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프리카 튀니지 카르타고 유적지 비루사 언덕
카르타고는 튀니지 만에 건설된 도시 국가였다. 수도 튀니스는 카르타고의 옛 영광을 간직한 인구 80만 명의 아름다운 목가적 항구도시다. 역사 속으로 사라진 카르타고 제국의 가장 높은 지대 비루사 언덕은 포에니 전쟁의 패전 영웅 한니발 장군의 본거지다. 카르타고 포럼이다. 1000년 동안 강국이었지만 3차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한 로마군이 철저하게 파괴했다. 사람과 식물이 살지 못하도록 불을 지르고 소금까지 뿌렸다. 비루사 언덕 광장에 남아 있는 것은 석조물 일부가 전부다. 곳곳에 앙상한 기둥과 무너진 건물 흙벽이 유적으로 남아 있다. 기원전 146년에 사라진 흔적이다.
카르타고 한니발 아버지가 시칠리아를 뺏기 위해서 싸운 것이 1차 포에니 전쟁이다. 2차 포에니 전쟁은 카르타고가 다시 로마로 가서 전쟁 도발해서 이긴 것이다. 한니발 장군의 승리였다. 마지막 3차 포에니 전쟁은 로마가 싸움을 걸어와 다시 이곳에서 일어났는데 한니발 장군과 로마의 대격으로 한니발 장군이 패배했다. 한니발 장군은 20년간 은둔 생활을 하다가 스스로 자살했다. 포에니 3차 전쟁은 로마의 승리로, 로마가 세계 대국으로 발돋움 하는 계기가 되었다. 146년에 카르타고 제국을 완전히 장악했다. 기원전 3세기에는 지중해권 문화요지로 번성했던 곳이다. 지중해 패권을 두고 로마와 겨뤘던 카르타고의 유적지다.
포에니 전쟁은 시칠리아에 대한 주도권 다툼으로 로마와 포에니 전쟁에서 싸우게 되었다. 제1차 포에니 전쟁은 기원전 264년 ~ 241년이다. 지중해의 상권을 둘러싸고 점차 팽창하는 로마 공화국과 전통적인 해운국이었던 카르타고 사이의 이권 분쟁에서 비롯되었다. 로마는 카르타고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시칠리아를 통해 해상으로 진출하려 했고, 결국 시칠리아를 둘러싸고 카르타고와 맞붙었다. 23년간의 전쟁 끝에 로마는 한니발의 아버지이기도 한 하밀카르 바르카가 이끄는 카르타고 해군을 격멸시키고 승리를 거두었다.
제2차 포에니 전쟁은 한니발 전쟁으로도 불린다. 유명한 카르타고의 장군 한니발이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진군해온 것으로 유명하다. 기원전 218년 한니발이 히스파니아의 사군툼을 공격함으로 전쟁은 시작되었다. 한니발은 많은 군사를 이끌고 갈리아 남부를 돌아 알프스를 넘었고 이 과정에서 많은 병력과 전투 코끼리를 잃기도 했지만 북부 이탈리아로 침입해서 기원전 216년의 칸나이 전투를 비롯한 여러 차례의 전투에서 로마군을 패배시켰다. 그러나 로마군은 파비우스 막시무스의 지연전술로 만회할 시간을 벌었고 한니발은 결코 이탈리아 전역을 손에 넣지 못했다. 이탈리아 외에 히스파니아, 시칠리아, 그리스에서도 로마군과 카르타고 군이 격돌했으나 끝내는 로마군이 모두 승리했다. 전장은 아프리카로 넘어갔고 기원전 202년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 근처에서 벌어진 자마 전투에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에게 카르타고가 결정적으로 패함으로써 16년동안의 이 전쟁은 종결되었다. 이 전쟁으로 카르타고는 심각한 타격을 입었고 막대한 배상금을 로마에 물어주고 지중해 서부의 재해권과 이권을 로마에 빼앗기고 말았다.
제3차 포에니 전쟁은 기원전 149년에서 146년까지 일어났다. 제2차 포에니 전쟁 이후 로마와 사실상 군신관계에 있던 카르타고는 로마의 허락 없이 또 다른 동맹국인 '누미디아 왕국'을 침범한 것에 의해 성난 로마 원로원을 정적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를 제거한 대 카토가 선동함으로서 전쟁이 발발하고 결국에는 멸망해, 로마의 속주 중에 하나인 '속주 아프리카'로 전락하게 되었다. 기원전 149년 로마는 카르타고의 조약 위반에 따른 대가로 수도 카르타고를 버리고 이주하라는 조건으로 카르타고를 압박해왔다. 카르타고 원로원은 이 요구를 현실적으로 생각해 받아들이려고 하였으나 성난 민중이 반란을 일으킴에 따라 결국 묵살하고 3차 포에니 전쟁에 돌입했고 로마는 카르타고에 대한 공성전을 벌였다. 제 2차 포에니 전쟁을 끝내기도 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외손자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 아프리카누스가 이끄는 로마군은 3년에 걸친 공격으로 결국 카르타고 도시를 함락하고 주민을 완전히 축출했으며, 도시를 불태우고 소금을 뿌려 황무지로 만들었다. 하지만 로마는 살아남은 카르타고 시민들을 아프리카에서 살 수 있도록 했다.
수도 튀니스 부근은 기원전 3세기쯤 페니키아인들이 이주해오면서 지중해권 문화의 요지로, 무역으로 번성하였다. 서지중해에서 최대의 세력을 떨쳤으며, 특히 무역으로 번영하였는데 특히 상업귀족의 세력이 매우 강대하였다. 로마시대에는 도시국가 카르타고가 형성돼 지중해 상권을 두고 로마와 격돌하기도 했다. 로마 장군 스키피오와 혈전을 벌린 한니발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카르타고는 결국 로마제국에 편입됐고, 로마는 증오의 표시로 도시 전체를 파괴했다. 로마의 지배를 받던 튀니지는 7세기 이슬람 세력의 진출과 함께 이슬람화했다. 북아프리카 전역으로 이슬람을 전파하는 전초 기지가 됐다. 로마인을 축출하고 로마인의 반격을 막기 위해 697년 건설된 것이 바로 튀니스다. 카르타고의 석재들이 튀니스 건설에 동원됐다. 이후 튀니스는 16세기 오스만투르크와 합스부르크의 전쟁으로 1574년 오스만 통치하에 들어가면서 1800년대 중반까지 오스만 제국의 일부로 남았다가 1864년 프랑스 보호령으로 들어갔고, 1957년 독립하면서 튀니지의 수도가 되었다.
비루사 언덕에는 세인트 루이스 성당도 있고 카르타고 박물관도 있다. 이곳은 지중해의 중심지로 중요한 곳이어서 다시 도시를 건설하여 언덕에 여러 공공건물을 세운 것이다. 페니키아인들의 유물들이 소장되어있는 박물관에 입장하여 1, 2층을 둘러보았다. 특히 어린이용 석관이 눈길을 끈다. 그 당시 희생되었던 남녀 아이의 슬픈 석관이다. 여러 가지 그 당시의 생활상을 나타내는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비루사 언덕을 중심으로 세워졌던 카르타고 도시의 모습도 있다. 튀니지 지도와 함께 전시해 놓았다. 지구상에 있어서는 안 되는 전쟁, 내 조국에서도 뼈저리게 느끼고 사는데 새삼 먼 나라에서 전쟁으로 인한 파괴와 희생을 보며 다시는 이런 일이 없기를 빌어본다. 비루사 언덕 위에 세워진 카르타고는 지중해를 내려다보고 있다. 지중해는 아픔을 모르는 듯 처연한 눈부심이다. 파란 바닷가 언덕 아래쪽에는 주택지다. 하얀 집들이 나무 사이로 비경이다. 노란 꽃들은 아름답게 들녘을 장식하고 있다. 비루사 언덕의 상처로 얼룩진 흔적만 아니면 누가 이 풍경을 보고 슬퍼할까. 역사 속에서 새로운 도약을 꿈꾸는 튀니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