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 호 2882 조 회 41
이 름 이상흔(월간조선기자) 날 짜 2003년 11월 19일 수요일
송두율 공소장
공 소 사 실
피고인은 일본에서 출생한 뒤 8˙15 해방 후 귀국하여, 1957. 2. 광주 중앙초등학교를, 1960. 2. 광주 서중학교를, 1963. 2. 서울 중동고등학교를, 1967. 2.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각 졸업하고, 같은 해 7. 15. 독일로 유학하여 1972. 6. 프랑크푸르트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1982. 1. 뮌스터대학에서 사회학 교수자격을 각 취득하고, 1993. 8. 18. 독일국적을 취득한 후, 1994. 8.부터 베를린 소재 훔볼트대학에서 한국학 초빙교수로 재직하다가 1998. 3.부터 뮌스터대학에서 사회학 초빙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자로서,
북한공산집단은 정부를 참칭하고 국가를 변란할 목적으로 불법조직된 반국가단체로서 대남적화통일을 기본목표로 설정하고, 남한사회는 미제국주의에 종속된 식민지로서 모든 인민이 수탈당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자주적 통일과 인민해방을 위해서는 미제국주의 침략자들과 남한정권을 타도함으로써 민족해방인민민주주주의혁명을 이룩하여야 한다는 전략 아래, 이를 위하여 남한의 노동자˙농민 등 피지배계급을 축으로 하여 청년학생˙지식인˙중소상인 등 모든 애국적 역량을 망라한 반미 구국통일전선을 구축하고, 폭력·비폭력, 합법·반합법 등의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반미˙반파쇼투쟁을 전개하여야 한다고 선전˙선동하는 한편, 김일성˙김정일의 독재˙세습체제를 정당화하고 대남적화통일역량을 강화시키기 위하여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북한사회에 맞게 창조적으로 적용하였다는 소위 주체사상을 널리 전파하여야 한다는 기도 하에, 해외유학생 또는 남한의 친북세력들을 입북시켜 주체사상을 학습시키고, 합법을 가장하여 국내외의 각종 간행물 등에 주체사상을 찬양하는 글을 게재하거나, 주체사상의 정당성과 우수성을 주장하고 홍보하는 국제학술회의를 개최하는 등 모든 수단˙방법을 동원하여 주체사상의 확산에 주력하면서 주체사상만이 미제의 식민지 예속에서 벗어나기 위한 남조선 인민들의 자주˙민주˙통일의 앞길을 밝혀주는 투쟁이념이라고 규정하고, 특히 1980년대 후반부터는 동구 사회주의 국가들의 몰락에도 불구하고 김일성과 김정일의 영도 하에 소위 ‘우리식 사회주의’를 구현하고 있는 북한은 결코 붕괴되지 않는다고 지속적으로 선전하면서 그 동조세력을 규합하려고 끊임없이 획책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1. 반국가단체에 가입하여 간부 기타 지도적 임무에 종사하면 처벌받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 1973. 8. 독일 뮌스터 소재 뮌스터대학 앞 커피숍에서 유럽지역 북한 공작원으로 활동하는 공소외 이재원으로부터 “유신독재로 혼란스러운 남한에 비해 북한은 경제적인 면은 물론 모든 면에서 크게 발전해 있는 상황이므로 조국통일의 구심점은 북한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직접 북한에 가서 그 발전된 모습을 한 번 보고 오는 것이 어떻겠는가”라는 내용의 입북권유를 받고 이를 승낙한 후, 1973. 9. 위 이재원의 안내를 받아 모스크바 주재 북한대사관에 도착하여 성명미상 지도원과 함께 항공편으로 평양 순안비행장에 도착, 평양 근교 명칭 미상 초대소에서 2주간 체류하면서,
- 주체철학 및 김일성 혁명 역사 등 사상 교양학습을 받고,
- 북한의 대남공작기관인 연락부 소속 성명미상 부부장으로부터 조선노동당에 입당하라는 제의를 받고, 입당원서 및 신상명세서 등을 작성하여 동인에게 제출한 후 선서 및 충성맹세문을 낭독하는 등의 절차를 거쳐 반국가단체인 북한 공산집단의 지도조직인 조선노동당(이하 노동당으로 약칭)에 가입하고,
- 위 부부장으로부터 “독일에 가면 유학생이나 반정부 활동을 하는 애국인사들을 규합해서 조국 통일 사업을 공개적으로 추진하라”는 지령과 함께 공작금 명목으로 미화 약 2,000달러를 교부받아 독일로 돌아온 후
○ 1974. 3. 1. 재독 교포 및 유학생 등 160여명과 함께 친북단체인「민주사회건설협의회(민건협)」를 결성하여 1대, 2대, 5대, 6대 의장에 취임하여 그 임무를 수행하는 등 친북활동을 적극 전개하고,
○ 1977. 8. 11.부터 8. 14.까지 일본 동경 소재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사무실에서 개최된 소위 ‘해외민주운동단체 대표자회의’에 공소외 윤이상, 같은 김길순 등과 함께 참석하여 국제적인 반한 연대투쟁을 목적으로 「민주민족통일 해외한국인연합(한민련)」을 결성하고,
○ 1979. 10. 동베를린 주재 북한대사관 소속 최 명미상 지도원의 안내로 다시 북한에 들어가 평양 소재 명칭 미상 초대소에서 약 1주일간 체류하면서,
- 북한 외교부장 허담을 면담하고,
- 노동당의 지도 및 통제를 받는 사회과학원 부소장 성명미상 등으로부터 주체사상을 학습받고,
- 전 명미상 지도원에게 “그 동안 민건협 초대 및 2대 의장으로 활동하면서 조직을 성장시키려고 노력하였으나, 3대 윤이상, 4대 이영빈 의장 시기에 고압적인 자세로 노동자들이 이탈하였고, 이영빈 의장의 경우 금전적인 부담을 끼쳐 조직이 사실상 와해 직전에 이르게 되었다. 그래서 회원들의 추대로 다시 5대˙6대 의장을 맡게 되었다”라는 내용의 민건협 운영상황을 보고하고,
- 대외연락부 부부장 성명미상으로부터 “독일로 돌아가면 민건협을 잘 이끌고, 유학생 중 유능한 인재들을 잘 이끌어 달라”라는 지령과 함께 공작금 명목으로 미화 1,000달러 및 인삼주 등의 선물을 교부받고,
○ 1982. 2. 위 윤이상, 김길순 등과 함께 「한국학술연구원(KOFO)」을 설립하여 위 사회과학원으로부터 수령한 주체사상 관련 책자 등을 비치하여 관심 있는 유학생들의 학습용으로 사용하는 한편, 연구이사의 직책으로 자문과 강연을 하는 등 친북활동을 전개하고,
○ 1985. 8. 독일 북부도시 킬 해안가에서 공소외 오길남에게 “현재 남쪽 상황이 답답하므로 지금 우리가 기댈 언덕은 북한 밖에 없다. 경제학자로서 조국의 발전을 위하여 북한에 가서 활동해 보면 어떻겠는가”라고 입북을 권유하고, 같은 해 11. 베를린역 인근 레스토랑에서 위 오길남에게 “북한도 변해야 한다. 북한에 가서 경제학자로 활약해 주기 바란다”라고 재차 입북을 권유하여 동인으로 하여금 1985. 12. 13. 처와 자녀 2명을 대동하여 입북하게 하고,
○ 1987. 9. 26. 독일 서베를린 소재 사무실에서 위 윤이상, 김길순 등과 함께 남한에서의 민족해방인민민주주의혁명을 목표로 하는 친북단체 「재유럽 민주한인협의회(유럽민협)」를 결성하여 기관지 ‘민주조국’의 편집고문으로 활동하고,
○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가 결정되자, 서울올림픽 개최 반대를 주장하기 위하여 독일인 3인과 공저(共著)로 ‘평화로운 경기에 부적합한 나라, 남한(Kein Land fur friedliche Spiele, Sudkorea)''이라는 책을 발간하여 배포하고, 독일 일원을 돌아다니며 ‘88 올림픽 개최 반대 강연’을 하는 등 친북활동을 전개하고,
○ 1988. 9. 북한대사관 소속 진 명미상 지도원의 안내로 항공편으로 북한에 들어가 평양 근교 서재골 초대소에서 2주일 가량 체류하면서,
- 주체사상 등 사상 교양학습을 받고,
- 노동당 통일전선부 산하 조국평화통일위원회(약칭 조평통) 부위원장 전금철로부터 “독일에 돌아가면 조국통일을 위하여 힘쓰고, 유능하고 똑똑한 친구가 있으면 우리에게 연결시켜 달라”는 지령과 함께 공작금 명목으로 미화 1,000달러 및 인삼주 등의 선물을 교부받고,
○ 국내의 친북좌익세력들에게 ‘북한 바로알기’라는 명목으로 주체사상과 북한체제를 옹호하는 글을 기고하여 대남통일전선전술 역량을 강화하기로 마음먹고
1988. 12. 국내 월간지〈사회와 사상〉에 기고한 “북한을 어떻게 볼 것인가, 북한을 제대로 인식하기 위한 방법론”이라는 글에서 ‘지금까지 북한연구는 반공이데올로기와 자본주의 편견 아래 북한 실상을 왜곡시켜 왔다. … 북한실상을 바로 알기 위해서는 북한 내부의 시각에 따라 북한을 분석해야 하며, 북한 내부 시각을 알기 위해서는 주체사상 연구가 필수적이다’라고 주장하는 등 소위 「내재적 접근법」을 통하여 북한을 평가 및 이해할 것을 제시하고,
이에 영향을 받은 국내˙외 친북 세력들 사이에 ‘북한 바로알기’라는 미명 하에 주체사상 학습 분위기가 급격히 확산되도록 함과 동시에 1989년 「전국대학대표자협의회(전대협)」 소속 임수경(한국외대)을 위시하여, 1991년 박성희(경희대)˙성용승(건국대)이, 1994년 위 전대협을 계승한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 소속 최정남(서울대)이, 1995년 정민주(인천대 제적)˙이혜정(카톨릭대)이, 1996년 류세홍(조선대)˙도종화(연세대)가, 1998년 황선(덕성여대)˙김대원(건국대)이, 1999년에는 황혜로(연세대)와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범민련 남측본부)」고문 나창순 등 5명이 밀입북 투쟁을 전개하도록 하는 데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하고,
○ 1991. 5. 24. 위에서 본 바와 같이 내재적 접근법을 통한 주체사상 확산과 북한체제의 유지˙강화 및 그 동안 유럽에서의 친북활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북한 국가주석인 김일성을 단독 면담한 후 그 무렵 김일성의 지명에 의해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선임되고,
○ 1991. 6. 29.부터 6. 30.까지 독일 베를린에서 개최된「남˙북한 및 해외교포 범민족대회」준비회의에 참석하여 참석자들에게 “김일성 주석은 대단히 똑똑한 분이며, 북한주민이 고생하고 있는 것은 인정하나 이는 남북분단의 결과로 북한주민은 이에 따른 어려움을 잘 견디고 있다”는 내용의 발언을 하여 김일성 및 북한체제를 찬양하고,
○ 주체사상과 북한체제를 선전하기 위하여 내재적 접근법에 따라 작성된 기고문이나 서적을 ‘국내에 들여보내는 사업’을 하기로 마음먹고
- 1991. 6. 29.부터 7. 5.까지 3회에 걸쳐 한겨레신문에 「평양에서의 강의 (上)˙(中)˙(下)」라는 제목으로 북한방문기를 기고하면서
˙ 리송갑 교수는 북의 ‘수령’을 흡사 ‘절대군주’처럼 이해하고 있는데 이는 ‘수령론’의 본질을 잘못 이해하는 것으로 주체사회주의 사회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평등’과 ‘사랑’의 내용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수령과 인민의 관계는 사랑에 기초한 것이고 ‘사랑’ 없는 ‘평등’은 사회를 자칫하면 혼란으로 몰고 갈 수도 있다고 그는 설명하면서, 내가 어떤 글에서 ‘수령’을 막스 베버의 카리스마 이론을 들어 설명한 것에 대해서도 반론을 제기하였다.(1991. 6. 29. 평양에서의 강의(上))
˙ 나는 몇 번의 강연과 토론에서 북의 주체사상이 북의 내재적 요구에 의해서 설명되고 전개되어 왔으나, 온갖 사상조류가 밀려오고 밀려나가는 남한사회에서 이러한 사조들과 만나고 부딪혀서 그 생명력을 보여주었을 때만, 남북통일에 있어서도 주체사상의 위상은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하였다.(1991. 7. 2. 평양에서의 강의(中))
˙ 반면 조선의 실정에 맞게 전개된 ‘우리식 사회주의’는 혁명과 건설에서 주체사상을 중심으로 통일된 사상적 무장 위에서 전개되었기 때문에 외부세계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릴 염려가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내가 만난 북쪽 사람은 열이면 열 확신에 차서 주장했다.(1991. 7. 5. 평양에서의 강의(下))
등의 내용을 기술하여, 북한의 주체사상을 찬양하고,
- 1994. 5. 12.자 한겨레21에 ‘북한은 동독과 다르다’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하면서
˙ 반나치 투쟁의 대상인 나치도 독일 자체의 산물이기 때문에 정통성의 강도와 지속성에 있어서 북이 내세우는 항일 빨치산 전통이나, ‘조국해방전쟁’의 투쟁대상이던 일제나 미제에 대한 북의 인민이 갖는 공통적인 응집력을 바탕으로 하는 권력의 정통성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 동독사람들이 그들의 상대적인 소비생활의 결손을 동체제 자체의 문제로 환원시키면서도 문제해결을 개인주의적 차원에서 시도했다면, 북한사람들은 그들의 소비생활의 상대적 결핍은 미제의 압력과 봉쇄 그리고 군사적 긴장에 따른 군사적 대응조처로 인한 과도한 군사비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등의 내용을 기술하여, 북한 권력의 정통성을 찬양하는 한편, 북한의 실상을 호도하고,
- 1994. 7. 21.자 한겨레21에 ‘김주석 죽음 그 이후 북한은 곧 붕괴한다? - 엉뚱한 정보에나 의존하는 서글푼 시나리오’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하면서
˙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의 지배로부터 자기 민족을 해방시킨다는 의지와 실천은 김 주석의 전 생애를 규정한 시대정신이라고 말할 수 있다. 민족의 존엄과 자주를 모든 문제의 핵심에 놓고 사고하고 행동한다는 ‘주체’의 철학체계를 현실화한다는 문제는 그러나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니었다. … 민족해방과 강대국이 지배하는 세계질서를 개편하려는 제3세계와 비동맹세력은 바로 이러한 김 주석이 추구했던 ‘시대적 공동체’의 정신을 높이 평가했다고 말할 수 있다. … 김 주석의 탁월한 정치적 능력을 마지막으로 보여주었던 카터를 통한 미국과의 외교적 협상이 있기 전에 …
˙ 김 주석이 가졌던 카리스마적 권위가 김정일 비서에게는 없기 때문에 권력 내분이 일어나 북은 결국 붕괴할 것이라고 내다보는 이러한 발상은 그러나 지난 20년 이상 ‘후계자’ 문제 해결을 준비해 온 북한에 있어서 모든 정책의 실질적 기조는 이미 오래 전부터 김정일 비서체제를 중심으로 구축되어 왔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 그러나 북한에 있어서 군은 당의 ‘혁명무력’이라는 정치적 통제 속에서 줄곧 성장했는데, 이는 분단 상황이 군의 정치적 영향력을 높여주기도 했지만, ‘주한미군’의 절대적 영향력 밑에 성장한 남한 군부와는 다른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등의 내용을 기술하여, 주체사상과 김일성의 정치력을 찬양하는 한편 김정일 체제의 정당성을 선전하고,
- 1995. 5. 10. ‘도서출판 당대’를 통하여 『역사는 끝났는가』라는 책자를 발간하면서
˙ 북한의 ‘주체사회주의’ 또는 ‘우리식 사회주의’가 내걸고 있는 이상은 자주성의 원칙 위에 선 조선의 실정에 맞는 사회주의 건설이라고 흔히들 이야기한다.
˙ 필자가 북을 방문하고 받은 확실한 인상 하나는 독일식의 흡수통합적인 통일은 우리 한반도에서는 엄청난 유혈적 사태를 동반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 50년대 중반부터 주체를 내세우고 소련과 중국의 영향으로부터 일찍 벗어난 북한이 이야기하는 ‘주체사회주의’나 ‘우리식 사회주의’는 동독의 ‘동독색깔의 사회주의’와는 다른 구조와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 피땀으로 건설한 사회주의에 대한 애착도 크지만 ‘전쟁을 원하지 않지만 두려워하지는 않는다’라는 말이 전달하는 결정론적인 의지를 단순히 수사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서독에 의한 동독의 흡수로서 독일통일이 평화적으로 진행되었다는 경험을 한반도에서 반복되리라고 믿기 어려운 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 결론적으로 말해서 ‘우리식 사회주의’는 ‘동독색깔의 사회주의’와 비교해서 일찍부터 자주성을 강조했고, 중국의 ‘특색있는 사회주의’에 비하여 사상적 요새점령 문제를 물질적 요새점령 문제 이상으로 사회주의에 있어서 중요한 고리로 여기고 있다.
˙ 역사적인 인물이 ‘시대정신’의 산물이라는 말의 이면에는 역사적인 인물은 동시에 ‘시대적 공동체’의 정신을 만들어왔다는 적극적인 의미가 들어 있다. … 따라서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의 지배로부터 자기 민족을 해방시킨다는 의지와 실천은 김주석의 전생애를 규정한 ‘시대정신’이라고 말할 수 있다.
˙ 전후 세계질서를 좌지우지한 강대국에 대해서 자주성을 강조하고 자기 길을 걷겠다는 원칙에 따라 행동해 온 김주석을 강대국들은 싫어했지만, 민족의 자주와 존엄을 위해 독립 이후에도 계속 투쟁해 온 제3세계와 비동맹세력은 김주석을 그들 세계의 지도자로서 바라보았다.
˙ 사회주의 연구는 사회주의 이념과 현실을 내재적으로 즉 ‘안’으로부터 분석˙비판하여, 사회주의 사회가 자본주의 사회와는 다른 이념과 정책의 바탕 위에 서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이 사회주의가 이룩한 ‘성과’를 이 사회가 이미 설정한 이러한 이념에 비추어 검토˙비판해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 강력하게 대두되었다.
˙ 바로 이러한 계급모순, 민족모순의 동시적 해결과제가 북한 사회주의의 내재적 이념 즉 ‘주체사상’으로 표현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주체사상’이라는 북한 사회주의 이념을 전제하고 이 이념이 정치˙문화˙경제˙사회 전 분야에서 어떠한 구체적 결과를 가져왔는가 하는 내재적 비판 속에서 북한 사회주의 연구는 진행되어야 한다.
˙ 자주성의 실현이라는 문제는 철학은 물론 정치˙경제 그리고 국제관계를 관통하는 북한의 중심축이며 이는 남한을 보는 관점에서도 나타난다. 즉 남한을 자주화하는 것이 자주적 통일을 위한 전제이며 담보라는 것이다. 이러한 남한사회에 대한 인식은 우선 ‘남조선혁명’을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이라고 규정하는 데서도 잘 나타난다.
˙ 우선 주체사상의 내재적 검토는 남북통일을 위한 새로운 발상의 전환에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한다.
˙ 자주성˙창조성 그리고 의식성을 인간의 본질로 파악하는 주체사상은 그 형성과정이 보여주듯이, 식민지적 질곡으로부터 해방투쟁을 거쳐 국토분단이라는 상황 하에서 북한이 사회주의 혁명과 건설을 추진하는 데서 제기된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는 북한 사회주의의 총노선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 이 사상이 북한 이외의 세계에서도 통용될 수 있다는 보편적인 요구 자체를 포기한 것은 아니다. 제3세계의 여러 곳에 주체사상 연구소나 주체사상 연구회는 물론, 남한에서도 주사파라는 용어가 생겨날 정도로 주체사상이 요청하는 보편타당성에 대한 반응은 여러 가지로 나타나고 있다.
˙ 진정으로 위대한 사상은 바로 시련기에 진가를 드러낸다. 주체사상이 현재 북한이 처한 여러 난관을 돌파하는 강력한 무기로서 그 생명력을 보여줄 수 있을 때 통일 한반도의 역사 속에서는 물론 인간해방을 지향한 인류의 모든 사상적 노력의 좌표 위에도 정당한 평가에 따른 주체사상의 위상은 기록될 것이다.
˙ 김정일 체제는 현대 간부의 부정부패와 앞으로 심해질 수 있는 군부에 의한 지방분권화 문제를 가지고 있는 중국의 등소평 이후의 체제보다는 훨씬 안정된 체제라고 할 수 있다.
˙ 김 주석의 사망은 엄청난 충격이었지만 바로 이 충격이 ‘수령˙당˙인민대중’의 단결을 강화시키고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북한을 강하게 지배하고 있다.
˙ 한국의 수출주도의 성장정책은 … 공업의 농업에 대한 ‘내적인 착취’는 농업의 공업에 대한 일방적 예속화 과정으로 나타났다.
˙ 국가보안법과 노동악법은 자본과 노동 간의 갈등에 국가가 물리적으로 직접 개입하는 도구로 이용되었다.
˙ (남한의 상황) 특히 노동과 자본의 철저한 이중구조적 ‘분할’을 통해서 숙련노동, 남성노동력, 대기업 등을 자본주의의 ‘기능적 핵’으로 삼고 이에 종속된 미숙련노동, 여성노동력, 중소기업을 이러한 핵 기능에 철저히 종속시키고 계열화하는 현상은 학력과 성별, 임금격차는 물론 열세한 중소기업에 대한 빈약한 국가의 지원정책에도 나타났다.
등의 내용을 기술하여, 비록 동독 등 동구 사회주의국가가 몰락하였지만 사회주의가 아직 끝난 것은 아니고, 자주성을 상실하였던 동독과는 달리 북한은 주체사상에 의하여 자주성을 철저히 유지하고 있어 동독과는 다르며, 반동에 지나지 않는 남한의 지성들과는 달리 북한의 지성들은 사회주의를 고수하려는 의지가 있으므로 독일식의 흡수통일은 유혈사태를 초래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한편, 북한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하여는 내재적 접근법에 따라 주체사상을 먼저 이해할 것을 권유하면서 주체사상을 옹호하고 김일성과 김정일을 미화함과 동시에 남한사회를 미국에 종속되었다고 비방하고,
- 1995. 8. 15. 한겨레신문사를 통하여 『통일의 논리를 찾아서』라는 책자를 발간하면서
˙ 북한의 민족정통성은 … 첫째, 북한의 정체성은 자기의 언어를 갖고자 하는 주변부의 긴장된 세계관의 표현이다. 둘째 반파쇼적˙반식민지적 정통성은 외부의 적에 대한 투쟁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 북한에서 김 비서는 김 주석이 남긴 정치적 유산의 유일한 관리자로 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그 이외에 어떤 사람도 김 주석의 정치적 유산을 결정적으로 해석할 위치에 있지 않다. 김 비서의 이러한 특수한 위치로 인해 김 주석의 유훈을 그는 새롭게 해석할 수 있다. 아버지 유산의 관리자로서 아들의 위치는 전임자의 정책노선을 자의적으로 해석한다는 의혹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 서독을 앞선 근대화로, 동독을 뒤처진 근대화로 비교하는 공식이 한반도에서는 그대로 적용될 수 없다. 왜냐하면 북한에 비해 앞선 남한의 근대화가 결코 긍정적으로만 해석될 수 없기 때문이다.
˙ 김 주석에 대한 김정일의 절대적인 충성과 효심은 전체 인민의 귀감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 북한사회에서 김 주석은 유일무이한 인격으로서 지역이나 사회계층의 차이를 넘어선 강한 공감대를 결집해 낼 수 있었다. 김 주석은 북한 사람들에게 칼 슈미트(Carl Sch-mitt)가 이야기하는 ‘대지에 뿌리 내린 빨치산(tellurische Partisanen)''의 덕목과 우리의 전통 속에서 특히 강조되고 있는 할아버지가 풍기는 따스함을 결합시킨 인격으로 보이고 있다.
˙ 북한과 남한의 진보세력은 민족과 민족주의라는 주제를 통해 그들의 정통성을 획득하려고 한다. “우리는 인민이다”라는 분노의 폭발이 북한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고 있는 반면에, 오히려 남한의 정치적 상황은 민중의 생존권 요구에 아직도 직면해 있다.
˙ 북한사회주의를 떠받치고 있는 정당성의 핵심인 주체사상은 제3세계 주변부라는 정체성에 대한 철저한 자기긍정으로 인하여 생긴 일련의 부정적인 결과에도 불구하고, 정치˙경제˙국방 등의 영역에서 자주와 자립을 고수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서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로 인한 엄청난 충격으로부터 그들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었다.
등의 내용을 기술하여, 남한은 대미종속에 의하여 민족정통성에 치명적인 결함이 있고, 북한은 외부의 적에 대한 투쟁으로 반파쇼적˙반식민지적 민족 정통성을 유지하고 있다고 평가하는 한편, 김정일을 미화하고 김정일 체제의 강고함과 정당성을 주장하고,
- 2000. 11. 9.자 시사저널에 ‘속도조절론 유감’이라는 제목으로 기고하면서
˙ 1953년의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치하는 문제는 국제법적으로는 북˙미간의 문제이다. 그래서, 주한미군 문제는 북˙미간의 협상 의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 문제가 동시에 한국군 지휘권 문제와 결부되었기에 남한과 미국간의 문제로 남을 수밖에 없다.
˙ 주한미군이 일종의 평화유지군으로서 남북한의 이해관계를 넘어설 수 없는 조건에서 주한미군의 존재를 납득했다는 이야기는 바로 남북관계와 북미관계 사이의 차이를 무시하는 데에 연유한다.
˙ 대남 관계 인력이 부족해 이산가족 상봉이 늦어지고 있다고 해도 믿지 않고, 남북 정상회담 이후에도 여전히 ‘한˙미˙일 공조체제’라는 단어가 신문지면을 장식하고 있다. 통일보다는 평화, 통일교육보다는 민족교육이 더 중요하다고 하지만, 이 말이 결국은 북을 ‘개혁’과 ‘개방’으로 유도하려는 전략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 해석될 소지가 많이 있는 그러한 불안정이 현재 남북관계를 지배하고 있다.
등의 내용을 기술하여, 한반도의 평화유지를 위한 주한미군의 실체적 역할을 전면 부인하고, 남한의 통일정책을 의도적으로 폄하하고,
- 2002. 10. 14. 한겨레신문사를 통하여 『경계인의 사색』이라는 책자를 발간하면서
˙ 유일 초강대국인 미국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북은 ‘선군영도’ 또는 ‘선군혁명로선’이 사회주의 전취물을 보호하는 생명선이라고 여기고 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그 동안 현지 시찰을 가장 많이 한 분야가 군사분야였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강한 군사력 없이는 사회주의 체제를 지켜나갈 수 없다는 확신이 분명히 드러난다.
˙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중심으로 한 ‘단결’은 가령 ‘신경제’의 신화를 배경으로 몰아친 남쪽의 개인중심 ‘벤처’열풍과는 분명히 다른 종류의 ‘동력’이다. 집단적 열정은 사회주의 혁명과 건설에서 북이 늘 강조해 온 원칙이지만, 새 세기를 맞은 북이 새로운 ‘관계체계’를 형성하는 데서도 포기할 수 없다고 보는 그러한 동력은 밖의 세계에게는 신화처럼 보인다. 그러나 계몽만이 신화가 되는 것이 아니라 신화도 계몽의 역할을 한다는 변증법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 서해교전 때 엄청난 인명피해와 물자 손실을 입은 북이 해안포의 발사준비를 끝내고도 끝내 발사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평양에서 들은 적이 있다. … 적어도 전쟁만은 일어나지 않도록 예방할 수 있는 소극적인 평화마저도 정말로 아쉬운 상황이다.
등의 내용을 기술하여, 북한이 남한과 달리 대외적으로 자주성을 유지한다고 평가하고, 나아가 극단적인 김정일 군사독재체제인 선군정치를 사회주의 체제 유지를 위한 생명선으로, 김정일을 북한체제 유지의 동력으로 각 미화하는 등 위 내재적 접근법을 빙자하여 주체사상에 기초한 북한의 주의˙주장을 지속적으로 전파하고,
○ 1992년부터 1994년까지 북한으로부터 매년 공작금 명목으로 미화 2~3만달러를 수수하여, 1987. 10. 폐쇄되었던 위 「한국학술연구원」을 재개설하여 그 운영자금으로 사용하는 한편 피고인의 개인적 활동자금에 충당하고,
○ 1994. 7. 11. 베를린 주재 북한 이익대표부 소속 공작원인 송룡욱으로부터 김일성 주석의 사망과 관련하여 “주석님 장례식에 참석하고 싶어 하는 지원자가 많이 있지만 다른 사람은 못 가도 송선생은 장의위원에 선임되었기 때문에 꼭 가야한다”는 지령을 전달받고, 같은 달 13. 모스크바를 경유하여 항공편으로 북한에 들어가, 「국가장의위원회」서열 23위에 등재된 ‘김철수’라는 가명의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 자격으로,
- 같은 달 14. 김일성 시신이 안치된 평양 소재 금수산 의사당에서 김정일을 만나 조문하고,
- 같은 달 19. 위 금수산 의사당에서 개최된 김일성 장례식 행사에 참석하고,
- 같은 달 20. 평양 소재 김일성 광장에서 개최된 김일성 추도식 및 목란관에서 개최된 ‘장례식 참석 해외동포들을 위한 위로연’에 참석하고,
○ 1994. 8. 하순 일자미상경 독일 베를린에서 개최된「제16차 세계정치학회」회의에 참석, 서울대학교 교수 길승흠으로부터 “1995년 해방 50주년을 맞아 통일관련 문제를 주제로 한 남북한 학자들의 공동세미나 개최 가능성을 북한측에 알아봐 달라”는 부탁을 받고, 노동당의 대남담당 비서 겸 통일전선부장인 김용순과 국제담당 비서인 황장엽 등에게 공동세미나를 개최하자고 요청하여 동인들로부터 승인을 받은 후, 1994. 10. 일자미상경 위 길승흠에게 “북한의 황장엽과 김용순을 접촉한 결과, 상당히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으니 이 일을 보다 구체화했으면 좋겠다”라는 의사를 전달하는 등 북한이 대남통일전선전술의 역량을 강화하는 방법의 하나로 위 통일학술회의에 참가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남조선 것들과 서방반동들이 공화국을 악랄하게 비방중상 선전하면서 공세적으로 나올 때 가만히 있지 말고 맞받아 공세적으로 나가 남조선이나 서방 것들이 조국의 목소리를 직접 듣게 하기 위하여” 통일학술회의를 주도하기로 마음먹고
- 1995. 2. 28.부터 3. 11.까지 북한에 들어가, 위 김용순과 남˙북˙해외의 학자들이 참여하는 통일학술회의 개최문제를 협의하고, 동인으로부터 통일학술회의에 북한의 학자를 파견하겠으며, 회의장소는 북경으로 하라는 지령을 받고,
- 1995. 6. 4부터 같은 달 6.까지 중국 북경에서 위 길승흠 및 건국대학교 교수 백영철과 위 사회과학원 산하 통일문제연구소 부소장으로 위장한 통일전선부 소속 공작원 김경남, 사회과학원 연구사로 위장한 통일전선부 소속 공작원 김관기를 만나 위 학술회의 관련 예비회담을 개최하여
˙ 남북한 통일 관련 공동세미나 명칭은 「남˙북˙해외학자 통일학술회의」로 한다.
˙ 위 통일학술회의는 1995. 7. 31~8. 1. 북경 쉐라톤호텔(長城大飯店)에서 개최한다.
˙ 참석 대상은 남한학자 15명, 북한학자 6명 및 해외학자 6명으로 한다.
˙ 회의 주제는 ‘통일 3대원칙’, ‘통일방식’, ‘남북 화해협력 방안’ 등으로 한다.
등을 결정하고,
- 1995. 7. 31.부터 8. 1.까지 중국 북경 쉐라톤호텔(長城大飯店)에서 남˙북˙해외학자 26명이 참가한 가운데 ‘통일의 원칙과 화해협력’이라는 주제로 개최된 「제1차 남˙북˙해외학자 통일학술회의」에 해외대표단 단장으로 참석한바, 위 회의과정에서
˙ 북한 통일문제연구소 부소장인 김구식은 ‘조국통일 기본원칙과 민족대단결’이라는 제목으로 “… 조국통일을 위한 투쟁에서 사상과 리념, 제도와 신앙을 달리하는 북˙남˙해외의 모든 사람들이 힘을 합치고 발걸음을 맞추어 나가기 위하여는 공동의 통일강령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조국통일강령에 대해 말할 때 민족의 태양이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 주석님께서 밝혀주신 조국통일강령을 생각하게 됩니다”라고 말하면서 김일성이 제안한 조국통일 3대 헌장(조국통일 3대원칙, 전민족대단결 10대 강령, 고려민주공화국 창립방안) 등 북한의 통일방안에 대해 선전하고,
˙ 피고인은 토론과정에서 “… 그래서 그러한 전반적인 문제를 볼 때 역시 연방제적 구조라는 체제와 민족국가라는 우리의 공통의 이상을 손상하지 않으면서 그러한 두개의 체제와 하나의 민족국가를 동시에 이룰 수 있는 구성적인 조건을 이제는 마련해야 되지 않겠는가라고 생각합니다. …” 등의 발언을 하고,
˙ 북한 조국통일연구원 실장인 박동근은 ‘조국통일방안의 모색’이라는 주제로 “여러분들도 다 잘 알고 계시는 바와 같이 경애하는 수령님께서는 영생불멸의 주체사상에 기초하시어 조국통일에 관한 사상과 리론을 전면적으로 밝히시고 특히 우리나라의 구체적인 실정으로부터 출발하시어 련방제 방식으로 조국을 통일할 데 대한 리론을 독창적으로 밝히셨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역시 조국통일 3대원칙 등 북한의 통일방안을 선전하는 발언을 하는 등으로 진행된 「제1차 남˙북˙해외학자 통일학술회의」를 주도하고,
- 1995. 8. 5.부터 같은 달 27.까지 및 1996. 3. 17.부터 1주일동안 각 북한에 들어가 위 김경남˙김관기 등과 「제2차 남˙북˙해외학자 통일학술회의」개최문제를 협의하고,
- 1996. 9. 13.부터 9. 15.까지 중국 북경 쉐라톤호텔(長城大飯店)에서 남˙북˙해외학자 34명이 참석한 가운데 ‘민족통일의 전망과 과제’라는 주제로 개최된 「제2차 남˙북˙해외학자 통일학술회의」에 해외대표단 단장으로 참석한바, 위 회의과정에서
˙ 위 김구식은 “… 우리 민족의 영원한 태양이시며 세기적 위인이신 김일성 주석께서는 어떤 사회력사적 운동에서든지 운동주체를 단합시키고 그 역할을 높여야 승리할 수 있다는 원리에 기초하여 일찍이 민족대단결사상, 민족통일전선사상을 창시하시고 그것을 빛나게 구현해 오시였으며, 1993년 4월에는 조국통일을 위한 전민족대단결 10대강령을 마련해 주시였다. … 위대한 영도자 김정일 장군께서는 어버이수령님의 민족통일전선사상과 통일유훈을 관철하기 위하여 전민족대단결 10대강령의 기치 밑에 온 민족을 단합시키는 데 불면불휴의 로고와 심혈을 기울이고 계시며, …”라는 등으로 김일성˙김정일 부자의 통일정책을 찬양하는 발언을 하고,
˙ 김일성종합대학 교수인 최금춘은 “… 우리 민족의 위대한 수령 김일성 주석께서는 우리나라에 조성된 주객관적 조건을 예리하게 통찰하시고, 제도적 통일은 후대들에게 맡기고 민족적 통일을 실현할 데 대한 독창적인 사상을 제시하시였습니다. … 민족적 통일관은 사회제도보다 민족을 우위에 놓고 같은 핏줄, 같은 언어를 가진 단군민족의 민족적 공통점에 기초하여 민족의 자주성을 옹호하는 민족대단결 국가, 민족통일련방 국가를 세우는 것을 조국통일로 보는 견해입니다. …”라는 등 북한의 통일정책을 선전하는 발언을 하고,
˙ 위 김관기는 “… 세 번째로 집권세력과의 관계 문제인데, 조국통일을 위한 통일전선에서는 집권세력과도 상층통일전선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우리 7˙4공동성명발표 같은 것은 상층통일전선이 이루어진 하나의 실례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회변혁을 위한 통일전선에서는 집권세력은 어디까지나 투쟁대상으로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민족통일전선사상을 크게 두 가지 류형이라고 말 할 수 있는데 그런 류형을 똑똑히 구분하지 않으면 혼란이 조성되고, 그렇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여기 론의하고 어제 제가 기본 보고를 한 민족대단결사상은 어디까지나 조국통일을 위한 민족통일전선문제를 말씀드린 겁니다. …”라는 등 북한의 통일정책을 선전하는 발언을 하고,
˙ 북한 아세아태평양평화위원회 책임참사인 원동연은 “… 우리의 이러한 립장은 고려민주련방공화국창립방안과 전민족대단결 10대강령에 뚜렷히 명시되여 있습니다. 지금 북과 남 어느 누구도 자기의 제도와 정부를 양보하려 하지 않는 조건에서 이보다 더 합리적인 평화통일방안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북과 남이 대결과 전쟁을 피하고 평화적으로 나라의 통일을 실현하는 유일한 길은 련방제도통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일방이 타방에게 자기의 사상과 제도를 강요하려 한다면 그것은 불피코 대결과 충돌을 가져올 것이며 그것이 격화되면 전쟁으로 나갈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라는 등 북한의 연방제 통일방안을 찬양하는 발언을 하고,
˙ 북한 인민경제대학 교수인 정영춘은 ‘북남경제협력과 그 실현에서 제기되는 몇가지 문제’라는 제목으로 “… 경애하는 김일성 주석께서는 전민족대단결 10대강령 제3조에서 공존, 공영, 공리를 도모하고, 조국통일위업에 모든 것을 복종시키는 원칙에서 단결할 데 대한 단결의 원칙을 천명하시였습니다. 북과 남은 모든 경제활동에서 개별적인 계급, 계층이나 지역적 리익보다도 전민족의 공동의 리익을 더 귀중히 여기고 모든 것을 조국통일위업에 복족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경제협력사업은 누가 누구에게 혜택을 입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북남사이의 경제협력은 북과 남의 유무상통의 원칙에서 서로 도움을 주고, 도움을 받는 평등의 관계에서 진행하여야 합니다. …”라는 등 북한의 통일정책에 동조하는 발언을 하고,
˙ 피고인은 “… 통일은 우리의 희망이자 미래에 대한 책임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 세대의 희망을 많이 이야기했습니다. 우리 세대의 희망사항이 너무 많다 보니까 모든 것을 자기 중심, 자기 세대 중심으로 이야기해 왔는데, 이제는 미래에 대한 책임을 가지고 살아야 되지 않겠는가, 그러한 학문공동체가 또 되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라는 등 내용의 폐회사를 하는 등으로 진행된 「제2차 남˙북˙해외학자 통일학술회의」를 주도하고,
- 1997. 8. 29.부터 8. 30.까지 중국 북경 소재 캠핀스키호텔에서 남˙북˙해외학자 3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남북 화해협력을 위한 실천방안’이라는 주제로 개최된 「제 3차 남˙북˙해외학자 통일학술회의」에 해외대표단 단장으로 참석한바, 위 회의과정에서
˙ 피고인은 “… 우리 민족이 과연 주체적으로 통일을 이룩할 수 있는가라는 자조적인 질문까지 던지기도 합니다. 저는 독일 통일의 명암을 지켜보면서 주체적 역량은 결국 밑으로부터 분출하는 민족의 지향과 의지를 하나의 훌륭한 결과로서 묶어 낼 수 있는 지적, 도덕적 그리고 문화적 역량의 총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 등 내용으로 기조발제를 하고,
˙ 북측단장인 김철식(사회과학원 제1부원장)은 “… 우수한 민족성을 자랑해 온 우리 겨레가 남의 희생물로, 롱락물로 된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북에서는 최근에 주체성, 민족성을 지킬 데 대한 문제를 그 어느 때보다 특별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지난 6월에 우리의 경애하는 김정일 장군님의 중대 로작이 나왔으며 얼마 전에는 위대한 김일성 주석님의 조국통일 유훈을 관철할 데 대한 로작이 발표되었습니다. 이것은 조국통일정책 전반을 파악할 수 있으며 북을 아는 데 크게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 등 김정일의 통일정책을 선전하는 발언을 하고,
˙ 김일성종합대학 교수인 최성익은 “… 조국통일도 사람이 하는 것인 만큼 사상의 힘으로 해야 합니다. 그 사상의 힘이 바로 민족자주의식입니다. 민족자주의식을 높이기 위해서는 사대주의를 철저히 배격하여야 합니다. 사대주의는 민족적인 모든 것을 말살하는 독약입니다. 오늘 외세에 대한 사대주의가 통일문제 해결에 크게 해독을 끼치고 있는 실정에서 그것을 반대 배격하는 것은 특별히 중요한 문제로 제기됩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는 일찍이 사람이 사대주의를 하면 머저리가 되고 민족이 사대주의를 하면 나라가 망한다고 가르치시였습니다. 사대주의는 민족을 비굴하게 만들고 나라를 망하게 합니다. 사대주의는 권력유지와 일신의 부귀영화를 위하여 큰 나라와 결탁하고 그에 기생하는 반민족세력이 등장함으로써 생겨났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사대주의의 치욕스러운 력사는 삼국시기부터 시작되였습니다. 신라 사대층은 외세를 끌여들여 동족의 나라인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켰고 동아세아의 강대국으로 통합되여가던 민족통일의 대업을 좌절시켰습니다. …” 등 김정일의 통일정책을 선전하는 발언을 하고,
˙ 북한 조국통일연구원 책임연구사인 김만길은 ‘평화보장은 조국통일의 필수적 과제’라는 제목으로 “… 그러면 조선반도에서 전쟁을 방지하고 평화를 보장하기 위한 현실적 방도는 무엇이겠습니까? 첫째로, 민족의 힘을 합쳐 미국이 조선반도에서의 군사적 긴장을 높이는 것을 반대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력사적으로 미국은 우리 민족에 있어서 평화의 적이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미국의 침략과 간섭으로 전쟁의 수난에 시달릴 대로 시달려온 우리 민족입니다. 미국은 우리나라를 저들의 세계제패를 실현하는 데서 없어서는 안될 전략과 요충지로 간주하면서 군사적 긴장을 끊임없이 높여왔으며 그로 말미암아 우리 민족은 헤아릴 수 없는 불행과 고통을 강요당하였습니다. …” 등 미국이 통일의 장애물이라고 선전하는 발언을 하는 등으로 진행된 「제3차 남˙북˙해외학자 통일학술회의」를 주도하고,
- 1997. 9. 2.부터 9. 8.까지 북한에 들어가 위 김용순과 차기 통일 학술회의의 평양 개최 문제를 논의한 후 「제3차 남˙북˙해외학자 통일학술회의」의 상황을 보고하고,
- 1998. 1. 초순 일자미상경 북한에 들어가 위 김경남˙김관기 등과 「제4차 남˙북˙해외학자 통일학술회의」의 조기 개최 문제를 협의하여, 위 회의를 ‘1998. 2. 20.~2. 21. 북경 캠핀스키 호텔에서 개최’하기로 하고,
- 1998. 2. 20.부터 2. 21.까지 중국 북경 캠핀스키호텔에서 ‘남북 화해˙협력의 새 시대 모색’이라는 주제로 개최된 「제4차 남북해외학자통일학술회의」에 해외대표단 단장으로 참가한바, 그 회의과정에서
˙ 피고인은 “… 남쪽은 세계화가 갖고 올 긍정적인 결과만을 너무 기대하고 이에 대한 주체적 관리능력을 소홀히 하다가 소위 ‘IMF 사태’를 맞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 등 내용의 기조발제를 하고,
˙ 북한 조국통일연구원 실장인 김혁철은 ‘민족자주의 립장을 견지하는 것은 북남관계 개선의 근본 담보’라는 제목으로 “… 우리의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고전적으로 로작 <혁명과 건설에서 주체성과 민족성을 고수할 데 대하여>에서 주체성과 민족성을 지키는가 못 지키는가 하는 것은 나라와 민족의 흥망을 결정하는 사활적인 문제라고 하시면서 민족대단결도 조국통일도 바로 주체성과 민족성을 고수해 나가는 길에 있다는 귀중한 진리를 명철하게 밝혀주시였습니다. 참으로 민족자주냐 외세의존이냐 하는 것은 통일과 분렬, 애국과 매국을 가르는 시금석으로 됩니다. 이제는 남조선에서도 지난 기간의 북남관계사에서 심각한 교훈을 찾고 정책전환을 하여 진실로 민족을 위하고 민족에 의거하는, 민족에 의하는 민족자주의 립장으로 돌아서야 하며 동족과 손을 잡고 민족의 운명을 함께 개척하는 정책을 실시하여야 합니다. 민족자주적 립장으로 돌아서는 데서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외세에 대한 옳은 인식을 가지는 것입니다. 지금 적지 않은 사람들은 외세, 특히 미국을 <혈맹>으로, 심지어 <전쟁억제력>이라고까지 하면서 미국을 무턱대고 믿고 미국과의 관계를 잘 가지는 것을 <최우선적 과제>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러한 구시대적 관념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다고 우리는 인정합니다. 오늘 좋다가도 래일 변하는 것이 외세, 특히 대국들입니다. …” 등 북한의 통일정책을 선전하는 발언을 하고,
˙ 북한 통일신보사 논설원인 리상혁은 ‘정치적 대결 상태 해소는 북남관계 개선의 선차적 요구’라는 제목으로 “… 우리에 대하여 말한다면 우리는 자기의 사상과 제도를 지키는 데 필요한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수십년간 다져온 우리의 군사적 잠재력이 그 어떤 침략자도 타승할 수 있는 위력한 것이라는 데 대해서는 세계가 공인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우리에게는 수령, 당, 대중이 일심동체로 단합된 위력한 힘이 있습니다. 우리 인민들은 위대한 주체사상과 인민대중중심의 우리식 사회주의를 자기의 생명처럼 귀중히 여기고 있으며 그것을 위해서라면 생명도 기꺼이 바칠 결사의 각오로 충만되여 있습니다. 우리에게서는 <개혁, 개방>이라는 것도 바라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개혁할 것도 없고 개방할 것도 없습니다. …” 등 주체사상과 북한체제를 선전하는 발언을 하고,
˙ 김일성종합대학 교수인 장용해는 ‘긴장완화를 위한 실천적 대책’이라는 제목으로 “… 진정으로 평화를 원한다면 마땅히 북남 사이의 군사적 대치상태를 격화시키고 나라의 정세는 전쟁접경에로 끌어가는 무력증강과 외부로부터의 무기반입, 외세와의 대규모 합동군사연습을 중지해야 할 것입니다. 셋째로, 남조선에서 <남침위협>이란 말이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남조선에서 전쟁정책을 실시하고 무력을 증강하고 외부로부터 무기를 대대적으로 끌어들이고 대규모 합동군사연습을 벌리면서 내세우는 기본명분은 이른바 <남침위협>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남침위협>은 존재하지도 않으며 <남침>은 앞으로도 있을 수 없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미국의 호전계층과 그 추종세력도 잘 알고 있습니다. 사실대로 말해서 이제 우리나라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거기에는 미국뿐 아니라 <신미일방위지침>에 따라 일본자위대무력이 자동적으로 개입되게 되여 있습니다. 그리고 미국이 지난 조선전쟁과 만전쟁때와 같이 여러 추종국가들의 군대를 동원하게 되리라는 것은 의심할 바 없습니다. …” 등 한국과 미국이 전쟁을 책동하고 있다는 등의 발언을 하는 등으로 진행된 「제4차 남˙북˙해외학자 통일학술회의」를 주도하고,
- 1999. 1. 16.부터 1. 18.까지 및 1999. 6. 29.부터 7. 6.까지 각 북한에 들어가 위 김경남 등과 「제5차 남˙북˙해외학자 통일 학술회의」의 주제 선정과 참가 대상자 선별 문제 등을 협의하고,
- 1999. 10. 26.부터 10. 27.까지 북경 캠핀스키호텔 별관 옌사 센터 회의실에서 북한대표인 위 김경남 등 남˙북˙해외 학자 3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한반도 평화 정착과 통일’이라는 주제로 개최된 「제5차 남˙북˙해외학자 통일 학술회의」에 해외대표단 단장으로 참가한바, 위 회의과정에서
˙ 피고인은 “… 저는 우리 땅위에 이러한 상반된 정서와 분위기가 상당히 지배적이라는 현실에 주목하면서 전쟁도 평화도 아닌 이러한 비정상적인 오늘의 상황을 하루빨리 평화적 상태로 전환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국제적인 환경변화에 남북이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남북이 함께 ‘휴전체제를 평화체제’로 하루 빨리 전환시키는 노력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 등 내용의 기조발제를 하고,
˙ 북측단장으로 북한 사회정치학학회 부회장인 원동연은 “… 지금 북의 전체 인민들은 위대한 김정일 장군님의 현명한 령도 밑에 21세기의 가까운 년간에 기어이 나라의 통일을 실현하고 강성대국을 건설하기 위해 새로운 대진군 길을 힘차게 다그치고 있습니다. 올해에 조국통일운동분야에서는 8˙15를 계기로 북과 남, 해외 3자가 모여 전민족적 축제로 통일대축전을 성과적으로 진행하고 북남로동자들이 분단 이래 처음으로 평양에 모여 통일축구, 통일롱구를 하는 등 전례 없는 전진을 이룩하였습니다. 평양에는 경애하는 김일성주석의 생전의 조국통일 념원과 유훈, 불멸의 업적을 력사에 길이 전하기 위해 조국통일 3대헌장 기념비가 새로 건설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위대한 김정일 장군께서 나라의 통일문제에 얼마나 관심을 돌리고 계시며 그 실현을 위해 얼마나 커다란 심혈과 로고를 기울이고 계시는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 등 북한체제와 북한의 통일정책을 선전하는 내용의 기조발제를 하고,
˙ 이어서 진행된 회의에서 위 원동연은 다시 ‘우리나라 통일문제의 주체적 고찰과 그 해결의 정책적 요구’라는 제목으로 “… 우리나라 통일문제를 주체적 립장에서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정당한 통일방안은 북과 남의 사상과 제도를 그대로 두고 그 우에 통일국가를 세우는 련방제통일방안이라고 인정합니다. 련방제통일은 어느 일방의 리익이 침해될 것도 없고 서로 싸울 필요도 없으며 통일 후 혼란이 올 것도 없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련방제통일이 비현실적이고 미완성형이라고 반대하지만 한 나라 안에서 서로 다른 사상과 제도가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은 오늘 국제사회의 현실이 웅변적으로 말해주고 있으며 가깝게는 여기 중국의 홍콩귀속을 통해서도 립증되고 있습니다. …” 등 북한의 통일정책을 선전하는 발언을 하고,
˙ 북한 조국통일연구원 책임연구사인 김만길은 ‘자주평화는 조국통일의 선결과제’라는 제목으로 “… 우리 민족에게 전쟁의 참화를 들씌우려는 미국의 책동은 력사적으로 체계적으로 감행되었습니다. 미국은 공화국북반부를 무력으로 침공할 목적 밑에 이미 오래전부터《작전계획 5027》이라는 것을 세우고 침략의 기회를 엿보아왔으며 얼마 전에는 보다 위험한 북침전쟁계획인《작전계획 5027-98》을 새로 작성하고 그에 따라 조선반도에서 전쟁책동을 더욱 강화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있지도 않는《핵문제》를 들고 전면적으로 번질 수도 있는 녕변지역에 대한 타격을 공공연히 획책했던 미국은 그것이 수포로 돌아가자 또다시 우리의 인공지구위성 발사를 《미싸일발사》로 우겨대면서 압력소동을 벌리였으며 오늘에 와서는 터무니 없는 그 무슨《인권》문제라는 것까지 거들고 있는 형편입니다. …” 등 미국이 전쟁을 책동하고 있다고 선전하는 내용의 발언을 하고,
˙ 김일성종합대학 교수인 홍광일은 토론과정에서 “… 또 현실적으로 미국이 무력증강 책동에 매달리고 있는 엄중한 상황 속에서도 일방적으로 군축을 실현하였습니다. 오히려 미국이 세계도처에서 수십 차례 침략전쟁을 감행하였습니다. 남조선에 미군이 주둔하고 있기 때문에 동북아세아의 세력균형이 파괴되고 평화가 위협을 받고 있는 것이며, 따라서 이 지역에서 미군이 철수하면 동북아세아에서는 엄연히 세력균형이 잡히고, 평화가 깃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등 주한미군 철수를 선전하는 발언을 하는 등으로 진행된 「제5차 남˙북˙해외학자 통일학술회의」를 주도하고,
- 2000. 4. 8.부터 4. 11.까지, 2002. 12. 7.부터 12. 4.까지 등 모두 5회에 걸쳐 북한에 들어가 위 김경남 등과 「제6차 남˙북˙해외학자 통일 학술회의」개최 문제 등을 협의하고,
- 2003. 3. 26.부터 3. 27.까지 평양 소재 인민문화궁전에서 ‘평화와 통일’이라는 주제로 개최된 「제6차 남˙북˙해외학자 통일학술회의」에 해외대표단 단장으로 참석한바, 그 회의과정에서
˙ 피고인은 ‘중정무편(重正無偏)의 통일마당을 열며’라는 주제로, “… 드디어 오늘 우리들이 이 기쁨의 자리를 같이 할 수 있는 시각에, 그러나 우리 땅 위에 전쟁의 먹구름이 다시 몰려오는 것을 저는 느낍니다. 바늘 따라 실가는 것처럼 이라크 전쟁을 이야기 할 때면 반드시 등장하는 것이 이른바 우리 반도의 위기적 상황입니다. … 그런데 북과의 전쟁을 정당화하는 논리가 미국의 호전적인 매파뿐만이 아니라 유럽에서 이라크전쟁을 열렬하게 반대하는 사람들의 머리 속에까지 점차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특별히 주목해야 합니다. …” 등 내용으로 기조발제를 하고,
˙ 위 김구식은 ‘력사적인 6.15북남공동선언은 민족 최대의 숙원인 조국통일을 확고히 담보하는 민족공동의 통일강령’이라는 제목으로 “… 이것은 조국통일을 실현하는 데서 우리 민족이 주인의 지위를 확고히 차지하고 주인의 역할을 다할 데 대한 투철한 자주적, 창조적인 정신이고 그 어떤 외세의 간섭도 허용하지 않고 또 그 어떤 외세의존도 반대하는 반외세, 반사대정신입니다. … 력사적인 평양상봉의 전 과정은 위대한 장군님께서 투철한 민족자주사상과 해박한 지식, 비범한 령도실력과 통쾌한 유모아, 숭고한 인간미와 고상한 도덕성을 다 갖추신 절세의 애국자이시며 위인 중의 위인이시라는 것을 온 세상에 과시하였습니다. …” 등 김정일을 찬양하는 발언을 하는 등으로 진행된 「제6차 남˙북˙해외학자 통일학술회의」를 주도하는 등
1973. 9. 북한의 조선노동당에 가입한 이후, 1991. 5. 일자미상경 간부인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선임되어 김일성 장례식에 참석하고, 수년간 공작금을 지급받았으며, 북한의 대남통일전선사업의 일환으로 북한체제 찬양 및 주체사상 전파를 위한 저술활동을 전개하거나 통일학술회의를 주도함으로써,
정부를 참칭하고 국가를 변란할 목적으로 결성된 반국가단체인 북한공산집단의 지도조직인 조선노동당의 간부 기타 지도적 임무에 종사하고
2. 반국가단체의 지배 하에 있는 지역으로 탈출하면 처벌받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가. 1991. 3. 중순경 독일 베를린 소재 피고인의 집에서, 위 사회과학원으로부터 “해외에서 학문과 조국통일 운동에 늘 분망하신 선생님(피고인 지칭)을 우리 사회과학원이 초청하려 합니다. 우리는 선생과 만나 주체철학과 현대철학의 과제에 관한 주제로 토론을 갖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방문시기는 선생님의 편의에 따라 아무 때라도 좋겠지만 올해 5월 중에 방문하면 좋겠습니다”라는 내용의 초청장을 수령함으로써 북한에서 개최되는 ‘주체철학 토론회’에 참석하라는 지령을 받고
1991. 5. 10. 독일 베를린에서 항공편을 이용하여 북한에 들어가 평양 소재 명칭 미상 초대소에서 체류하면서,
○ 5. 13. 인민경제대학을 방문하여 북한 교육부장과 동대학 총장 김국훈의 접견을 받고, 동 대학 교원 및 학자들과 학술좌담회를 개최하고,
○ 5. 17. 위 사회과학원에서 북한 학자 20여명 참석하에 개최된 ‘주체철학의 발전과 현대철학의 과제’ 제하의 학술토론회에 참석하여, 북한 주체철학 학자들로부터
- 주체사상은 인간중심의 사상으로 자주성에 입각, 인간의 본질을 정확히 파악한 철학이다.
-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 창시하시고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께서 끊임없이 심화 발전시키고 계시는 주체철학이 현시대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가장 어렵고 복잡한 문제들에 정확한 해답을 주고 세계인민들이 나아갈 앞길을 밝혀주는 보편적인 사상이다.
라는 내용의 주체철학 강의를 듣고,
○ 5. 17.부터 5. 18까지 위 사회과학원 소속 학자들의 안내로 평양 소재 김일성 생가인 만경대와 평양시내 등지를 관광하면서, 위 만경대에서 안내 학자들에게 “위대한 수령님께서 조국과 인민 앞에 쌓아올리신 불멸의 혁명 업적에 감동을 금치 못하겠다”라고 말하는 등 김일성의 혁명 업적을 찬양하고, 혁명열사릉을 방문하여 전 조평통 위원장 겸 노동당 정치국 정위원인 허담(1991. 5. 11. 사망)의 묘 앞에서 애도의 뜻을 표시하고,
○ 5. 20. 위 사회과학원 소속 학자들의 안내로 평양 소재 김일성 종합대학을 참관하고, 그 자리에서 위 북한측 인사들에게
- 위대한 수령 김일성 주석과 친애하는 김정일 선생님께서 베풀고 계시는 크나큰 배려와 보살핌에 깊이 감동되었다.
- 이처럼 훌륭하고 현대적인 교육조건을 갖춘 대학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은 모두 재능 있고 쓸모 있는 민족간부로 자라날 것이다.
라고 말하는 등 김일성˙김정일 부자를 찬양하거나 북한 교육체제의 우월성에 동조하고,
이어서 위 대학 소속 철학박사 및 사회과학 부문 학자들이 참석한 ‘학술좌담회’ 자리에서 그들에게
- 광주 민주항쟁을 계기로 남조선의 지성인들과 인민들 속에 주체사상이 널리 파급되고 있다.
- 주사파 대열이 급격히 늘어났으며 주체의 진리가 자주, 민주, 통일을 위한 청년학생들과 인민들의 투쟁을 힘있게 추동하고 있다.
라고 말하는 등 한국사회를 비판함과 아울러 주체사상의 우수성을 주장하고,
○ 5. 24. 성명미상 지도원의 안내로 평안도 묘향산 소재 김일성 별장을 방문하여 그곳에 있던 김일성과 약 3시간동안 단독면담하면서, 그로부터
- 송 교수 같은 학자가 한 두 명이라도 더 있었으면 좋겠다.
- 우리 당원들이 자본주의에 대해서 너무 모르니까 앞으로 방학기간을 이용하여 북한에 와서 강의를 해줬으면 좋겠다.
라는 등의 지시를 받고, 이어서 통일 이후의 독일 경제문제, 동유럽 사회주의국가 체제와 북한 체제의 차이점, 남북한 UN가입 및 주한미군 보유 핵철수 문제, 한반도 비핵화 방안 등에 관하여 대화한 후 김일성과 기념촬영을 하고,
○ 그 직후 일시미상경 노동당 통일전선부 부부장 임동옥이 황장엽(전 노동당 국제담당 비서 겸「주체사상연구소」소장)에게
- 송 교수는 남한에서도 영향력이 크고 특히 독일에서 다년간 조직사업을 하다 보니 독일에 와 있는 남한 유학생들이 다 그를 따르고 있다.
- 위(김일성˙김정일 지칭)에서 송 교수를 크게 쓸 생각이고, 앞으로 송 교수의 이름을 ‘김철수’라고 부르기로 했다.
- 송 교수에게 주체사상 교육을 시켜야 하는데 통일전선부 산하에는 유능한 학자가 없기 때문에 주체사상 전문가가 많은 그쪽 부서에서 주체사상 전문학자를 동원해서 주체사상 교육을 시켜 달라.
등의 부탁을 하여, 이에 위 황장엽의 지시를 받은 북한 주체과학원 사회학연구소 소장 이성갑, 주체사상연구소 실장 박승덕 및 김일성종합대학 철학부장 김영춘 등으로부터 주체사상 학습을 받고,
○ 5. 29. 평양 소재 서재골 초대소에서 개최된 환송만찬에 참석하여 통일전선부 담당비서로부터 “송 선생의 학문에 큰 성과가 있기를 바란다”라는 등 내용의 만찬사를 듣고 성명미상자로부터 여행경비 명목으로 미화 약 2,000달러를 받은 후, 5. 30. 평양순안비행장에서 항공편을 이용하여 독일로 되돌아가고
나. 위 한국학술연구원 원장으로 활동하던 김길순이 1987년 위 연구원을 폐쇄하자 북한으로부터 운영자금을 받아 위 연구원을 재개설하기로 마음먹고, 베를린 주재 북한 이익대표부를 통하여 입북 희망의사를 전달하여 위 사회과학원으로부터 위 문제를 협의하기 위하여 입북하라는 지령을 받고
1991. 7. 일자미상경 위와 같은 방법으로 북한에 들어가 약 1주일동안 체류하면서, 노동당 대남담당 비서에게 한국학술연구원의 운영자금 지원을 요청하여 적극적으로 고려해 보겠다는 약속을 받고, 위 황장엽˙이성갑˙박승덕˙김영춘으로부터 주체사상 학습을 받고, 성명미상자로부터 여행경비 명목으로 미화 약 1,000달러 상당을 받은 후, 항공편을 이용하여 독일로 되돌아가고
다. 1992. 7. 초순경 위 피고인의 집에서 북한「조선사회과학자협회」부위원장 리지수(전 주체과학원 원장)로부터 “전번 방문 때 선생이 요구한 주체의 사회주의 정치˙경제˙철학과 관련한 자료를 준비하였습니다. 1992년 9월이나 10월 중 편리한 시기에 방문하면 우리 전문가들과 토론할 기회를 마련해 드리겠습니다”라는 내용의 초청장을 수령함으로써 평양에서 개최되는 ‘주체철학 토론회’에 참석하라는 지령을 받고
1992. 9. 일자미상경 위와 같은 방법으로 북한에 들어가 약 1주일동안 체류하면서, 사회과학원 소속 학자들을 만나 북한의 정치˙경제 등에 관한 토론을 한 후 그와 관련된 자료를 넘겨받고, 여행경비 명목으로 미화 약 1,000달러를 받은 후, 항공편을 이용하여 독일로 되돌아가고
라. 북한으로부터 주체사상 토론회 등에 참석하라는 지령을 받고
1993. 3. 19. 위와 같은 방법으로 북한에 들어가 평양 소재 명칭 미상 초대소에 체류하면서, 3. 23.경 지난 1991. 5. 1. 입북시 피고인에게 주체사상을 학습시킨 바 있는 위 황장엽 및 이성갑˙박승덕 등 노동당 간부 및 북한 학자들과 회합하여 김일성 주체사상에 관하여 좌담형식으로 학습을 받고, 3. 25. 장소 미상지에서 성명미상의 부부장이 주최한 만찬에 참석하여 성명미상자로부터 여행경비 명목으로 미화 약 1,000달러를 받은 후, 3. 26. 항공편을 이용하여 독일로 되돌아가고
마. 1994. 2. 초순경 위 피고인의 집에서 북한 사회과학원 제1부위원장 김철식으로부터 “겨레의 숙원인 통일을 위한 선생님의 여러 방면에 걸친 학술활동에 경의를 표합니다. 선생님의 저술과 관련된 전문가들의 자료 및 정보교환을 위해 조국을 방문하고 싶다는 의사를 받고 기쁘게 접수하였고 이에 따른 준비를 진행시키고 있습니다. 이곳의 사정으로 선생님의 조국 방문은 (1994년) 3월 중이면 더욱 좋겠습니다”라는 내용의 초청장을 수령함으로써 북한에서 개최되는 학술토론회에 참가하라는 지령을 받고
1994. 3. 12. 위와 같은 방법으로 북한에 들어가 평양 소재 명칭 미상 초대소에 체류하면서, 노동당 대남담당 비서인 김용순에게 피고인이 구상 중인 ‘독일과 한국 1945-1955’이라는 국제세미나에 북한측 대표가 참가하여 줄 것을 요청하고, 위 김철식 등 노동당 간부 및 학자들을 만나 남˙북한 및 독일 학자들의 언론 관련 세미나 개최문제를 협의한 후, 3. 20. 항공편을 이용하여 독일로 되돌아가고
바. 1994. 7. 11.경 독일 베를린 주재 북한 이익대표부에 근무하는 공작원 송룡욱으로부터 “김일성 주석이 서거했으므로 빨리 조국에 가야 한다. 주석님 장례식에 참석하고 싶어하는 지원자가 많이 있지만 다른 사람은 못 가도 송 선생은 장의위원에 선임되었기 때문에 꼭 가야 한다”라는 내용의 북한 「국가장의위원회」의 지시를 전달받음으로써 평양에서 개최되는 김일성 장례식에 참석하라는 지령을 받고
7. 13. 모스크바를 통하여 고려항공 특별기편으로 북한에 들어가 평양 근교 초대소에서 체류하면서, 7. 14. 김일성 시신이 안치된 위 금수산 의사당에서 김정일을 만나 조문하고, 7. 19.「국가장의위원회」서열 23위에 등재된 ‘김철수’라는 가명의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 자격으로 위 금수산 의사당에서 개최된 김일성 장례식에 참석하고, 7. 20. 평양 소재 김일성 광장에서 개최된 김일성 추도식에 참가하고, 같은 날 평양 소재 목란관에서 개최된 ‘장례식에 참석한 해외동포들을 위한 위로연’에 참석한 후, 7. 23. 항공편을 이용하여 독일로 되돌아감으로써
각 반국가단체인 북한 공산집단의 지령을 받거나 또는 목적수행을 협의하기 위하여 반국가단체의 지배 하에 있는 지역으로 탈출하고
3. 반국가단체나 그 구성원의 지령을 받거나 받을 목적으로 또는 그 목적수행을 협의하거나 협의하기 위하여 반국가단체의 지배 하에 있는 지역으로 탈출하면 처벌받고, 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정을 알면서 반국가단체 구성원 또는 그 지령을 받은 자와 회합˙통신 기타의 방법으로 연락을 하면 처벌받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가. 1995. 2. 일자미상경 위 피고인의 집에서 위 사회과학원으로부터 ‘남북해외학자들이 참여하는 학술회의 개최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북한으로 들어오라’는 취지의 지령을 받고
1995. 2. 28. 독일 베를린에서 항공편으로 북경을 경유하여 북한에 들어가 평양 소재 서재골초대소에서 체류하면서, 그 무렵 위 김용순을 만나 「남˙북˙해외학자 통일학술회의」에 관하여 논의하고, 동인으로부터 “해방 50주년을 맞이한 남북한 통일 관련 공동세미나에 북한에서는 사회과학원과 주체과학원 소속 학자 6~7명을 파견하겠으며, 회의장소는 제3국인 북경이 좋겠다”는 답변을 듣는 등의 활동을 전개한 후, 3. 11. 항공편을 이용하여 독일로 되돌아가고
나. 위와 같이 중국 북경에서「제1차 남˙북˙해외학자 통일학술회의」를 개최한 후, 그 결과를 보고하고 향후 동 학술회의의 정례화 방안 등을 협의하기 위하여 북한에 들어가기로 마음먹고
1995. 8. 5. 중국 북경에서 처 정정희 및 아들 2명과 함께 항공편으로 북한에 들어가 서재골초대소에서 체류하면서, 가족들과 함께 금강산, 묘향산, 백두산, 평양시내 일원 등지를 관광하고, 그 직후 위 김경남, 김관기, 사회과학원 역사부장 리종현 등을 만나 「남˙북˙해외학자 통일학술회의」의 정례화 여부 등에 대하여 논의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한 후, 같은 달 27. 항공편을 이용하여 독일로 돌아가고
다. 중국 북경에서 개최된 「제2차 남˙북˙해외학자 통일학술회의」 예비회담에 참석한 후 위 회담에 참석하였던 위 김관기 등과 함께 북한에 들어가기로 마음먹고
1996. 3. 17. 중국 북경에서 항공편으로 북한에 들어가 평양 소재 서재골초대소에 1주일 이내의 기간 동안 체류하면서, 위 김관기˙김문일 등을 만나 「제2차 남˙북˙해외학자 통일학술회의」개최문제를 협의하고, 같은 달 일자미상경 항공편을 이용하여 독일로 되돌아감으로써
각 반국가단체인 북한 공산집단의 지령을 받고 그 목적수행을 협의하기 위하여 반국가단체의 지배 하에 있는 지역으로 탈출하고
라. 1997. 6. 21. 16:00경 위 피고인의 집에서 베를린 주재 북한 이익대표부 소속 공작원 김경필로부터, “우리 대표부와「범유본」(「조국통일범민족연합유럽본부」지칭)을 비롯한 교포조직들이 위대한 수령님 서거 3돐 추모회를 조직하기 위한 준비사업을 하고 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 편지를 올리고, 우리나라 대표부에서 조직하는 추모회(김일성 추모회)에 참가하라”라는 말을 듣고, 위 김경필에게 “경애하는 장군님께 올리는 편지는 곧 준비할 것이며 대표부에서 조직하는 추모행사에는 행사 직전에 먼저 대표부에 가서 위대한 수령님의 초상화 앞에 꽃다발을 드리겠다. 학교수업과 시험문제 출제 때문에 시간을 낼 수 없어 조국에는 가지 못할 것 같다. 나 대신에 나의 이름으로 꽃다발을 바쳐 달라” 라고 말하면서 김일성 추모회 때 사용할 꽃 구입비로 독일화 500마르크(한화 30만원 상당)를 제공한 후, 위 김경필로부터 “송 선생이 10월경 학자토론회(「남˙북˙해외학자 통일학술회의」지칭)를 해 보자고 하는 것은 괜찮을 것 같으니 다시 구체적으로 안건을 제기해 주면 좋겠다”라는 말을 듣고, 다시 김경필에게 “연초부터 내가 제기한 토론회에 대하여 조국은 현 정세하에서는 적합하지 않다고 하여 그렇겠거니 생각하면서도 더 유리한 정세를 마련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지난 번에 토론회 문제를 다시 제기하였으나 이에 대해서는 아무런 답변도 없다. 이번에 내가 제기한 토론회와 관련하여 조국에서 구체적인 안건을 제기해 달라.”고 말하는 등 「제3차 남˙북˙해외학자 통일학술회의」개최 문제를 수용해 달라는 요청을 전달하고, 이어서 “나는 그래도 지금까지 30여년간 조국과 연계되어 일 해오고 있는데 조국과의 관계에서 윤이상처럼 조국에 대해 자신의 주견을 강하게 요구할 줄도 모르고 또 황석영처럼 조국에 가서 입으로 나팔을 불 줄도 모른다. 지난 시기 조국과 사업해 온 데 대해 총화해 보면서 눈물도 많이 흘렸다. 그 전에는 조국 일꾼들이 내가 제기한 문제들에 대해서 매우 신중하게 대해 주고 신속하게 연락을 보내오곤 하였다. 30여년간 연계되어 일해 온 나를 조국에서 멀리하면 나로서는 어디 갈 데가 없다. 그래서 이번 토론회를 놓고 많이 생각하던 중이다. 나의 신분위장을 위하여 가명을 쓰고 있는데 지금은 이전에 조국에 다닌 사실이 공개되었고 또 북남간의 토론회도 주관한다는 것을 사람들이 다 아는 상황에서 계속 가명을 쓰겠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조국에서는 나의 가명으로 되어 있는 문건들을 다 따로 정리하여 두고 이제부터는 나의 본명을 가지고 연계 연락을 해주기 바란다” 등의 말을 하여, 피고인이 김철수라는 가명을 사용한 사실과 관련하여 신분노출에 대비하기 위하여 피고인과 관련된 공작문건을 정리해 주고 향후 연락시 본명을 사용하게 해 달라는 등 신변보호 대책방안을 위 김경필을 통해 위 통일전선부에 요청한 후 김일성 추모식에 참석하라는 지령을 수행하기로 마음먹고
1997. 7. 7. 18:00경 반국가단체인 북한이 지배하는 지역인 독일 베를린 주재 북한 이익대표부에 들어가 그곳에서 개최된 ‘김일성 사망 3주기 추모식’에 처 정정희와 함께 참석하여, 김일성 초상화에 꽃다발을 헌화한 후 묵념하고, 위 김경필 등을 만나고
마. 위와 같이 중국 북경에서 「제3차 남˙북˙해외학자 통일학술회의」를 개최한 후 위 회의결과를 북한에 보고하기 위하여 북한에 들어가기로 마음먹고
1997. 9. 2. 중국 북경에서 항공편으로 북한에 들어가 평양 소재 서재골 초대소에서 체류하면서, 그 직후 위 김용순을 만나 「제3차 남˙북˙해외학자 통일학술회의」의 개최상황을 보고하고, 차기 통일학술회의의 평양 개최 문제를 논의한 후, 9. 8. 항공편을 이용하여 독일로 되돌아가고
바. 「제4차 남˙북˙해외학자 통일학술회의」의 조기개최 문제를 협의하기 위하여 북한에 들어가기로 마음먹고,
1998. 1. 초순 일자미상경 독일 베를린에서 항공편으로 북경을 경유하여 북한에 들어가 약 일주일동안 체류하면서, 위 김경남˙김관기 등을 만나 「제4차 남˙북˙해외학자 통일학술회의」의 조기 개최 문제를 협의하여, 위 회의를 ‘1998. 2. 20.~2. 21. 북경 캠핀스키호텔에서 개최’하기로 한 후, 같은 달 초순 일자미상경 항공편을 이용하여 독일로 되돌아가고
사. 위 사회과학원으로부터 「제5차 남˙북˙해외학자 통일학술회의」개최 문제를 협의하기 위하여 입북하라는 지령을 받고
1999. 1. 16. 위와 같은 방법으로 북한에 들어가 평양 소재 서재골 초대소에서 체류하면서, 위 김경남˙김관기 및 성명미상의 사회과학원 소속 학자 등을 만나 「제5차 남˙북˙해외학자 통일 학술회의」의 주제 선정과 참가 대상자 선별 문제 등을 협의한 후, 같은 달 18. 항공편을 이용하여 독일로 되돌아가고
아. 위 사회과학원으로부터 「제5차 남˙북˙해외학자 통일학술회의」 개최문제를 협의하기 위하여 입북하라는 지령을 받고
1999. 6. 29. 위와 같은 방법으로 북한에 들어가 평양 소재 서재골 초대소에서 체류하면서, 위 김경남 등을 만나 「제5차 남˙북˙해외학자 통일 학술회의」의 주제 선정과 참가 대상자 선별 문제 등을 협의한 후, 7. 6. 항공편을 이용하여 독일로 되돌아가고
자. 「제6차 남˙북˙해외학자 통일학술회의」를 평양에서 개최하는 문제와 관련된 남북간의 협의가 북한측의 미온적인 태도로 진척되지 아니하던 중, 위 백영철이 북한의 초청을 받아 평양 모란봉극장에서 개최 예정인 ‘2000 평화를 위한 국제음악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북한에 간다는 연락을 받고, 북한에 들어가 위 회의의 개최문제를 협의하기로 마음먹고
2000. 4. 8. 위와 같은 방법으로 북한에 들어가 평양 소재 서재골 초대소에서 체류하면서 위 백영철이 도착하기를 기다렸으나 북한측의 초청 취소로 백영철의 입북이 불가능하게 되자, 위 김경남˙김관기 등을 만나 「제6차 남˙북˙해외학자 통일학술회의」를 평양에서 개최하는 문제를 협의한 후, 4. 11. 항공편을 이용하여 독일로 되돌아가고
차. 「제6차 남˙북˙해외학자 통일학술회의」를 평양에서 개최하는 문제를 협의하기 위하여 북한에 들어가기로 마음먹고
2000. 12. 2. 위와 같은 방법으로 북한에 들어가 평양 소재 고려호텔에서 체류하면서, 위 김경남 등을 만나 「제6차 남˙북˙해외학자 통일 학술회의」를 2001년 2월이나 3월경 평양이나 금강산 호텔에서 개최하는 문제 등을 협의한 후, 12. 9. 항공편을 이용하여 독일로 되돌아가고
카. 「제6차 남˙북˙해외학자 통일학술회의」개최 문제에 대한 남북간의 협의가 북한측의 미온적인 반응으로 진척되지 아니하자 이 문제를 협의하기 위하여 북한에 들어가기로 마음먹고,
2001. 5. 29. 중국 북경에서 항공편으로 북한에 들어가 평양 소재 명칭 미상 초대소에서 체류하면서, 위 김경남˙김관기 등을 만나 위 통일학술회의 개최문제 등을 협의한 후, 같은 해 6. 2. 항공편을 이용하여 독일로 되돌아가고
타. 「제6차 남˙북˙해외학자 통일학술회의」를 개최하는 문제에 관하여 북한 당국자와 협의하기 위하여 북한에 들어가기로 마음먹고,
2002. 6. 11. 독일 베를린에서 항공편으로 북경을 경유하여 북한에 들어가 평양 소재 고려호텔에서 체류하면서, 위 김경남˙김관기 등 사회과학원 소속 북한학자 및 당국자들을 만나 「제6차 남˙북˙해외학자 통일 학술회의」를 평양과 서울 또는 금강산에서 개최하는 문제 등을 협의하고, 6. 14.부터 6. 15.까지 금강산에서 개최된 ‘6.15 공동선언 2돌 기념 민족통일대축전’ 행사에 참관인 자격으로 참석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한 후, 같은 달 18. 항공편을 이용하여 독일로 되돌아가고
파. 그 직후 위 피고인의 집 등지에서 위 백영철 등에게 「제6차 남˙북˙해외학자 통일학술회의」와 관련한 북한과의 협의결과를 통보하는 등 위 회의 개최를 준비하던 중, 위 백영철로부터 위 회의가 평양에서 개최되면 남한측에서 북한에 경제적인 지원을 할 수 있을 것 같으니 북한과 위 학술회의 개최문제를 협의해 달라는 연락을 받고, 이를 협의하기 위하여 북한에 들어가기로 마음먹고,
2002. 12. 7. 위와 같은 방법으로 북한에 들어가 평양 소재 고려호텔에서 체류하면서, 위 김경남, 사회과학원 원장 태형철, 사회과학원 산하 철학연구소장 전하철, 역사연구소장 허정호 등을 만나 「제 6차 남˙북˙해외학자 통일 학술회의」평양 개최 문제를 협의하여 2003. 1. 29.~1. 30. 북경에서 예비회담을 갖기로 결정한 후, 같은 달 14. 항공편을 이용하여 독일로 되돌아가고
하. 2003. 3. 일자미상경 독일 주재 북한대사관에 「제6차 남˙북˙해외학자 통일학술회의」에 참가하기 위하여 북한에 들어가겠다는 의사를 밝혀 그 직후 북한으로부터 북한에 들어오라는 지령을 받고
2003. 3. 22. 위와 같은 방법으로 북한에 들어가 평양 소재 고려호텔에서 체류하면서, 같은 달 26.부터 같은 달 27.까지 평양 소재 인민문화궁전에서 개최된 「제6차 남˙북˙해외학자 통일학술회의」에 참석한 후, 4. 1. 항공편을 이용하여 독일로 되돌아감으로써
각 반국가단체인 북한공산집단의 지령을 받거나 또는 목적수행을 협의하기 위하여 반국가단체의 지배 하에 있는 지역으로 탈출하고, 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정을 알면서 반국가단체 구성원과 회합하고
4. 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정을 알면서 반국가단체의 구성원 또는 그 지령을 받은 자와 회합˙통신 기타의 방법으로 연락을 하면 처벌을 받는다는 사실과 북한공산집단이 소위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을 높이 받들어 모시며 노동당의 위대성 선전을 강화하기 위한 사업’의 일환으로 김일성˙김정일의 생일, 노동당 창건기념일, 북한정권 수립기념일 등에 해외교포 등으로부터 축전을 받고 있으며 이를 통하여 북한 주민들이나 국내의 좌익세력들에게 북한정권의 정통성을 홍보하고 세습체제 유지의 방편으로 활용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매년 해당시기에 계속하여 축전을 보내던 중
가. 1996. 12. 일자미상경 위 피고인의 집에서 김정일과 북한 정권을 찬양하는 문구를 기재한 소위 ‘설 명절 축하편지’를 베를린 주재 북한 이익대표부를 통하여 김정일에게 발송하고, 그 직후 위 편지가 북한 언론에 보도되게 하고
나. 1997. 2. 일자미상경 위 피고인의 집에서 위와 같은 내용의 소위 ‘경애하는 장군님 탄생 55돐(1997. 2. 16.) 축하편지’를 위와 같은 방법으로 김정일에게 발송하고, 그 직후 위 편지가 북한 언론에 보도되게 하고
다. 1997. 4. 일자미상경 위 피고인의 집에서 위와 같은 문구를 기재한 소위 ‘위대한 수령님 탄생 85돐(1997. 4. 15.) 축하편지’를 위와 같은 방법으로 김정일에게 발송하고, 그 직후 위 편지가 북한 언론에 보도되게 하여
각 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정을 알면서 반국가단체 구성원과 연락하고
5. 피해자 황장엽이 1998. 6. “송두율 교수를 잘 알고 있다. … 북한 통치자들은 남한 학생들과 독일에 있는 남한 유학생들을 끌어당기기 위하여, 그리고 여러 가지 다른 목적에 이용하기 위하여 그를 ‘김철수’라는 가명 밑에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선출하고 김일성이 접견한 사진을 신문에 크게 보도한 바 있다. …”라는 내용이 기재된 ‘북한의 진실과 허위’라는 책자를 발간˙배포하자, 사실은 피고인이 제1항과 같은 경위로 조선노동당에 가입한 후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선출된 사실이 있고, ‘김철수’라는 가명을 사용한 사실이 있으며, 김일성 사망 직후 구성된 국가장의위원회의 장의위원 중 서열 23위의 ‘김철수’가 피고인임에도 불구하고,
1998. 10. 13. 서울 서초구 소재 서울지방법원에 피해자 황장엽을 상대로 ‘원고 송두율은 북한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이 아니며 또 김철수라는 가명을 사용한 적도 없고, 북한 노동당에 가입한 사실이 없음에도 피고 황장엽이 위와 같은 내용의 책자를 발간하여 원고가 북한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이라는 허위사실을 공표하여 원고의 명예를 훼손하였으니 피고는 원고에게 금 100,000,000원 및 1998. 7. 20.부터 위 사건 판결선고일까지는 연 5푼의, 그 다음날부터 다 갚을 때까지는 연 2할5푼의 각 비율에 의한 금원을 지급하라“는 취지의 명예훼손으로 인한 손해배상청구의 소를 제기하여 위 법원을 속이고 그 정을 모르는 위 법원 판사로 하여금 위와 같은 취지의 판결을 받아 위 금원을 편취하려 하였으나 2001. 8. 23. 원고 패소판결이 선고됨으로써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미수에 그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