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사회社會라고 하는 것은 '모일 사社' '모일 회會', 즉 모여 있으면 사회가 됩니다.
중생사회는 지옥세계. 인간세계. 천상세계 등이 있습니다. 고통이 많은 중생이 모여 있는 세계를 지옥이라 하고, 사람이 모여 사는 세계를 인간人間이라고 합니다.
인간은 천상과 지옥 사이에 있는 세계입니다. 사람이 사는 공간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천상세계가 있습니다. 지옥세계는 고통이 많고, 천상세계는 즐거움이 많습니다.
인간세계는 즐거움과 괴로움이 반반씩 있습니다.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나서 사회생활을 하는 데 아주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가장 훌륭한 인간 사회는 도덕道德이 지배하는 사회입니다. 도덕사회는 자유와 정의가 있고, 항상 물질이 넘쳐나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물 한 잔도 도덕적으로 마시면 여러 사람이 나눠 마셔도 남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한ㄴ 것이 도덕이기 때문에 마시라고 줘도 입만 갖다 대고 마시지 않습니다.
몇 백 명이 나눠 마셔도 물은 그대로입니다. 이것이 풍요로운 사회입니다.
우리가 물질을 적게 생산해서 모자라는 것이 아니라, 도덕이 부족하기 때문에 모자랍니다.
만약 비도덕적으로 마시면 아무리 많이 주어도 끝에 가서는 모자랍니다. 반면 목마른 사람이 많아도 물 한 바가지로 나눠 마셔도 남는 것이 도덕입니다. 그런데 도덕을 잃어버리면 아무리 물이 많아도 뒷사람은 항상 마시지 못합니다.
도덕 다음에 상식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도덕사회의 밑 단계가 상식이 지배하는 사회입니다.
상식은 곧 정의인데, 정의는 간단합니다. 많이 일한 사람은 많이 갖고 적게 일한 사람은 적게 갖고, 내 것은 내가 갖고 네 것은 네가 갖는 것입니다. 그것뿐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통하지 않으니까 법률이란 것을 만듭니다. 상식이 안 통하니까 법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상식으로 해결하지 않고 법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나라는 좋지 않은 나라입니다. 소송이나 분쟁이 많다는 것은 상식이 모자란다는 이야기입니다.
항상 법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사회가 제일 수준이 떨어지는 사회입니다.
상식과 도덕이 있는 사회가 제일 좋은 사회입니다. 도덕이 있으면 모자람이 없습니다.
인색한 사람을 뜻하는 자린고비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서 고비考妣는 부모를 뜻합니다.
그런데 이분이 평소에 안 먹고 모아서 어려울 때 다 남에게 나눠 줍니다. 그래서 자비롭고 인자한 부모(자인고비慈仁考妣 )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잘못 전해져서 지독한 구두쇠를 자린고비라고 합니다. 사실은 도덕을 실천한 분입니다.
'흉년이 든 해에 부자는 절대 땅을 사지 말라.' 는 것도 도덕입니다. 흉년 드는 해는 땅값이 내려갑니다. 그때 땅을 사면 제값을 주지 않고 사는 것이기 때문에 안 됩니다.
그리고 '부자 동네에서 백 리 안쪽에는 굶어죽는 사람이 없도록 하라.' 이것도 도덕입니다.
나는 잘 먹고 사는데 옆에서 자꾸 굶어 죽는다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도덕입니다. 잘 사는 사회를 만들려면 상식이 통해야 하고, 도덕이 자꾸 늘어나야 합니다.
오늘날에도 도덕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지만 잘 알려지지 않았을 뿐입니다.
옛날 부모님들은 아들과 딸을 많이 차별하셨습니다. 우리 어머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제 위에 누님이 한 분 계시는데, 그 누님이 백일기침을 앓았는데 조금 있다가 저도 기침을 시작했답니다. 어머님이 늘 하시는 말씀이 "네 누나 백일기침은 쳐다보지도 않고 너만 계속 돌보았다." 였습니다. 아들이나 딸이나 똑같이 보살펴야 당연한 것인데, 자식들이 아프면 아들만 죽기 살기로 보살피고, 딸은 그냥 내버려 뒀습니다.
만에 하나 누님이 잘못되었다면 평생 동안 얼마나 부담을 가지고 살았겠습니까?
아들에게도 못할 짓이고, 딸한테도 못할 짓입니다.
제가 중앙승가대학교 중간 관리자 소임을 볼 때, 감동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석주昔珠(1909~2004) 큰스님이 학장이셨는데, 학교에서 한 달에 15만원씩 월급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 급여를 수령하는 통장이 학교 서무과 사무실에 있었습니다.
그 이유를 물어보니 한 푼도 안 찾아가신다는 겁니다. 완전히 봉사만 하셨습니다. 이런 것이 도덕입니다. 도덕은 상식보다 위에 있습니다. 이런 도덕적인 사람이 많을수록 훌륭한 사회입니다. 적어도 상식이 통해야 살 만한 사회입니다.
우리나라 선거를 들여다보면 상식이 통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느 동네는 항상 찍는 당만 찍습니다. 잘한 정당은 지지하고 잘못한 정당은 심판해야 하는데, 아무리 잘못을 해도 심판을 안 합니다. 이렇게 잘못했는데도 심판을 하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잘잘못을 따져서 지지와 심판이 잘 이루어지는 것이 상식입니다. 또 젊은이들이 투표에 대거 참여하니까 서울시장도 바뀌고, 시에서 운영하는 시립대학교의 등록금이 절반으로 줄었습니다.
'아, 우리가 참여하면 세상이 바뀌는구나!' 하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이것이 상식입니다.
그러면 왜 이런 상식이 안 통하는가? 중생의 어리석음 때문입니다. 중생이 경계를 좇아가면 자신이 만족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 다음은 경계를 취하여 자신이 가지면 행복하리라고 생각하는 어리석음입니다. 불나방은 불을 보면 좋아 보여서 그 불 속에 뛰어듭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어떻게 됩니까? 여름에 불 밑에 보면 불나방이 수북하게 죽어 있습니다.
중생도 불나방과 마찬가지로 어떤 것 하나를 얻으면 걷잡을 수 없이 따라갑니다.
그런데 그것이 좋은 게 아닙니다. 좋은 줄 알고 따라갔는데 좋은 게 아니고, 좋은 줄 알고 따라갔는데 또 좋은 게 아니고, 항상 따라가다가 죽습니다. 구해도 구해도 만족할 줄 모르고, 좇아가고 좇아가도 멈출 줄 모릅니다. 이것이 혹경惑境. 취경取境. 생사윤회. 중생고통입니다. 혹경. 취경. 즉 경계에 미혹해서 경계를 취한다는 것이 생사윤회입니다. 그러면 해결책이 무엇이냐? 탐욕을 다스려야 하는데 자꾸 경계로만 경계로만 가니까 다스려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탐욕을 다스리는 방법을 수행이라고 합니다. 수행을 통해서 그런 상식을 지키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인생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게 됩니다.
그러면 수행이란 무엇이냐? 수행은 비동시성非同詩性에서 동시성을 보는 것입니다.
동시성이 아닌 것에서 동시성을 본다는 것은 역사학에서 많이 쓰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신라시대가 있고 조선시대가 있고 현대가 있습니다. 이 시대들이 전부 다르니까 비동시성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변함없이 통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을 동시성이라고 합니다.
비동시성 속에 동시성이 있습니다. 신라시대에도 상식이 안 통한다고 호소했고, 조선시대에도 상식이 안 통한다고 호소했고, 오늘날에도 상식이 안 통한다고 많은 하소연들을 합니다.
시대는 다르지만 부정적인 것은 똑같습니다. 조금 더하고 덜한 차이는 있어도 근본적으로는 개선이 안 됩니다. 이것을 비동시성의 동시성이라고 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보면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가 있는데, 이것이 비동시성입니다.
그리고 삼세에 다 통하는 동시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비동시성에서 동시성을 볼 때 욕망이 사라집니다. 그리고 비평등성에서 평등성을 보는 것이 수행입니다. 하늘과 땅이 평등하지 않고, 나와 다른 사람이 평등하지 않고, 돌멩이와 금덩어리가 평등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비평등성인데, 여기에 평등성이 있습니다. 세월이 지나도 거기에 지나가지 않는 게 있고, 이 세상 모든 것이 차이가 있어도 그 차이를 초월한 게 있습니다.
「법성게法性偈」에서 말한 '구세십세호상즉九世十世互相卽'이 비동시성의 동시성입니다.
과거세와 현재세가 비동시성인데, 항상 같이 있는 것이 동시성입니다. 또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 이 비평등성의 평등성입니다. 작은 티끌 하나에 시방세계를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것이 전혀 평등하지 않은데 평등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등하지 않은 것에서 평등한 것을 보는 것이 깨달음입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을 이루는 것이 수행입니다.
비평등성에서 평등성을 보는 것이 수행이고, 비동시성에서 동시성을 보는 것이 수행입니다.
이것을 눈앞에서 확 보는 것이 깨달음이고, 그 깨달음으로 가는 것이 수행입니다.
부처님이 이것을 깨달으신 것입니다. 눈 한 번 깜박하는 순간이 하늘과 땅이 갈라지기 이전의 시간이고, 현재의 순간이고, 하늘과 땅이 다 없어지는 종말의 순간입니다.
제가 통도사에서 화엄산림華嚴山林 법문을 할 때, "아버지가 아들을 낳기도 하고, 아들이 아버지를 낳기도 한다." 라는 법문을 했습니다. 그때만 히도 당찬 법문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노스님이 "어떻게 자식이 아버질ㄹ 낳을 수 있냐?" 하고 이의를 제기하셨습니다. "며칠 있으면 극락암極樂庵 경봉鏡峰(1892~1982)스님께서 내려오시니까 큰스님께 여쭤 보십시오." 라고 대답했습니다.
얼마 있다가 큰스님이 오셨습니다. 그 노스님이 큰스님께 여쭈었습니다.
"이 강사 스님이 애비가 자식을 낳기도 하고 자식이 애비를 낳기도 한다고 하는데, 이런 망발이 어디 있습니까? 무슨 뜻입니까?"
"강사 스님이 법문을 했으면 강사 스님에게 물어야지."
"물어봤는데 큰스님께 여쭈어 보라고 미뤘습니다."
그러자 큰스님께서 기가 막힌 법문을 하셨습니다. 그 법문을 바로 알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됩니다. 큰스님이 차담茶啖을 하는데 차담 상에 사과를 통째 올려놓고는 질문한 스님의 이름을 부르며서 "아무개! 이 사과가 어디가 처음이고 어디가 끝인고?" 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그분이 "생긴 것으로 보면 배꼽이 끝이고, 꼭대기가 처음입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경봉 스님이 아무 말씀 없이 "하하하" 웃으셨습니다.
참 깊은 법문입니다. 어디가 처음이고 어디가 끝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처음과 끝이란 비동시성인데 동시성이 있습니다. 차별 속에서 평등을 알고, 역사 속에서 역사를 초월한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깨달음입니다. 맨날 죽었다 살았다 하는데, 이것은 비동시성입니다. 그런데 죽었다 살았다 하는 것이 없는 게 있습니다.
가의성可義性, 불가의성不可義性 입니다.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 가의이고, 생각할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는 것이 불가의입니다. 그러니까 죽는다. 산다, 좋다. 나쁘다 등은 생각하고 말할 수 있는 가의성입니다. 여기에 생각할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는 불가의성이 있습니다. 그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보살 수행 같은 경우에는 아예 생각을 떠나서 살기 때문에 불가의성에서 항상 불가의성을 봅니다. 늘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 속에 삽니다.
이것이 불가의성에서 불가의성을 보는 것입니다. 말할 수도 없고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을 불가사의해탈경계不可思議解脫境界라고 하는데, 보현보살이 머물러 있는 세계가 불가사의해탈경계입니다. 이것이 불가의성입니다.
그리고 말할 수도 없고 생각할 수도 없는 불가의성에서 가의성의 말을 하기도 하고 생각을 하기도 하는 자유자재한 것이 부처님의 수행입니다.
부처님은 해탈경계에서 중생의 속박경계에 자유자재입니다. 수행은 중생도 하고 보살도 하고 부처님도 하고, 다 똑같이 합니다. 불가사의해탈경계에서 중생경계에 자유자재하는 것이 부처님의 수행입니다. 비동시성의 세계를 믿고 경계를 좇아가면 계속 헤매기만 합니다.
내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이 깨달아 가는 길입니다.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이 깨달음의 길이고, 경계를 좇아가는 것이 고생의 길입니다. 무엇을 얻든 밖에서 얻는 것은 마지막에 고생인데 그걸 모르고 계속 얻으려고 합니다.
남편을 얻어도 마지막에는 고생덩어리, 아내를 얻어도 마지막에는 고생덩어리입니다.
그런데 얻을 때는 그것을 모릅니다. 말리지 왜 얻지 말라면 하느냐고 원수지려고 합니다.
명예를 얻어도 권력을 얻어도 이 사람 저 사람 해 달라는 사람이 따라와 감당이 안 됩니다.
밖에서 얻는 것은 무엇을 얻어도 마지막에는 괴로움입니다.
그런데 마음에서 얻는 것은 불가사의해탈경계입니다. 마음으로 돌아가서 찾는 것이 수행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시작하는 마음에서 바로 깨달음이 옵니다. 과일나무 종자를 땅에 심으면 심은 종자에서 열매가 생기고, 안 심으면 열매가 안 생깁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내 마음을 찾아야겠다고 찾는 순간이 이루는 순간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마음응ㄹ 찾아 불가사의해탈을 이루려면 어떻게 하느냐? 과거에 자꾸 좇아가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과거에 얽매이는 것이 굉장히 많습니다. 과거는 다 지나간 것입니다.
미래에 얽매이지 말아야 합니다. 바보 같은 사람은 아직 늙지도 않았는데 늙은 후를 걱정합니다. 미리 걱정하는 것은 아무 소용없습니다. 과거에 빠지지 말고, 미래에 빠지지 말고, 현재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내 마음을 내가 돌아보는 것이 역사를 초월해서 사는 일이고, 온갖 차별적인 속박을 초월해서 사는 일입니다. 이것을 불가사의해탈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불가사의해탈은 지혜로 딱 보아서 항상 비동시성에서 동시성을 보고 비평등성에서 평등성을 보기 때문에 뭐든지 기쁩니다. 죽어도 기쁘고 살아도 기쁩니다.
눈 뜨고 죽어도 기쁘고, 서서 죽어도 기쁘고, 앉아서 죽어도 기쁘고, 개미가 먹어도 기쁘고, 파리가 먹어도 기쁘고, 기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기쁘지 않은 이유는 비동시성과 비평등성만 보고 동시성과 평등성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생각이 경계에 미혹되고 경계에 따라가서 항상 차별경계에 얽매이기 때문에 괴로운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 다른 사람 욕하는 데 세월 보내지 말고, 앞을 걱정하는 데 세월 보내지 말고, 지난날 돌아보고 한탄하는 데 세월 보내지 마십시오.
아무 소용 없는 일입니다. '이렇게 억울해하고 괴로워하고 힘들어하는 나 자신은 누구인가?' 여기에 길이 있습니다. 자심반조自心返照, 자기 마음을 돌아보는 것이 정말 행복한 길입니다. 이것을 마음공부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억울한 마음이 일어날 때도 '억울한 마음 일으키는 이것이 무엇인가?' 무서운 생각이 날 때도 '무서운 생각을 일으키는 이것이 무엇인가?' 괴로운 생각이 날 때도 '괴로운 생각을 일으키는 이것이 무엇인가?' 라고 하는 것이 자심반조입니다.
경허 큰스님은 고양이가 쥐 잡듯이, 어미 닭이 알 품듯이 '항상하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고양이가 쥐를 잡을 때는 심안부동心眼不動이라, 생각과 눈동자가 움직이지 않습니다.
쥐가 구멍에 들어간 것을 보면 나올 때까지 생각이나 눈동자가 움직이지 않고 집중합니다.
'어미 닭이 알 품듯이' 라는 것은 어미 닭은 병아리가 알에서 나올 때까지 따뜻한 온기를 식히는 법이 없습니다. 난기상속煖氣相續, 따뜻한 기운이 항상 이어진다는 뜻입니다.
심안부동과 난기상속이면 금방 깨닫습니다. 설사 안 되더라도 그것이 없어지는 게 아니고 좋은 종자로 자기에게 남습니다. 그러니까 된다. 안 된다, 어렵다. 쉽다는 생각을 하지 말고, 어느 때나 '지금 보는 것, 듣는 것, 생각하는 이것이 무엇이냐?' 라고, 일체 근심걱정 없애고 자기한테 돌아오고 자기를 밝게 보십시오. 그것이 바로 수행생활입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서방정토 극락도사 아미타불()()()

첫댓글 과거는 다 지나간 것입니다.
미래에 얽매이지 말아야 합니다. 바보 같은 사람은 아직 늙지도 않았는데 늙은 후를 걱정합니다. 미리 걱정하는 것은 아무 소용없습니다. 과거에 빠지지 말고, 미래에 빠지지 말고, 현재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내 마음을 내가 돌아보는 것이 역사를 초월해서 사는 일이고, 온갖 차별적인 속박을 초월해서 사는 일입니다. 이것을 불가사의해탈이라고 합니다.....법문 깊이 새깁니다 감사합니다 무량공덕이 되소서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극락도사 아미타여래불 🙏🙏🙏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_()_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