이고 왕이 어릴 때 부왕이 세상을 떠나자 모친인 진원이 친정인 고향(高向)
으로 돌아가 양육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또한 당시 왜 왕실에서 방계혈통이었던 계체왕(게이타이)
은 성골(聖骨)인 24세 인현(仁賢) 왕의 3녀 수백향(手白香 다시라카) 황녀를 정실 왕후로 맞아들입니다.
이에 대해 일본 고대왕실의 족보인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에서는 26대 계체왕 때 왜
왕실의 성씨가 바뀌었다고 말하고 있으며, 사카모토 다로오(板本太郞) 등 일본학자들
은 응신(應神)왕의 뒤를 이어 왜왕이 된 16세 인덕(仁德)왕의 혈통이 25대 무열왕
때까지 이어지다가 그 계보가 끊겨진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으니 왜 그런 말들을 할까요?
일본 와카야마(和歌山)현 하시모토(橋本)시에 있는 스다하찌만(隅田八幡)신사에 보관되어 있는
일본 국보 제2호 ‘인물화상경(人物畵像鏡)’에는 9인의 인물상과 48자의 명문이 또렷하게
새겨져 있는데, 이 명문은 한·일 고대사의 비밀을 명백하게 밝혀주는 중요한 금석문
자료의 하나로 그 내용과 일본학계의 통설인 후쿠야마(福山)교수의 판독은 다음과 같습니다.
“계미년(503) 팔월 십일 대왕(백제 무녕왕)해에 오시사카(意紫沙加)궁에 있는 오오도
(男弟,南大迹=계체왕) 왕에게 사마(斯痲=무녕왕)가 장수를 염원하며,
개중비직과 예인 금주리 등 2인을 시켜 양질의 백동 200간으로 이 거울을 만들었노라.”
후쿠야마 교수는 일본서기에 기록된 계체왕의 휘(이름)인 남대적(南大迹)은 놀랍게도 남동생
이란 뜻인 남제(男弟)의 훈인 ‘오오도’와 같은 발음이라고 하면서, 일본학계에서도 남제왕은
26대 계체왕이 확실하다고 했으며 기타 사서에 ‘오오도’와 발음이 비슷한 ‘오호도’의 여러
한자표기로 다르게 기록되어 있는건 남동생(오오도)을 고의로 지우려고 한 것으로 보입니다.
후쿠야마 교수는 계미년을 A.D 503년으로 단정했으나 거울을 남동생에게 하사한 사마대왕이
누구인지 밝혀내지 못했는데 그러던중 사마(斯痲)는 1971년 공주에서 발견된 백제 무녕왕릉
의 지석에 있는 사마(斯痲)와 같은 이름이라는 것이 밝혀졌고, 이 거울은 무녕대왕이 즉위
다음해인 계미년(A.D 503년)에 남동생인 계체왕에게 하사한 일종의 신임장이었던 것입니다.
무녕왕은 자신의 연호를 쓰지 않고 간지기년(干支紀年)을 사용했다는 것이 무녕왕릉
의 지석과 인물화상경에 동시에 나타났으니.... 당시 거울(鏡)이나 칼(刀)을
하사함은 오늘날의 임명장이나 신임장과 같은 의미로 보아야 할 것이며, 거울이
만들어진 503년으로부터 4년 후인 507년 남제왕의 신상에 중요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1145년 삼국사기는 곤지가 개로왕의 둘째 아들이라 했지만 720년 일본서기는 개로왕의 둘째 동생
이라고 했는데, 무녕왕릉이 발굴되어 일본서기의 후기기록은 정확하다는 것이 밝혀졌으니 곤지
를 개로왕의 동생으로 보니, 송서에서는 개로왕이 먼저 하사한 작위를 인정해 달라고 부탁
하는 기록에서 나오는데 그리하여 송나라로 부터 정로장군 좌현왕의 작위를 유송에서 받았습니다.
이 시기에는 동북아 여러나라들은 왕족이나 지방 호족의 관직을 중국 황제에게 요구하는 경우도
흔했으니.... 왜 5왕이 자신들과 연합한 지방 호족등의 작위를 황제에게 요구한 경우를
들 수 있으,니 개로왕은 해씨들이 장악한 병권을 빼앗아 동생 곤지에게 넘겨준 것으로 보입니다.
(10) 게이타이왕 시기 왜국 안라회의(安羅會議) 참가
안라회의(安羅會議)는 529년 3월에 안라국(아라가야)이 주도해 백제, 가야, 신라, 왜가
참가하여 수 개월간 지속된 국제 회의로 .... 고당(高堂)을 새로 지어 그곳에서
회의를 했다고 고당회의(高堂會議) 라고 불리는데 일본서기에 매우 상세하게 나옵니다.
1) 신라와 백제 상황 : 신라와 백제는 장수왕 때부터 계속된 고구려의 남진 정책때문
에 나제동맹을 맺어 왕가끼리 혼인하고는 서로 싸움은 자제하는 상태였지만
그럼에도 가야 소국들을 먼저 차지하기 위해 물밑경쟁을 은밀히 벌이고 있었습니다.
2) 대가야 신라와 혼인 동맹 : 529년에 반파국(대가야)의 왕이었던 이뇌왕이 신라와
동맹을 위해 신라 김씨 왕실의 이찬 비조부의 누이동생과 결혼하니 왕후는
100여명의 종자를 데리고 왔는데... 반파국에서 신라와의 동맹을 알리기
위해 종자들을 가야 곳곳에 배치하자 이 종자들이 스파이 노릇을 해서 문제가 됩니다.
“가라왕(加羅王) 이 신라 왕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아이를 가졌다. 신라가 처음
여자를 보낼때 100인을 아울러 보내 그녀의 시종으로 삼았으므로, 받아들여
여러 현에 나누어 배치했는데 신라의 의관을 입도록 하였다. 탁순국왕 아리사등
은 그들이 복장을 바꾸어 입었다고 성을 내며 사자를 보내 돌아가게 하라고 시켰다.”
“신라는 크게 부끄러워 그녀를 도로 돌아오게 하려고 했다. 전에 그대가 장가드는 것을
받아들여 나는 즉시 혼인을 허락했으나, 지금 이미 이처럼 되었으니 왕녀를 돌려주길
바라오, 가라(加羅) 기부리지가(己富利知伽 이뇌왕)가 대답하였다. 부부로 짝지워
졌는데 어찌 다시 헤어질 수 있겠소? 또한 아이가 있으니 그를 버리면 어디로 가겠소?"
“결국 신라는 지나는 길에 도가(刀伽), 고파(古跛), 포나모라(布那牟羅)의 세개 성을 함락
시키고, 또한 북쪽 변경의 다섯 성을 함락시켰다”《일본서기》<계체기> 23년 3월조.
이걸 빌미로 신라는 탁순국을 공격해 탁순국의 북경 5개 성과 도가(刀伽)등 3개
성을 함락시켰으니 그 결과 탁기탄국은 멸망했고 탁순국은 영토의 반이 날라가 버립니다.
3) 안라회의 : 이 사건으로 인해 가야 연맹 내의 남부 가야는 맹주국 반파국(대가야)을
불신하게 되었고, 반파국 다음으로 강력한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던 안라국(安羅國)
을 중심으로 뭉치기 시작했으니.... 가야 제국(諸國)에 대한 백제, 신라 양국의 간섭
으로 부터 벗어나기 위해 안라국은 신라, 백제, 왜를 초청해 안라회의를 열게 됩니다.
경상남도 함안에서 충의공원을 건설하다 발견된 6세기 건설된 것으로 추정되는 대규모 건물지.
길이 48m, 폭 15m의 규모로 학자들은 이곳을 안라회의가 열린 고당(高堂)으로 추정합니다.
“ 이 달에 오구미 게누노 오미(近江 毛野臣)를 안라로 보내 조칙으로 신라에 권하여
남가라(금관국), 탁기탄을 다시 건립토록 했다. 백제는 장군군 윤귀(將軍君尹貴),
마나갑배(麻那甲背), 마로(麻鹵) 등을 보냈고 신라는 번국의 관가를 부순 것이
두려워 대인을 보내지 않고 부지내마례(夫智柰麻禮), 해내마례(奚柰麻禮) 등을 보냈다.”
“안라는 새로 고당(高堂)을 지어 칙사를 인도하여 올라가는데, 국주는 따라 올라갔고,
백제 사신 장군군(將軍君) 등은 당 아래에 있었다. 그 뒤로 몇달동안 두세번 당위에서
모의했는데 장군들은 뜰에 있음을 한스럽게 여겼다.”《일본서기》<계체기> 23년 3월조.
안라(아라가야)는 안라회의를 통해 신라에게 압박을 가해 탁기탄국을 재건하고,
안라의 국제적 지위를 올려 반파국(대가야)의 압력에서 자유로워지기를 원했다고 봅니다.
4) 안라회의 이후 : 하지만 백제와 신라는 회의를 안라 진출을 위한 발판으로 이용하려
했으니, 백제와 신라의 이 회의에 대한 관심도 차이도 위의 기사를 통해 알수
있는데.... 백제가 보낸 3인은 백제 관등 체계 제1위에 해당하는 좌평이었지만,
신라가 보낸 3인은 신라 17관위 체계 중 불과 제11위에 해당하는 내마급이었습니다.
게누노 오미는 친안라적 인물로 안라 독립을 유지할수 있는 외교적 지지를 바라며 초청한
왜국 사신이었지만 백제의 강경 외교 정책 때문에 실패로 돌아갔고... 이후 안라 가야
에서 쫒겨났으며 이후 안라국의 주도로 웅진회의가 열리기 전, 탁순국의 아리사등
의 요청을 받았으나 이에 응하지 않고 가야 내에서 자신의 세력을 늘리는 데 급급합니다.
안라회의 이후 백제는 군사력을 동원해 안라국의 걸탁성(乞卓城)을 빼앗아 안라국을 자신의
영향권에 복속시키는데 성공하는데... 이때 《일본서기》를 보면 고구려는 안장왕이 시해
당해 나라가 혼란스러웠고, 왜국 또한 나라가 혼란스러워 쉬이 나서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태세(太歲) 신해 3월, 군대가 나아가 안라에 이르러 걸탁성(乞乇城) 을 영위했다.
이 달에 고려(高麗)가 그 왕 안(安)을 시해했다. 또 듣건대 일본 천황과 태자,
황자가 모두 죽었다고 한다." 《일본서기》 <계체기> 25년(531년) 12월조. 이
기사는 백제 역사서인 《백제본기》에서 인용해 《일본서기》에 실린 문구라고 봅니다.
남부 가야에서 가장 강력했던 안라국이 백제의 영향권에 들어가면서 남가라(금관국)와 탁순국만이
남부 가야권 중 독립 세력으로 남게 되었는데, 백제가 안라국을 손에 넣고 남부 가야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자 가야 영토를 모두 뺏길 것을 우려한 신라는 1년후인 532년 이사부에게 3,000명
군사를 내어주고 남가라(금관가야, 부산 복천동 고분군?)를 접수하니 결국 남가라는 멸망하게 됩니다.
이를 보면 가야 연맹의 생존을 위해 주최한 안라회의가 오히려 가야의 멸망을 앞당긴 셈이 돼버렸는
데.... 이후 안라국이 또다시 회담을 주최하는 웅진회의와 백제 주도의 1차 사비회의(541. 4),
2차 사비회의(544. 11)가 열렸지만 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가야 북부의 반파국도 맹주 자리를
잃은 후 위에서 따로 놀다가, 신라의 공격으로 562년에 멸망하면서 가야는 역사 속에서 사라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