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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큰믿음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겸손
중편 목 차
3. 신사도운동
<신사도 운동 시행자들의 사상을 따른다는 주장에 대해>
<오늘날도 사도가 존재한다는 주장에 대해>
4. 예언
5. 계시
<직통(직접) 계시에 대해>
<성경 이외 더 이상 직접적인 계시는 없다는 주장에 대해>
<성경과 방불한 계시를 받고 있다는 주장에 대해>
신사도운동
백석 : 오늘날에도 ‘사도’가 있다고 주장하며, 벌써 그 자신도 사도라고 한다. 그는 또한 신사도적 운동 시행자들의 사상을 따르고 있다.
통합 : 변승우씨는 최근 물의를 많이 일으키는 소위 <신사도운동>의 영향을 받은 자로...
합신 : 변승우 목사는 신사도 운동의 한국의 선두주자로서 지금도 사도가 있고 자기도 사도라고 믿고 있는 위험한 사상을 가지고 있다.
고신 : 오늘날에도 ‘사도’가 있다고 하며, 변씨 ‘자신도 사도’라고 한다. 그리고 그는 신사도적 운동 시행자들의 사상을 따르고 있다.
기성 : 은사론에 있어서 변 목사는 신사도개혁운동에 나서고 있다. 자신을 사도로 부르고 차별화하므로 권위주의적 카리스마 운동의 조짐을 보이고, 계시적 은사체험에 집중하고 있으므로 이것이 극단적 신비주의로 보여지며, 사도를 4가지 서열로 구분하거나 예수님을 사도의 반열에 두는 비성경적 사상을 가지고 있다.
<신사도 운동 시행자들의 사상을 따른다는 주장에 대해>
『보이지 않는 적 귀신』 p.24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한 전통적인 계시관』 p.70-71
『종교개혁보다 나를 개혁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목차 중
『종교개혁보다 나를 개혁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p.120-133
『종교개혁보다 나를 개혁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p.136-138
『터』 p.62-66
<오늘날도 사도가 존재한다는 주장에 대해>
『큰믿음교회에 대한 말말말들과 진실!』 p.59-70
『터』 p.44-53
『터』 p.53-62
<신사도 운동 시행자들의 사상을 따른다는 주장에 대해>
1. 『보이지 않는 적 귀신』 p.24, 32
(1) 피터 와그너
피터 와그너 박사님은 이 시대에 가장 존경받는 신학자 중의 한 분이며 가장 영향력 있는 신학자입니다. 그리고 학자로서는 보기 드물게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는 좋은 분입니다. 그런데 그분은 ‘특정 지역을 지배하는 악령들’이라는 제하의 글에서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마크 뷰벡(Mark Bubeck)은 사단을, 악령들의 위계 구조를 이끌어가고 있는 어두움의 세력의 총사령관으로 보고 있다. 그가 이해하고 있는 바에 따르면, 가장 힘 있는 존재는 ‘정사’(또는 왕)로서 막강한 세력을 지니고 상당 수준의 독립된 행동을 취한다. 그 아래 속한 ‘권세’는 정사보다 수효가 많으나, 세력이나 독립성 면에서 훨씬 뒤진다. 그 다음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은 하급 장교에 해당하며, 수많은 악령들을 거느리고 있다.”
이처럼 마크 뷰벡은 본문이 악령들을 높은 계급에서 낮은 계급 순으로 기록한 것으로 이해했는데, 피터 와그너 박사님의 다른 많은 책들을 읽어보면 이분 역시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견해를 각종 책과 설교에서 무수히 발견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견해가 널리 확산되면서 어느덧 이것이 정설이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에 대한 바른 해석이 아닙니다.
2.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한 전통적인 계시관』 p.70-71
사도들은 지금도 존재합니다. 저는 인간이 만든 교리가 아니라 성경말씀에 입각하여 오늘날도 사도와 선지자가 존재함을 확실히 믿습니다.
그런데 이 진리를 저보다 훨씬 먼저 알고 신사도운동을 벌이고 있는 분이 있습니다. 그분이 바로 WLI의 피터 와그너 박사님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분의 추종자는 아닙니다. 저는 단지 ‘성경’과 ‘성령’의 추종자입니다. 즉 어느 운동에서든 성경적인 것은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거부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한국의 신사도운동을 하는 측에서도 저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기준으로 걸러낼 것은 걸러내고, 그들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피터 와그너 박사님처럼 사도가 지금도 존재한다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그분의 가르침에 모두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가르침 중에 철저하게 성경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체험에 근거하여 이론을 만들어내고 성경으로 약간 덧칠만 한 가르침들이 제법 눈에 띄기 때문입니다. 저는 성경으로 입증되지 않는 한 어떤 체험이나 계시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완성되었고, 성경에 나오는 사도들과 동일한 권위를 가진 사도는 피터 와그너를 포함하여 지구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사도들은 성령의 조명에 의하여 사람의 계명으로 인해 손상된 진리를 성경대로 회복하고, 사도는 보냄을 받은 자이므로 하나님이 자신에게 이루라고 주신 일을 단계적으로 성취하고, 많은 교회들을 세우고 영적인 아비로서 따르는 교회와 목회자들을 지도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받는 계시나 체험이 성경과 동일한 권위를 가진 것이 아니며 성경을 기준으로 분별해야만 합니다.
3. 『종교개혁보다 나를 개혁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목차 중
2. 귀신들의 위계질서에 대한 그릇된 견해 . .................. 43
(1) 예수님이 전략적 수준의 영적 전쟁을 하라고 명령하신 일이 없습니다.
(2) 바울은 에베소서 6장 12절에서 신사도운동이 주장하는 전략적 수준의 영적 전쟁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습니다.
(3) 바울이 말한 견고한 진은 신사도운동에서 말하는 도시나 나라에 있는 마귀의 진이 아닙니다.
(4) 서신서에 나타나는 ‘전쟁’ 혹은 ‘전투’는 신사도운동에서 주장하는 전략적 수준의 영적 전쟁이 아닙니다.
(5) 예수님과 제자들은 전략적 수준의 영적 전쟁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6)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전략적 수준의 영적 전쟁을 하지 않았습니다.
(7) 사도 바울은 3차 선교여행 중 그 어느 도시에서도 전략적 수준의 영적 전쟁을 하지 않았습니다.
4. 『종교개혁보다 나를 개혁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p.120-133
이쯤에서 저는 신사도운동에 대해 이런 질문을 던져보고 싶습니다. 그들 중 다수는 진실하고 선량한 분들입니다. 그리고 사랑스럽고 존경스러운 분들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왜 성경에서 벗어나게 되었을까요? 왜 성경과 다른 높아진 생각과 이론에 사로잡히게 되었을까요? 왜 마귀의 견고한 진을 무너뜨리기 원했던 그들이 도리어 자기 안에 견고한 진을 가지게 되었을까요?
저는 그 대표적인 이유 중의 하나가 사도에 대한 반쪽짜리 지식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케네스 해긴 목사님의 책에 보면 예수님께서 사도에 대해 두 가지를 계시해주신 것이 나옵니다. 하나는 『나를 살리신 하나님』이라는 책에 나오는 사도가 오늘날도 존재한다는 계시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선물』이라는 책에 나오는 예수님과 12사도와 바울은 토대적인 사도로서 성경을 기록하여 교회의 토대를 놓았고, 지금은 이런 사도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계시입니다. 물론 아무 계시나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반드시 성경을 기준으로 엄격하게 분별하여 성경적인 것만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런데 이 계시들은 둘 다 지극히 성경적입니다.
그런데 피터 와그너 박사님은 케네스 해긴 목사님의 책에 나오는 사도가 오늘날도 존재한다는 것은 받아들였으나 토대적인 사도들은 오늘날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에는 충분히 주목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즉 하나만 알고 둘은 몰랐습니다. 만약 피터 와그너 박사님이 케네스 해긴 목사님의 사도에 대한 두 번째 계시에 주의했더라면 성경에 착념했을 것이고 현상이나 결과에 너무 집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그러지 못했고 성경이 아니라 현상이나 결과에 지나치게 집착했습니다. 그래서 생성된 이론이 전략적 수준의 영적 전쟁인 것입니다. 그분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토대적인 사도들과 동등한 자리에 올랐고, 성경에도 없는 영적 도해니 사도적인 네트워크니 전략적 수준의 영적 전쟁이니 하는 것들을 만들어내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큰 혼란과 문제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제가 자주 드리는 말씀인데, 성령의 은사와 성령께로부터 오는 계시를 인정하는 사람들이 잊어서는 안 되는 사활적으로 중요한 원칙이 있습니다. 교리는 성경에서 나와야지 계시나 체험에서 끌어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피터 와그너 박사님은 이 중요한 원칙을 범했습니다. 저는 그분이 이런 실수를 하게 된 이유 중 하나가 성경학자가 아니라 교회성장학자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피터 와그너 박사님은 성경을 깊이 연구한 성경학자가 아닙니다. 성장한 교회들을 찾아가 어떻게 성장했는지 그 비결을 조사하고 정리하여 발표한 교회성장학자입니다. 즉 성경이 아니라 성장한 교회나 부흥이 일어난 도시를 찾아가 결과를 보고 연구한 분입니다. 그런데 어떤 교회나 도시에 큰 부흥이 일어났다고 해서 그 부흥이 그들이 전한 말씀이나 사용한 방법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닙니다. 표적과 기사들은 단지 예수님과 복음을 확증합니다. 그리고 부흥이 일어난 것은 전한 메시지나 사역방법이 다 옳아서가 아니라 전해진 다른 바른 메시지와 함께 사용된 다른 성경적인 방법에 의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 점을 절대 간과하지 말아야 합니다.
잔 폴 잭슨 목사님 역시 저와 같은 지적을 했습니다.
“영적 전쟁 분야에서도 성공과 승리의 열매들이 분명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성공적인 결과는 그동안 영적 전쟁이 그 방법 면에서 옳았기 때문이 아니라, 기도와 금식으로 중보하는 성도들의 울부짖음이 점점 더 증가되고, 점점 더 하나가 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비슷한 사례로, 크리스천 사이언스(Christian Science)를 세운 메리 베이커 에디(Mary Baker Eddy)의 예가 있습니다. 그녀의 가르침 안에도 성경으로부터 비롯된 올바른 가르침들이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사역 가운데서 기적이 실제로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사역이나 그녀가 범한 오류들이 정당화될 수는 없습니다. 그 가르침의 대부분은 영지주의 이단사설에 속한 것이었습니다.
기적적인 현상들이 그녀의 사역을 정당화시킬 수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영적 전쟁에서 몇몇 표면적인 승리가 있었다 하더라도 과거의 방법과 시도들이 모두 지혜로운 것이었다고, 혹은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피터 와그너 박사님은 이 점을 놓쳤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아니라 부흥한 교회나 도시가 사용한 방법과 결과를 텍스트로 삼고 거기에서 이론을 끌어내어 조립한 후 성경으로 살짝 덧칠을 했습니다. 이것이 동기는 선하지만 피터 와그너 박사님이 범한 실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신사도운동에 대한 케네스 해긴 목사님의 다음과 같은 판단과 권면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적 가르침과 하나님의 말씀의 건전한 지혜의 부족이 그리스도의 몸 안에 우스운 일들을 하게 만든 것이고 그것들이 사람들을 상하게 한 것입니다. 그들은 너무 극단적이고, 사람들로 하여금 한쪽으로 치우쳐서 광신과 과다와 오류를 만들게 했기 때문에 이것은 해로운 것입니다…
‘오직 너는 바른 교훈에 합당한 것을 말하여’ (디도서 2:1)
사람들은 그들이 영적인 전쟁에 대하여 배우는 것이 교리적으로 건전한 것인지 주의해서 보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넘어선 전쟁에 대한 계시를 받아서 가르칩니다.
하나님의 말씀 밖에서는 어떤 계시도 없는 것입니다. 당신이 가진 어떤 계시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오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합니다. 사람들이 말씀을 떠날 때, 그들은 마귀들의 영역에 빠져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들은 성령을 따른다고 말은 합니다만 당신이 말씀을 떠나서 성령님을 따를 수는 없습니다. 말씀을 첫 번째로 두고 성령님을 두 번째로 두십시오!”
신사도운동에서 가르치는 것 중 옳은 것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중 일부는 분명 비성경적인 것이며 바른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피터 와그너 박사님은 우리나라의 조용기 목사님과 김선도 목사님을 비롯해서 세계적으로 가장 인맥이 넓은 분입니다. 그래서 국제적으로 수많은 교회지도자들이 신사도운동에 동참하거나 혹은 비호하여 세력이 커졌고, 그 결과 성령운동이나 영성운동을 하는 교회들은 도매금으로 신사도운동을 하는 교회로 오해를 받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실제로 거짓말쟁이인 이단사냥꾼들과 일부 시기하는 목사들은 알면서도 일부러 우리 교회를 신사도운동으로 몰아붙이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교회는 신사도운동의 가장 큰 피해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교계의 굴절된 시각과 달리, 성령운동이나 영성운동을 하는 교회들이 모두 신사도운동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증거 중의 하나로 미국 하버드와 영국 프린스턴에서 신학을 제대로 공부한 평택대학교 김동수 박사님은 최근 다음과 같은 글을 썼습니다.
“모든 성령운동은 신사도운동인가? 김동수 교수(평택대학교)
한국 복음주의권 목회자의 대표자 격인 이동원 목사는 최근 국내판 크리스채너티 투데이(Christianity Today) 2013년 3월호 사설에서 개혁주의적 복음주의자들에게 애정 어린 충고를 한마디 던진다. 자신의 신앙과 신학도 내용을 따지고 보면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고 말하면서, 하지만 개혁주의적 복음주의가 다른 신앙전통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는 보다 열린 복음주의로, 다른 교파의 신학에 대해서 보다 포용적으로 바뀌어야 함을 역설한다. 유독 한국의 개혁주의적 복음주의는 타 교파의 신학을 포용하지 못하고 정죄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는 미국의 복음주의의 대표적 신학교인 트리니티 신학교를 다니면서 열린 복음주의를 경험하고 이렇게 말한다고 했다.
최근에 한국 교회의 성령운동을 신사도운동이라는 카테고리로 몰아넣고 비판한 정이철의『신사도운동에 빠진 교회: 한국교회 속의 뒤틀린 성령운동』(서울: 새물결플러스, 2012)을 읽고 나도 이동원 목사와 같은 말을 저자에게 하고 싶다. 본서의 저자는 기독교 교파 신학의 다양성을 거의 인정하지 않고 매우 편협한 자신의 입장에서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거의 모든 성령운동을 비판하고 있다. 또 성서학자가 볼 때 그의 성서해석은 아마추어 수준을 약간 벗어난 정도로, 성서 본문 본래의 정황과 저자의 신학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한 교파 혹은 자신의 도그마적 해석에 빠져 있다. 본서는 성령운동이 성경이 말하는 정도를 벗어난 사례들에 대해 정당한 비판도 포함하고 있으나, 그가 전제하고 있는 도그마는 매우 편협하며, 그의 판단은 극단적으로 단정적인 경우가 많다.
나는 본서가 주장하는 구체적인 것보다도 본서의 저자가 당연시하고 있는 그의 전제를 비판하려고 한다. 이 책의 저자는 일종의 이데올로기적 도그마에 빠져 있다. 그것은 이런 것이다. (1) 성경의 성격은 하나님의 계시다. (2) 사도들의 역할은 계시를 기록하는 데 있었고, 계시는 사도들로 인해 종결되었다. (3) 대부분의 기적적인 은사들(치유는 예외?)은 사도들의 계시의 방편이었기 때문에 그것들은 사도들의 사라짐과 함께 그쳤다. (4) 그래서 이러한 은사들(사도, 예언자, 방언, 예언 등)이 지금도 계속된다고 하는 것은 사도들이 지금도 존재한다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들을 주장하는 것은 일종의 신사도운동이다. (5) 한국에서 많은 성령운동이 위와 같은 은사들을 인정하기에 그것들은 신사도운동일 수밖에 없다.
나는 다른 책들(『신약이 말하는 방언』, 『방언은 고귀한 하늘의 언어』)에서 이미 바울이 말하는 방언과 예언과 방언통역이 계시적 은사가 아니라는 것을 밝혔다. 그래서 여기서는 다른 문제에 집중해서 위 견해를 비판하려고 한다.
우선,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가 지금도 존재한다고 믿는 것과 신사도운동과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 신사도운동은 피터 와그너가 그의 책 『신사도적 교회로의 변화』(서울: 쉐키나, 2006)에서 제기한 대로 2000년 이후를 ‘제2의 사도시대’로 규정한 것에 근거한다. 아마도 정이철이 신사도운동이라고 몰아붙인 대부분의 인물이나 단체는 지금이 ‘제2의 사도시대’라고 본 와그너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신사도운동이라는 말을 너무 확대해서 해석하고 있다.
나는 성서에서 옛 언약 시대(구약시대)와 새 언약 시대(신약시대)를 명확히 구분했다고 본다(렘 31:33). 그리고 신약시대는 예수시대와 교회시대로 구분된다. 요한은 그 기점을 제자들이 성령을 받는 때라고 본다(요 7:39). 사실 이것들 외에 신약성경은 어떤 의미 있는 시대 구분도 하지 않는다. 사도시대와 그 이후 시대의 구분도 인위적일 뿐 성서가 우리에게 제시한 것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도시대를 교회시대에서 따로 떼어놓은 정이철이나 이 시대를 ‘제2의 사도시대’라고 보는 와그너의 구분은 모두 인위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교회사적으로 이런 구분은 가능하다고 본다. 하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성경이 이것을 구분하여 그에 따른 성령의 역사가 다르게 일어난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다음으로, 정이철의 문제는 그의 비판이 초자연적 은사중지론의 입장에서 은사가 지금도 있다고 하는 사람들을 비판한 것이다. 그가 여러 사람들을 신사도운동의 카테고리 안에 넣어 비판한 것은 결국 은사가 지금 지속된다고 믿고 그러한 신앙을 전개한 사람들에 대한 것이다. 그는 방언을 주장하는 김우현, 치유를 주장하는 손기철, 예언을 주장하는 김하중을 비판하는데, 그 내용을 보면 사실 이들 각각이 이러한 은사가 지금도 존재한다고 믿고 그러한 신앙 행동을 한다는 데 있다. 내가 볼 때 그가 비판한 많은 내용은 그가 오순절적 신앙 행습에 익숙하지 않고, 그러한 신앙 형태를 부정하는 것에서 온 것이다. 그는 치유는 인정하지만, 방언과 예언이 현재에 지속된다고 믿지 않는다. 이러한 은사들이 지금도 계속된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별 문제가 되지 않는 것들이 그에게는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본서 저자의 문제는 그는 하나의 정통 신앙이 있고, 그것으로 다른 신앙 형태를 다 재단해 낼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는 웨슬레는 인정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 이외에 알미니안적 신앙 전통에 대해서는 그는 매우 교조적으로 비판한다. 그에게 있어서 정통은 오직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따르는 자들로 보이며, 오순절 운동과 그것을 잇는 20세기 이후의 성령운동은 모두 비정통인 것처럼 보인다. 그에게 있어서 정통은 지금은 성경이 완성된 시대이기 때문에 성령으로부터 조명을 받아 성경을 이해하고 그에 따른 신앙생활을 하는 것, 그것만이다. 신약성경이 우리의 삶의 모델이며, 신약성경에 예수님이 약속한 성령의 역사들이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그대로 일어난다고 믿는 사람들은 비정통인 셈이다. 사도행전을 우리 신앙생활의 모델로 보고 사도행전을 읽는 오순절주의는 그에게 당연히 비정통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일대학교 신학부 조직신학 교수인 미로슬라브 볼프(M. Volf)는 최근 우리말로 번역된 그의 저서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서울: 국제제자훈련원, 2012)라는 책에서 성경의 목소리의 다양성과 통일성은 물론, 본문의 다의성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그 안에서도 다양성이 있고, 그 말씀의 해석 자체에도 어느 정도 다의성이 있는 것이다.
물론, 본문에 대해서 어떤 해석도 가능한 것은 아니다. 본문은 기호화된 의미이기 때문에 개연성 있는 해석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기독교인 간에 이런 정도의 합의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개신교 정통 안에는 개혁주의적 입장(장로교, 침례교 등)과 알미니안적 입장(감리교, 성결교, 오순절파) 등이 있고, 각자는 자신의 입장에서 성서를 해석하고 있다. 그 역사적 기원이나 내용으로 볼 때 모두 의미 있는 해석 전통이다.’
만약, 위와 같은 입장에서 본다면 성령의 초자연적인 은사를 인정하고 그것이 실제로 교회 사역에서 활용되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을 그 자체로 비판해서는 안 된다. 이들이 그것을 성경이 말한 대로 하고 있는지 우리는 늘 감시의 눈을 가지고 있어야 하지만 말이다. 구소련 출신 불신자 우주비행사와 신자였던 미국 우주비행사가 우주를 여행하고 와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다른 말을 했던 것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한 사람의 지적 체험과 한 교파 전통의 체험은 늘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보다 열린 마음으로, 또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것을 실제로 체험하고 성령의 은사를 보면 한국에서의 성령운동에 대해서 다른 시각으로 보게 될 것이다.”
제가 들은 바에 의하면 현재 교계 일부에서 조용기 목사님, (고)하용조 목사님, 저 그리고 손기철 장로님과 김하중 대사님 등이 신사도운동을 주도적으로 도입한 것처럼 오도하며 성령운동을 약화 내지는 이단시하려는 움직임이 있다고 합니다. 동시에 많은 교수들을 중심으로 이런 움직임에 신학적으로 대항하고 파쇄하려는 움직임도 자생적으로 일어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중보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저는 이 기회에 다시 한 번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우리 교회는 신사도운동을 하는 교회가 아닙니다! 그런데 신사도운동을 한다고 오해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난 2011년 “큰믿음교회는 신사도운동을 하는 교회가 아닙니다.”라는 제목의 글을 인터넷에 올린 일이 있습니다. 그 글을 여러분에게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우리 교회는 성경대로 사도의 존재를 인정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를 신사도운동을 하는 교회로 오해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큰믿음교회는 신사도운동을 하는 교회가 아닙니다. 그 증거로 저의 최신간 『1세기의 사도와 오늘날의 사도』 제3장 ‘사도의 직무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신사도운동’에 나오는 내용을 일부 여러분께 인용해드리겠습니다. ‘오늘날도 사도가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은 분들 중 세계적으로 가장 광범위하게 일하고 있는 분이 피터 와그너 박사님입니다. 이분은 세계적으로 엄청난 인맥과 조직을 가지고 큰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이분이 WLI를 통해 하시는 일을 흔히 ‘신사도운동’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 역시 사도의 존재를 인정하기 때문에 이단사냥꾼들은 우리 교회를 신사도운동을 하는 교회로 분류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사도의 존재를 인정한다고 해서 다 신사도운동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케네스 해긴 목사님은 피터 와그너 박사님보다도 먼저 오늘날도 사도가 존재한다는 것을 아신 분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믿음의 말씀운동’을 하는 분이지 신사도운동을 하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사도에 대하여 피터 와그너 박사님과 많은 부분 상반되는 생각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 외에도 빌리 그래함, 오랄 로버츠, 로렌 커닝햄, 후안 까를로스 오르띠즈… 등 국제적으로 저명한 많은 지도자들이 오늘날도 사도가 존재한다는 것에 동의하지만 그분들 역시 신사도운동을 하는 분들은 아닙니다.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이는 저를 가리켜 ‘신사도운동의 선두주자’라고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 증거로, 피터 와그너 박사님이 신사도운동에 대해 정리한 대표적인 책이 『신사도적 교회로의 변화』라는 책인데, 저는 그 책의 내용에 동의하지 않을 뿐 아니라 몇 가지 점에 있어서는 매우 위험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무에게도 권하지 않고 있습니다. 더욱이 최근에 저는 우리 교회 주보에 교회의 정체성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정리하여 명시했습니다.
‘큰믿음교회는?
하나, ‘말씀운동’을 하는 교회입니다.
즉,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딤전 3:15)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교리대로가 아니라 ‘성경의 문맥’(행 17:11)과 ‘성령의 조명’(요일 2:27)에 의지하여 성경대로만 설교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교회입니다.
둘, ‘성령운동’을 하는 교회입니다.
즉, 교회는 ‘예수님의 몸’(엡 1:23)으로서 예수님이 하신 일을 해야 함으로, 예수님이 성령의 기름부음에 의존하여 사역하신 것처럼(행 10:38) 성도들 역시 성령 충만을 받고 자기의 은사를 발전시켜서 예수님이 하신 일을 하고 그보다 큰일도 할 수 있도록 돕는 교회입니다(요 14:12).
셋, ‘신부운동’을 하는 교회입니다.
즉, 단순히 ‘성령운동’을 하는 교회가 아니라 ‘성경’(요 5:39)과 ‘성령’(요 15:26)이 증거하는 것이 예수님이므로, ‘예수님에 관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을’(요 17:3, 빌 3:8) 알고, 그분을 사랑하고 교제하고 본받고 동행하도록 오직 예수님께로 사람들을 인도하는 교회입니다(요 3:25-30).’”
지금까지 제가 쓴 60여 권의 책 중에 우리 교회의 정체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터』라는 책입니다. 그 책을 꼭 읽어보십시오! 그러면 우리 교회가 결코 신사도운동을 하는 교회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큰믿음교회는 절대로 신사도운동을 하는 교회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거짓 소문을 믿고 우리 교회를 오해하는 분들이 한 분도 없길 바랍니다.
5. 『종교개혁보다 나를 개혁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p.136-138
한편,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신사도운동에 대해서 끝으로 이런 말을 할 수밖에 없음을 참으로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슬프게도 신사도운동은 전략적인 수준의 영적 전쟁 관련 부분에서만 성경을 벗어난 것이 아닙니다. 또 다른 주제에서도 성경에서 심각하게 벗어났습니다.
제가 들은 바에 의하면, 신사도운동의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인 척 피어스는 ‘히브리적 관점에서 성경보기’에 매우 깊이 심취해 있는 분입니다. 또한 한국 WLI에서 집회를 인도한 바 있고 WLI KOREA에서 출판한 『너 자신을 자유케 하라!』의 저자인 로버트 하이들러 역시 ‘히브리적 관점에서 성경보기’ 사상에 깊이 물들어 있는 분입니다. 그분은 『메시아닉 교회 - 언약의 뿌리를 찾아서』라는 책을 썼고 이 책을 WLI KOREA에서 번역 출판했습니다. 그리고 척 피어스가 이 책의 머리말을 썼습니다.
그런데 이 책은 제가 총회장으로 있는 부흥 교단에 속해 있다가 ‘히브리적 관점에서 성경보기’에 미혹되어 교단을 탈퇴한 한 목사님이 저에게 꼭 읽어보라고 신신당부하며 선물한 책입니다. 그럴 만큼 이 책은 ‘히브리적 관점에서 성경보기’ 사상의 교과서와도 같은 책입니다. 여러분, 굳이 읽지 않으셔도 됩니다. 대략 목차만 보아도 이 책이 문제가 있는 책임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이 책 부록의 목차입니다.
“부록 1. 유대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
부록 2. 초대 교회의 유대성2장 귀신들의 위계질서에 대한 그릇된 견해 137
부록 3. 성경의 절기들을 기념하는 법
1부. 유월절
2부. 오순절
3부. 나팔절
4부. 속죄일
5부. 초막절
6부. 절기 날짜(2006-2020) 책 찾을 것”
이처럼 이 책은 “성경의 절기를 기념하는 법” 하면서 유월절, 오순절, 나팔절, 속죄일, 초막절을 어떻게 기념해야 하는지를 기술하고 있고, 해마다 바뀌는 절기날짜까지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른 것입니까? 절대 아닙니다. 그 증거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갈라디아서 4:10-11)
물론 ‘히브리적 관점에서 성경보기’의 추종자들은 율법이 폐해졌다는 성경말씀들이 모세의 율법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잘못 해석하고 가르친 전통들을 가리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들의 주장을 합리화하기 위한 작위적인 구분일 뿐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나오는
날과 달과 해와 절기가 유대교가 아니라 이방 종교의 절기라고 주장하지만 그것 역시 억지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주장에 미혹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6. 『터』 p.62-66
그러나 정작 사도의 존재를 인정하는 신사도운동이나 영성운동을 하는 교회들은 이 진리를 놓쳤거나 희석시켰거나 적어도 불분명합니다. 저는 근거 없이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점은 신사도운동의 대표적인 지도자인 존경하는 피터 와그너 박사님의 책에도 드러나 있습니다.
『오늘날의 사도』라는 책에서 피터 와그너 박사님은 이렇게 썼습니다.
“제2사도시대라는 말을 처음 듣는 자들에게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것은 첫 2세기 동안에 사도와 선지자들이 교회의 토대를 놓는 일을 완수했다는 가정이다. 그러므로 사도들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안에 이렇게 깊이 스며있는 개념은 에베소서 4장 11절의 말씀을 볼 때에 성서적으로 뒷받침을 받을 수 없다.”
물론 이 말은 단순히 사도가 오늘날도 존재한다고 변호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럴 경우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가정”이라는 말이 암시하듯이 에베소서 3장과 케네스 해긴 목사님의 『그리스도의 선물』이라는 책에 나타난 “두 번째와 세 번째 등급의 사도와 선지자들이 교회의 교리적인 토대를 놓는 일을 완수했으며, 오늘날은 그런 사도들이 없다.”는 사실에 대해 무지하거나 간과하고 있는 가운데 나온 말이라면 분명히 문제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보입니다.
피터 와그너 박사님은 또 『사도와 선지자 교회의 터』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터를 닦으셨을 뿐 아니라 지속적으로 팽창할 수 있고 발전 가능한 역동적인 모습으로 교회를 세우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꼭 알려주고 싶으셨던 것이 있었다. 그것은 예수님 자신이 교회의 모퉁이돌이 되어 이후 수 세기 간에 걸쳐 교회를 세우시되, 사도와 선지자를 교회의 터로 삼으셨다는 것이다.”
여기서 “지속적으로 팽창할 수 있고 발전 가능한 역동적인 모습으로 교회를 세우셨다.”는 말이 약간 걸리긴 하지만 그래도 그 표현에 큰 문제는 없어 보입니다. 문제는, 사도와 선지자가 기록한 성경이 아니라 사도와 선지자 자체를 교회의 터로 생각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물론 1차로 사도와 선지자들이 쓴 성경을 교회의 기초로 인정하고, 2차로 그들과 그들의 사역을 교회의 기초로 생각한 것이라면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이해가 선행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도와 선지자를 교회의 기초로 생각하고 있다면 문제입니다. 그런데 제가 피터 와그너 박사님의 여러 책을 읽어본 결과 말로는 그렇게 말씀하지 않지만 분명히 1차 의미를 간과하고 있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은 그분의 책의 좀 더 뒷부분에 보다 분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성경말씀의 권위 :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실천의 모든 영역에서 성경은 최종권위를 지닌다. 활기 넘치고 복음적이며 생명을 부여하는 교회들 가운데 성경의 권위에 의문을 제기하는 교회 지도자들은 거의 없다. 기독교계에 팽배한 이러한 분위기는 성경의 영감에 대해 제기된 질문들이 금세 한 풀 꺾이게 하는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반면, 신세기를 개척하는 선구자의 역할도 필요 없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이 말은 보다 확실하게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말이 왜 문제인줄 아십니까? 아무리 선구자라 할지라도 성경과 다른 주장을 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성경과 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면 성경의 절대적인 권위가 선구자의 역할을 필요 없게 만들지도 않습니다. 전통과 교리는 그런 악역을 왕왕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역할을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오히려 선구자들을 일으켜 세우며 교회를 전통과 교리에서 성경으로 돌아가게 합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문제가 있는 발언입니다. 혹 제가 이단사냥꾼들처럼 말꼬리를 잡고 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제가 존경하는 피터 와그너 박사님의 책의 일부를 인용한 이유는, 그것을 빌미로 그분을 매도하기 위함이 아니라, 실제로 그분이 창안하여 널리 퍼트린 ‘전략적 수준의 영적 전쟁’과 그것에 수반되는 ‘영적도해’와 ‘소속 교회들에게 십일조를 받는 사도 네트워크’ 등 몇몇 가르침들이 성경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그분의 막강한 영향력 때문에 그것을 사도적인 사역의 핵심으로 착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책에서 그것이 왜 비성경적인 것인지에 대해 자세하게 다루지는 않겠습니다. 그 점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으신 분들은 저의 책 『보이지 않는 적: 귀신』이나 케네스 해긴 목사님의 『모든 어둠의 권세를 다스리는 승리하는 교회』라는 책을 사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사도 네트워크에 대한 것은 케네스 해긴 목사님의 최신간 『교회를 잘 섬기는 직분과 사역 은사』라는 책을 사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피터 와그너 박사님이 존경할 만한 분이고 좋은 분이지만 그 부분들은 성경적인 것이 아님을 아시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도 사도가 존재한다는 주장에 대해>
1. 『큰믿음교회에 대한 말말말들과 진실!』 p.59-70
기성교단의 질문:「예장 합동정통 교단의 질의서」에 대한 답변에서 변 목사님은 “저는 피터 와그너 박사의 추종자가 아닙니다.”라고 하시면서 신사도개혁운동에 대해 일정한 거리를 두셨지만 핵심적인 주장들에서는 신사도개혁운동을 추종한다고 봅니다. 특히 신사도개혁운동은 에베소서 4장 11절에 나타난 초대 교회의 5종류의 사역자가 현대 교회에도 그대로 실현되어야 한다고 하는데, 변 목사님도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직접, 특별계시를 받는 사도가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변 목사님 자신이 정말 ‘사도’라고 생각하십니까?
답변: 저는 신사도개혁운동이 아니라 ‘성경’과 ‘성령’을 추종합니다. 즉 어느 운동에서든 성경적인 것은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거부합니다. 그래서 한국의 신사도운동을 하는 측에서도 저를 좋지 않게 봅니다. 그들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저는 성경대로 사도나 선지자가 지금도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신사도운동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리고 여러분이 “직접, 특별계시”라고 부르는 성경의 사도들이 받았던 그런 권위 있는 계시를 받는다고는 믿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경에 나오는 사도들과 동일한 권위를 가진 사도는 지금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단지 성령의 조명에 의하여 성경의 의미를 바르게 깨달아 가르치고, 그리고 많은 교회들을 세우고 따르는 목회자들을 지도할 뿐입니다. 그들이 체험하는 모든 것은 성경과 같은 권위를 가진 것이 결코 아니며 성경에 의하여 분별되어야만 합니다.
여섯 번째 질문에 대한 증거 자료
저의 책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의 178~191p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지금은 사도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분야의 선구자적인 케네스 해긴, 피터 와그너, 빌 해몬, 데이빗 캐니스트러시, 후안 까를로스 오르띠즈... 등 많은 분들의 수고에 의해 오늘날도 사도가 존재한다는 것이 널리 알려지고 점점 더 많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주장이 과연 성경적일까요? 물론입니다. 저는 그것을 어렵지 않게 증명할 수 있습니다.
먼저, 사도행전 1장 21-22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리워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
많은 목사님들이 이 구절을 근거로 오늘날은 절대 사도가 있을 수 없다고 단언합니다. 우리 중 누가 세례요한 때부터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까지 예수님을 따른 사람이 있겠습니까? 이것이 가룟 유다를 대신할 사도의 자격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정말 지금은 사도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사도의 자격이 아니라 어린 양 12사도의 자격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어린 양의 12사도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계 21:13-14 “동편에 세 문, 북편에 세 문, 남편에 세 문, 서편에 세 문이니 그 성에 성곽은 열 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 어린 양의 십 이 사도의 열 두 이름이 있더라.”
이처럼 어린 양 12사도는 특별합니다. 그들은 반드시 세례요한 때부터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까지 예수님을 따른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사도가 어린 양의 12사도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과 바나바 같은 사도들도 있습니다. 바울은세례요한때부터예수님을따르지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뒤에도 그는 여전히 박해자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 모든 사도의 자격이라면 바울도 사도가 아닙니다. 하지만 바울은 사도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어린 양 12사도의 자격이지 모든 사도의 자격은 아닙니다. 이와 같은 사실에 근거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어린 양의 12사도와 같은 사도는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종류의 사도들은 지금도 존재한다.’
다음으로, 에베소서 4장 11-12절을 보시겠습니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바울은 사도의 사명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여러분도 알다시피 이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 일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즉 사도의 역할이 아직도 필요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사도의 직분이 1세기에, 혹은 교회사의 중간에 끝날 수 있겠습니까? 케네스 해긴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할 것입니다. ‘오늘날 사도나 선지자는 없어요.’ 그러나... 모든 성도가 이미 온전케 되었습니까? 오늘날도 계속되고 있는 사역이 있긴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이 아직도 필요합니까? 그렇다면, 이 모든 사역들과 섬기는 은사들은 지금도 역사해야 합니다. 그것들은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한편, 지금으로부터 십 년 전쯤 제가 춘천에서 목회하는 저의 동기 목사님의 교회에 부흥회를 인도하러 갔을 때 그 목사님에게 지금도 사도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관해서 말했습니다. 그러자 신학교 시절 항상 1등을 도맡아 했던 그 목사님이 성경을 펴서 다음 부분을 읽어 주었습니다.
엡 3:4-5 “이것을 읽으면 그리스도의 비밀을 내가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게 하지 아니하셨으니”
그러면서 “이 구절에는 당시의 사도와 선지자들에게만 그리스도의 비밀을 계시해 준 것으로 나옵니다. 그러므로 사도와 선지자는 그 당시만 존재했다고 보는 것이 옳지 않을까요?” 과연 장학생답게 예리한 질문이었습니다. 저는 그 당시 그 지적에 대해서 올바른 답을 해 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최근에 출판된 케네스 해긴 목사님의 책에서 비로소 그 해답을 발견했습니다. 1987년 케네스 해긴 목사님은 예수님의 방문을 받았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사도들에게는 네 가지의 등급 또는 서열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다른 서열이나 등급 안에서, 사도들은 서로 다른 분량의 기름 부으심을 가지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의 첫 번째 서열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사도뿐 아니라 각 사역의 은사에서 홀로 한 서열 안에 계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한량없는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은 유일한 분이기 때문입니다(요 3:34). 예수님이 가지셨던 한량없는 성령의 기름부음은 전무후무한 것입니다. 두 번째 서열의 사도들은 어린 양의 사도들입니다. 즉 맛디아를 포함한 예수님의 열두 제자입니다. 세 번째 서열의 사도들은 다른 토대적인 사도들인데 사도 바울도 여기에 속해 있습니다. 그리고 네 번째 서열의 사도들은 비토대적인 사도들입니다. 오늘날 존재하는 사도들은 모두 여기에 속합니다. 이중 세 번째 서열의 사도들에 대해 케네스 해긴 목사님은 이렇게 썼습니다.
“세 번째 서열의 사도들: 다른 토대적인 사도들
세 번째 서열의 사도는 바울이 속해 있는 사도의 등급입니다. 이 서열에 들어 있는 사도들의 특징은 그들도 역시 신약 성경의 교리적인 토대가 형성되는 것을 도왔다는 것입니다. 1987년 방문에서 예수님은 또한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토대적인 사도들은 두 번째와 세 번째 서열의 사도들 가운데서 볼 수 있다. 이 등급 또는 수준의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신약 성경의 교리적 토대를 놓기 위해 기름 부으심을 받았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서열의 사도와 선지자들은 토대적인 사도들과 선지자들로 간주되어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신약 성경의 복음이 그들에게 계시되어졌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토대적인 신약의 사도들과 선지자들인 이 세 번째 서열에 들어 있었습니다. 그는 신약 성경의 많은 부분을 썼으며, 그리고 그는 그리스도에 관한 신비한 계시를 사람으로부터 배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성령으로부터 받았습니다.
엡 3:4-5 ‘그것을 읽으면 내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 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셨으니’
바울은 복음의 계시를 초기 신약 성도들에게 전파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기초를 놓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신약 성경에서 우리를 위해 이미 놓여진 토대 위에 쌓아올리기만 합니다... 아무도 오늘날 복음의 기초에 무언가를 더하기 위한 부가적인 계시를 받고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새 언약의 계시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갈 1:8) 바울은, 이미 놓여진 기초 위에 우리가 어떻게 세울 것인가를 주의해야 한다고 경고한 것입니다(고전 3:10). 우리는 그것에 뭔가를 더할 수도 뭔가를 제거할 수도 없습니다.
그때 방문에서 예수님은 저에게 매우 재미있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말씀하시기를 ‘오늘날에는 기초를 놓는 사도들도 없고, 기초를 놓는 선지자들도 없단다. 오늘날에는 초대 교회의 사도들과 선지자들과 동일한 수준 또는 권위와 같은 서열, 또는 같은 정도의 기름부음을 받은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없다. 오늘날 교회에서는 아무도 두 번째나 세 번째 서열에 속해 있지 않다.’”
케네스 해긴 목사님의 이 글은 오래도록 품고 있었던 에베소서 3장 4-5절에 관한 저의 의문을 말끔히 해소해 주었습니다. 이제는 그 구절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서, 그래서 선을 넘지 않으면서도 오늘날도 사도가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해긴 목사님의 말대로, 오늘날 토대적인 사도들인 두 번째와 세 번째 서열의 사도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네 번째 서열의 사도는 여전히 존재합니다...
마지막으로, 데살로니가전서 1장 1절과 2장 6절을 비교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살전 2:6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도로 능히 존중할 터이나”
여기서 주목할 점은 바울이 본인만 사도라고 말하지 않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말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누구일까요? 그것은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쓸 때 같이 있었던 사람들인데 1장 1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찌어다.”
여기서 실루아노는 실라를 가리킵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어린 양의 12사도 혹은 바울과 바나바에서 사도의 계보가 끝난 것이 아니라 계속 이어졌다는 것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실라와 디모데는 바울과 바나바 다음 세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도 사도였습니다. 그러면 실라와 디모데 뒤에는 사도가 끝났을까요? 아니요. 그럴 만한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불합리하며 증거도 전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선지자와 마찬가지로 사도도 오늘날 존재합니다.
2. 『터』 p.44-53
그런데 터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 사도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사도라는 주제가 교회 안에서 이슈가 되고 있습니다. 전통적인 교회에서는 오래도록 지금은 사도와 선지자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르쳐왔고, 사람들은 그렇게 믿어왔습니다. 그런데 걸출한 하나님의 사람 케네스 해긴 목사님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성경을 통해 지금도 사도와 선지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완벽하게 증명해주셨습니다. 이것이 영성운동하는 교회들을 비롯해서 수많은 교회들로 번져가면서 사도와 선지자의 존재를 인정하는 목회자들이 점점 증가하고 있는 추세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사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전통적인 교회도, 그리고 사도가 존재한다고 믿는 영성운동하는 교회도 대부분 균형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이를 바로잡기 위해 여러분이 들어서 알고 있는 내용이 있더라도 성경적으로 차근차근 사도에 대해서 설명해 드리고자 합니다.
(1) 오늘날도 사도가 존재할까요?
사도에 대한 첫 번 째 이슈는 “과연 사도가 오늘날에도 존재하느냐?”하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사도와 선지자가 존재할까요? 물론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대주의의 영향을 받아 1세기 이후로 사도들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비성경적인 잘못된 견해입니다.
다행히도 이 분야의 선구자인 케네스 해긴, 밥 존스, 피터 와그너, 릭 조이너, 빌 해몬, 데이빗 캐니스트러시, 후안 까를로스 오르띠즈… 등 많은 분들의 수고에 의해 오늘날도 사도가 존재한다는 것이 충분히 성경으로 증명되었고, 점점 더 많은 신학자와 목회자들이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가 오늘날도 존재한다는 것을 성경으로 쉽게 증명할 수 있습니다.
먼저, 사도행전 1장 21-22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려져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
많은 목사님들이 이 구절을 근거로 오늘날은 사도가 없다고 단언합니다. 우리 중 누가 세례요한 때부터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까지 예수님을 따라다닌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가룟 유다를 대신할 사도의 자격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정말로 지금은 사도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사도의 자격이 아니라 어린 양 12사도의 자격입니다. 이스라엘이 12지파였던 것처럼 어린 양의 사도도 12명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친히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마태복음 19:28)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누가복음 22:28-30)
그래서 가룟 유다가 배신한 후 그를 대신할 12번째 사도를 뽑은 것입니다. 사명을 잘 감당하고 순교한 야고보의 사후에는 그를 대신할 사람을 뽑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주를 배신하고 죽었기 때문에 즉 그의 자리가 궐석이 되었기 때문에 대신할 사람을 뽑아야만 했던 것입니다.
어린 양 12사도의 사명은 베드로가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라고 명시한 대로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사도들의 메시지의 핵심이었고 사도행전의 핵심주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을 잘 증언하기 위해서는 십자가 이전부터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잘 알아야 합니다. 더구나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한 자들인즉” 이것이 12보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12지파를 다스릴 자들의 자격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세례요한 때부터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까지 함께 한 것을 어린 양 12사도의 필수적인 자격으로 제시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가 어린 양의 12사도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과 바나바 같은 사도도 있습니다. 이 중 바울은 세례요한 때부터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뒤에도 그는 여전히 박해자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 모든 사도의 자격이라면 바울도 사도가 아닙니다. 그러나 바울은 분명히 사도입니다. 그러므로 어린 양 12사도에게만 요구되는 자격요건을 모든 사도들에게 들이대면서 그 요건을 충족시킬 자가 없으므로 지금은 사도가 없다고 주하는 것은 억지에 불과합니다.
다음으로, 에베소서 4장 11-12절을 보시겠습니다.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많은 사람들이 사도의 사명이 성경을 기록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1세기의 사도들이 교회의 토대를 놓은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그들모두 정경의 완성을 위해 부름 받은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사도 중에도 성경을 한 권도 기록하지 않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사도가 아닌데도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이 있음을 볼 때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성경에서 바울은 모든 사도들의 공통적인 사명을 다음과 같이 제시했습니다.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포괄적이긴 하지만, 이것이 사도를 포함한 모든 목회자들의 사명입니다. 그런데, 이 일들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1세기뿐 아니라 지금도 성도는 온전케 되어야 합니다. 1세기뿐 아니라 지금도 성도는 봉사를 위해 준비되어야 합니다. 1세기뿐 아니라 지금도 그리스도의 몸을세워야 합니다. 이 세 가지는 현재는 물론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지속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는 1세기뿐 아니라 오늘날도 여전히 필요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왜 사도직을 1세기 이후로 폐하시겠습니까? 그러실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케네스 해긴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어떤 이들은 사도로, 어떤 이들은 선지자로, 어떤 이들은 전도자로, 어떤 이들은 목사로, 어떤 이들은 교사로 주셨다고 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할 것입니다. ‘그래요, 하지만 이런 사역들은 지금은 없어져버렸어요. 오늘날 남아있는 사역들은 교사와 목사와 전도자뿐이에요. 오늘날 사도나 선지자는 없어요.’ 그러나 바울은 그런 구별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주목하기 바랍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어떤 이들은 사도로, 어떤 이들은 선지자로, 어떤 이들은 전도자로, 어떤 이들은 목사로, 어떤 이들은 교사로, 그리스도의 몸을 섬기는 일과 세우는 일에 부르셨다고 했습니다(엡 4:11-12). 모든 성도가 이미 온전케 되었습니까? 오늘날도 계속되고 있는 사역이 있긴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이 아직도 필요합니까? 그렇다면, 이 모든 사역들과 섬기는 은사들은 지금도 역사해야 합니다. 그것들은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더 나아가서 릭 조이너는 좀 더 소상하게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에베소서4:11-16)
위의 말씀에서 보듯이 한 사람으로는 교회를 세우기 위해 필요한 모든사역을 감당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예수님이라면 가능하다. 예수님은 사도이고, 선지자이고, 복음 전하는 자이며, 목사이자 교사이셨기 때문이다. 승천과 동시에 예수님은 자신이 수행했던 5중 사역의 은사를 각각의 사람에게 나누어주셨다. 이 다섯 가지의 사역이 한데 어우러지면 제자들을 준비시키고 모든 면에서 그들을 성숙시키기에 충분하다. ‘예수님의 온전한 사역’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1세기의 교회에서처럼 각각의 사역이 연합되고 동역의 차원에 이를 때까지 교회는 부르심 받은 모습 그대로 변화될 수 없다. 너무나 자명한 사실 아닌가?
그뿐만이 아니다. 교회가 그러한 모습으로 변화되지 못하고 성숙하지 못한 상태라면, 위의 성경 말씀에 의거하여 여전히 그 모든 사역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사역들은 우리가
1) 신앙의 조화를 이룰 때까지
2) 하나님의 아들을 아는 지식에 이를 때까지
3) 성숙한 사람이 될 때까지
4)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를 때까지 우리에게 허락되었다.
이 세상에 1-4번 항목을 전부 다 갖춘 교회가 있을까? 우리 모두는 각각의 영역에서 제대로 기능할 그 모든 사역이 필요로 한다.”
무엇보다, 성경에서 사도 바울이 오중직임을 열거한 후에 이 직임들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그 구체적인 기간을 언급했습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에베소서 4:13)
그런데 과연 교회들이 이 수준에 이르렀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도직이 오늘날도 존재함이 분명합니다.
마지막으로, 데살로니가전서 1장 1절과 2장 7절을 비교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마땅히 권위를 주장할 수 있으나” (데살로니가전서 2:7)
여기서 주목할 점은 바울이 본인만 사도라고 말하지 않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고백했다는 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누구일까요? 당연히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쓸 때 함께 있었던 사람들인데, 그들의 이름이 1장 1절에 나와 있습니다.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이것은 대단히 의미심장합니다. 왜냐하면 어린 양의 12사도 혹은 바울과 바나바에서 사도의 계보가 끝난 것이 아니라 계속 이어져 내려왔음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실루아노”는 실라를 가리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참 아들”(딤전 1:2)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실라와 디모데는 바울과 바나바 다음 세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당시 그들도 사도였습니다. 그러면 실라와 디모데로 사도가 끝이 났을까요?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불합리하며 증거가 전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도 사도들이 존재한다고 믿어야 성경적입니다.
3. 『터』 p.53-62
(2) 1세기의 사도들과 오늘날의 사도들의 중요한 차이
사도에 대한 두 번째 이슈는, 오늘날 존재하는 사도들이 성경에 나오는 사도들과 동등한가? 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 이슈인 “오늘날도 사도가 존재하는가?”에 대한 답은 “예!”였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이슈에 대한 답은 “아니오!”입니다. 그런데 전통적인 교회는 첫 번째 이슈에 “아니오!”라고 오답을 말했습니다. 그리고 영성운동을 하는 교회들은 두 번째 이슈에 “예!”라고 역시 오답을 말해왔습니다. 그래서 두 진영 다 가르침을 받아야 하고 교정이 필요합니다.
오늘날도 사도가 존재한다고 가르치고 있는 분들 중 많은 분들이 지금의 사도들이 1세기의 사도들과 동등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잘못되었을 뿐 아니라 매우 위험한 생각입니다. 그러면 왜 그것이 잘못된 생각일까요?
지금으로부터 약 십년 전, 춘천에서 목회하는 저의 동기 목사님의 교회에 부흥회를 인도하러 갔을 때의 일입니다. 저는 그 목사님에게 개인적으로 오늘날도 사도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관해서 설명했습니다.
그러자 신학교 시절 항상 1등을 도맡아했던 그 목사님은 성경을 펴서 다음 구절을 읽어주었습니다.
“그것을 읽으면 내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 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셨으니” (에베소서 3:4-5)
그러면서 “이 구절에는 1세기의 사도와 선지자들에게만 그리스도의 비밀을 계시해준 것으로 나옵니다. 그러므로 사도와 선지자는 그 당시만 존재했다고 보는 것이 옳지 않을까요?”라고 되물었습니다. 과연 장학생다운 예리한 지적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이 질문에 만족할 만한 설명을 해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구절에 대한 의문을 오래도록 마음에 담아두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장 연구한다고 항상 답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전통적인 교회에서는 에베소서 3장 3-5절 말씀을 근거로 지금은 사도와 선지자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반면에 영성운동을 하는 교회에서는, 전통적인 교회가 제기하는 에베소서 3장의 말씀을 소화하지는 못했지만 사도와 선지자가 지금도 존재한다는 것을 다른 성경구절들로 완벽하게 증명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일단 사도의 존재를 인정하는 한편, 에베소서의 말씀 때문에 오래도록 고민을 했는데 그 어디에도 명확한 답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새로 출판된 케네스 해긴 목사님의 『그리스도의 선물』이라는 책에서 그 답을 얻었습니다.
참고로, 제가 그 책의 내용을 받아들인 것은 케네스 해긴 목사님이 ‘계시’를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해긴 목사님이 받은 계시가 의심할 여지없이 ‘성경적’이었기 때문입니다. 해긴 목사님이 받은 계시는 사도가 존재한다는 성구들과 에베소서에 있는 말씀을 완전히 조화시키고, 성경의 의미들을 밝히 드러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멘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을 여러분에게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1987년 예수님이 케네스 해긴 목사님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 친히 확립하신 사역의 은사들에 대해 설명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도들에게는 네 가지의 등급 또는 서열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다른서열이나 등급 안에서, 사도들은 서로 다른 분량의 기름 부으심을 가지게 된다.” 18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의 첫 번째 서열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사도뿐 아니라 각 사역의 은사에서 홀로 한 서열 안에 계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한량없는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은 유일한 분이기 때문입니다(요3:34). 예수님이 가지셨던 한량없는 성령의 기름부음은 전무후무한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 서열의 사도들은 어린 양의 사도들입니다. 즉 맛디아를 포함한 예수님의 열두 제자입니다.
세 번째 서열의 사도들은 다른 토대적인 사도들인데 사도 바울도 여기에 속합니다.
그리고 네 번째 서열의 사도들은 비토대적인 사도들입니다. 오늘날 존재하는 사도들은 모두 여기에 속해 있습니다.
이중 세 번째 서열의 사도들에 대해 케네스 해긴 목사님은 자신의 책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세 번째 서열의 사도들: 다른 토대적인 사도들
세 번째 서열의 사도는 바로 바울이 속해 있는 사도의 등급입니다. 이 서열에 들어 있는 사도들의 특징은 그들도 역시 신약성경의 교리적인 토대가 형성되는 것을 도왔다는 것입니다.
1987년 방문에서 예수님은 또한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토대적인 사도들은 두 번째와 세 번째 서열의 사도들 가운데서 볼 수 있다. 이 등급 또는 수준의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신약성경의 교리적 토대를 놓기 위해 기름 부으심을 받았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서열의 사도와 선지자들은 토대적인 사도들과 선지자들로 간주되어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신약성경의 복음이 그들에게 계시되어졌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토대적인 신약의 사도들과 선지자들인 이 세 번째 서열에 들어 있었습니다. 그는 신약성경의 많은 부분을 썼으며, 그리고 그는 그리스도에 관한 신비한 계시를 사람으로부터 배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성령으로부터 받았습니다.
‘그것을 읽으면 내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 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셨으니’ (에베소서 3:4-5)
바울은 복음의 계시를 초기 신약 성도들에게 전파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기초를 놓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단지 신약성경에서 우리를 위해 이미 놓여진 토대 위에 쌓아올리기만 합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에베소서 2:19-20)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신약성경에서 우리를 위해 이미 놓은 토대 위에 세워졌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토대 위에 쌓여져가야 합니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 (고린도전서 3:10)
아무도 오늘날 복음의 기초에 무언가를 더하기 위한 부가적인 계시를 받고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새 언약의 계시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8)
바울은, 이미 놓여진 기초 위에 우리가 어떻게 세울 것인가를 주의해야 한다고 경고한 것입니다(고전 3:10). 우리는 그것에 뭔가를 더할 수도 뭔가를 제거할 수도 없습니다.
그때 방문에서 예수님은 저에게 매우 재미있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말씀하시기를 ‘오늘날에는 기초를 놓는 사도들도 없고, 기초를 놓는 선지자들도 없단다. 오늘날에는 초대 교회의 사도들과 선지자들과 동일한 수준 또는 권위와 같은 서열, 또는 같은 정도의 기름부음을 받은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없다. 오늘날 교회에서는 아무도 두 번째나 세번째 서열에 속해 있지 않다.’”
케네스 해긴 목사님의 이 글은 저를 겸손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오래도록 품고 있었던 에베소서 3장 4-5절에 관한 의문을 말끔히 해소시켜주었습니다. 이제는 그 구절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서, 오늘날도 사도가 존재한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케네스 해긴 목사님의 말대로, 오늘날 토대적인 사도들인 두 번째와 세 번째 서열의 사도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네 번째 서열의 사도들은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의 사도나 선지자들의 주장을 맹종할 것이 아니라 성경말씀으로 분별하고 오직 성경적인 것만 받아들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만이 교회들을 위해 주신 올바른 터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기이한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도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전통적인 교회들은 케네스 해긴 목사님이 받은 계시에 나타난 ‘성경이 교회의 터’라는 핵심적인 진리를 고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사도의 존재를 인정하는 영성운동하는 교회들은 이 진리를 잃어버리거나 희석시키는 우를 범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리적인오류에 빠지거나, 극단적인 신비주의자가 되거나, 심지어 이단으로 전락하기도 합니다.
전통적인 교회가 견지하고 있는 견해를 우리는 복음주의 신학의 거장 존 스토트의 책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는 사도에 대해 이런 글을 썼습니다.
“1975년 존 노블(John Noble)은 ‘처음 사도들, 마지막 사도들’(First Apostles, Last Apostles)이라는 제목으로 작은 책자를 발간했다. 그 책에서 그는 자신의 관심이 ‘이 말세에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할 군대를 하나님의 이름 아래 조직하여 출전시킬 사도들, 즉 우리 시대의 교회생활을 지도할 사도들을 기대하도록 내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 자극을 주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최초의 사도들이 죽었을 때 그들은 권위의 공백을남겼는데 그 자리에 잘못된 사람들 즉 주교들이 들어갔다고 보는 것이 그의 역사해석 방법이다. 그는 가톨릭교회와 프로테스탄트교회를 모두 비판하면서 전자는 ‘한 사람에게 절대적인 권위를 맡겼다’고 말하며, 후자는 ‘모든 개인들에게 교회를 다스릴 권리를 주었다’고 이야기했다. 변화무쌍한 긴 교회사에 걸쳐서 권위가 자주 그릇 사용되었다는 점에서는 우리는 그와 전적으로 의견을 같이 한다.
그러나 그의 해석은 본질적으로 중요한 진리들을 간과한다. 그 진리들이란, 첫째 부활하신 역사적 예수님을 목격한 자들로서의 원래 사도들은 그를 목격한다는 의미에서는 결코 계승자들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며, 둘째 그들의 권위는 오늘날 신약성경 안에 보존되어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본질적인 ‘사도 계승’(apostolic succession)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 베드로 또는 요한 같은 사도들이 가졌던 권위에 비교되는 권위를 가진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오늘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우리가 주장했지만, 그러나 감독으로서 다스리는 일, 선교사로서 개척하는 일, 교회를 설립하는 일, 그리고 순회 설교자로서 지도하는 일 등을 포함하는 여러 종류의 사도적 사역들을 감당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또한 단연코 주장할 수 있다.”
그는 또 에베소서를 강해하면서 에베소서 2장 20절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어떠한 건축물에 있어서나 견고하고 안정된 기초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예수께서는 산상수훈의 결론으로 집짓는 자들의 비유로 들어 이야기하셨으며, 이를 통해 반석의 필요성을 가르치셨다. 그렇다면 교회는어떤 반석 위에 세워졌는가?
바울은 이에 대하여 그것은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고 대답한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모두 가르치는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교회의 기초를 구성하는 것은 명백히 그들의 인격도 직책도 아니며 그들의 교훈이어야 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르친 것을 교회가 믿고 보존해주기를 기대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명령한 것을 교회가 복종하기를 기대하였다…
실제적인 의미의 용어로 표현한다면 이 사실은 교회가 신약성경을 기초하여 세워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은 교회의 기초를 이루는 문서들이다. 그러므로 기초가 일단 놓여지고 그 위에 건축물이 세워지고 나면 함부로 변경될 수 없듯이, 신약이라는 교회의 기초도 침해될 수 없고 또한 오늘날 사도들 또는 선지자들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제공된 어떠한 것들에 의해서도 가감되거나 변화될 수 없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그의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계시하셨고 또한 현재 신약성경에 보존되어 있는 근본적인 진리들을 성실하게 따르고 있는가에 따라 서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한다.”
아멘입니다! 저는 존 스토트의 주장에 기쁜 마음으로 동의합니다.
존 스토트가 저처럼 사도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지 않을 뿐 내용상으로는 사실상 같은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오히려 전통적인 교회에서는 사도에 대한 가장 핵심적인 진리를 잘 고수하고 있습니다.
예언
백석 : 지금도 큰믿음교회는 선지자학교가 있고 선지사역이 있어서 각 개인에 대하여 예언상담을 해주고 선지자 역할을 하고 있어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다.
통합 : 천국과 지옥을 경험하는 입신, 예언과 방언 등 신비적인 사상을 강조하고 심지어 이를 훈련시키는 학교까지 운영하고 있다. 변승우는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는 등의 저서와 설교들 통하여 천국을 갔다 온 입신의 경험, 개인의 미래에 대한 예언, 방언, 쓰러지는 현상 등 신비주의 형태의 목회를 활발히 펼치고 있다. 그의 저서에는 천국을 갔다 온 사람들의 간증이 많이 실려 있다. (가령, 『정통의 탈을 쓴 짝퉁 기독교』pp.223-289를 보라.). 그는 집회 시간에 방언을 훈련시키고 있으며, <큰믿음교회> 내에는 예언 사역 팀, 방언 통변 팀, 신유 축사 팀 등 신비주의를 조장하는 목회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합신 : 직통계시를 주장하고 이것을 예언사역이라 하여 교회에서 실행하고 있다. 큰믿음교회는 예언사역을 한다고 하면서 각 개인에게 예언을 해주고 또 훈련을 하는데 개인의 장래사를 예언해주고 길흉을 예언해주는 것은 성경적으로 볼 때 하나님이 가증히 여기시는 것이다.
고신 : 오늘날에도 ‘예언’이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그냥 목회하면 실패할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예언을 붙잡고 순종하면서 나아가면 반드시 성공할 줄로 믿는다.”
기성 :예언, 환상, 입신, 천국체험 등의 계시체험을 우선적으로 신뢰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
『예언을 멸시하지 말라』 p.43-45
『예언을 멸시하지 말라』 p.47
『예언을 멸시하지 말라』 p.157-158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p.178-179
『정통의 탈을 쓴 짝퉁 기독교』 p.98-103
『미혹』 p.48
1. 『예언을 멸시하지 말라』 p.43-45
한번은 제가 『교회와 신앙』의 기자에게 왜 우리가 이단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여기자는 신경질적으로 “예언하잖아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기가 막힌 일입니다. 정말 예언하면 이단입니까? 아닙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고린도전서 13:8-10)
많은 사람들이 이 구절에 나오는 “온전한 것”(10절)이 성경의 완성을 의미한다고 오해합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이 쓰여졌을 때 교회는 완전한 성경을 갖게 되었고, 더 이상 성령의 은사들은 필요치 않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견해는 반대되는 확고한 논의들에 부딪히게 됩니다.
첫째로, 이 구절의 인접한 문맥 어디에서도 바울은 성경(정경)에 대하여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둘째로, 바울은 “온전한 것이 올 때” 방언과 예언뿐 아니라 “지식”도 폐해진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지식이 폐해졌다면 강해설교와 제자훈련은 왜 합니까? 그러므로 이 구절을 예언이 폐해졌다는 증거로 삼으면 수습할 수 없는 모순에 빠지게 됩니다.
셋째로, 12절에 나오는 표현은 성경의 완성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재림을 의미할 경우에만 사용이 가능한 표현입니다.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12절)라는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가리키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때에는 주께서 아시는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12절)는 말 역시 주님이 다시 오실 때에만 이뤄질 수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우리가 전지해질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주님처럼 오보나 오해 없이 정확하게 알게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여러분, 성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를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뵙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또 주께서 우리를 온전히 아시는 것처럼 우리가 온전히 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래서 로이드 존즈가 “온전한 것이 올 때”를 신약성경이 완성되는 때를 가리킨다고 보면 다음과 같은 오류에 빠지게 된다고 지적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 전체를 가지고 있는 여러분과 나는 하나님의 진리에 관하여 사도 바울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을 알고 있다는 뜻이 된다… 그것은 곧 우리 모두가 사도 바울을 포함한 여러 사도들보다 훌륭하다는 뜻이 된다! 이 같은 생각을 터무니없는 생각이라고 보지 않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이로 보건대 “온전한 것이 올 때” 즉 예언과 여러 가지 은사들이 폐해지는 때는 성경의 완성이 아니라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를 가리키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놀랍게도 예언이 끝났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니라 도리어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지속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구절인 것입니다.
2. 『예언을 멸시하지 말라』 p.47
비단 큰믿음교회와 신부동교회만이 아닙니다. 저는 어느 교회에서든 성경대로 예언의 은사를 인정하고 성도들을 지도할 때 놀라운 예언사역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아왔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만들어 내거나 흉내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의 은사인 예언의 은사가 실제로 임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저도 벌써 예언하고 있을 것입니다(참고로, 저는 아직까지 예언사역을 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은사가 임해야만 가능하지 흉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언의 은사가 지금도 존재함이 분명합니다.
3. 『예언을 멸시하지 말라』 p.157-158
그런데 요즘 그 일을 하는 목회자들은 그야말로 극소수입니다. 그러니 예언전도학교가 얼마나 더 귀합니까? 예언전도학교는 꼭 필요하고 지극히 귀한 학교입니다. 하지만 많은 목회자들이 정작 해야 할 일은 하지 않고 자신들이 외면한 일을 모범적으로 잘하고 있는 우리 교회를 비난합니다. 그들은 어이없게도 우리 교회가 사람들에게 예언하는 법을 가르쳐서 예언하게 한다고 비난합니다. 하지만 예언은 성령의 은사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가르쳐서 예언하게 할 수가 있습니까? 만일 예언이 가르침만으로 가능한 것이라면 누구보다도 먼저 제가 예언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아직도 예언사역자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사실무근의 악의적인 거짓말입니다. 우리는 예언전도학교를 통해 예언의 은사가 없는 사람을 가르쳐서 예언하게 하는 불가능한 일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미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에게 겸손히 목회자의 권위 아래 순복할 것을 비롯해서, 받은 계시를 해석하는 법과 영들을 분별하는 법, 범하기 쉬운 실수, 그리고 지혜롭게 전달하는 방법 등 덕을 끼치면서 예언사역을 하는데 필요한 많은 것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간의 예언사역으로 인한 폐단을 생각해볼 때 이런 교육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가 뭐라고 하든 예언전도학교를 계속할 것입니다.
4.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p.178-179
저도 이와 비슷한 경우를 본 적이 있습니다. 즉 예언을 분별하지 않고 무턱대고 받아들였다가 사업상의 큰 손해를 본 경우를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언의 은사를 존중하되 예언을 분별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예언은 오히려 큰 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예언을 분별없이 받아들이고 그 예언이 틀렸다고 예언하는 사람에게 책임과 화살을 돌려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분명히 예언을 분별하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언을 어떻게 분별해야 할까요?
(1) 예언의 내용이 성경적인가
우리는 먼저 예언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분별해야 합니다. 만일 예언이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옳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 교회에는 영안이 열리고 계시를 받는 사람들이 아주 많습니다. 또 성도들이 계속해서 영적으로 열리고 있습니다. 성도들이 처음영안이 열릴 때 제가 가장 많이 해주는 말은 성경을 많이 읽으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환상이나 계시나 입신, 체험의 거의 대부분은 성경만 바로 알아도 분별이 가능한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어떤 것은 성경을 아는 것만으로는 분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는 성경만 많이 알아도 충분히 분별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에게 예언이나 그 밖의 계시의 은사들이 임하고 그 위에 영분별의 은사가 임하면 성경을 잘 몰라도 그 은사로 안전하게 분별할 수 있는 줄로 압니다. 그러나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과 영분별의 은사는 각기 그 영역이 다릅니다. 그러므로 영분별의은사가 성경의 무지로 인한 무분별을 대신해 주거나 보충해 주지 않습니다. 아무리 영분별의 은사를 받아도 성경을 모르면 분별하지 못하고 속는 많은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열리면 열릴수록 더 열심히 성경을 읽고 성경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5. 『정통의 탈을 쓴 짝퉁 기독교』 p.98-103
몇 달 전의 일입니다. 저를 아끼시는 교계의 한 어른의 소개로 통합측 한 노회의 이대위위원장을 만난 일이 있습니다. 그분은 좋은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함께 얘기할 때 그분이 예언에 대해서 오늘날 예언은 설교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정색을 하며 그것은 성령에 대해 무지한 신학자들이 만들어 낸 말이지 진리가 아니라고 지적해 드렸습니다. 오늘날 많은 목회자들이 오늘날은 설교가 예언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예언을 부정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엉터리입니다. 제가 간단하게 증명해 드리지요.
고전 14:29-33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변할 것이요. 만일 곁에 앉은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거든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찌니라. 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 예언하는 자들의 영이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이것은 예배 중에 어떻게 예언의 말씀을 나누어야 하는지에 대한 지침입니다. 우리는 예배 시간에 설교만 하지만 초대 교회는 예배 시간에 계시와 예언들을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요엘의 예언이 실제로 이루어져 계시를 받는 사람이 많아지자 한 예배에 세 사람만 순서대로 예언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언하는 사람들은 사도들과 목회자들이 아닙니다. 일반 성도들입니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예언이 설교라고 가정해보십시오. 예배 시간에 손을 드는 대로 평신도를 세 사람 정도 세워서 짧게 설교하게 합니다. 그리고 목회자는 그것을 가만히 듣고 있습니다. 그 후에 다시 목회자가 설교합니다. 여러분 이게 말이 됩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지요. 그러므로 여기서 예언은 설교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예언입니다.
또, 사도행전 21장 8-9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유하니라. 그에게 딸 넷이 있으니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
여기 빌립 집사의 네 딸이 나오는데 처녀로 예언하는 자였습니다. 그러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말했던 초대 교회의 문화 속에서 이 처녀들이 설교자들이었겠습니까? 그들이 바울이나 다른 사람들 앞에서 설교했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예언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언은 설교가 아닙니다. 예언은 어디까지나 예언입니다.
또 한 가지, 성경에 보면 성령의 은사 중에 예언의 은사가 있는가 하면 가르치는 은사가 있습니다.
롬 12:6-7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예언과 가르치는 일, 이것은 분명 하나의 은사가 아니라 두 가지 은사입니다. 이 두 가지는 같은 은사가 아닙니다. 서로 다른 은사입니다. 가르치는 은사는 설교할 때 사용되고 예언의 은사는 예언할 때 사용됩니다. 분명히 서로 다른 은사입니다. 그러므로 예언을 부정하며 설교가 곧 예언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어리석은 주장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지적이고 종교적인 신학자들이 예언의 개념을 혼잡케 해 놓은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고 성경대로 믿어야 합니다.
자 이제 이것을 깨닫고 인정하는 자들에게 비로소 드릴 수 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설교와 예언은 다릅니다. 그런데 설교가 예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설교가 예언이다.” 이런 종교적인 무식한 주장과는 다른 것입니다. 구약 성경의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 등 선지자들이 쓴 선지서들을 읽어 보십시오. 거기에 단지 이스라엘의 미래에 대한 예언들만 들어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 중의 많은 부분이 설교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오늘날의 강해 설교와는 다른 것입니다. 선지자들은 단 한 사람도 강해 설교를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도 바울도 강해 설교를 하지 않았습니다. 선지자들의 설교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었습니다(암 8:11, 마 4:4). 신약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계 2:7, 11)이었습니다. 즉 여러 책을 참고하고 머리로 짜낸 것이 아니라 성령 충만한 상태에서 성령의 감동과 계시와 조명 속에서 주어진 말씀을 성령의 권능으로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좌우에 날선 검처럼 사람들의 심령을 찔러서, 단지 지식을 주지 않고 각성시키고 회개하게 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예언입니다.
벧후 1:21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물론 강해 설교라는 폼을 가지고 있더라도 정말 성령의 감동 중에 말씀을 받아서 성령의 권능으로 그 말씀을 선포하고 있다면 그런 설교는 예언입니다. 그러나 그 외의 설교는 그냥 가르침이지 절대 예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마땅히 알아야 할 예언에 관한 이런 기초적인 내용도 제대로 이해하거나 분별하지 못하면서, 성경적으로 바르게 예언 사역을 하는, 그래서 매주 2,000여 명 가까운 목회자와 신자들이 계속해서 예언을 받기 위해 모여드는 큰믿음교회의 예언 사역을 직통 계시 이단이라고 매도하다니 정말 우습지 않습니까? 그것은 어리석고 불의하고 오만한 일이며 큰믿음교회가 이단임을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소경이요, 악질적인 바리새인임을 드러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상대가 교단이든 신학자든 큰 교회의 목사든 그런 무지한 자들의 말에 더 이상 현혹되는 일이 없으시길 바랍니다.
6. 『미혹』 p.48
간혹 고린도교회는 은사 때문에 문제가 많지 않았느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은사를 반대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헛똑똑이입니다. 왜 성경에서 자기가 읽고 싶은 것을 읽지요? 성경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읽어야지요! 성경을 똑바로 보십시오. 고린도교회는 은사 때문에 문제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책망하고 교정했습니다. 그런데 은사사역을 금한 것이 아니고 교정을 해주었습니다. 교정을 하면서 바울이 노파심에서 말했습니다. “신령한 것을 사모하라. 풍성하기를 구하라.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그러면 은사가 상대적으로 부족한 다른 교회들에게는 바울이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바울이 고신이나 통합, 합동, 백석, 합신 교단을 보면 뭐라고 말할까요? 바울의 견해는 명백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명백합니다. 교회가 은사를 사모하고 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벧전 4:10).
계시
백석 : 그의 책에 있는 대로 하면 그는 현재도 계시의 기관으로서 활동하는 사도적 반열에 있는 자이며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서 성경과 방불한 계시를 보내시고 있는 셈이 된다.
통합 : 변승우씨는 자신의 저서 여러 곳에서 성령이 직접 자신에게 책을 저술하라든지 또 어떠어떠한 내용으로 설교하라고 지시한다고 강조한다. 이는 자신의 저서나 설교에 대해 초월적인 권위를 부여하는 효과이다. 또한 그의 직접 계시성은 기성 교회에 대한 강한 비판과 자기 교회를 특수화하는 효과가 있다. 변 씨의 직접계시 주장은 결과적으로 성경의 권위를 약화시키는 효과가 있다. 변 씨의 이러한 주장은 성경이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위해 충분한 계시 내용을 담고 있어 성경 이외 더 이상 직접적인 계시는 없다는 우리 교단의 교리에 반하는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합신 : 지금도 계시가 계속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도 위험한 사상이다. 변승우 목사는 자신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계시의 수여자로 믿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변승우 목사는 1) 사도들과 똑같은 영감을 받았으며 2) 그의 성경해석은 전혀 틀리지 않고 완전하며 3) 그의 말은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는 직통계시를 주장하고 이것을 예언사역이라 하여 교회에서 실행하고 있다.
고신 : 그는 날마다 ‘성경이 아닌 음성을 들어야’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손에는 성경을 정확하게 해석하는 다림줄이 있다고 단언하기도 한다.
기성 : 성서관 및 계시론에 있어서 성령의 직접 계시(레마)를 객관적 계시인 말씀(로고스)보다 더 중시하거나, 성경을 정확히 해석할 수 있는 다림줄이 자신에게 있으며, 성경저자들이 받았던 성령의 영감을 자신이 받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주 위험한 태도이다.
<직통(직접) 계시에 대해>
『계시』 p.7-8
『계시』 p.97-99
<성경 이외 더 이상 직접적인 계시는 없다는 주장에 대해>
『계시』 뒤표지 글
『계시』 p.19-22
『계시』 p.32-36
『계시』 p.49-55
『계시』 p.79 p.85
<성경과 방불한 계시를 받고 있다는 주장에 대해>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한 전통적인 계시관』 p.63-64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한 전통적인 계시관』 p.78-96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한 전통적인 계시관』 p.71
『예언을 멸시하지 말라』 p.96
『계시』 p.66-75
『터』 p.98-107
<직통(직접) 계시에 대해>
1. 『계시』 p.7-8
이단사냥꾼들이 한 교회를 이단으로 매도하는 대표적인 수법 중의 하나가 ‘직통계시 이단’으로 모는 것입니다. 그들은 ‘계시’라는 단어를 사용하면 큰일 날 것처럼 말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사용하는 ‘직통계시’가 무슨 의미인지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경악했습니다. 성경과 동등한 권위가 있는 계시를 받는 것도 아니고 단지 하나님께로부터 무엇이든지 직접 받으면 그것이 직통계시였습니다. 이런 잣대를 들이대면 체험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 이단이 됩니다.
물론 계시라는 단어를 특별계시인 성경과 같은 의미로 사용하면 안 됩니다. 그런데 이단사냥꾼들은 안식교의 엘렌 G. 화잇이 받았던 것과 같은 이단적인 계시가 아니라 성령께로부터 오는 꿈과 환상과 예언, 입신 심지어는 흔한 레마(이 용어의 사용이 바람직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저도 의문입니다만)까지 직통계시로 구분합니다. 그래서 이단으로 매도합니다. 이것은 성경에 대한 성령의 조명 외에는 아무 것도 인정하지 않는 계몽주의에 영향을 받은 잘못된 신학사조 즉 은사중지론에서 파생된 매우 잘못된 생각입니다.
물론 은사중지론의 입장에서 보면 제가 말한 계시들도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나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한 전통적인 계시관”이라는 책에서 충분히 증명한대로 은사중지론은 비성경적인 이론입니다. 은사중지론은 개혁주의 신학의 대표적인 오점 중의 하나입니다. 은사중지론은 이 시대의 대표적인 ‘사람의 계명’(막 7:6-13)이며, 하나님의 계명을 폐하는 마귀적인 이론입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폐기 돼야 합니다.
2. 『계시』 p.97-99
이단사냥꾼들과 적지 않은 교단들이 성령께로부터 오는 계시들을 부정하고 “직통계시”라는 우스꽝스러운 말을 만들어내어 이단정죄의 잣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직통계시라는 말은 그 자체가 모순입니다. 왜냐하면 계시는 당연히 성령으로부터 직통으로 오는 것이지 쓰리쿠션으로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계시를 “직통계시”라는 해괴한 말로 부르며 이단시하는 불의하고 악한 일은 교계에서 근절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상식적인 말이지만 법은 만인에게 평등해야 합니다. “유전무죄요 무전유죄”가 되면 안 됩니다. 그런데 직통계시를 이단시비의 잣대로 삼으면, 극소수 외에는 그 누구도 동의할 수 없는 우스꽝스러운 일이 벌어집니다. 직통계시를 이단의 기준과 잣대로 삼으면 ‘세기의 성자’라 일컬어지는 성 프랜시스부터 이단으로 정죄해야 합니다. 수도사들의 선조이며 ‘대 안토니’라 불리는 성 안토니 역시 이단으로 정죄해야 합니다. 기독교 고전 중의 고전으로 성경 다음으로 가장 많이 팔린 “그리스도의 본받아”의 저자 토마스 아 켐피스도 이단으로 정죄해야 합니다. 구세군의 창시자 윌리엄 부스와 포스퀘어교단의 창시자 에이미 샘플 맥퍼슨도 이단으로 정죄해야 합니다. 많은 이들에게 존경받는 ‘인도의 성자’ 썬다 싱도 이단으로 정죄해야 합니다. 또 강력한 복음전도자이며 오랄 로버츠 대학의 설립자인 오랄 로버츠 목사님도 이단으로 정죄해야 합니다. 또한 전 세계에서 가장 크고 역동적인 선교단체인 예수전도단 역시 이단으로 정죄해야 합니다.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인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조용기 목사님과 순복음 교단 역시 이단으로 정죄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한국영성총연합회에 속해 있는 모든 교회와 심지어 통합 소속 주안장로교회 나겸일 목사님도 이단으로 정죄해야 합니다. 이와 함께 명성교회 김삼환 목사도 이단으로 정죄해야 합니다. 저는 집회에 참석하여 김삼환 목사가 어릴 때 기도하면서 본 환상에 대해 간증하는 것을 두 귀로 직접 들었습니다.
제가 거명한 분들은 극히 일부에 불과합니다. 저는 직통계시를 이단의 잣대로 삼을 때 이단으로 정죄해야 할 수천수만 명의 목회자들의 이름을 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 여기에 동의하겠습니까? 사실이 이런데도 아직까지도 그런 구시대적인 잣대를 이단사냥꾼들이나 교단들이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 신기하고 놀라울 정도입니다. 이런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 한국 교회 안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것은, 한국 교회가 사실에 관계없이 누군가를 표적으로 삼고 거짓으로 이단으로 매도하는데 익숙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이런 악인들을 교계에서 뿌리 뽑아야 합니다.
<성경 이외 더 이상 직접적인 계시는 없다는 주장에 대해>
1. 『계시』 뒤표지 글
성경으로 돌아가자!
웨인 그루뎀 박사는 미국의 명문 하버드대(B. A.),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M. Div.)을 거쳐 영국 캠브리지 대학에서 박사학위(Ph. D.)를 취득했으며 트리니티복음주의신학교의 조직신학교수를 거쳐 현재 피닉스신학대학원(Phoenix Seminary)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웨인 그루뎀은 예언이나 환상을 보는 자들을 무조건 신비주의자로 정죄하고 이단시하는 정통보수신학에 제동을 걸었다. 특히 예언을 부정하는 존 맥아더의 견해를 신랄하게 반박했다.
웨인 그루뎀은 ‘계시’를 ‘신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는 오류의 가능성이 없는 성경말씀’과 ‘오류의 가능성이 있는 사적인 계시’ 두 가지로 구분했다.그러면서 기적종식론자로 대표되는 리처드 개핀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성경 고전 14:24-28에 의할 때 예언의 은사가 사도시대에 끝났다는 개핀의 주장은 전혀 성경적인 근거가 없는 추측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미국 필라델피아 소재 웨스트민스터신학교의 번 포이트레스 교수도 많은개혁, 보수신학자들이 '계시'라는 말을 전문술어로 지나치게 좁게 정의하여 '특별계시는 곧 성경말씀'이라고 단정 지어 버리기 때문에 개핀과 같은 실수를 저지른다고 비판했다. 성경에는 ‘계시' 또는 ‘계시하다’라는 말이 꼭 정확무오 한 ‘특별계시 곧 성경말씀'이 아니라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계시는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나는 것(롬 1:18), 신자들이 하나님을 아는 것(마 11:25), 하나님을 더욱 잘 알아가는 것 (엡 1:17)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또 예언과 같은 은사는 교회 설립 은사(Church founding gift)이고 초대 교회 때 교회가 설립되었으므로 오늘날에는 이런 은사가 필요 없다는 주장에 대해, 포이트레스는 만일 사도들이 교회를 설립하기 위해 이런 은사가 필요했다면 오늘날 성경 반입이 금지된 오지의 선교사들에게 이런 은사가 더욱 더 필요한 것이 아닌가하고 반문한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그는 아무런 성경적 근거 없이 고전 14장 1절과 살전 5장 20절이 명확하게 인정하는 예언의 은사를 사람인 자기들이 무엇이기에 부정하느냐면서 그들의 횡포를 책망했다.
뿐만 아니라 저명한 신약학자인D. A. 카슨도 ‘성경해석의 오류’(Exegetical Fallacies)에서조직신학자가 사용하는 좁은 의미의 '계시'와 성경이 말하는 넓은 의미의 ‘계시’의 정의를 혼동하는 오류에 빠지지 말 것을 경고했다. 그러므로 계시가 끝나고 없다는 비성경적인 교리적인 도그마에서 빠져나오라!
2. 『계시』 p.19-22
1. 지금은 성령시대이고 성령님은 “지혜와 계시의 영”이십니다.
흔히들 인류의 역사를 3시대로 구분합니다. 즉 성부시대, 성자시대, 성령시대로 구분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성령시대입니다. 교회는 성경의 완성이 아니라 성령의 강림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행 2:1-4). 그리고 구약시대와 신약시대의 가장 큰 차이점 중 하나는, 구약시대에는 왕과 선지자와 제사장들에게만 성령이 임했으나 신약시대에는 요엘의 예언대로 믿는 모든 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신다는 것입니다(욜 2:28-29).
그리고 중요한 사실은, 사도 바울이 신약시대의 모든 신자들에게 임하는 성령님을 “지혜와 계시의 영”이라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여기서 “영”은 성령님을 가리킵니다. 존 스토트는 이 구절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비록 RSV가 ‘영(spirit)’의 첫 글자를 소문자(s)로 적고 있을지라도, 성경은 성령에 대하여 ‘진리의 영’,계시의 중개자, 하나님 백성의 선생으로 말하기 때문에 여기서 이것이 성령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계시의 중개자”라는 표현입니다. 성령님은 계시의 중개자 즉 계시를 주시는 분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성령님을 “지혜와 계시의 영”이라고 부른 이유입니다.
그러면 성령님은 누구에게 계시를 주실까요? 바울의 증언에 의하면 성경저자인 바울과 같은 사도들에게만이 아닙니다. 이 편지의 수신자인 에베소 교회 신자들을 포함한 모든 평범한 신자들에게입니다. 이 구절에서 바울은 신약의 신자들에게 성령님을 지혜와 계시의 영으로 소개했습니다. 그들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이신 성령님을 주십사고 간구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이 그들에게 지혜와 계시를 주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의 의미가 그것이라는 것은 그 뒤에 나오는 "아버지를 알게 하시고"라는 문구를 통해서 확인됩니다. 지혜와 계시의 영이 임하면 그 결과 아버지를 알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1;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이처럼 계시를 통해서만 아버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아버지를 알게 하시고”라는 표현은 성령님이 지혜와 계시의 영으로 불릴 뿐 아니라, 실제로 신자들에게 지혜와 계시를 주시는 분이라는 것에 대한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저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존 웨슬리가 신약성서주해에서 에베소서 1장 17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석했다고 생각합니다.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셔서' - 약속의 성령은 믿는 자의 진보에 따라 지혜와 통찰도 주신다. 그리하여 그들에게 구원의 지혜와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깨닫게 해주신다. 바울은 여기에서 모든 진실 된 그리스도인들에게 공통적으로 있는 지혜와 계시를 논하였다.”
보십시오. 존 웨슬리도 사도들뿐 아니라 모든 신자들에게 성령으로 말미암아 계시가 주어진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그는 계시를 사도들뿐 아니라 진실한 모든 신자들에게 주어지는 공통적인 것으로 보았습니다.그러므로 직통계시라는 잣대를 들이대면 존 웨슬리도 이단이 되고 맙니다.
3. 『계시』 p.32-36
우리는 영생을 얻기 위해 예수님을 믿습니다. 그런데 영생은 ‘성경을’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예수님을’ 아는 것입니다. 즉 영생은 ‘하나님과 예수님에 관해서’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예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예수님에 관해서 아는 것과 달리 하나님과 예수님을 아는 것에는 계시가 필요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에 분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마태복음 11: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은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이 말씀은 두 가지 의미 중 하나일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나 사도나 선지자가 계시를 받아서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것이 없이는 아버지를 알 수 없다고 말한 것일 수도 있고, 사람들이 각각 내적인 계시를 받지 않으면 아버지를 알 수 없다고 말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말씀한 계시가 전자라면 ‘그분들이 계시를 받아 성경을 완성했으므로 지금은 이런 계시가 필요하지 않고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주장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후자라면 지금도 계시가 존재하며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의 의미는 후자입니다. 그 증거가 바로 마태복음 11장 25-27절입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또, 누가복음 10장 17-22절입니다.
“칠십 인이 기뻐하며 돌아와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시며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 하시고”
두 곳 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라는 말씀이 먼저 나옵니다. 그 직후에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문맥상 25절의 ‘나타내심’과 27절의 ‘계시’는 같은 의미입니다. 실제로 “나타내심”과 “계시”는 같은 단어입니다. 두 곳 다 헬라어 ‘아포칼륍토’가 사용되었으며, 이 단어는 “폭로하다, 덮개를 벗기다, 나타내다, 드러내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더구나 계시를 뜻하는 ‘아포칼륍시스’와 동의어입니다. 그래서 27절에서 ‘계시’로 번역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27절뿐 아니라 25절에 나오는 “나타내심”도 계시를 의미함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존 스토트도 25절을 강해하면서 이렇게 썼습니다.
“하나님은 ‘어린아이들’ 즉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받을 만큼 충분히 겸손한 사람들에게 자신을 계시하신다.”
그러므로 27절의 의미는 예수님이나 사도나 선지자가 아니라 복음을 듣는 각 개인에게 내적 계시가 필요하다는 뜻임이 분명합니다.
그렇더라도 제 말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저는 각 사람이 구원받기 위해 성경 이외의 계시를 개인적으로 직접 받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문맥을 보면 마태나 누가가 말하고 있는 것이 그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잘 보시면 70인 제자가 나가서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그런데 듣는 자들 중 자기가 지혜롭고 슬기 있다고 생각하는 교만한 자들에게는 복음의 비밀이 감추어졌습니다. 즉 그들은 복음을 들을 때 내적인 계시를 받지 못했습니다. 반면에 어린아이 같이 겸손하고 열린 마음을 가진 자들에게는 성령님이 복음의 비밀을 나타내셨습니다. 즉 그 마음에 계시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을 두고 예수님이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하나님을 아는 자가 없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계시’는 성경 이외의 계시가 아니라 성경의 복음과 진리를 전할 때 성령님이 듣는 자들에게 역사하셔서 그들의 눈과 귀를 여시고 마음을 여셔서 깨닫게 하시는 내적인 계시를 뜻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이런 계시가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계시가 끝났다는 주장은 어리석은 것이며 성경적인 것이 아닙니다.
4. 『계시』 p.49-55
3. 정경 완성을 위한 특별계시는 끝났으나 성령의 은사로 말미암는 계시는 지금도 존재합니다.
오늘날 계시가 끝났다고 믿고 그렇게 가르치는 신학자와 목회자들이 다수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분들에게 계시가 끝났다는 것을 증명해보라! 고 도전하고 싶습니다. 대답은 안 들어보아도 뻔합니다. 대부분 고린도전서 13장 8-10절을 근거로 들이댈 것입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하지만 이것은 그들이 은사중지론에 미혹되었으며 성경 자체에 무지하다는 것을 드러낼 뿐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온전한 것’은 로이드 존즈가 지적한 것처럼 정경의 완성이 아니라 예수님의 재림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그때까지 이 모든 은사들은 폐해지지 않고 존재할 것입니다. 즉 성령의 은사들은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존재합니다. 이것을 더 설명하지는 않겠습니다. 자세한 것은 웨인 그루뎀 박사가 쓴 “조직신학” 하권이나 저의 책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한 전통적인 계시관”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한편, 성경을 잘 아는 분들은 에베소서 3장 2-5절을 근거로 제시할 것입니다.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을 너희가 들었을 터이라.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내가 먼저 간단히 기록함과 같으니 그것을 읽으면 내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 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셨으니”
그러나 이 말씀은 성령의 은사들 중 계시의 은사들이 끝났다는 의미가 아니라, 바울이 받은 성경 기록을 위한 계시를 다른 세대에게는 주지 않으신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과 바울을 포함하여 성경저자들만 이런 계시를 받았습니다(롬 16:26, 갈 1:12, 3:23, 벧전 1:12). 이런 계시는 오늘날 누구에게도 주어지지 않습니다. 이것은 ‘토대적인 사도들’에게만 주어졌던 계시입니다.
그런데 ‘계시’가 이런 계시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성경기록과 무관한 계시들이 나옵니다. 예를 들어, 고린도후서 12장 1절에 나오는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가 그것입니다. 이 구절에 나오는 바울이 셋째 하늘에 올라가서 받은 계시는 성경 기록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셋째 하늘의 경험에 대해 일절 함구했기 때문입니다. 다음 구절도 마찬가지입니다.
갈라디아서 2:2 “계시를 따라 올라가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제시하되 유력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바울이 성경에 기록한 복음과 진리를 계시 받았다는 것이 아니라 그가 계시로 인도함을 받았다는 뜻입니다.그러므로 이것도 성경기록과 무관한 계시입니다. 그리고 성경기록과 무관한 이런 계시는 바울 같은 사도들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일반성도들에게도 주어졌습니다. 그 증거가 바로 고린도전서 14장입니다.
고린도전서 14:6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으로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으로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고린도전서 14:26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고린도전서 14:30 “만일 곁에 앉아 있는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으면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
이처럼 바울뿐 아니라(6) 고린도교회 성도들도 계시를 받았습니다(26, 30). 이것은 은사장인 고린도전서 14장에 나오는 구절들입니다. 그들은 성령의 은사로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들이 받은 계시는 성경 기록이 아니라 단순히 개인 신앙생활과 은사사역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은사는 중지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바울과 같은 계시를 받는 사람들은 없지만 그 당시 성도들이 받은 것과 같은 계시를 받는 것은 가능하다고 말해야 성경적입니다.
흔히 고린도전서 12장에 나오는 성령의 아홉 가지 은사 중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영분별’을 계시의 은사로 분류합니다. 왜냐하면 그 은사들은 우리에게 계시를 주기 때문입니다. 케네스 해긴 목사님은 “성령과 성령의 은사들”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성령의 은사를 구분하는 가장 단순한 방법은 그들 중 세 가지는 뭔가를 말하는 것이고, 세 가지는 뭔가를 행하는 것이고, 세 가지는 뭔가를 계시하는 것으로 분류됩니다.
- 뭔가를 말하는 세 가지 발성의 은사
* 예언
* 각종 방언
* 방언 통역
- 뭔가를 행하는 세 가지 능력의 은사
* 믿음의 은사
* 능력 행함
* 병 고치는 은사
- 뭔가를 계시하는 세 가지 계시의 은사
* 지혜의 말씀
* 지식의 말씀
* 영분별”
우리나라의 조용기 목사님도 고린도전서를 강해하면서 성령의 은사를 다음과 같이 세 부류로 구분했습니다.
“8절부터 10절까지는 성령의 9가지 은사가 열거되어 있습니다. 이 9가지 은사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분류해 볼 수 있습니다.
1) 계시의 은사
(1) 지혜의 말씀의 은사
(2) 지식의 말씀의 은사
(3) 영분별의 은사
2) 발성의 은사
(1) 방언의 은사
(2) 방언 통역의 은사
(3) 예언의 은사
3) 권능의 은사
(1) 믿음의 은사
(2) 병 고치는 은사
(3) 능력 행함의 은사”
결국 두 분 다 계시가 오늘날도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한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들 안에 계시의 은사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은사들은 여전히 폐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계시는 당연히 오늘날도 존재합니다. 그래서 저를 비롯해서 은사에 대해서 열린 마음을 가진 많은 교수님이나 목사님들이 ‘계시’라는 단어를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순복음과 성령운동을 하는 교회들은 성령의 은사가 계속된다고 믿고 있으며, 그래서 계시 받았다는 말을 설교나 책에서 아무 스스럼없이 사용합니다. 이것은 매우 성경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성경에서 성령의 은사로 받은 것을 ‘계시’라고 표현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계시라고 부른 것을 계시라고 부르는 것은 성경적인 것이며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이를 두고 잘못되었다고 하는 이단사냥꾼들이나 교단들이 오히려 잘못된 것입니다.
5. 『계시』 p.79 p.85
4. 요한계시록에서 계시라고 부른 것들이 오늘날도 여전히 존재합니다.
요한계시록은 성경 중 ‘계시’라는 단어가 책명에 들어가 있는 유일한 책입니다. 계시록의 내용 전체가 계시입니다. 그 책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요한계시록 1: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그리고 계시가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요한계시록 1:1-3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하였느니라.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이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이 알려주신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 ‘천사의 방문을 통해서 알게 하신 것’,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것’,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증거 하신 말씀’, ‘환상을 본 것’, ‘미래에 대한 예언’ 등을 계시라고 불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계시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보겠습니다.
요한계시록 1:19 “그러므로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요한계시록은 “네가 본 것”(과거)과 “지금 있는 일”(현재), “장차 될 일”(미래) 세 파트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네가 본 것”은 1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방문과 요한이 본 예수님의 영광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계시의 은사인 영분별의 은사가 작동한 것으로 예수님 자신에 대한 깊은 계시입니다.
“지금 있는 일”은 2-3장에 나오는 당시 존재했던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예수님이 요한을 통해 보낸 편지를 가리킵니다. 그 안에는 각 교회에 주시는 칭찬과 책망과 위로와 권면과 약속 즉 예언의 말씀 성격의 것들이 주류입니다(고전 14:3). 그런데 단순 예언 이상의 것이 있습니다. 각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계속 반복되고 있는 “안다”는 표현이 그 증거입니다(계 2:2-3, 9, 13, 19, 3:1, 8, 15). 즉 이 편지들에는 덕을 세우고 권면하고 안위하는 단순 예언뿐 아니라, 계시의 은사인 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의 은사로 주어지는 과거나 현재 미래에 대한 계시적인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부분도 계시입니다.
“장차 될 일”은 4-22장에 나오는 요한이 입신과 환상과 천사와 들리는 음성을 통해서 받은 반드시 속히 될 일들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영분별의 은사를 통해서 본 천국의 광경과 지혜의 말씀의 은사를 통해서 받은 미래에 대한 계시들이 주 내용입니다. 따라서 당연히 계시입니다.
이처럼 요한계시록은 책 내용 전체가 계시입니다. 문제는 많은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이 책을 끝으로 즉 정경의 완성과 함께 모든 계시가 끝났다고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것입니다. 왜냐하면 정경을 위한 계시는 끝났지만 개인 신앙생활과 사역을 위한 계시는 지금도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정경을 위한 계시와 오늘날 주어지는 계시가 임하는 방식은 같지만 기름부음의 분량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자는 믿음의 대상이지만 후자는 분별의 대상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성경 기록을 위해 쓰임 받은 선지자들에게 임했던 기름부음과 오늘날의 선지자나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에게 임하는 기름부음은 그 분량이 다릅니다. 그래서 전자가 받은 계시는 정경인 캐논 즉 잣대가 되지만, 후자가 받은 계시들은 캐논이 아닌 분별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고전 14:29, 살전 5:20-21). 따라서 우리는 받은 계시를 성경을 기준으로 잘 분별하고 성경적인 것만 받아들여야 합니다.
정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과 동일한 권위를 갖고 있는 계시는 끝났습니다. 하지만 성경과 같은 권위를 갖고 있지 않은 ‘기름부음의 분량은 다르지만 같은 방식으로 주어지는 계시들’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이것은 성경은 물론이고 교회사를 통해서도 증명이 가능합니다. 만약 정경을 기록하는 계시뿐 아니라 개인 신앙과 사역을 위한 계시마저도 성경의 완성과 함께 끝나고 없다면 그 이후 같은 종류의 영적 체험이나 간증이 교회사에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과연 없습니까? 아닙니다. 있습니다!
<성경과 방불한 계시를 받고 있다는 주장에 대해>
1.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한 전통적인 계시관』 p.63-64
2. 우리가 받는 계시들과 성경의 계시는 같은 권위를 가지고 있는가? 아니면 다른가?
저는 은사중단론은 비성경적인 견해이고, 지금도 계시가 존재한다는 것을 성경으로 입증했습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가 꿈이나 환상, 예언, 방언 통변, 입신, 천사의 방문, 혹은 레마를 통해서 받는 계시는 어떤 권위를 가지고 있을까요? 그것도 성령께로부터 온 것이니 성경과 같은 권위를 가지고 있을까요? 분명히 말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질문할 필요도 없는 이런 유치한 질문을 먼저 하는 이유는, 우리가 계시를 성경보다 높인다는 천인공노할 매도들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입니다. 책을 쓰면 자기 책을 성경보다 높인다, 밥 존스의 간증을 인용하면 성경보다 밥 존스의 계시를 더 높인다, 케네스 해긴 목사님의 책을 인용하면 케네스 해긴이 받은 계시를 성경과 동일한 계시로 수용한다, 예언 사역을 하면 예언을 성경보다 더 높인다... 는 등 계시와 관련된 어처구니없는 음해는 끝이 없어 보입니다. 그리고 거짓말만 하고 살았는지 그렇지 않다고 해도 어찌 그렇게들 안 믿는지, 아예 사람을 매도하기로 작정한 사람들 같습니다. 이것은 교단이나 신학자나 목사들이나 소수를 제외하고는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정말 환멸감이 느껴지고 진절머리가 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어느 정신 나간 목사가 계시를 성경보다 높이거나 성경과 같은 권위가 있다고 믿겠습니까? 그럴 정도로 무모하거나 어리석은 목사가 과연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그것은 우리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사람들이 저에 대한 누구의 예언, 혹은 어떤 간증을 들이대든지 그것은 애써 진실을 외면하고 우리를 이단으로 매도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하는 말들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추호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실제로 우리가 무엇을 믿고 있느냐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성경에 나오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사람들을 보내어 예수님의 말 꼬리를 잡으려고 했던 것처럼 왜 그렇게 말꼬리를 잡고 물고 늘어지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2.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한 전통적인 계시관』 p.78-96
전에 백석교단 이대위에서 조사를 받을 때 샨 볼츠가 한 예언에 대해서 제게 묻기에 이와 유사한 답변을 한 적이 있습니다. 바울이 한 설교도 다 성경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기간 중 하신 말씀은 모두 100% 진리였지만 예수님의 말씀도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모두 성경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성경이 가진 권위는 그만치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제가 저나 다른 사람들이 받는 계시들을 성경과 같다고 생각하거나 더구나 성경보다 높일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명백한 모함입니다.
저는 지금 단순히 이단시비를 피해가기 위해 급조된 구차한 변명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증거로, 서울에 큰믿음교회가 세워진 해인 2005년 12월 20일 제가 새벽기도 때 준비 없이 한 설교의 한 부분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그 설교의 제목은 “계시가 임하는 사람일수록 성경을 신물 날 정도로 봐야 합니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을 많이 합니다. 저는 말 많은 사람을 싫어합니다. 말은 자기 생각의 표현인데 자기 생각을 다 표현할 필요가 있을까요? 사무엘처럼, 마리아처럼 주님 앞에 꿇어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것이 가장 좋은 편을 택한 것이고, 그것이 지혜입니다. 그런데 무슨 말과 이론들이 그렇게도 많은지 그것은 다 쓸데없는 것입니다.
정말 성공하기를 원하시면 사사로운 지혜를 버리세요. 사사로운 지혜를 버리고, 사업할 때 전심으로 주님을 향하고 주님의 음성을 들으세요. 주님의 음성을 정확하게 듣는 자는 성공합니다.
릭 조이너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앞으로 다가올 대 부흥과 대 추수 때 하나님께서 일으키실 하나님의 사람들의 특징은 하나님의 음성을 정확하게 듣는 것이다.’ 참입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최고의 지혜이고, 최고의 전략입니다. 주님과 친밀해지므로 하나님의 음성을 정확하게 듣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정확하게 듣는 것이 목회에서도 사활적으로 중요하고, 세상사에서도 생사화복을 좌우하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음성을 정확하게 들을 수 있을까요? 꿈을 꾸는 것입니까? 환상을 보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것만으로는 더 뒤죽박죽 될 수 있습니다. 예언의 은사가 임한다고, 입신한다고 하나님의 음성을 정확하게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정확하게 들으려면 먼저, 성경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이것이 기본입니다. 그 전에는 여러분이 듣는 음성들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성경을 많이 읽고 성경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분별력은 성경에서 나옵니다. 성경을 많이 읽어서 스펀지가 물을 흡수하는 것처럼 여러분의 생각과 머리가 성경으로 젖고 배어야 합니다.
제가 성경을 열심히 읽을 때는 하루에 다섯 시간에서 일곱 시간을 매일 읽었습니다. 그렇게 여러 해를 읽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제게 성경을 몇 번 읽었냐고 물어보는데 성경은 몇 번 읽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몇 시간을 읽었느냐가 중요합니다. 저는 성경을 읽으면 성경이 여러 가지로 깨달아지면서 자연스럽게 깊게 묵상이 되고, 수없이 떠오르는 성경구절들을 찾아봐야 되고, 그리고 물밀듯이 깨달아지는 것을 메모해야 되다 보니까 성경 반 페이지 읽는데 두세 시간이 걸리곤 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는데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제대로 들을 수 있는 방법은 성경에 익숙해지는 것입니다. 주님의 음성을 정확하게 들으려면 꿈이나 환상이나 예언이 열리는 것 가지고는 안 됩니다. 그것만으로는 아주 이상한 길로 갈 수 있습니다. 성경 말씀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그래야 분별력이 생깁니다. 이 과정을 사람들이 무시하기 때문에 탈선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들으려면 성경 말씀으로 머리가 채색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첫 번째인데 물론 이것은 하루아침에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쉬운 길을 찾지만 다른 길은 없습니다.
계시가 임하는 사람일수록 성경을 신물 날 정도로 봐야 합니다. 성경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주셨기 때문에 성경에 익숙해지지 않으면 심지어 ‘영분별의 은사’를 받아도 온전히 분별할 수 없습니다. 영분별의 은사는 성경을 대신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주는 분별이 따로 있고, 영분별의 은사가 주는 분별이 따로 있습니다. 성경이 주는 분별의 기초 위에서 영분별의 은사가 작동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주는 분별이 없이 영분별의 은사만으로는 제대로 분별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절대로 못 믿습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성경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여러분, 이것이 성경과 지금 받는 계시들을 똑같이 생각하거나 혹은 계시를 성경보다 높이는 자의 입에서 나오는 설교입니까?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과연 이런 설교를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그런 말들은 모두 억지요, 모함에 불과합니다.
여기에 덧붙여 쐐기를 박는 의미에서, 그동안 계시와 관련하여 큰믿음교회가 어떤 입장을 견지해왔으며 어떤 길을 걸어왔는가? 에 대해서 간략하게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어떤 거짓된 목사는 손에스더 전도사를 들먹이며 우리 교회를 이장림의 시한부종말론과 억지로 연결을 시키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1992년 이장림 목사의 책이 날개돋인 듯 팔리고 많은 목사와 신자들이 거기에 미혹되었을 때, 이장림이 예언한 그 날 오히려 놀러 다녔습니다. 왜냐하면 시한부종말론은 명백하게 비성경적인 것이고, 그 날 절대로 주님이 오시지 않을 것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장림 씨처럼 그렇게 쉽게 입신 간증에 속는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아는 것과는 달리 저는 아주 극소수의 입신간증만 믿습니다. 나침반출판사에서 성경적이라 판단되어 이례적으로 출판한 리차드 이비 박사의 “하늘나라 기행문”,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적극 추천하는 박영문 장로님의 “두고 보리라!”, 여러모로 충분히 검증된 케네스 해긴 목사님의 “나는 지옥에 갔다 왔습니다.”, 선지자들의 아버지 밥 존스 목사님의 천국 지옥 간증, 보좌에 올라갔을 때 하나님이 약속하신 200여 가지 사건이 그대로 이루어진 롤랜드 벅 목사님의 체험, 이것이 제가 실제로 믿는 입신간증의 전부입니다.
저는 심지어 토마스 주남이나 메리 백스터의 간증도 다 믿지 않습니다. 토마스 주남의 경우 조용기 목사님의 추천서가 없었다면 처음부터 선반 위에 올려놓았을 것입니다. 조용기 목사님의 추천서 때문에 그나마 처음에 마음을 열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여러분이 놀라실 지도 모르겠지만, 인도의 성자 썬다 싱을 존경하기는 하나 썬다 싱의 간증마저 그대로 믿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주인의 존재나 종교다원주의의 색채가 다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른 이들의 책뿐 아니라 우리 교회에서 일어난 입신들을 통해 입신 간증이 다 정확하거나 바르지는 않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미 오래 전에 회의와 실망감을 느껴 입신간증을 모은 “하늘나라에서 온 이메일”을 스스로 절판시켰고, 인터넷 카페 안의 국내 입신간증과 해외 입신간증 게시판에 있었던 수백편의 입신간증을 게시판째 통째로 내려버렸습니다. 그리고 카페에 회원들이 올리는 입신 간증들을 거의 대부분 즉각적으로 내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주 최근에는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라는 제목의 저의 책 마지막 단락에 나오는 “입신”에 대한 단원을 통째로 없애버리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성경대로 계시가 지금도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나, 그렇다고 계시들을 쉽게 믿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계시들을 성경에 입각하여 까다롭고 철저하게 분별하는 지는 인터넷 카페에 올려져 있는 3가지 게시물을 통해 여러분이 얼마든지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먼저, 2008년 2월 2일에 제가 인터넷 카페에 올린 ‘겨자씨’라는 닉네임을 가진 성도님에 대한 공지 글입니다.
“과거 ‘겨자씨’(그 이름)라는 닉네임으로 활동했던 분의 쪽지와 메일을 조심하십시오.
이분은 전에 ‘겨자씨’라는 닉네임으로 활동했던 분으로 마치 자신이 무슨 대단한 선지자라도 되는 양 우리나라 뿐 아니라 각 나라에 관한 환상과 계시를 받아 천국 카페를 위시해 여러 카페에 올렸던 분입니다.
우리는 환상과 계시를 다 믿지 않습니다. 거짓된 계시와 환상도 많이 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읽어보았는데 거짓 영들에게서 온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희 카페에 올라오는 대로 그 게시물을 내렸습니다.
여러분, 그런 정도의 예언을 하려면 환상을 보고 예언의 은사를 받고 입신을 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랜 세월 동안 말씀으로, 그리고 영적인 지도를 받아가며 훈련을 받고, 무엇보다도 그냥 무책임하게 이런 것을 보았다 저런 것을 보았다가 아니라 실제로 받은 대로 계속 정확하게 이루어짐으로 검증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분의 간증들은 그냥 무엇을 보았다 들었다 일뿐 믿을 만한 성취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평소 교회 안에서도 겸손히 지도를 받거나 훈련을 받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분이 거짓 영에 속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다가 구역 모임에서 허락되지 않은 사역을 하고 문제가 발생하여 제명 조치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분이 이런 저런 주장을 하지만 일고의 가치도 없습니다. 그런 주장에 일일이 대응할 시간도 없고 또 지저분하게 구구절절이 그분에 관한 것을 다 쓸 생각도 없습니다. 그냥 거두절미 하고 그분이 저를 찾아와 만났던 마지막 만남에 대해서만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분이 교회에서 제명된 후 오랜 후에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왜 그분이 받는 계시들이 성령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고 잘못된 것인지 쭉 설명을 해 드렸더니, 다 듣고 난 후에 ‘어쩐지 제게 나타난 예수님의 모습이 이상했어요. 그리고 느낌이 좋지 않았어요. 제가 속았던 것이군요’ 하고 눈물을 흘리고 회개하고, 제게 기도 부탁을 해서 측은한 마음에 간절히 축복기도까지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거듭 감사를 표하고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오래지 않은 일인데 이제 와서 갑자기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며 저와 교회를 음해하는 글을 쓰고 카페 회원들에게 계속 쪽지와 메일을 보내 미혹하고 있네요. 휴~ 제가 이렇게 귀신에게 속아서 거짓 계시를 받는 사람들을 많이 보아서 알지만, 정말 귀신에게 속는 사람은 괜히 속는 게 아닌 것 같아요. 그들의 언행을 보면 귀신이 들어갈 만해서 들어간다는 것을 매번 느낍니다. 사람이 이렇게 속을 수 있고 악해질 수 있다는 것이 슬프네요. 그리고 참 피곤합니다.
지난 주 제가 설교한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예는 예고 아니오는 아니오입니다. 맹세가 필요하다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겠지요. 저는 그냥 사실 그대로를 적었습니다. 믿으십시오. 그리고 이런 분들의 의미 없는 글 때문에 혼란을 느끼거나 마음 고생하는 분들이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 여러분, 이 외에도 더 증거가 필요하십니까? 죄송한 말씀이지만 우리는 김용두 목사님처럼 그렇게 쉽게 입신 간증을 믿지 않습니다. 그리고 한국 WLI와도 마찰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성경의 사도와 오늘날의 사도가 다르다고 믿으며, 경험 위에 교리나 가르침을 세우는 것에 동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리는 오직 성경에 기초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에 의해 검증되지 않는 한 설사 밥 존스 목사님이 본 환상과 계시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믿지 않습니다. 우리는 계시가 아니라 성경을 따라갑니다. 심지어는 계시를 존중하는 이유도 성경이 그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욜 2:28-29, 고전 12:7-11, 고전 14:1-5, 엡 1:17). 이미 말했듯이 우리는 케네스 해긴 목사님이 받는 계시처럼, 단지 계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의해 깔끔하게 증명되는 계시들만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의 설교에서 수많은 계시들을 인용하지만 성경에서 벗어난 이상한 주장이 단 한 가지도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양심이 있다면 앞으로는 큰믿음교회가 계시를 성경과 동일시한다거나 성경보다 더 높인다는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제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경고하지만 회개치 않는다면 그런 거짓말을 하는 자들은 모두 반드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잠 12:19 “진실한 입술은 영원히 보존되거니와 거짓 혀는 눈 깜짝일 동안만 있을 뿐이니라.”
요 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계 21: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계 22:15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 밖에 있으리라.”
3.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한 전통적인 계시관』 p.71
저는 피터 와그너 박사님처럼 사도가 지금도 존재한다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그분의 가르침에 모두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가르침 중에 철저하게 성경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체험에 근거하여 이론을 만들어내고 성경으로 약간 덧칠만 한 가르침들이 제법 눈에 띄기 때문입니다. 저는 성경으로 입증되지 않는 한 어떤 체험이나 계시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완성되었고, 성경에 나오는 사도들과 동일한 권위를 가진 사도는 피터 와그너를 포함하여 지구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사도들은 성령의 조명에 의하여 사람의 계명으로 인해 손상된 진리를 성경대로 회복하고, 사도는 보냄을 받은 자이므로 하나님이 자신에게 이루라고 주신 일을 단계적으로 성취하고, 많은 교회들을 세우고 영적인 아비로서 따르는 교회와 목회자들을 지도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받는 계시나 체험이 성경과 동일한 권위를 가진 것이 아니며 성경을 기준으로 분별해야만 합니다.
4. 『예언을 멸시하지 말라』 p.96
물론 저는 계시에 기초하여 교리를 세우면 안 되고, 성경 위에 세워야 한다는 것을 잘 압니다. 100% 그것을 믿습니다. 늘 드리는 말씀이지만, 주님의 방문이나 입신 간증을 다 믿으면 안 됩니다. 예수님의 방문이나 입신 경험들을 들어보면 예수님의 머리 색깔이나 길이가 서로 다른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이 매일 염색을 하실까요? 그리고 그때 받은 예언이나 지식의 말씀이 안 맞거나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왜냐하면 진짜 예수님을 만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이 체험한 예수님의 방문이나 입신을 믿고 싶어합니다. 실제로 쉽게 믿습니다. 그리고 그것에 기초하여 교리나 주장을 만들어 퍼트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의해야 합니다.
5. 『계시』 p.66-75
성경 기록을 위한 계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지만 성령의 은사로부터 오는 계시는 여전히 존재합니다. 놀라운 사실은 대표적인 이단사냥꾼인 최삼경과 진용식 목사 역시 이것을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그 증거가 최삼경과 진용식 목사가 함께 저술한 “안식일 교회 대논쟁”이라는 책에 나와 있습니다.
“안식교는 성경 외에 다른 계시를 인정한다는 말에 대하여
김 목사는 성경 외에 다른 계시를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다른 여러 이단들이 가지는 특징으로서 성경 외에 자신들의 계시를 성경과 같은, 또는 성경 위의 계시로 인정받기 위함이다. 기성교회는 안식교의 이러한 주장을 다른 이단들과 함께 이단시하고 있는 것이다.
김 목사는 이러한 주장을 증명하기 위하여 요엘서의 예언과 고린도전서 12, 14장의 은사들을 인용하였다. 그러나 김 목사의 주장과는 달리 요엘서 2장의 예언이나 고린도전서의 은사들이 성경 외에 다른 계시를 말하고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더욱이 화잇의 계시를 뒷받침해주는 성경이 결코 아니다. 요엘서나 고린도전서가 말하는 것은 성경 외의 다른 계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성령의 은사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안식교에서 선지자로 믿고 있는 화잇의 계시는 보편적인 은사로서의 계시가 아니다. 안식교의 교리들은 성경의 계시처럼 화잇의 계시에 의하여 세워졌고 실질적으로는 성경 위의 계시로 작용하고 있다.”
보십시오! 분명히 최삼경과 진용식 목사조차도 “보편적인 은사로서의 계시”즉 성령의 은사로 임하는 계시를 인정했습니다. 아니면 적어도 이것이 이설이고 이단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히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인정하는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저는 최삼경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 성경과 같은 권위가 있는 계시가 존재한다고 믿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태어나서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저의 사상은 저의 책 “터”에 충분히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최삼경은 통합의 이대위위원장으로 있으면서 저를 이단으로 매도할 때 안식교와 논쟁할 때와 전혀 다른 잣대를 사용했습니다.
“변 씨의 직접계시 주장은 결과적으로 성경의 권위를 약화시키는 효과가 있다... 또한 그는 자신이 받은 직접 계시를 성경과 동일하거나 혹은 성경의 권위 위에 둔다. 나아가 변 씨는 자신이 사도들과 똑같은 영감을 받았으며 따라서 자신의 성경해석이나 설교는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는 식으로 암시한다...
변 씨의 이러한 주장은 성경이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위해 충분한 계시 내용을 담고 있어 성경 이외 더 이상 직접적인 계시는 없다는 우리 교단의 교리에 반하는 것임은 <본 교단 「헌법」 제 1편, 교리의 4부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 제 1장 ‘성경에 관하여’를 보라. 1조 ‘…그러나 하나님이 자기의 뜻을 자기 백성에게 계시해 주시던 이전 방법은 현재 중지되어 버렸다(히 1:12).’ 또 6조. ‘…이 성경에 대하여 어느 때를 막론하고 성령의 새로운 계시로서나, 인간의 전통으로서도 더 첨가할 수 없다(딤후 3:1517, 갈 1:8-9, 살후 2:2).’>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처럼 변 씨의 성경관과 계시관은, 비 성경적임은 물론 본 교단의 계시관과 성경관과 배치되는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권위를 훼손시킨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이 시대의 산헤드린 역할을 하는 통합의 교리가 오히려 비성경적이고 잘못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통합은 속히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한편, 이 글에서 최삼경은 “그(저를 가리킴)는 자신이 받은 직접 계시를 성경과 동일하거나 혹은 성경의 권위 위에 둔다.”고 했는데 이것은 천인공노할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반면에 “변 씨는 자신이 사도들과 똑같은 영감을 받았으며 따라서 자신의 성경해석이나 설교는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는 식으로 암시한다.”라고 했는데, 이것은 근거가 있는 말입니다. 최삼경이 이런 말을 한 이유는 “다림줄” 책에 소개한 신학생 때의 저의 간증 때문입니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 방학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울산에 있는 집에 내려가서 기도를 많이 하고 성령의 은사를 두루 체험했으며 영분별의 은사가 아주 강한 나이 지긋한 한 여 전도사님과 어머니와 함께 기도원에 올라갔습니다. 거기서 함께 열심히 기도를 하는데 갑자기 또다시 왜 하나님이 나에게 방언 통변의 은사를 주지 않으시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중단시키고 그것을 위해 함께 기도해 주실 수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다시 기도가 시작되었는데, 한참 기도를 하다가 갑자기 그 여 전도사님이 큰 소리로 배를 잡고 웃었습니다. 그냥 웃는 정도가 아니라 배를 잡고 자지러지게 웃으면서 아예 뒤로 넘어갑니다. 그래서 속으로 ‘아이고, 기도하다가 잘못되는 사람들이 있다는데 이분이 잘못되었는가 보다! 악령이 들어갔는가 보다!’ 하고 놀라서 ‘전도사님 왜 그러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래도 한참을 웃다가 겨우 진정을 하고 다음과 같은 얘기를 제게 들려주었습니다.
기도 부탁을 받고 그 전도사님이 ‘하나님, 변 전도사님에게 방언 통변의 은사를 주세요. 저렇게 사모하는데 저는 예언의 은사도 있으므로 방언 통변의 은사가 없어도 괜찮으니 안 되겠으면 저에게 있는 방언 통변의 은사를 거두어가시고 대신 변 전도사님에게 주세요.’ 이렇게 기도하셨답니다. 얼마나 고마운 기도입니까? 그런데 그 기도를 하자마자 제가 옆에서 방언으로 한 마디 톡 쏘더랍니다.
‘네가 가진 은사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그깟 것을 나에게 주라고 그러느냐?’
참 황당한 노릇 아닙니까? 만약 이 말을 제가 한국어로 했다면 실례도 보통 실례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방언으로 한 말입니다. 그것도 저는 방언 통변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냥 열심히 기도하고 있었을 뿐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그 전도사님에게는 통변의 은사가 있었기 때문에 알아들은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그분은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이렇게 여쭈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도대체 변 전도사님에게 무슨 은사를 주셨습니까? 무슨 은사를 주셨기에 아홉 가지 은사를 두루 체험한 저에게 저렇게 당돌한 말을 할 수 있는 것입니까?’
그때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을 누가 기록했느냐?’
‘성경은 선지자와 사도들이 기록했지만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한 것이므로 성경의 저자는 성령님이십니다.’
‘네 말이 옳다. 나는 이 시대의 많은 나의 종들에게 말씀의 은사를 주었다. 그러나 성경 저자들이 성경을 쓸 때에 임했던 그런 영감을 준 사람은 이 종 하나뿐이다. 나는 그에게 단순히 말씀의 은사가 아니라 성경 저자들이 성경을 쓸 때 가지고 있었던 그런 영감을 주었다.
오해하지 말아라. 이것은 그가 다시 성경을 기록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성경은 이미 완성되었다. 그러나 그는 성경을 정확하게 해석할 것이다. 그가 성경을 해석하는 것은 틀린 것이 없을 것이며, 내가 직접 하는 말과 같을 것이다. 그러니 이 은사를 어찌 다른 은사들과 비교할 수 있겠느냐?’”
이 간증을 잘 보시면 간증 자체가 ‘성경은 완성되었다’, ‘성경을 기록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라고 못 박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책에서 이 간증을 소개한 후 저는 이렇게 썼습니다.
“어떤 분은 이 간증을 읽으면서 피식 웃을 것입니다. 그리고 못미더워할 것입니다. 이해합니다. 왜냐하면 저 자신도 오랫동안 이 간증을 액면 그대로 믿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냥 ‘나에게 말씀의 은사를 강하게 주셨구나.’ 하는 정도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제가 하는 성경해석이 100% 맞다거나, 성경저자에게 임했던 영감을 준 사람은 저 하나뿐이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분명히 저는 이 간증을 액면 그대로 믿지도 않고 그냥 ‘나에게 말씀의 은사를 강하게 주셨구나.’ 하는 정도로만 생각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하는 성경해석이 100% 맞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당연한 말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과거는 물론 지금도 패러다임의 전환을 경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부적절한 표현이 없지는 않습니다. “성경 저자에게 임했던 영감을 준 사람은 저 하나뿐이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라는 표현이 그것입니다. 이것은 제가 성경에 무엇인가를 더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성경저자들이 받은 영감을 받았다는 의미가 됩니다. 하지만 제가 성경을 기록할 수 있다거나 제가 깨달은 것이 성경과 동등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고 이해할 수 있는 말씀의 은사를 받았다는 의미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단성은 아닙니다. 그래서 백석에서는 물론이고 한기총에서 최삼경 그룹인 박문수 교수가 이 문제를 집요하게 들고 나왔지만 한기총 이대위가 저의 답변을 듣고 이단이 아니라는 결정을 내린 것입니다.
더구나 케네스 해긴 목사님의 책을 읽고 ‘오늘날은 토대적인 사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 후 저는 이미 이 생각을 버린 지 오래입니다. 그래서 과거 한기총 이대위에서 기성의 박문수 교수가 이 문제를 물고 늘어졌을 때 “저는 패러다임의 전환을 경험했습니다.”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으로 끝난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그 교수가 뭐라고 말했는지 아십니까? “패러다임의 전환이 일어났으면 답니까?” 이러더군요. 그리고 끝까지 그 부분을 물고 늘어졌습니다. 그러면 어쩌라는 것입니까? 전에 미숙해서 잘못안대로 계속 믿으라는 것입니까? 박 교수의 말에 드러난 것은 결코 기독교 정신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귀적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10: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마귀는 죽이는 일을 하고 예수님은 살리는 일을 합니다. 마귀는 참소자로서 무조건 꼬투리를 잡아 죽이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구원자로서 한 사람이 깨닫고 돌이키면 즐거워서 잔치를 벌이십니다. 만약 이단사냥꾼들과 그 하수인들이 주님께 속한 자들이라면 제게 패러다임의 전환이 일어나고 바르게 깨닫게 된 것을 기뻐하고 축하했을 것입니다(마 18:12-17). 그러나 그들은 저의 변화에 대해서 오히려 당혹스러워 했고 매우 분노했습니다. 그들의 목적이 마귀처럼 무조건 이단으로 매도하고 죽이는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들의 정체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으로 그들의 아비가 마귀라는 명백한 증거입니다(요 8:44).
아무튼 저는 이미 여러 해 전 저의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다림줄” 수정증보판을 낼 때 그 간증에 대한 설명을 다음과 같이 수정했습니다.
“어떤 분은 이 간증을 읽으면서 피식 웃을 것입니다. 그리고 못미더워할 것입니다. 이해합니다. 왜냐하면 저 자신도 이 간증을 액면 그대로 믿지는 않았습니다. 그냥 ‘나에게 말씀의 은사를 강하게 주셨구나.’하는 정도로만 생각합니다. 저는 제가 하는 해석이 100% 맞다거나, 성경 저자에게 임했던 영감이 저에게 임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이 이상 제가 이 문제에 대해 더 답변할 필요가 있을까요? 없습니다.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래서 최근 예성 이대위에서도 동일한 질문을 받고 제가 “다림줄” 수정증보판을 증거로 제시하자 이단이 아니라는 결정을 내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는 큰믿음교회에 대해 직통계시 이단이라는 무지한 말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할렐루야! 선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6. 『터』 p.98-107
영성운동을 하는 교회들은 “지혜와 계시의 영”이신 성령님이 주시는 계시에 대해 마음을 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일부는 전통적인 교회와 달리 계시에 대해 마음을 열고 인정하는 대신 ‘내가 이 계시나 입신을 무시하면 성령을 소멸하거나 훼방하는 것이 아닐까? 주님의 심판이 있는 게 아닐까? 중요한 것을 놓치는 게 아닐까’하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두려움을 마귀가 이용하곤 합니다. 그러나 ‘성령 훼방 죄’나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는 말씀은 분별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계시를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누가 무엇을 보고 왔든, 성경적인 것만 받아들이고 나머지는 과감하게 버릴 수 있는 자유가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불행하게도, 입신을 많이 강조하는 교회나 단체 치고 탈선하지 않은 곳이 드뭅니다. 극단으로 치우쳐 시한부종말론자가 된 이장림 씨나, 혼탁한 입신간증을 되풀이하는 김용두 목사, 최근 국민의례나 추도예배가 우상숭배의 죄라고 주장한 모 대형교회 목사 등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많은 사람들이 극단으로 치우치거나 실수를 범합니다.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입신을 기준으로 주신 것이 아닌데 때로는 이를 망각하고 입신 간증을 기준으로 삼기 때문입니다.
최근 입신을 통해 받았다는 황당한 주장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인터넷에 떠돌고 있는 옥한흠 목사님이 지옥에 가 있다느니, 자살한 최진실 씨의 말을 전한다느니, 주일날 돈을 쓰면 지옥에 간다느니, 주일에는 차 대신 자전거를 타고 다녀야 한다느니… 국민의례나 추도 예배는 우상숭배의 죄라고 하는 어이없는 주장들이 그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간증들에 관심을 꺼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것들로 인해 동요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류의 간증들이 얼마나 비성경적이고 엉성한 주장인지 아십니까?
여러분이 그 허황됨을 깨달을 수 있도록 “국민의례나 추도예배가 우상숭배 죄라는 한 초대형교회 목사님의 황당한 주장에 대하여!”라는 제 글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오늘 카페의 한 회원이 우리나라의 한 초대형교회 목사님이 국민의례나 추도예배가 우상숭배의 죄라는 취지로 설교한 것을 올려서 제가 바로 내렸습니다. 그런데 그 후 그에 대한 작은 깨달음이 있어서 여러분에게 도움이 될까하여 올립니다.
성경은 절대적인 진리요 기준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것은 우리의 이성으로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그대로 믿어야 하며, 우리의 신앙과생활의 지표로 삼아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지 않은 것을 어설픈 입신이나 개인적인 사견으로 정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런 주제들에 대해서는 이성을 사용하여야 하며 상식에 맞게 판단해야 합니다.
성경은 우상숭배에 대해서 분명하게 반대하고 경고합니다. 우상숭배는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죄이며 지옥에 가게 하는 큰 죄입니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고린도전서 6:9-10)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 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갈라디아서 5:19-21)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요한계시록 21:8)
성경은 이토록 치명적이고 무서운 죄인 우상숭배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지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개인이 함부로 그 개념을 정하거나 가감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에 의하면 우상숭배는 다음 둘 중 하나를 의미합니다.
1. 우상숭배란 이방신을 섬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출애굽기 20:3-5)
‘만국의 모든 신들은 우상들이지만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음이로다.’ (시편 96:5)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 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로마서 1:22-23)
그러므로 성경에 나오는 바알과 아세라를 비롯한 우상들과 불상 같은 것이 우상이며, 형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더라도 이방신을 섬기는 모든 행위가 우상숭배에 해당합니다.
2. 우상숭배란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마태복음 6:24)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마태복음 10:37)
‘너희도 정녕 이것을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에베소서 5: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골로새서 3:5)
그러므로 돈을 위시해서 부모와 자녀에 이르기까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으면 그것이 우상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반드시 회개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여러분, 이것이 성경에 나오는 우상숭배의 전부입니다. 성경에 이것 이외에 다른 것을 우상숭배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까? 저는 이 글을 쓰기 위해 일부러 구약과 신약에 나오는 ‘우상’이나 ‘우상숭배’라는 단어가 언급된 모든 구절을 찾아서 읽어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이 외의 것을 우상이나 우상숭배로 규정한 곳이 없습니다. 다만, 이런 구절이 있었습니다.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사무엘상 15:22-23)
이처럼 완고하여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것은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습니다. 그런 사람은 사울이 버림받았던 것처럼 버림받아 지옥에 갑니다. 그러므로 형식적인 신앙인이 되지 말고 회개하고 예수님을 임금과 구주로 모셔 들이므로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마 7:21)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성경의 이 2가지 기준을 가지고 과연 국민의례와 추도예배가 우상숭배에 해당하는 지 알아봅시다. 먼저, 성경에 의하면 우상숭배는 이방신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해보십시오. 국민의례를 할 때 우리가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에게 경배합니까? 다른 신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까? 분명히 아닙니다. 그리고 추도예배를 드릴 때 우리가 부모를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으로 생각하고 그 신에게 경배하기 위해 예배를 드립니까? 이 역시 분명히 아닙니다. 그러므로 첫째 기준에 의하면 둘 다 우상숭배가 아닙니다.
다음으로, 성경에 의하면 우상숭배는 하나님보다 무엇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생각해보십시오. 국민의례를 할 때 우리가 하나님보다 국기나 나라를 더 사랑합니까? 아닙니다. 그리고 추도예배를 드릴 때 우리가 부모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립니까? 이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둘째 기준으로 볼 때도 국민의례나 추도예배는 절대 우상숭배가 아닙니다. 사실 저 개인적으로는 추도예배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희 어머니가 돌아가셨지만 추도예배를 드려본 기억이 없습니다. 그럴 필요를 느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나라가 오래도록 불교와 유교문화이다 보니 장례식이나 추도예배에 우리도 모르는 잔재가 들어있을 수도 있습니다. 단순히 그런 것을 알려주고 고치자고 한다면 당연히 찬성입니다. 그러나 멀쩡한 그리스도인들이 국민의례를 하거나 추도예배를 드리는데 그것을 가리켜 우상숭배요, 그 죄 때문에 지옥에 간다고 하는 것은 분명히 비성경적이고 극단적인 생각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십시오. 만약 그 목사님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우리의 선배 세대인 최권능, 손양원, 주기철, 이성봉 목사님을 비롯해서 그 세대 분들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분들이 국민의례나 추도예배를 드렸기 때문에 지옥에 가셨겠습니까? 저는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그런 엉터리 주장으로 인해 더 이상 번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제가 이런 게시물을 우리 교회 인터넷 카페에 올린 후 어떤 분이 읽고 매우 무례한 메일을 보내왔습니다.
“남이 하면 불륜이고 내가 하면 로맨스냐? 그렇게 안 보았는데 참 못됐네!”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저는 메일을 읽고 처음에는 어이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잠시 후 왜 이분이 이런 메일을 보냈는지 나름 이해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지금은 제가 그런 사역을 하지 않지만 전에는 교회 안에서 입신이 자주 일어났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메일을 제게 보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분이 놓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는 입신의 내용을 성경으로 항상 엄격하게 분별했고, 단순히 입신 중 누가 보고 듣고 왔다고 해서 그것을 믿은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았다면 절대로 이런 무례한 메일을 제게 보내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전에 많은 사람들이 입신을 했고 그 간증들을 추려서 카페에 올리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많은 성도님들이 다양한 영적 체험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로 인해 큰믿음교회가 탈선하였습니까? 거짓말로 억울하게 매도를 당하고 있을 뿐, 우리 교회는 진리 면에서 전혀 문제가 없고 조금도 탈선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왜 그토록 많은 입신과 영적 체험들 속에서도 다른 교회들처럼 탈선하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단 한 번도 입신이나 계시를 맹목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입신하는 사람들이 간증을 카페에 맘대로 올리지 못하게 했습니다. 반드시 모든 간증을 저에게 보내어 분별을 받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그 중 비성경적인 것은 모두 폐기처분했습니다. 오직 성경적인 것만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입신이 일어나고 성도들이 다양한 영적 체험들을 하지만 단 한 번도 비성경적인 이상한 주장을 하여 물의를 일으킨 일이 없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지금은 한 단계 더 나아가 강력한 치유 부흥이 일어나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수많은 영혼들이 구원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입신이나 계시를 수용하는 교회들은 반드시 이것을 우리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한편, 가끔 자신이 받은 계시나 입신 등을 사용하여 권위를 내세우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속히 그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어떤 진리를 주장할 때 입신이나 계시들에 근거해서 전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말씀에 의한 권위를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케네스 해긴 목사님이나 릭 조이너 목사님은 계시로 교리를 만들지 말라고 여러 차례 경고했습니다. 교리는 철저하게 성경에 입각해야 하며, 성경으로 모든 계시를 분별해야 합니다. 성경에 부합하는 계시를 저처럼 예화로 사용할 수는 있어도(이 차이에 주목하십시오!), 계시에 근거해서 성경과 다른 것을 주장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개인이 받는 계시가 아니라 성경이 교회의 유일한 터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경을 제외한 모든 것은 분별의 대상이지 믿음의 대상이 아닙니다. 이것을 마음에 새기십시오. 그러면 다시는 그 누구에게도 속지 않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