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부활절이다. 찬양이 이어지고, 사람들은 2천 년 전 유대 땅의 이야기를 뜨겁게 노래했다. 낯선 광경이 아니다. 유대인의 민족종교가 이 땅에 이미 깊이 뿌리내린 터이다.
그런데 그 노랫소리를 들으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 민족이 수천 년을 이어온 자신만의 기념일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음력 3월 15일은 어천절(御天節)이다.
올해는 양력 5월 1일이다. 단군 한배검이 124년의 교화와 93년의 치화를 마치고 기원전 2241년 이 날, 아사달에서 하늘로 돌아간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대종교에서는 이를 슬픔이 아닌 경사로 기린다. 한배검이 인간을 믿었기 때문에 떠났다는 뜻에서 그렇다.
이 날이 한낱 특정 종단의 절기였다면 지금 이 글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어천절은 일제강점기 내내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이 함께 모여 기리던 날이었다.
1920년 5월 3일 상해거류민단 사무실에서 열린 어천절 기념식에 김규식이 기념사를 했고, 박은식이 강연을 했다. 1924년에는 여운형이 사회를 맡았다. 국내에서는 서울과 성주에서 기념식이 열렸고,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이를 보도했다.
결정적인 기록은 1921년이다.
그해 4월 22일, 상해임시정부 의정원 건물에서 어천절 기념식이 열렸다. 그 자리에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이 있었다.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던 이승만은 단군 어천절 찬송사를 직접 낭독했다. 독립신문 1921년 4월 30일자에 실린 그 찬송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온 세상이 캄캄할 때에 우리에게 나타나시어 빛과 터와 글을 주시니 알음과 지킴과 행함이 넉넉하였도다. 그 힘을 보이시고 도로 가시사 옛 자취를 머무시니… 우리 황조는 거룩하시고 크시며 지혜로우시며 힘지시사 이를 쫓아 베푸시니 인류의 한배이시며 임검이시며 스승이셨다."
그는 찬송사 끝에 이렇게 맺었다. "불초한 승만은 이를 본받아 큰 짐을 메고 연약하나마 모으며 나아가 한배의 끼치심을 빛내고자 하나이다."
같은 해 기념식에서 신규식이 축사를 했고, 조완구가 강연을 했다. 이 자리는 대종교만의 행사가 아니었다. 임시정부 요인들이 함께한 사실상의 준 국경일 행사였다.
도산 안창호도 다르지 않았다. 개신교 신자였던 그가 직접 지은 「대황조의 높은 덕」은 "우리 황조 단군께서 / 태백산에 강림하사 / 나라 집을 건설하여 / 자손 우리에게 전하셨네"로 시작한다. 기독교 신앙과 단군 공경이 그에게 모순이 아니었다.
백범 김구도 마찬가지였다. 대종교 중광 60년사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백범이 대종교 총본사를 방문해 천진전에 참배하고 단애 윤세복 선생을 만났을 때 첫 마디가 이것이었다.
"나도 대종교인이올시다. 우리가 한배검 자손인 이상 다 이 교화에 살아온 것 아닙니까?" 그러면서 덧붙였다. "선비께서 천주교 신자로 소시 신교하시라는 명을 받은지라 개종할 수는 없으나, 정신만은 대종교인이외다. 버리지 마소서."
그는 4대 경절이면 임정 요인들을 동반하여 참석하고 적지 않은 성금까지 헌납했다고 기록은 전한다.
이승만, 안창호, 김구.
개신교인이든 천주교인이든, 이들에게 단군은 배척의 대상이 아니었다. 민족의 뿌리였고 공경의 대상이었다. 종교가 다르다는 것은 그 뿌리를 부정하는 이유가 되지 않았다.
그 사실이 지금 이 땅에서는 뒤집혀 있다.
김영삼 정부 이후 대통령은 개천절 기념식에 참석하지 않는다. 어천절에는 그 흔한 축전 한 장 없다. 석가탄신일에, 성탄절에, 부활절에 대통령과 정치인들이 경쟁적으로 메시지를 내는 이 나라에서, 민족 자신의 기념일은 조용히 지워지고 있다.
백범의 말을 빌리자면 이렇게 될 것이다. "조선인치고 한배검 자손 아닌 자 누가 있느냐."
우리가 잊었다고 해서 뿌리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올해 5월 1일(양력), 어천절(음력 3월 15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