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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이 멀지 않은 건봉사는 한국전쟁 당시 2 년여 동안 국군 5, 8, 9사단 및 미군 제 10군단과 북한군 5개 사단이 16차례의 뺏고 빼앗기는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 격전지였다. | 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냉천리. 금강산 기슭에 불이문(不二門) 하나가 서있다. 건봉사다. ‘북쪽’이 멀지 않은 건봉사는 한국전쟁 당시 2 년여 동안 국군 5, 8, 9사단 및 미군 제 10군단과 북한군 5개 사단이 16차례의 뺏고 빼앗기는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 격전지였다.
그때 건봉사는 완전히 폐허가 됐다. 그토록 치열했던 전쟁의 포화 속에서 유일하게 사라지지 않은 건 이 불이문뿐이다. 불이문 곳곳에서 서로 삶과 죽음을 물었던 흔적들이 그 시절을 증언하고 있다. 올해는 한국전쟁 정전 60주년이 되는 해이다.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잠시 멈춘 시간 속에 서있는 불이문의 현판이 묻는 듯하다. ‘불이’의 뜻을.
분단의 슬픔 아는 도량 불이문을 지나면 개울 위로 능파교가 있다. 북녘에서 내려온 개울물이 건봉사를 적시며 내려간다. 능파교를 건너기 전 왼편으로는 전쟁의 포화 속으로 사라진 가람의 옛터가 있다. 범종소리와 풍경소리 대신 총성과 포성에 웅크렸을 가람의 표정이 쓸쓸한 허공을 채우고 있고, 전각이 사라진 기단 위엔 이름 모를 들꽃들이 피어 그날을 묻고 있다. 극락전이 사라진 이야기, 낙서암이 사라진 이야기, 능파교 건너에서….
목탁소리가 들려온다. 능파교를 건너면 봉서루다. 봉서루 앞 대석단 좌우로 십바라밀석주가 서있다. 봉서루를 지나면 마당이 보이고 대웅전, 명부전 등이 있다. 건봉사 명부전에는 1250명의 호국영령 영가가 모셔져 있다. 건봉사는 매년 6월 6일 현충일에 위령재를 모신다.
능파교를 다시 건너 산 쪽으로 오르면 적멸보궁이다. 부처님 치아 사리 3과가 모셔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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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때 유일하게 소실되지 않은 불이문 | 건봉사는 1950년 5월 10일, 폭격으로 인해 건봉사 대웅전이 소실됐고, 건봉사가 소장하고 있던 국보 제 412호 〈마지금니화경〉 전 46권이 소실됐다. 1953년 7월 27일 휴전으로 민통선 이북에 자리한 건봉사는 출입이 통제됐고, 도량엔 군이 주둔했다. 그러다 1989년 1월 20일부터 민통선이 완화되면서 민간인의 출입이 자유로워졌고, 1987년부터 국가 차원의 복원 불사가 논의되기 시작했다.
전국 4대 사찰의 하나로 불렸던 건봉사는 신라 법흥왕 7년(서기 520년)에 아도 화상이 원각사를 창건해 시작됐다. 이어서 533년(법흥왕 20)에 보림암과 반야암이 창건되었다. 758년(경덕왕 17)에 발징 화상이 원각사를 중건하고 염불만일회를 중창했다. 염불만일회란 염불 수행을 목적으로 살아서는 편안한 생활을 하고 죽어서는 극락왕생할 것을 기원하는 법회를 말한다. 이때 발징 화상이 정신, 양순, 등 31명의 대중과 함께 염불을 했는데 뜻을 같이 하는 신도 1,820명이 동참했다. 이것이 염불만일회의 효시가 됐다.
810년(현덕왕 2)에는 당나라 현수 법사로부터 경교를 배우고 돌아온 승전 화상이 화엄경을 강설했다고 하는데, 확실하지는 않다. 이어 937년(고려 태조 20)에 도선 국사가 왕명을 받들어 941년(태조 24)에 원각사를 중수하고 서봉사(西鳳寺)라 했으며, 고려 말엽 나옹 화상이 중수하고 건봉사라 했다.
1465년 세조가 건봉사에 닷새 동안 머물렀는데, 이때 건봉사를 자신의 원당으로 삼은 뒤, 어실각을 짓고 전답과 친필 동참문을 하사했다고 전한다. 이로써 건봉사는 강원도를 대표하는 사찰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1605년(선조 38)에는 사명대사가 일본이 약탈해 간 통도사의 부처님 사리를 되찾아 와 건봉사에도 모셨다.
1878년(고종 15) 4월 3일 산불로 인해 사찰과 암자 3천 칸이 모두 불에 탔다. 학림 화상이 팔상전의 삼존불상과 오동향로, 절함도 등을 구해냈지만 나머지 당우와 집기 등은 모두 소실됐다. 그 후 여러 차례 복원 불사를 통해 1911년 9개 말사를 거느린 31본산의 하나가 됐다. 한국전쟁으로 다시 소실됐고 다시 복원 불사가 진행 중이다.
호국사찰, 불보사찰 건봉사는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의승병을 일으키고 기른 도량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승군의 본거지가 됐다. 건봉사를 우리나라의 대표적 호국불교 도량으로 꼽는 이유다. 사명대사가 건봉사를 의승군의 근거지로 삼은 것은 건봉사가 당시 700여 명의 스님들이 수행할 수 있을 정도로 전국 최대의 규모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건봉사에는 부처님 진신 치아사리가 모셔져 있다. 1605년에 사명 대사가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임진왜란 때 빼앗겼던 부처님의 치아와 부처님의 사리를 되찾아온다. 그리고 원 봉안처인 통도사뿐만 아니라 건봉사에도 일부를 나누어 모시게 된 것이다. 이는 일찍이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부처님의 치아와 사리 등을 모시고 돌아와 통도사를 비롯한 지금의 5대 적멸보궁에 모셨던 것을 왜군이 약탈해 간 것이다. 현재 건봉사는 적멸보궁 사리탑에 부처님 치아사리 3과를 모시고 있고, 법당에 친견용으로 5과를 모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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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1월 20일 민간인 출입허용 기념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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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건봉사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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