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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 熱河日記(수정을 끝낸 최종본으로 양천허씨대종보 25호에 게재할 내용 임)
東州使公派 參議公宗會 會長 許昌武
2012. 11. 19. (월) 天晴
양천허씨대종회 허찬 회장 부부와 허덕행 고문 허창무 감사 허관욱 부회장 등 임원진 5인이 중국길림성 연변종친회 허연일 회장의 초청으로 4박 5일 간의 재외종친 친선방문길에 올랐다. 서울인천발 중국연길행아시아나항공 351편에 올라 비행하기 약 2시간, 연길공항에 안착하여 허연일 회장과 여러 종친들의 따뜻환 영접 속에 반가운 해후의 교권을 나누었다. 허길석(r許吉碩) 부회장 부부가 초청한 오찬자리에서 허찬회장은 반가움의 인사말을 전하면서, 종사전반에 관하여 관심사를 언급하고, 특히 전자족보 발간의 중요성에 대하여 역설하면서, 재중 양천허씨 입보의 당위성과 파계를 찾지 못한 종인들의 입보방법까지 자세히 설명하여 주었다. 그리고 연변양천허씨종친회의 적극적이고도 역동적인 애종활동에 대하여 격찬하면서 10년전 이곳을 방문하였을 때와는 격세지감을 느낀다고 연변의 놀라운 발전에 대한 소회를 피력하였다.
허창범(許吉碩) 부회장은 우리 일행이 투숙한 하오야호텔(豪亞飯店) 사장으로부터 우리가 체재하는 동안 최선의 스비스를 받았고 당일 오후는 휴식을 취하는 일정으로 짜여 있었다. 밤 8시 경 허연일(許延日)회장, 허동린(許東麟)부회장, 허극진(許極振)비서장 세분의 만찬 초대 를 받았다. 그동안 많이 변해버린 비한비중(非韓非中)의 신품식단이라 우리들 구미에는 다소 낯선 음식들이었다. 숙소를 배정받았는데 나는 4일동안 허관욱(許官旭)부회장과 룸메이트로 하오야호텔 602호실에 투숙하였다. 여장을 풀고 ‘訪延吉(방연길)’의 일감(一感)을 성재(性齋) 허전(許傳)선생의 방송정(訪松亭) 시운(詩韻)을 따서 오늘의 소회(小懷)를 여기에 몇 줄 적어 본다.
延邊一族逈超群, 延邊사는 양천일문 諸氏중에 으뜸이라,
現代化途各樹勳. 東北自治 개방이후 근대화에 立功樹勳 .
獨立後孫功績見, 獨立志士 후손들로 다진절의 두렷하고,
移居先祖苦勞聞. 선조님의 移住痛史 숨은애환 들려오네.
情談熟處知心合, 고운말씨 솜씨맵씨 누구아니 一本分가?
濃血凝時惜手分. 같은뿌리 엉긴정리 얼기설기 나눈줄기,
他國結成親族會, 間島땅에 우리허씨 친족회로 뭉쳤으니,
可量此地有靑雲. 이땅에도 우릇푸릇 청운꿈이 피어나리.
2012년 11월 20일 화요일 天晴而寒
오전에는 어제의 여독을 풀기 위하여 호텔에서 휴식을 취하였다. 12시경 연변공안국(한국 경찰기능과 동일)에서 30여년 봉직하다가 퇴임한 허창범(許昌範) 고문이 우리를 연변시 모아산공원으로 안내하였다. 서울의 남산공원 같은 기능을 하는 휴식공간이다. 등산로도 잘 다듬어 놓았고, 정상에는 연변타워도, 연도에는 민속촌을 조성하고 있었다. 연변주정부가 문화상품의 중요성을 이미 간파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규모면에서도 반도보다는 대륙풍을 띠고 있었다. 그는 우리를 香肉酒店(보신탕집)으로 오찬을 초대했는데 이곳에서도 애식가들이 꽤 많이 있는 것 같다. 오후 2시경 연변종친회사무실에서 허연일(許延日)회장 주재로 좌담회(座談會)를 개최하여 1시간여를 허찬(許燦)회장의 특강을 듣고 許悳行고문과 방문단 각자가 관심사를 언급하였는데, 특히 허덕행(許悳行) 고문은 내년부터 연변종친회에서 유재무전(有才無錢)한 학생을 추천해 주면 1명에 한하여 장학금(奬學金)을 지급하겠다고 약속하였고, 허관욱(許官旭)부회장과 나는 연변종친의 선조유적지순례(先祖遺蹟地巡禮) 모국방문시 영호남(嶺湖南) 지역의 안내역은 물론, 그 지역의 체재비도 양안공종중과 참의공종회에서 공동 부담하겠노라고 자신하여 좌중의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오후 6시경 우리 일행이 연회장에 들어설 때 150여명의 일족들이 연회장 양편에 도열하여 박수로 환영해 주었다. 통제된 사회에서나 볼 수 있는 이색적인 풍경이었지만 감동적이었다. 메인테이블에 배석한 분은 허록춘(許錄春)고문, 허연일(許延日)회장, 허미란(許美蘭)이사였다. 허미란이사는 연변 십대여걸중 한 분이었고, 허녹춘 고문은 연변시 시의원으로 오늘의 경비를 전담하였다고 한다. 허연일(許延日) 회장의 환영사와 허찬(許燦) 회장의 답사에 이어 본행사가 약 2시간 여에 걸쳐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진행되었다. 내빈 및 임원진 소개, 자랑스러운 연변양천허씨상 수여식에 이어, 허춘림(許春林)이 작곡한 <자랑스러운 양천허씨송가>와 <선조유교> 그리고 <노래하세 양천허문>을 반주에 맞추어 허씨 며느님과 딸들로 구성된 합창단에 의하여 가곡풍의 음률이 흘러나오자 좌중 분위기가 한껏 고조되었다. 허찬회장 사모님이 그리운 '금강산'과 '일송정'을 연이어 답창하자 좌중으로부터 우레같은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이 자리에 참석한 우리들도 흥분의 도가니 속으로 빠져들었는데, 나는 오늘의 이 감흥을 시심(詩心)에 담아 오래 기억하고져 한다. 마침, 재미중인 허찬회장의 영식 허원무 종인의 축사가 인터넷으로 전송, 그것을 낭송해 주었는데 듣는이로 하여금 감동을 느끼기에 충분한 내용이었다. 연변종친회의 양천허씨송가(陽川許氏頌歌)와 함께 허원무씨(許원茂)의 축사도 별록에 붙여 둔다. 규모와 형식면에서나 내용과 실질면에서 이번 행사가 매우 알차고 유익했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듣자하니 이곳 종친회 행사시 참여도가 높아 많이 모일 때는 1500여명이 운집하기도 한다고 한다. 대종회에서의 행사도 이런 점을 타산지석으로 삼았으면 한다.
2012년 11월 21일 (수) 天晴而昨夜乍雪
오전 9시경, 동주사공파 후손이라며 허철호(許哲浩)씨란 분이 <關北陽川許氏譜略>(관북양천허씨보략)을 들고 우리가 머물고 있는 하오야호텔(豪亞飯店)로 찾아와서 필사한 가승(家乘)을 제시하고 지금까지 보장할 수 있었던 숨은사연을 설명하면서, 앞으로 양천허씨전자족보(陽川許氏電子族譜)를 편찬할 때 이 내용을 꼭 추입(追入)해 달라는 소청과 함께, 자신의 정확한 뿌리를 밝혀달라고 애원하듯 신신당부를 했다. 이를 본 허찬(許燦)회장은 당장 그의 직계 상조의 휘(諱)자를 일일이 써서 그가 양천허씨 34世로 동주사공파(東州使公派) 판관공(判官公-季,합천-밀양) 후손임을 밝혀 주었다. 자신의 뿌리를 알게 된 그 본인의 기쁨야 말할 수 없겠니만, 같은 동주사공파 한사람으로서, 잃어버렸던 일가를 연변 땅에서 다시 만나게 되니, 나의 기쁨 또한 마치 흙에서 진주를 발견한 이상으로 반갑고 기뻤다. 오늘 오전 3시간에 걸쳐 교감한 종사교육의 장면은 나의 뇌리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 같다. 가르침을 주는 자와 받는 자의 태도가 너무도 진지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판관공(季)은 동주사공(東州使公)의 현손(玄孫)인 예판공(禮判公 15世 孟)의 3형제중 끝집이고, 그들의 입북조(入北祖)인 충순위공(忠順衛公 17世 崙)은 우리의 직계조인 부사공(府事公 天益 倬)과 재종지간(再從之間)이며, 충순공(崙)의 이드님 대호군공(大護軍公 璟)은 고성입향조 참의공(參議公 18世 天益)과 동항(同行)이다. 우리의 입향조 참의공(參議公 18世 天益)은 成宗十九戊申(1488)년에 고성에 입향하였는데 충순위공(崙)은 中宗5庚午(1510)년에 입북한 것으로 보아 참의공이 입고성(入固城)한 22년후에 입회령(入會寧)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해 볼 때 대호군공(大護軍公) 경(璟)의 전 가족이 그의 장인 정순(鄭順)의 귀양지로 떠날 때 그를 따라 입북한 것 같다.
이번에 자랑스런 연변양천허씨상을 받은 허순자(許順子) 부회장이 일식집에 우리 일행을 오찬초대해 주었다. 사위가 일본인 베테랑 요리사인데 그 사위를 주방장으로 초청하여 순수한 일본요리만을 선보인다고 자랑하였는데, 정갈한 분위기와 식품의 신선도가 일본요리 그대로임을 단적으로 말해 주었다. 며칠동안 기름기 음식을 먹은 탓에 속이 메시꺼웠는데 일식요리 덕택으로 입맛을 말끔히 되찾을 수 있었다. 맛있는 오찬이었다. 식사가 끝나자 허연일회장의 안내로 해란강(海蘭江)을 건너 일송정(一松亭)을 찾았으나 며칠간 눈이 온 관계로 정상에 오르지 못하고 먼발치에서 바라만 보고 발길을 돌렸다. 許延日회장은 그의 가족묘원을 조성하기 위하여 이곳에 약간의 공원부지를 확보해 두었다고 자랑하였다. 연변에도 장묘문화(葬墓文化)의 회귀(回歸)바람이 차츰 일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일송정(一松亭)에 올라 당시처럼 ‘선구자’를 불러보지 못한 아쉬움을 뒤로한 채 용두례우물(龍井)로 내려와 선구자들이 목을 추기던 우물물을 마시면서 조국광복의 꿈을 키웠던 그분들의 심정이 되어 본다. 우믈가에 약 4m 높이의 거석 "巨龍驚天碑"(거룡경천비)가 서 있었는데, 용정시와 거제시가 우호도시의 결연기념으로 근자에 이 비를 세운 것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다시 근처에 있는 대성중학교(大成中學校)로 발길을 옮겼다. 수많은 독립지사를 배출한 용정의 대성중학교의 교정을 지나 윤동주(尹東柱) 시인이 공부했던 실내 책걸상을 바라보며 서시(序詩)의 시심(詩心)에 침잠해 보기도 하였다. 1970년 이 학교를 처음 방문했을 때 중국은 개방이 된 직후라 학교모습이 초라했는데 오늘 다시 방문해 보니 개방정책 덕택으로 많이도 변헤 마음의 위안을 받았다. 민족학교의 발전을 기원하는 뜻에서 허찬회장과 함께 방명록에 서명하고 약간의 성금을 기탁하였다. 갑자기 고인이 된 한 친구가 생각난다. 나와 함께 심양에 창립한 요녕발해대학의 千文甲학장도 이 학교 출신이다. 민족의식이 유달랐던 현대 중국의 조선족 핵물리학자였던 그와의 만남은 한편 고통이었고, 한편 기쁨이었다. 전재산을 버리게 되었으니 고통이요, 만주허허벌판 고토에 제2의 독립을 위한 밀알을 뿌릴 텃밭을 일구었으니 기쁨인 것이다. 1989년 당시 나는 특요교수 자격으로로 북경대학에서 1년간 교학하고 있을 때였다. 한중수교의 당위성을 중국학계에 알려야 하는 국가적 사명을 띠고 있었는데, 당시 천문갑교수와 우연히 알게 되어 일면여구(一面如舊)의 지기(知己)로 발전하게 되었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2만평의 학교부지 기금을 지원, 심양의 민족학교인 발해대학의 창립을 보게 되었다. 세월이 흘러, 3년전 그도 가고 나도 이미 늙었으니 인생무상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퇴임후론 부로들이 미완한 종사를 정리하지 않으면 안되는 절박한 사명의식으로 파조(派祖), 입향조(入鄕祖), 5대조이하(五代祖以下)의 선묘를 이안(移安)하는 일에 착수하여 금년에 거의 마무리하고 남은 일은 법인격 이회서당(以會書堂)의 활성화에 진력하는 남아 있을 뿐이다.
이번에 허찬(許燦)회장의 권유로 연변 우리 일족을 만나게 되어 ‘일가백대지친(一家百代之親)’이라 하시던 할아버지 성재공(誠齋公) 말씀을 절감하는 좋은 기회가 되었고, 허찬(許燦) 대종회회장과 허연일(許延日) 연변종친회장이 위종사업(爲宗事業)에 갈력하는 진면목을 알게 되었다. 경탄(敬歎)과 경외(驚畏)감을 금할 수 없었다. 허관욱(許官旭)부회장과는 행운이 따라 4일간 룸메이트가 되면서 종사고찰(宗事考察)의 고락(苦樂)을 공유할 수 있었다. 그는 부지런하고 배려심이 깊어 게으르고 어린 나를 형대접해 주었다. 마치 포숙아가 관중을 아껴주었듯이 말이다. “만남의 일초 일각이 마지막이다. 두번 다시 오는 일은 결코 없다.”하신 그 말씀, 긴 여운으로 남아 심금을 울리고 있다.
귀로의 오늘 만찬은 허경희(許慶熙) 종인이 우리 일행을 남편이 경영하는 金氏生態園(김씨생태원)에서 초대하였는데 허철준(許哲俊) 종인 부부와 어머니가 동석하였고, 허연일(許延日)회장과 허춘림(許春林)고문이 배석하였다. 생태원은 실내에 크고 작은 다양한 열대식물을 심어 남국풍(南國風)을 느낄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그속에서 비중비한(非中非韓)의 연변음식을 맛볼 수 있었다. 음식도 시대와 공간에 따라 변화하는 것 같다. 중국의 조선족은 우리 음식을 기본으로 하되 중국음식의 장점을 활용하여 새로운 음식문화를 창조하고 있었다. 흔히 한중일(韓中日) 삼국음식(三國飮食)의 특색을 말하면서, 한국음식의 맛이 부인들의 손끝(手端)에서 만들어진다면 중국음식의 맛은 불끝(火端)에 나온다고 할 수 있고, 일본음식의 신선도는 칼끝(刀端)에서 창조된다고 삼단론(三端論)으로 설명하곤 하는데, 이곳의 음식은 칼끝에서 만들어 내는 신선도는 찾아 볼 수 없으니 아쉽지마는 오늘은 이단론(二端論)의 음식으로 만족해야할 것 같다.
2012. 11. 22. (목) 天晴而風大
내일이면 4박5일의 일정을 마치고 연변일족들과 아쉬운 작별을 고할 시간이다. 오전에는 내일의 귀국준비를 위해 호텔에서 휴식을 취하기로 하였다. 12시경 허연일 회장이 우리를 호텔에서 픽업하여 유경호텔(柳京飯店)의 평양식당으로 안내하였는데, 치과의사인 허금숙(許今淑) 종인이 우리를 맞이하였고, 북한에서 파견나온 두 복무원이 한복차림으로 반갑게 맞아 친밀감을 더해 주었다. 나는 물냉면을 시켰는데 담백한 맛이 한국의 냉면과는 다소 달랐다. 식사중에 아가씨들이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조용한 북한의 경음악을 틀어 주었다. 오찬이 끝나갈 무렵 복무원이 나와 북한노래 몇 곡을 불러주었고, 사모님도 흥에 겨워 한곡조를 뽑았다. 사모님의 노래솜씨는 언제 들어도 수준급이다. 식후에 우리 일행은 쇼핑차 이곳의 재래시장격인 연변시장(延邊西市場)에 들러 스무얼(石木耳), 푸얼차(중국茶), 명란(明卵)젖, 깜은참깨(黑麻子), 투루판산의 건청포동(乾靑葡萄), 명태포(明太脯), 더덕(莎蔘) 등 집식구들의 구미에 맞는 특산품 몇 점을 골랐다. 한국물가의 1/3 정도로 가격이 싼 편이었다.
오후 6시경 허순자(許順子) 부회장이 다시 우리일행을 福成肥牛火鍋餐廳(복성쇠고기샤브샤브집)에서 만찬을 초대하였는데, 한 원탁에 14명이 둘러 앉아 각종육류를 사브사브식으로 맘껏 즐겼다. 오늘의 만찬에 주역(作東)을 자임한 허순자(許順子)부회장의 송별사에 이어 허찬(許燦)회장의 정감어린 답사가 있었으며, 허씨가(許氏歌)를 작사작곡한 허춘림(許春林)고문은 내가 읊은 성재(性齋) 허전(許傳)선생의 ‘방송정(訪松亭)’시를 듣고 시감에 취해 한 수 필사를 청하였다. 허춘림(許春林) 종인은 한술더 떠 이 시를 필사(筆寫)한 다음, 족자(簇子)로 만들어 양천허씨연변종친회(陽川許氏延邊宗親會) 사무실에 걸겠다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허찬(許燦)회장은 성재(性齋)선생의 학맥(學脈)에 대하여 설명해 주면서 돌아가서 허문의 유명한 서예가에게 부탁하여 다시 새로 써 보내 주겠다고 약속하자 모두가 환호하였다. 이 방송정시의 시의(詩意)가 오늘 우리 모두의 심정과 너무도 잘 부합하였던 모양이다. 3년전 허순자(許順子) 부회장은 대종회를 찾아왔을 때 서로간 문화적 차이로 인한 오해가 발생한 적이 있었다. 큰집인 친정으로 찾아왔는데 대접이 이렇게 소홀할 수 있겠느냐며 질타하는 그녀에게 나는 문화적 차이로 인한 소치라고 애써 개유하였으나 듣지 않았던 것이다. 이 기회에 그 때의 오해를 풀 수 있으리라 믿었는데 그 역시 회장님의 제지로 실패하고 말았다. 이 일로 좌중의 분위기가 한 때 머석해졌는데, 양천허씨연변종친회 허연일 회장과 양천허씨대종회 허창무 감사의 ‘절연절주(切煙節酒)의 선포’가 호재로 작용, 좌중이 일시에 웃음바다로 변해, 화기 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아쉬운 작별을 고함으로씨 연변종친방문의 대미(大尾)를 아름답게 장식할 수 있었다. 이 연회석에 참석한 분은 한국측에서 양천허씨대종회 허찬회장 부부, 허덕행(許悳行) 고문, 허창무(許昌武) 감사, 허관욱(許官旭) 부회장이며, 연변측에서 양천허씨연변종친회 허창법(許昌範) 고문, 허춘림(許春林) 고문, 허연일(許延日) 회장, 허극진(許極振) 비서장, 허동린(許東麟) 부회장, 허순자(許順子) 부회장, 전 연변시장 부인(許哲俊母), 김종호(金鍾浩) 외손등 14명이었다.
2012. 11. 23. (금) 天晴而寒
하오야호텔(豪亞飯店)에서의 조찬(朝餐) 후 우리 일행은 연변서시장(延邊西市場)에 들러 몇가지 쇼핑을 끝내고 호텔로 돌아와 행장(行裝)을 챙겼다. 종친회 회장단 몇분의 안내를 받아 공항에서 출국수속을 끝내고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연변에 체재하는 5일 동안 임원진들이 보여준 넘치는 친절과 융승한 대접에 감사를 드린다. 반면 년전 고국방문시 우리의 접빈객 태도에 얼마나 많은 서운함을 느꼈을지 미안함이 앞선다. 국내뿐만 아니라 국외에 거주하고 있는 종족들과의 유대도 원활하도록 교류사업을 활발히 추진해야겠다. 1시간 정도 기내에서 출발을 기다리면서 뜻깊었던 지난 5일간의 연변추억을 회상해 본다. 규모뿐만 아니라 실질면에서도 대단한 발전을 거둔 중국과 이에 걸맞는 동포들의 역동적인 삶에 갈채를 보내며, 양천허문의 긍지를 살려 노래하고, 충효청백 정신을 동북고토에 뿌리를 내리게 하였으니 실로 장하다 아니할 수 없다. 연변에서 받은 마음의 선물 양천허씨송가를 흥얼거려보며 나도 귀로의 상념을 몇자 치부(置簿)해 본다. 김포공항에 도착후 허찬회장 부부와 허덕행 고문은 각자 귀가하고, 나는 내일 있을 도사공(都事公) 시제에 참석차 허관욱 부회장을 따라 남원의 성남재(城南齋)로 향했다.
臨岐吾輩惜分時 臨別즈음 우리서로 아쉬움을 나눌적에,
誼熟情深我自知. 誼熟情深 하나됨을 나스스로 알겠구나.
送客延邊朝日出, 손님배웅 延邊機場 아침해는 선잠깬듯,
迎吾首爾夕陽遲. 一行맞을 서울空航 夕陽빛은 더디지듯.
機中回憶尋根事, 機內에서 홀로앉아 尋根事를 回想하고,
窓外傍觀逐鹿碁. 窓門밖에 펼쳐지는 逐鹿碁를 관전한다.
明年花發春時節, 明年봄이 다가오면 始祖春享 모실테니,
始祖壇前願訪期. 金浦先塋 壇所앞에 만남다시 期約하자.
(양천허씨대종회 감사 허창무 기록)
첫댓글 종사자료 214번 '訪中國之延邊陽川許氏一族' 초고 참조.
기록과 정리가 너무 일목요연하군요. 바쁜 일정중에도 참가일행의 손과 발 역할도 감내하면서도 기행 일지가 너무
생동감있게 잘 기술되어 있군요.
시은형님께서 쓰신 방문기는 후일 (이곳 카페에서든 대종보에서든) 언제든지 읽어볼수있는 의미있는 기록입니다. 열하일기를 생각하니 박지원의 글중 一夜九渡河 (하룻밤에 강을 아홉번 건너다) 부분이 연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