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예레미야 9장 23-24절
이것으로 자랑하라
선지서를 보면 많은 부분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지적할 뿐 아니라, 그 죄에 대한 징계를 말씀하십니다. 돌이키라는 말씀도 하시고, 회복에 대한 말씀도 분명 하시지만, 그리고 모든 초점이 거기에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분량 상으로는 죄와 그 징계를 말씀하시는 경우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선 말씀들을 보면 돌이키라는 말씀도 있고 또 회복에 관한 말씀도 분명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부분 그들의 죄와 그 죄로 인한 징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일에 대하여 예레미야 선지자는 오늘 본문에 앞서 슬픔의 탄식을 하기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으로 오시면 그런 과정 속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뭐냐? 23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지혜를 자랑꺼리로, 용맹함을 자랑꺼리로, 부함을 자랑꺼리로 여기고 있었던 겁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들이 그것을 자랑꺼리로 여기면서 무엇을 멸시했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했던 겁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또한 그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하지만 그들은 전혀 그렇지 않았던 겁니다. 도리어 세상의 지혜와 용맹함, 그리고 세상의 부를 의지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 경고하시는 말씀이 오늘 본문의 내용인 겁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살펴봤지만 그들이 제사 의식을 행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하나님을 예배하는 장소에 나오지 않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배를 드리는 자로 있었습니다. 말씀이 들려지는 곳에 나와 있었습니다. 이사야의 말씀으로 하자면 많은 제물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온 것입니다. 찬송을 부르기도 하고, 기도를 하기도 하는 등 분명 종교적인 모습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뭐냐? “내 목소리를 들으라” 바로 이 말씀이었습니다. “내 목소리를 들어야지만 너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렘7:23). 역으로 말하면 그들은 하나님을 예배하면서도 그분의 목소리는 듣지 않는 자로 있었던 겁니다. 말씀이 들려지는 곳에 나아와 있지만 그들의 모든 마음은 어디에 가 있었는가? 세상의 지혜, 세상의 명예, 세상의 부, 바로 거기에 그들의 마음이 있었습니다. 모든 관심과 초점이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에 대한 순종이 아니라, 세상이 좋아하고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그것에 그들의 마음도 있었던 겁니다.
여러분, 성경에 보면 교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의미로서는 잘난 체 하는 것, 뽐내는 것, 그러면서 건방진 것을 교만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의 교만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것 자체가 교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 그리고 그렇게 행하는 것이 교만입니다.
때문에 지금 그들의 지혜를 자랑꺼리로 삼는 자들, 그들의 용맹함을 자랑꺼리로 삼는 자들, 그들의 부를 자랑꺼리로 삼는 자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의지하면서 그것으로 자랑꺼리로 삼는 자들은 다 교만한 자라 할 수 있습니다. 비록 외식적인 모습을 통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 같지만 이미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있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교만한 자라는 판단을 받을 수 받게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경을 대하면서 반드시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사람들이 자랑하는 모든 것들, 오늘 본문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지혜와 용맹함, 그리고 부는 다 어디로부터 오는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사실입니다.
창세기 1장을 보면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이 세상 만물에 대한 창조의 기록을 볼 수가 있습니다. 창조와 관련하여 우리가 많은 것들을 생각할 수 있겠지만 창조의 순서와 관련하여 사람은 언제 창조 되었는가 했을 때 맨 마지막 날에 창조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첫째 날부터 사람이 창조되기 전까지 이 세상 모든 만물이 다 만들어진 상태에서 사람이 창조된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비록 사람이 모든 만물의 영장일지라도 그 모든 것을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게 하는 내용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만물을 다스리라는 명령을 받지만, 다스릴 뿐 자신이 창조자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누구로부터 주어진 것을 다스리도록 되어 있느냐?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것을 다스리도록 되어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이런 사실은 타락 이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타락으로 말미암아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냄으로(창3:18) 노동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 노동을 하기 때문에 하나님과 상관없이 나 스스로가 열매를 낼 수 있는가? 성경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신명기 8장이 정확하게 그것을 말합니다. 11절부터 보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오늘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삼갈지어다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신8:11-14a) 광야 40년 동안은 그들의 수고와 노력 없이 먹을 것을 먹었습니다. 하늘에서 만나가 내리고, 메추라기가 내림으로 그것을 주어 먹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목이 마를 때는 반석에서 물이 나와 그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먹을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그들이 입고 있던 옷도 떨어지지 아니하였다고 말씀하실 정도로(신8:4) 하나님께서는 광야 40년 동안 그들을 붙들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가나안에 들어가서는 그런 역사가 멈출 것입니다. 소위 우리가 말하는 기적의 역사가 멈추는 것입니다. 가나안에 들어가서는 노동을 해야 합니다. 수고와 땀을 흘려야 합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시는 내용이 이것입니다. 너희의 노동으로, 너희의 수고와 땀으로 열매를 거두어 풍부하게 될 때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삼갈지어다. 그리고 17절과 18절 상반부 말씀을 보시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말할 것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결국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은 타락 이전에도 그렇지만, 타락 이후에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으로 있다는 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교훈인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내 노력과 수고, 열심이 들어가면 내가 했다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성경도 그렇게 말하는 내용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푸는 것을 틀렸다고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다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교훈은 하나님이 주신다, 하나님이 진정한 주체라고 가르칩니다.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분명 수고와 노력, 열심, 땀을 흘리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것까지 주시는 분이 누구시냐? 하나님이시라는 겁니다. 오늘 본문으로 하자면 지혜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고, 용맹함도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부도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욥의 고백은 참으로 사실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주신 이도 여호와시오,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다(욥1:21). 그가 모든 재물을 잃어버렸을 때, 그가 자기 자식까지 다 잃어버렸을 때 그것을 주시는 이가 누구신지를 고백했던 겁니다.
이렇게 볼 때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깨달아야 할 것은 그들이 자랑꺼리로 여기고 있는 것들은 다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왔기 때문에 다시금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도록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에 합당한 방향으로 사용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왔기 때문에 그것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하나님만을 더욱 경외해야 했던 것이 본래 이스라엘 백성의 자리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하시는 말씀은 그러한 자리에 있지 않다는 지적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지혜이지만 그들 스스로의 노력과 열심으로 그 지혜를 얻은 것처럼 여기고 자기를 자랑했던 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이었던 겁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용맹함이지만 본래부터 가지고 있던 용맹함인 것처럼, 혹은 오늘날 유전에 대한 말을 많이 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부모로부터 유전적으로 물러 받은 용맹함인 것처럼 여겼던 겁니다. 부함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이 부를 취하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노력들을 합니까?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부를 취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거짓과 술수와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부를 취하기도 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렇게 부를 축적하여 그 부가 마치 자신의 힘인 것처럼 여기며 살았던 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이었던 겁니다. 다 뭐냐? 자기 스스로의 힘과 능력으로 취한 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라 내가 취한 것인 줄 착각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지 않다고 누누이 밝히는 겁니다. 타락 이전에도 그렇지만, 타락 이후에도 우리는 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아 누리는 자들로 있습니다. 우리의 육체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고, 우리의 영혼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지식과 감정과 의지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의지라고 하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의지를 생각하기 쉽지만 과학으로서 증명한 사실은 그런 의지조차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지 밖에 뭔가 작용하는 것이 있다고 밝혀질 정도로(직접 확인X, 들은 내용O) 우리는 모든 부분이 피조물의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유일하게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지 않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죄 밖에는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받기 때문에 죄조차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든 선한 것들을 우리에게 주시되, 죄만큼은 우리에게 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런 말씀 앞에서 깨닫고 인정해야 할 것은 내 것이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셨기 때문에 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분명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서는 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 있어야 합니다. 지혜도 내 것이 아니며, 용맹함도 내 것이 아니며, 심지어 부함도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내 노력과 내 열심으로 취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런 노력과 열심까지도 하나님께서 주셔서 취하게 된 것, 그런 의미에서 그것들은 다 잠시 맡겨 놓은 것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져 있으면서도 축복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크게 속고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칼빈). 우리가 잘 아는 솔로몬을 보십시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지혜와 부와 영광을 받은 사람입니다(왕상3:12-13). 하나님께 지혜를 구했을 때, 그것도 주의 백성들을 선악 간에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구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지혜뿐만 아니라 부와 영광도 함께 주셨습니다. 그와 같은 왕이 없을 거라고 말씀하실 정도로 엄청난 축복을 받은 사람이 솔로몬입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을 떠나게 되었을 때, 하나님이 아닌 이방 여인들을 통해 우상숭배의 범죄에 빠지게 되었을 때 그런 모든 지혜와 부, 영광을 헛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회개하고 난 뒤 전도서에서 어떤 고백을 하느냐? 전도서 1장 1절과 2절입니다.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단순히 회의주의자로서 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없는 인생은 모든 것이 헛될 수밖에 없다는 고백인 겁니다. 지혜를 가지고 있어도 헛되며, 용맹함을 가지고 있어도 헛되며, 부를 가지고 있어도 헛되며, 영광을 받고 있어도 헛될 뿐이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참된 지혜는 무엇인가 했을 때 잠언에서 이런 고백을 할 수가 있었던 겁니다. 잠언 1장 7절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잠언 9장 10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참된 지혜와 명철은 뭐냐?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있다고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져 있으면서도 축복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다 속고 있을 뿐이라는 걸 명심하고 또 명심해야 합니다. 말씀을 듣지 않고 있고, 또 말씀대로 살아가지 않고 있는데도 마치 외적인 축복의 내용들이 우리 곁에 있을 때 그것이 곧 축복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큰 착각입니다. 오히려 하나님 없는 세상의 모든 축복은 축복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저주의 자리로 가도록 만드는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특히 믿는 자로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옳지 못한데 외적인 어떤 축복을 받는다면 그 외적 축복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괜찮은 것으로 생각한다면, 혹은 외적인 축복을 축복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매우 큰 착각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오히려 자주 말씀드리는 것처럼 그것이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 올바른 관계에 있다면 그것이 바로 우리의 축복의 내용입니다.
나아가 자기 자신의 탁월함을 자랑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인간의 타고난 악일 뿐이라는 것도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칼빈). 사람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을 가지고 자신의 자랑꺼리로 삼습니다. 자랑을 삼는다는 것은 달리 표현하면 그것으로 교만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으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것을 마치 자기 것인 양 그렇게 도둑질하여 자신을 드러내기 때문에 그것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교만이라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특히 이런 교만은 인류 보편에 있어 항상 있어 왔던 악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심각한데, 왜냐하면 인류 보편의 모습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모습으로 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이런 진단 앞에 성도의 마땅한 자세는 자신의 탁월함에 대하여 그것이 하나님의 은사일 줄 알고, 그것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되도록 그 삶을 살아가셔야 됩니다. 무엇을 하든지 그리고 누구를 대하든지 주께 하듯 하는 자세를 가지면서 해야 하고, 또한 그 모든 일에 있어 성령의 열매를 맺는 방향으로 나아가셔야 합니다. 결코 세상 사람들처럼 지혜를 자랑하면서, 용맹을 자랑하면서, 부를 자랑하면서 하나님과 상관없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은 채, 오히려 그들이 가지고 있는 그것을 의지하면서 살아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내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고전4:7). 한자 표현 중에 신체발부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란 말이 있습니다. 부모에게서 받은 몸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것인데, 성경이 말하는 사실은 우리의 신체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다는 것을 기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신체만 받았느냐? 우리의 영혼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만들어 내거나 혹은 부모가 우리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앞서 말한 지식과 감정, 의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이 말하고 있는 지혜와 용맹함, 그리고 부함조차 다 누구로부터 오는 것이냐?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죄가 아닌 이상 우리에게 있는 모든 선한 것들을 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 신체와 영혼을 구별되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으로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계속해서 오늘 본문 24절을 보시면 지혜도 자랑하지 말라, 용맹함도 자랑하지 말라, 부함도 자랑하지 말라고 하면서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하라고 합니다.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정으로 자랑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만 자랑을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 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자랑이어야 하는가? 칼빈의 제네바 교리문답을 내용으로 말씀드리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우선 첫 번째 문항에서 인생의 주된 목적에 대해 묻는데, 그 답변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답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 문항에서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했을 때 이렇게 답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 우리를 창조하여 세상에 내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그가 우리의 삶의 근원이므로 우리가 우리의 삶을 그의 영광을 위해 드리는 것은 매우 타당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고, 그리고 그 모든 목적은 우리 삶을 그의 영광을 위해 드리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세 번째 문항에서는 인간이 최고선, 즉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과 가장 높은 가치는 어디 있는가 했을 때 그것 역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삶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네 번째 문항에서는 “그것을 최고선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물을 때 이렇게 답변합니다. “그것이 없다면 우리의 상태는 야수들의 상태보다 더 악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지 않으면 야수보다, 짐승보다 나은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인생에 있어 가장 불행한 삶은 뭐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지 않을 때 가장 큰 불행인 겁니다(다섯 번째 문항).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그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위하여 살아가지 못하는 삶, 그것처럼 불행한 삶은 없다. 그것은 마치 무엇과 같은가? 짐승보다 못한 삶이더라.
실제로 이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중요한 내용입니다. 로마서 1장에 보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 로마서 표현으로 하자면 하나님을 알지만 하나님을 하나님으로서 인정하지 않고자 하는 자들의 삶에 대해 이렇게 묘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1절부터 보시면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1:21-23) 본래 창조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을 지으셨기 때문에 하나님만이 창조주이십니다. 모든 피조물은 누구를 섬겨야 하느냐? 하나님만을 섬겨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만물 가운데 인간을 만물의 영장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래서 앞서 창조된 것들을 다스리라고 사람에게 명하셨습니다. 때문에 처음 창조 시 하나님-인간-나머지 피조물의 순서로 그 위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높으신 분으로서, 그리고 인간과 나머지 피조물이 그 아래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피조물을 인간이 다스려야 했기 때문에 인간의 자리란 하나님을 섬기면서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나머지 피조물을 다스려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타락 이후 하나님을 그 마음에 두기 싫어함으로 그 모든 관계가 깨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지금 로마서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 자리에 인간을 올려놓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자리에 다른 피조물들을 올려놓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다른 피조물을 다스려야 하지만, 역으로 다른 피조물을 섬기는 자가 되었고, 도리어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형태가 되어버렸던 겁니다. 그래서 로마서 1장 25절에 보면 이렇게 말하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하나님을 섬겨야 할 자가 타락으로 인하여 진리를 거짓을 바꾸어, 오히려 조물주이신 하나님보다 피조물을 섬기는 형태로 있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 로마서 1장 26절 이하에 보면 매우 심각한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고 증거합니다. 좀 길지만 읽으면서 확인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롬1:26-32) 가끔 우리들은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을 했다고 생각할 때 짐승만도 못하다는 말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기준일 뿐, 하나님의 기준은 하나님을 그 마음에 두기 싫어함으로 나타나는 모든 일에 대하여 짐승만도 못하다는 말을 사용할 수 있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지 않는 인생, 그 인생을 짐승만도 못한 삶이라 할 수 있는 겁니다. 특히 오늘날 보면 성에 대한 정체성이 심각하게 무너지고 있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데, 인권이라는 이름 아래 많은 부분 수용하자고 하지만 성경의 기준은 이미 그것 자체가 하나님을 두기 싫어하는 마음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기 때문에 일어나는 결과로서 말할 뿐이라는 걸 명심해야 합니다.
결국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 무엇인지도 모른다는 것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지 않는다는 것은 짐승보다 못한 죄악을 저지르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이 가장 큰 불행이기 때문에 성경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장 복된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그것이 성도의 자랑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자들은 분명 이것을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의 모든 관심은 성도일 수밖에 없고, 또한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도 성도들을 향하여 하시는 말씀이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과연 우리는 무엇을 자랑의 내용으로 삼고 있는가?
특히 오늘 본문에 보면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이라는 말씀 뒤에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칼빈의 주석을 좀 참고하여 말씀드리면 ‘여호와’라고 부르심으로써 당시 유대인들의 관심을 사로잡았던 모든 생각을 배제하신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온 땅이 온갖 우상숭배로 더럽혀져서 유일하신 참 하나님의 이름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땅히 유일하신 참 하나님만을 예배의 대상으로 삼고 섬겨야 했지만, 그들의 역사는 그런 역사가 아니었던 겁니다. 말로는 하나님만을 섬긴다고 고백하지만 그들은 온갖 우상을 함께 섬기는 혼합주의로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여호와’, 즉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말씀하심으로써 다른 모든 것들은 피조물일 뿐 유일한 창조주는 하나님 자신 밖에 없다고 알리십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시는데, 그 다스리시는 방식이 어떠하냐? 그분의 속성에 합당하게 다스린다고 알리십니다. 그 대표적인 내용이 사랑과 정의과 공의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아는 것이 우리의 자랑이어야 하는데, 그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냐? 사랑의 하나님 그리고 정의와 공의의 하나님이란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속성에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 외에도 많지만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알리시고자 하시는 내용이 이러한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냐? 첫 번째로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보편적인 의미에서는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신다는 성격에서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마5:45). 그러나 택자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그 절정이 자기 아들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내어주신 것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롬8:32). 물론 구약 성도들에게 있어서는 그런 예수 그리스도를 내다보게 하셨지만, 분명한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을 받기 전에는 어떤 자였는가? 죄와 비참함 외에 어떤 것도 말할 수 없는 자로 있었습니다. 아담이 범죄 이후 하나님을 피하여 숨은 것처럼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먼저 다가오시지 않으신다면 구약의 백성이든, 신약의 백성이든 하나님을 피하여 숨는 자로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우리의 죄책과 부패로 인하여, 그리고 그런 원죄로부터 나오는 자범죄로 인하여 절망할 수밖에 없는 상태에 놓여져 있었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그런 자에게 어떤 분으로 계시하시길 원하시느냐 하면 사랑의 하나님으로 계시하시길 원하시는 겁니다.
두 번째는 정의와 공의의 하나님으로서 소개를 하고 있는데, 일반적으로 생각하자면 사랑의 반대적인 속성으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정의와 공의로서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는 자들에 대하여 심판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어 정의와 공의는 사랑의 또 다른 면이라는 걸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법에 따라 자기 백성이라 할지라도 분명 징계하시는 면이 있지만, 그런 징계는 무엇을 위한 징계냐? 돌이키도록 하기 위한 징계일 뿐입니다. 유기자들처럼 영원한 심판을 위한 것이 아니라 돌이키게 만들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게 만드는 내용으로서의 정의와 공의인 것입니다.
실제로 맨 처음 말씀드린 것처럼 선지서를 통해 죄를 지적하시고, 징계하시겠다고 말씀하시는 이유도 다 여기에 속합니다. 너희가 내 백성이기 때문에 죄 짓는 것을 결코 볼 수 없다는 것이지, 내 백성이지만 너희의 범죄 때문에 내가 너희를 버릴 것으로 말씀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며,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는 아니지만(롬2:28), 궁극적인 의미에서 보자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버리시는 일이 없다는 진리가 구약에서도 깔려져 있는 겁니다. 그래서 징계도 하시고, 그런 징계를 통하여 회개하라, 돌이키라고도 말씀하시는 겁니다. 심지어 내가 반드시 너를 돌이키게 하고야 말겠다고도 말씀하시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정의와 공의의 하나님이라고 할 때 그 의미 속에는 자신의 신실한 백성들을 옹호하시며, 불쌍한 자들을 도우신다는 내용까지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부당하게 억압을 당할 때 그들을 구원하실 뿐 아니라, 특별히 악한 자를 제어하시고, 무죄한 자를 해치지 못하도록 막으시는 분이 바로 정의와 공의의 하나님이신 겁니다. 자기 백성을 보호하시며 지키시는 분, 그분이 바로 정의와 공의의 하나님이신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동시에 정의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열매를 가져야 되는데, 그것이 뭐냐? 하나님께서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만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믿음은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정의와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런 믿음과 사랑과 더불어 두려움도 가져야 합니다.
지금 예레미야 선지자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너희는 하나님 앞에 나아와야 한다는 것이고, 또한 하나님께서는 자비와 긍휼이 많으시기 때문에 결코 그 자비와 긍휼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선지자를 통해 징계하실 것이라는 말씀을 하고 있지만 여전히 하나님은 사랑으로서 대하고 계시다는 걸 알라는 것이고, 이런 징계는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로서 하나님의 백성 된 너희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한 방편으로 있다는 것을 알리시는 겁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자들에게는 공의가 심판으로밖에 행사될 수밖에 없지만, 적어도 너희에게는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에서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을 사랑과 정의, 공의의 하나님으로 소개하고 계시는 겁니다. 그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너희가 자랑하는 그 자랑꺼리 그리고 그것을 의지하는 마음을 버리라는 것이고, 도리어 누구를 의지하길 원하시느냐? 하나님을 의지하길 원하십니다. 하나님만이 믿음의 대상이시며, 하나님이 믿음의 대상이시기 때문에 그런 하나님을 사랑하길 원하십니다. 특별히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길 원하시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으면 돌이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씀을 통해 하나님은 그들이 돌이키길 원하십니다. 이제는 나에게로 돌아오라. 바로 이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맨 마지막에 보면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자신을 아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역으로 오늘 본문 23절의 자리에 있을 때, 즉 지혜를 자랑하거나 용맹함을 자랑하거나 부함을 자랑하거나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결코 기뻐하실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참된 복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칼빈은 이렇게 말합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지식만으로 완전한 행복을 얻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 없이는 모든 인간은 비참하다는 사실을 명백히 보여주었다.”
우리가 하나님 지식을 자랑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만 완전한 행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참된 행복을 얻을 수 없습니다. 참된 행복은 하나님 안에만 있으며, 때문에 하나님을 아는 것보다 더 큰 복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자신을 알리실 때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15:1) 말씀하실 수 있었던 겁니다.
이미 살핀 바 있지만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이런 고백까지 합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3:7-9) 특히 오늘 본문을 좀 더 드러내는 말씀이 고린도전서 1장에 있는데, 거기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고전1:30-31) 그리스도가 우리의 지혜요, 그리스도가 우리의 의요, 그리스도가 우리의 거룩이요,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원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자랑은 오직 누구만이어야 하는가? 예수 그리스도만 우리의 자랑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모든 유익이 오직 그리스도 안에만 있기 때문에, 오늘 본문으로 하자면 지혜도 구원을 줄 수 없고, 용맹함도 구원을 줄 수 없고, 부함도 구원을 줄 수 없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자랑은 그리스도와 그 그리스를 보내신 하나님만이 우리의 자랑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일에 더욱 힘쓰시길 바랍니다. 호세아서는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호4:6)라고 말씀하시는데, 하나님 지식이 없다는 것은 곧 저주의 지름길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만이 우리로 하여금 복된 길을 걸어가게 할 것입니다. 부디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가장 복된 길임을 아시고, 이 길을 걸어가시되, 다른 모든 것들은 배설물로 여기는 마음으로 하나님 지식을 구하며, 또한 주께서 주시는 열심과 노력으로 우리의 마땅히 행해야 될 그 길을 걸어가시되, 감사함으로 나아갈 수 있는 삶이 되시길 간절히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