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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첫사랑의 그림자
강 신 해
그 누가 말했던가? 이루어지지 못한 첫사랑은 무덤에까지 가지고 간다고.
오스카 와일드는, 남자는 첫사랑을 체념하지 못하고 여자는 최후의 연애를 잊지 못한다고 했었지.
김영우, 그는 영원히 대적할 수 없는 나의 라이벌. 나의 우상이었고 우리들의 영웅이었다. 그는 중학교 2학년 때 우리 고향의 성당에 부임한 신부와 영어로 대화를 나눌 정도로 영어 실력이 대단했다. 중학 2학년 학기말 영어시험은 레슨 원에서 레슨 투에니세븐까지 교과서를 완전 암송하는 것으로 시험을 쳤는데, 그는 단어 하나 틀리지 않고 완벽하게 다 암송했다. 선생도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는 며칠간 밤을 새며 공부했지만 겨우 반밖에 암송을 못했다. 그것도 더듬거리면서. 그 후 나는 그를 영우가 아니라 영웅이요 천재라 생각했다. 그는 천재라 불리며 졸업을 했는데 고교입시에서 시골중학에서 대도시의 일류고교에 톱으로 합격하는 저력을 보여 중앙의 신문에까지 대서특필될 정도였다.
중학교 2학년 9월 운동장가의 코스모스가 가을을 알릴 때 우리 반에 우체국장 맏딸 멋쟁이 윤청화가 서울로 전학을 갔고, 며칠 후 경주여중에서 여학생 하나가 전학을 왔다. 담임선생이 데리고 와서 소개를 했다. 그때 2학년은 세 반이었는데 2반 3반은 남학생이이었고 1반은 남녀공학이었다. 우리 반에는 여학생 20명 남학생 41명이었다.
그 학생은 엄청나게 예뻤다. 단발머리, 볼그레한 얼굴, 깜빡깜빡이는 눈. 저렇게 예쁜 여학생도 있단 말인가? 신데렐라 같애. 윤청화보다 더 예뻐. 우리 모두의 시선은 그 여학생에게 집중되었다. 담임선생의 소개에 의하면 공부도 잘 하고 글씨도 잘 쓴다고 했다. 그러자 그녀는 얼굴이 빨갛게 되어 “박선희라고 합니다. 모르는 게 많으니, 새 친구 여러분, 많이 도와주세요.” 분명한 음성으로 말하고는 흑판에다 분필로 ‘박선희’라 한글로 적고 그 옆에다 한자로 ‘朴善熙’ 라 또박또박 적었다. 음성도 예뻤지만 글씨도 너무 예뻤다. 우리는 마구 박수를 쳐댔다. 그런데 그가 입고 있는 교복은 깨끗하게 다려 입었지만 낡을 대로 낡아 소매는 색깔이 희끔하게 바래어져 있었다. 그것은 언니로부터 물려받은 것 같았다.
성적에 있어서 영우는 이미 나의 경쟁자가 아니었고 이제 새로운 경쟁자 박선희가 나타났다. 그때 두 달에 한 번씩 일제고사를 치고 전교생(2학년 181명) 성적을 20등까지 발표했었다. 다행히 박선희는 나보다는 항상 몇 등 아래이었지만 점수 차이가 별로 나지 않아 나는 항상 조바심으로 공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스나, 이쁘기만 하면 되지. 공부는 뭐 한다고 그래 잘 하노?
나는 시험발표 때마다 궁시렁거렸다.
늦가을 교정의 은행나무 잎이 노랗게 물들어 떨어지고 있던 토요일 오후, 집에 가면 농사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숙제를 하고 갈 요량으로 나는 몇몇 친구와 교실에 남았다. 나중에는 모두들 돌아가고 나 혼자 남게 되었다. 가방을 챙겨 교문으로 나오는데 은행나무 밑에 두 사람이 보였다. 영우와 선희였다. 나는 화들짝 놀라 빠른 걸음으로 교문을 향하면서 잘못 본 게 아닐까 하고 다시 은행나무를 바라보자 둘은 은행나무 잎을 줍고 있었다.
-야! 둘이 연애를 한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었구나. 나만 알고 있어야지. 내 짝지 박원구는 헛물켜고 있구만.
이렇게 다짐을 하면서도 내 가슴은 콩닥거렸다.
박원구, 그는 키다리란 별명을 가졌고 우리 고향 국회의원의 막내아들로 공부는 적당히 했지만 아주 성격이 활달하여 친구들이 많았고 가끔은 나를 괴롭혔지만 정도 많았다. 원구와 영우와 나(성우), 세 사람은 성격이 조화를 이루었고 정감도 비슷하여 친했다. 영우는 공부를 잘 했고, 원구는 선심을 잘 썼고, 나는 덩치가 컸다. 우리 셋은 곧잘 어울렸다. 또한 우리 셋은 단연 반에서 대인기였다. 원구와 영우는 읍내에 살았지만 나는 읍에서 십리 떨어진 시골에 살았다. 우리 마을은 그 이름 행촌(杏村)처럼 살구꽃이 많이 피는 마을이라 나는 모심기가 끝나면 살구를 따서 원구와 영우에게 선심을 쓰기도 했다.
“선희한테 이 편지 좀 전해라.” 원구의 말에 “안 한다.”하고 나는 완강히 거절했다. 내 속마음은 그럴 바에는 차라리 내가 편지를 써서 내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그럴 용기도 없었고 연애편지란 것도 박원구 때문에 겨우 알았을 정도로 아둔했다.
나는 덩치가 크고 힘만 좀 셀뿐 어수룩하여 약간은 바보스러웠다. 고작 내가 선희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이란 밤이면 선희의 얼굴을 떠올리며 그를 포옹하는 환상에 젖거나 가끔 선희를 생각하며 엉큼하게 손으로 나의 그것을 만지작거리며 수음을 하는 정도였다.
“성우야, 갈 때 짜장면 한 그릇 사 줄게.”
나는 짜장면 한 그릇에 넘어가 연애편지 배달부노릇을 두어 번 하기도 했다. 1950년대 말 그 당시는 우리들에게 짜장면 한 그릇이면 모든 게 해결되는 시절이었다.
선희가 우리 학교에 온 후 우리 마을에 살구꽃이 세 번이나 피고 진 늦봄, 고교 2학년 때 시골에서 대도시로 유학온 동기들 여남은이 로터리 빵집에서 만났다. 박원구와 나는 학교가 달라 자주 만나지는 못했지만 방학 때는 고향 읍에서 몇 번 만나기도 했다. 그는 고등학교에 들어가자 키가 나보다 한 뼘이나 더 컸다.
박원구가 나에게 다가와 나를 내려다보며 “성우야, 오랜만이다!” 악수를 하고는“너, 박선희 소식 모르지?” 했다. “왜! 무슨 일이 있어.“ ”죽었어. 자살을 했어.“ ”뭐! 뭐라고!?“ 나는 너무 놀라 고함치듯 큰소리로 말했다. 곁에 있던 친구들이 박원구의 말을 듣고 모두들 ”뭐! 선희가 죽었다고!“ 하며 놀랐다. ”며칠 전 영우를 민났는데 풀이 죽어 있어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었더니 선희가 죽었다고 했어….“
고향 친구들 십여 명이 로터리빵집에 모인 그때 우리들의 화제는 선희가 왜 죽었나? 하는 것이었다.
-영우하고 선희가 단둘이 만났는데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보니 영우 집안은 읍에서 큰 정미소를 하는 부잣집이었지만 선희 아버지는 역에서 지게꾼으로 돈벌이를 하기 때문에 아마 가정을 비관해서 충동적으로 자살을 했을 끼다.
-머리가 좋아 일류여고에 합격을 했는데 학비가 모자라 비관했을 꺼야.
-아니야, 그럴 리가 있나?
-영우, 그놈이 선희를 죽인거나 마찬가지야. 영우 저거집 별로 잘 살지도 않아.
농땡이 철구가 입에 앙코빵을 넣어 움썩거리면서 말하자 원구가 성난 얼굴로
-무슨 그런 악담을 하고 있어!?
하고 어께를 흔들었다. 그러자 철구는 한 마디 더 했다.
-그 자석이 공부 잘 한다고 인간 괄시를 했던 거야.
-선희도 우등생이었기에 일류여고에 합격했잖은가? 바보 같이 죽긴 왜 죽어?
-영우는 요즈음 학교도 나가지 않는단다. 선희 때문에 휴학을 했다는 말도 있어.
우리들은 모두 각자 나름대로 아름다웠던 선희의 얼굴을 떠올리며 선희의 죽음에 놀라고 한편으로는 얼떨떨했다.
십여 년의 세월이 흐른 초겨울에 나와 원구는 영우의 결혼식에 참석했다. 원구는 자기가 소개해 준 여자와 영우가 결혼한다며 꼭 참석해 달라고 했다. 영우는 그때 사법고시에 합격하여 연수원 생활을 끝내고 검사로 갓 발령을 받아 대도시로 부임했다. 신부 김진숙은 서울에서 사대를 나와 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미인이라 했다. 영우는 키가 조금 작은 편인데 비해 신부 김진숙은 키가 크고 연약하여 청초한 코스모스를 연상시켰다.
고향 친구 몇이 뒷자리에 서서 결혼식을 보면서 몇 마디 주고 받았다.
“야, 성우야! 신부 눈 좀 닮은 것 같지 않나?”
“닮았다니? 누구를?”
“죽은 박선희.”
나도 신부가 누군가를 많이 닮은 얼굴이라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막상 원구가 그렇게 하는 말을 듣고는 신부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둥근 달걀형의 얼굴 윤곽이며 매력적인 눈매가 죽은 박선희를 많이 닮아 있었다.
“미인이야. 부잣집 아가씨를 다 뿌리친 이유를 알겠네.”
“좀 약해 보이는데.”
친구들은 수군거렸다.
식이 끝나고 하객에게 인사를 하러 식당에 왔을 때 자세히 보니 신부 김진숙은 몸매가 가냘픈 것을 제외하고는 죽은 박선희를 너무 닮아 있었다. 죽은 박선희의 화신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우리들은 소주잔을 기울이며 죽은 박선희와 신부 김진숙의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세월은 다시 흘러 또 십수 년이 지났다. 내 나이 40대 중반에 이르러 오랜만에 중학 동기회에 나갔다. 그때 김영우는 법률변호사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는 미인의 아내와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했다. 그에 비해 나는 평범한 공무원으로, 예쁠 것도 없고 멋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생활에 지친 그저 그런 아내를 만나 매일 잔소릴 들으며 살고 있었다.
적당히 살이 지고 귀공자 모습의 영우를 보자 나는 주눅이 들었지만 아주 반가웠다. 나의 물음에 그는 아들 둘이라 했다. 나는 풀 죽은 음성으로 딸만 둘이라 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영우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후줄근한 양복에 넥타이도 잘 어울리지 않았고 바지도 추레했고 구두도 윤이 나지 않았다. 그보다 그는 술고래가 되어 주는 술은 모두 마셔댔다.
“원구야, 영우 웬 술을 저렇게 마셔대?”
내가 낮은 음성으로 묻자 그는 입을 내 귀에다 갖다대었다.
“김 변호사 반 폐인이 되었어.”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장가를 잘 못 들었어.”
“뭐! 장가를 잘못 들다니?”
“김진숙은 가정환경이 좋지 않은데다 건강이 좋지 않아. 하도 조르기에 내가 소개를 했는데 후회돼. 이 친구가 박선희를 닮았으니 무조건 좋다는 거야. 김 변호사 머리 속은 죽은 박선희 혼으로 가득 찼어.”
몇 해 후 박원구를 만났더니 김 변호사 소식을 전했다.
박원구가 말하길 김진숙이가 암으로 죽은 지가 몇 해 되었는데, 김 변호사는 지금 청화와 교재하고 있다고 했다.
“김진숙이가 죽었어?”
“3년 됐어.”
“그래, 참 안되었군. 중년에 상처를 하다니? 그런데 청화라니?”
“왜! 우리 중학 동기생 윤청화, 우체국장 딸! 윤청화. 박선희가 전학 오기 며칠 전 서울로 이사가버린 윤청화. 기억 나? 뒷날 파리로 유학을 갔잖은가? 지금은 유명한 화가야.”
“아, 그랬구나. 나도 신문을 통해 윤청화가 유명한 화가란 건 알고 있지만 우리 동기생 윤청화인 줄은 몰랐어.”
“영우가 청화와 왜 친해졌는지? 알아? 청화도 자세히 보면 입술과 눈매가 선희를 닮았어.”
“선희라니?”
“박선희, 고등학교 이학년 때 죽은 박선희!”
“아, 그 박선희. 죽은 박선희.”
나는 그날 박선희를 장미꽃에 김진숙을 코스모스에 그리고 윤청화를 모란에 비교했다.
세월은 다시 흘러 내가 초로의 나이에 접어들었을 때 우리 셋은, 정말 오랜만에 내가 술 한잔 사고 싶어 불렀다. 김영우는 서울로 가서 변호사업을 하고 있었고 박원구는 부동산업을 하여 돈을 많이 벌어 외제차를 타고 다닌다고 했다. 그때 나는 시청 공무원으로 퇴직을 한 해 앞두고 있었다.
영우에게 전화를 했더니 출장 올 일이 있다며 쉽게 응했다. 해운대 호텔에서 우리 셋은 만났다.
우리는 실컷 술을 마셨다. 청화는 서울에서 큰 화실을 경영하고 있다고 했다.
우리들은 장어 잡이와 등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박원구 사장이 영덕에 가면 장어 잡이 할 곳이 있으니 안내를 하겠다고 했고, 내가 지리산 등반을 안내하겠다고 하자 영우는 술은 자기가 사겠고 했다.
술이 거나하게 되었을 때 내가 물었다.
“김 변호사, 뭐 하나 물어보자.”
“변호사가 뭐야? 성우야! 이름을 불러.”
“아, 그래 영우야. 지금 청화와 사냐?”
“그래, 살고 있어.”
“그럼 애들은?”
“아들 두 놈 다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어, 학비가 하도 많이 들어 좀 골치야. 지네는 그때 딸만 둘이라 했잖은가? 애들은”
“아들 하나 더 낳았어. 둘은 서울에 살고 있어.”
박원구가 끼어들었다.
“영우는 말야 옛날부터 늘 박선희와 살고 있어. 진숙이가 죽었든 말든 영우가 청화와 살든 말든, 둘은 다 박선희의 그림자일 뿐이야.”
“박선희의 그림자?”
영우가 쓸데 없는 소리 한다는 투로 얼굴을 찌푸리며
“그런 돼 먹도 않은 말은 치우고, 자, 내 노래 하나 부를께.”
하고 일어났다. 그는 육성으로 <일편단심 민들레>를 불렀다.
님 주신 밤에 씨뿌렸네 사랑의 물로 꽃을 피웠네
처음 만나 맺은 마음 일편단심 민들레야
그 여름 어인 광풍 그 여름 어인 광풍
낙엽지듯 가시었나
행복했던 장미인생 비바람에 꺾이니
나는 한 떨기 슬픈 민들레야
긴 세월 하루같이 하늘만 쳐다보니
그이의 목소리는 어디에서 들을까
일편단심 민들레는 일편단심 민들레는
떠나지 않으리라
우리 둘은, 열여덟에 죽은 박선희의 선연한 아름다운 눈매와 볼그레한 볼과 상큼한 그 미소를 떠올리며 박수로 장단을 맞추었다.
김영우 변호사는 노래를 끝내고 나서 눈시울을 적시며 나지막한 음성으로 말했다.
“박선희, 참 예뻤지. 그는 나 때문에 죽었어. 선희야∼ 선희야∼”♠
-분량-42매 (<부경에스프리> 20호 2016년. 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