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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질을 찾아가는 길 (십계명 9) 무엇이 거짓말인가
출 20 ; 16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언 하지 말라
거짓말이라고 하면 우리 나름으로 어떤 것이 거짓말이다 하는 축적된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어떤 것을 거짓말이라고 하는지 거짓말이라고 쓰인 용례를 찾아보겠습니다.
요8장
42. 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 43.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
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예수님이 자신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유대인들을 책망하시는 말씀입니다
세상에서 거짓말한다는 것은 일상생활에서 남을 속이는 행위....정직한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을 말하지만 예수님은 위의 본문에서 진리가 그 속에 없어 진리에 서지 못하고 자기 사상이나 자기 가치체계에서 나오는 말을 거짓말이라고 합니다.
로마서 12:9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우리는 너무 쉽게 성경말씀을 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랑이라고 하면 남을 배려하여 주고 아껴주고 가난한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하는 사람들의 착한 행실정도로 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쓰여 지는 이 사랑은 대가 없이 목숨을 내어주는 무한한 사랑을 말합니다..
요한 1서4: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 하나님이 사랑 그 자체가 된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랑에는 거짓이 없다는 말씀은 하나님에게는 거짓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밖에 있으면 그것이 거짓말이 되는 것입니다.
선에 속하라는 말씀도 착한 일을 하는 쪽에 있으라가 아니고 ...선한 자는 한 분 그리스도뿐이시니 ....그 한 분이신 그리스도에 속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 속하지 않는 것은 거짓말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본질과 비 본질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여름철 갈증을 해소해주는 것은 그릇에 담겨진 시원한 물 한 모금이지 고급스럽게 보이는 그릇이 아닙니다. 그릇에 담긴 물이 본질이지 그릇이 아무리 금칠을 했다고 해서 그것은 본질이 아닙니다.
우리가 자동차를 삽니다. 차체와 바퀴가 얼마나 고급스러운가... 엔진이 유명 메이커인가를 살핍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 비 본질 입니다. 본질은 무엇입니까 이 차가 얼마나 사고 없이 잘 달릴 수 있는가하는 그 기능이 본질이고 우리는 그 기능을 사는 것입니다 ...차체나 바퀴는 그 기능을 담고 있는 그릇 즉 비 본질입니다.
이와 같이 본질은 반드시 비 본질이라는 포장 그릇에 담겨져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본질 보다는 우선 눈에 보이는 비 본질의 화려함에 마음을 빼앗긴다면 속아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질이 있어야 비 본질이 제 기능을 하는 것이지 본질이 없는 비 본질은 소용이 없는 포장용기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그 비 본질에 모든 가치를 두고 말하는 것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눈에 보이는 육신과 세상은 비 본질입니다. 육신과 세상이라는 그릇에 본질인 영이요 영생이요 진리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육신의 삶을 이 세상에서 아름답게 치장해서 살아가려 합니다. 그런 삶은 거짓된 삶입니다. 그러므로 본질인 영이요 진리가 내 안에서 빛이 나야 비본질인 육의 세상이 제 값어치를 하는 것이지 영이요 진리가 없으면 육적인 세상은 아무런 값어치가 없는 허망한 것에 불과하여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이라는 그릇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 그릇에 담겨진 본질을 보지 못했습니다..소나 양을 성전의 제물로 드림은 하나님 앞에 자신이 제물이 되어 죽어야 마땅한 죄인입니다 하는 고백인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자기의 재산 중에 비싼 소 한 마리를 하나님을 위하여 드린 자신을 대단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이렇게 살찐 송아지 드렸습니다. 하고 .... 자랑하는 너희는 독사의 자식이요 거짓말쟁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죄를 깨달으라고 주어진 것인데 오히려 자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질은 없고 비 본질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언하지 말라는 것은 “네 이웃이 가진 본질을 말하고 비본질적인 증언을 하지 말라”이지요...그러려면 이웃이 누구인지를 알아야 그 이웃의 본질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누구를 이웃이라고 생각하느냐 하면 이 세상에서 만나고 함께 일하고 이웃집에서 더불어 사는 사람을 이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이웃 말고 하나님은 누구가 우리의 이웃이라고 하시는지를 봐야 할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진정한 이웃은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눅10;‘25-37
29. (율법사가)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이니까?
3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중략)
33.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35.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36.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율법사는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하고 질문을 했고 예수님의 대답은 강도만난자의 이웃이 누구냐고 오히려 율법사에게 질문을 합니다. 그리고 그 이웃은 자비를 베푼 자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하여 묘하게 율법사와 강도만난 자를 동일선상에 두셨습니다. 이 둘 즉 율법사의 이웃과 강도만난자의 이웃이 동일하게 자비를 베푼 자입니다. .
여기에 쓰인 자비라는 말은 하나님만이 베풀 수 있는 자비를 뜻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자비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근원적인 이웃은 자비를 베풀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당시 예수님은 나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할 정도로 유대인들로부터 박해와 천대를 받았습니다. 마찬가지로 당시의 사마리아인들도 유대인들로 부터 사람대접을 못 받는 박해를 받고 있었습니다. 비유속의 사마리아인은 예수님 자신을 비유하신 것입니다.
율법사로 대표되는 인간들을 향한 주님의 말씀은 ....너는 강도만나 거반 죽은 자와 같아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죽어 있는 존재라는 것을 인식해야 된다는 것입니다...그렇게 죽은 존재라는 자기 인식이 생기면 진정한 이웃인 그리스도의 자비를 은혜로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엡2장 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서 역사하는 영이라 .
.......에베소서의 이 말씀은 너희는 예수를 알기 전에 너희는 죽어 있었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죽어 있던 자가 예수와 더불어 살아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죄로 죽어 있는 자입니다” 라는 고백을 하는 사람에게 진정한 이웃은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그 이웃인 그리스도에 대하여 거짓 증언하지 말라 입니다. 비본질적인 증언을 하지 말라이지요.. 본질을 말해야지 그릇의 아름다음이나 또는 자기 신념이나 세상 가치관을 이야기 하는 것은 비본질적인 것으로 그것은 거짓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본질과 비본질의 예를 설명하여 보겠습니다.
요9장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40.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 4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요한복음 9장은 안식일에 날 때부터 맹인이 된 사람을 예수님이 눈을 뜨여 보개 해준 것에 대하여 바리세인과 예수님의 논쟁입니다.
바리세인들의 주장은 노동이 금지된 안식일에 일을 하여 안식일을 범한 예수는 죄인이고 죄인 주제에 어떻게 눈을 뜨개 하는 일을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고.......설사 눈을 뜨게 했더라도 그것은 귀신의 힘을 빌린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그들의 관심은 안식일을 범한 것과 맹인이 지금 눈을 떠서 시력을 회복한 것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반발하는 유대인을 향하여 너희가 맹인이 되어 보지 못한다고 하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다고 하십니다. 좀 아리송한 말씀입니다. 무슨 말씀인지 보겠습니다.
요 1장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성경은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요1;18)고 하십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지만 어둠이 그 빛을 보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말씀하시는 소경은 하나님과 하늘의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구별하지 못하는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죄 가운데 있는 이 땅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들을 빛을 알아보지 못하는 어둠에 있는 소경이라 말합니다. 너희는 지금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소경주제에 본다고 하니 너희가 죄인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지금 예수님이 날 때부터 소경인 사람의 눈을 뜨게 해주신 이 사건은 소경인 그가 시력이 회복되어 사물을 볼 수 있는 것처럼 어두움 속에서 하나님의 진리의 세계를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이 땅의 모든 인간들에게 영안을 열어 주셔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보게 해주시겠다는 비유의 사건입니다. 그것이 구원이고 영생입니다.
그러므로 맹인이 눈을 떠 시력을 회복한 기적은 비유이고 비 본질입니다. 그것은 보석함이고 그 보석함에 담겨진 보석은 구원이고 진리이고 그리고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 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본질은 보지 못하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는 현상적인 인간의 모든 질병을 고치시는 예수님으로 증언한다면 그것은 비 본질을 본질로 오해한 것이고 그것을 성경은 강도요 거짓 증언이라고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생명과 영광은 이 땅의 모든 것을 초월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실상을 계시록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계 21:
3 (전략)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그들은 하나님의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서서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 이러라.
그런 나라를 볼 수 있는 영안을 열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질은 생명이요 영생인 하나님의 장막...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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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교회가 예배의 중요성을 말하고 예배에 성공하여야 한다고 합니다.. 코로나19로 모이는 예배가 제한을 받으니 더욱 그러한 것 같습니다. 주일 예배에 함께 모이지 못하는 것은 참으로 가슴 아픈 일입니다. 그래서 비록 온라인 이지만 예배에 성공하기 위하여 마음과 뜻을 모으자고 거듭거듭 독려하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모든 회중도 예배와 그 의식의 거룩함에 공감합니다..
유대인들의 제사가 오늘날 예배의 모형입니다. 유대인들의 제사의식은 웅장하고 장엄합니다.
그리고 엄격합니다.
레위기 9장
22 ○아론이 백성을 향하여 손을 들어 축복함으로 속죄제와 번제와 화목제를 마치고 내려오니라 23. 모세와 아론이 회막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백성에게 축복하매 여호와의 영광이 온 백성에게 나타나며 24.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제단 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사른지라 온 백성이 이를 보고 소리 지르며 엎드렸더라.
이 장면은 오늘날 예배에 해당하는 당시 유대인들의 제사가 얼마나 엄격하고 장엄 하였는가를 잘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에서도 예배가 장엄하고 대단합니다. 우선 큰 교회일수록 건물이 웅장하고 강단을 오색 꽃으로 장식을 하고 성가대가 고운 옷으로 치장을 하고 음정하나 박자하나 틀리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입니다. 몇 번씩이나 연습을 거듭하여 완벽한 하모니를 이루어내는 찬양에 자신들의 실력과 대단한 솜씨가 나타나 있습니다...모든 순서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서 그 분위기가 장엄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 성공한 예배였다고 만족해합니다. 그런 예배를 흠모하고 그런 예배의식을 이상적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예배에 대하여 이와는 다른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배의식이라는 형식에 담겨진 본질이 무엇인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롬12장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우리가 드릴 영적예배는 우리가 산 제물로 드려지는 것입니다. 산 제물로 드려진다는 것은 일상의 삶에서 내 뜻이 죽고 하나님의 마음이 내 속에 살아 있어서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 그것이 산 제물로 드리는 영적예배입니다.
일주일에 하루 교회에 나가 드리는 예배가 아무렇게나 되어도 좋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일상의 삶 속에서 주님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더 중요한 본질이라는 말씀입니다. 본질에는 등한히 하면서 비 본질을 장려하고 거듭 강조하면서 그 의식을 장엄하게 하는 것은 온전하신 아버지의 뜻을 분별하지 못한 것입니다.
온 정성을 다하여 장엄하게 주일예배를 드린 사람이 뿌듯함을 느낍니다. 바리세인이 성전에서 기도하기를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소득의 십일조 때어 먹지 안했습니다. 그렇게 뿌듯해하며 기도한 바리세인과 무엇이 다릅니까...그들은 의롭다고 판정받지 못했습니다.
눅18장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제사의식이라는 형식을 주셨습니다. 그 속의 본질을 보아야합니다.... 제사(예배)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제물이지요. ....제물이라고 하니까 금방 우리는 우리가 소유한 물질을 생각하지요.....그게 아니고 자기 자신을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이 본질입니다.,,,죄 가운데 죽어진 존재가 되었다는 자기 인식이 있고.... 그래서 산 제물로 드려지는 것 ...그렇게 자기가 죽어지고 그리스도와 한 몸으로 연합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사는 사람이 아니고 그리스도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배의 본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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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세상에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속하여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옛날에 정치범이 성당으로 피신하면 세상권력이 그를 체포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세상의 가치관이나 세상의 덕목을 말하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세상의 덕목 이야기를 비유로 해서 하나님 나라를 말하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상대적으로 타락한 세상의 윤리나 도덕을 재무장시키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진리를 말하고 영생을 말함으로 하나님 나라의 도덕과 윤리를 제시합니다.
그래서 세상과 구별되어 거룩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세상을 해쳐나가는 방법이나 출세를 이야기 하면 그것은 비 본질이고 거짓말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의 원칙을 말하는 곳이 아니고 하나님나라의 원칙을 말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말씀은 세상나라에 살고 있는 인간의 번영과 행복에 관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 백성의 번영과 축복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성경말씀에서 진리와 생명의 본질을 찾아가는 노력은 없고 성경말씀을 재료로 인간의 희로애락을 말하면서 위로하고 격려하며 동기부여 해주고 웃고 울리며 듣기도 좋고 기분도 좋게 감성을 충족시키는 것.....그렇게 하는 것은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거짓 증거 하는 것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1:1)......... 그러므로 말씀에서 진리의 깊은 뜻을 깨달아 알아가는 것.... 그것이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과의 만남이고 그것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기쁨과 영생이 되고 그리고 그것을 복이라고 말씀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