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류 쏠리는 길가/속새에 물방울에/숨은 눈빛 황홀히 받아/풀섶 반짝이며 흐르던 꽃/희미하게 갈라진 길 앞에서/그대 한눈팔다 들어간 길/한참 되돌려 나올 때/그대의 숨은 눈빛 끌어내어/빛만 남기고 사라지던 꽃/마타리, 어수리, 궁궁이/그 뒤쪽 어딘가/자취 없이 흔들리던 꽃/그 꽃에 홀려 나는/곰배령 넘어 그대에게 간다.’ (신대철 시 ‘곰배령 넘어-무슨 꽃 1’)
꼭 무엇에 홀린 것 같다. 지천으로 핀 이름 모르는 야생화들이 나도 모르게 정신줄을 놓게 만든다. 그 덕에 10㎞나 되는 고갯길을 힘든줄 모르고 올랐다. 흔들리던 꽃에 홀려 곰배령 넘어 그대에게 가는 시인처럼 말이다.
곰배령의 계절은 느리게 흘러간다. 도시는 벌써 성큼 다가선 초여름 날씨로 덥다고 아우성이지만 이곳에는 봄이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산이 깊은 탓에 꽃 피는 시기도 평지보다 다소 늦다. 4월 복수초를 시작으로 얼레지, 한계령풀, 홀아비바람꽃, 매발톱, 은방울꽃 등 수많은 들꽃이 릴레이 달리기를 하듯 하나둘 피었다 지면서 끊임없이 들판을 장식한다.
사람들은 곰배령을 ‘천상의 화원’으로 부른다. 하늘만큼이나 높은 곳에 원시림이 울창하게 펼쳐진 가운데 피어난 형형색색의 꽃들은 야생화 전시장을 연상시킨다. 자연이 빚어낸 기막힌 풍경은 무심코 찾은 탐방객들의 혼을 빼놓기 일쑤다. 게다가 곰배령은 태초의 원시성이 그대로 살아있는 생태계의 보고다. 멸종위기식물 5종, 희귀식물 66종, 한국특산식물도 51종이나 자라는 것으로 조사됐다.
산림 유전자원 보호림으로 지정돼 22년 동안이나 입산이 금지된 곰배령이 일반 등산객들에게 개방된 건 2009년부터다. 이후 산림자원 보호와 산불 예방 차원에서 부분적으로 입산을 통제하거나 탐방 인원을 제한하고 있다. 지난해까지 1일 탐방객 수를 400명으로 제한해 운영하다 최근 600명으로 확대했다. 산림청 홈페이지(www.forest.go.kr)에서 예약을 해야 탐방이 허락된다.
곰배령에 가려면 점봉산 아래 진동리 설피마을을 지나야 한다. 겨울에 눈이 워낙 많이 내려 눈신발인 설피를 신고 다녀야 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불과 10여 년 전만 하더라도 겨울철 큰 눈이 내리면 처마 밑까지 눈이 쌓여 이웃집 가는 것도 어려웠고, 조선시대에는 세상을 등진 선비들이 은둔처로 찾아든 산간오지다.
이 설피마을 위에 곰배령생태관리센터가 있고 이곳에서 출입증을 받는 것으로 야생화숲 탐방이 시작된다. 곰배령 정상(1천164m)까지는 5km, 왕복 10km정도. 그리 부담스러운 거리가 아니고 경사가 완만해 아이들도 충분히 오를 수 있다. 5시간이면 왕복할 수 있지만 지천에 널린 야생화에 취해 걷다보면 하루 해가 짧게 느껴진다.
곰배령생태관리센터부터 산속에 자리한 강선마을까지는 계곡을 따라 1.7㎞의 평탄한 길이 이어진다. 계곡이 깊어질수록 숲은 더욱 짙어진다. 계곡에서 흘러 내려오는 물소리가 우렁차다. 강선마을에는 소나무 숲이 우거졌다. 총 아홉가구로 토착민과 이곳이 좋아 흘러들어 왔다가 그대로 눌러앉아 사는 이들도 있다. 막걸리, 부침개 등을 팔며 민박을 겸하는 집도 있다.
강선마을 끝머리에서 돌다리를 건너면 입산통제소. 본격적으로 곰배령이 펼쳐진다. 정상까지 가는 내내 간이화장실 하나 없는 원시림이 이어진다. 사람 한두 명 지나갈 정도의 좁은 산길 옆으로는 사람 손 타지 않은 수목들이 빽빽하게 그늘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 사이사이로 야생화들이 수줍은 듯 얼굴을 내민다. 코속을 자극하는 야생화 향기와 싱싱한 숲내음이 지친 심신을 위로했다.
깊은 숲속에서 만나는 부드럽고 완만한 오르막길이 산행을 더욱 즐겁게 해줬다. 짙은 숲그늘의 서늘한 기운이 피부로 전해져 온다. 그 느낌이 예사롭지 않다. 숲의 정령이 있다면 바로 이런 곳에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하면서 발걸음을 재촉했다.
걸음을 더할수록 숲은 점점 깊어진다. 신갈나무와 당단풍, 거제수나무, 박달나무 등 오래된 활엽수들이 하늘을 가리고 그 아래로는 고사리류의 양치식물인 관중이 넓게 퍼져있어 세상은 온통 초록바다다.
좁은 산길 옆으로 흐르는 계곡에는 맑은 물이 우렁찬 소리를 내며 달려가고 있다. 가깝게 들려오는 딱따구리 소리가 그렇게 경쾌할 수 없다. 언덕과 계곡을 타고 불어오는 산들바람은 또 어떤가. 물소리, 새소리, 바람소리를 들으면서 걷는 길이 참으로 행복했다. 이번 탐방길을 함께 따라나섰던 초등학생 아들녀석은 웬일로 힘들다는 한마디 불평도 없이 정상까지 앞서서 씩씩하게 걸었다. 자연이 빚은 아름다운 풍경에 마냥 신이 난 표정이다.
정상이 가까워지면 나무는 줄어들고 야생화들이 점점 많아진다. 그리고 마지막 가파른 비탈을 넘어서자 갑자기 하늘이 열렸다. 드디어 천상의 화원 곰배령에 다다른 것이다. ‘퉁퉁한 곰이 배를 벌렁 뒤집고 누워있는 모습’을 닮은 곰배령 널따란 둔덕에는 철따라 850여 종의 온갖 들꽃이 피었다가 진다. 수천 평의 초지에 야생화가 흐드러지면 작고 여린 들꽃들은 바람결을 좇아 고개를 흔든다.
이제 곧 곰배령 둔덕엔 여름 야생화들이 활짝 피어날 것이다. 곰배령 여름꽃은 7월말에서 8월 절정을 이룬다. 하얀 전호를 비롯해 미나리아재비, 쥐오줌풀, 매발톱 등 형형색색의 야생화들이 꽃물결치는 장관을 만나게 될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지면서 훼손을 피할 수 없다는 점이다. 사람들에 묻어온 질경이 같은 외부의 꽃씨로 인해 곰배령생태계가 조금씩 변하고 있다고 한다. 정상 나무데크는 바람길을 막아 어린 들꽃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다. 자연과 그곳에 기대어 사는 인간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법은 없을까.
‘점봉산 가는 길/오늘은 곰배령까지만 간다 거기/지천으로 피었다 동자꽃/동자꽃 안주하여 술 한잔 마신다/나도 마시고 안개도 마신다/물봉선도 취하고 노루귀도 취하고 바람꽃도 취한다/묻는다. 세상은 왜/감탄만으로 살 수 없는 것이냐고/없는 것이냐고/마을로 내려와 안개를 토했다.’(권혁소의 ‘곰배령’ 전문)
>> 찾아가기
•곰배령 입구는 대중교통으로 가기는 어려워 승용차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 서울~춘천 고속도로를 이용해서 동홍천IC로 나온다. 44번 국도를 따라 인제로 가다 철정 삼거리에서 우회전하고 451번 지방도를 따라가면 홍천~상남을 잇는 31번 국도가 나온다. 상남을 지나 418번 지방도를 따라가면 조침령 터널 입구가 나오고 이곳에서 좌회전해서 4km만 가면 설피 마을이다. 그 위에 곰배령생태관리센터
(033-463-8166)가 있다.
•그래도 버스로 간다면 현리까지 가서 택시를 타고 들어가거나 하루 2회에 불과한 진동리행 버스를 타야 한다. 동서울터미널∼현리 직행버스는 하루 4회 운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