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대 영토를 차지한 유스티니아누스 시대
유스티누스 1세의 업적에도 불구하고 그의 재위 시기는 조카이자 후계자인 유스티니아누스 1세(재위 527~565년)에 완전히 가려진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재위는 공식적으로 527년에 시작되었으나, 학자들은 유스티누스 1세의 재위 기간부터 '유스티니아누스 시대'라고 부르는 경향이 있다. 여기에는 유스티니아누스 시대에 작성된 사료가 꽤 많고 다양하다는 점이 작용한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불려와 외삼촌의 양자가 되어 옥좌 뒤에서 실질적인 권력자로 군림했다.
유스티누스의 재위 동안 유스티니아누스는 로마와의 협상을 지휘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여러 건물을 세웠다. 527년 이전 언제인가 유스티니아누스는 외삼촌을 설득해 원로원 의원이 배우와 결혼할 수 없다는 법을 수정했다. 그 덕분에 그는 히포드로무스에 근무하는 곰 사육사의 딸로 태어나 히포드로무스의 배우로 일한 테오도라와 결혼할 수 있었다. 테오도라에게 호의적인 사료들조차 그녀가 창녀 또는 첩실이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유스티누스가 죽은 527년 그녀는 아우구스타가 되어 남편 유스티니아누스와 함께 통치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비잔티움 황제 중 가장 유명해진 데에는여러 이유가 있다. 그는 긴 재위 기간 끊임없이 전쟁을 치르며 값비싼 승리를 거두어 최대 영토를 확보했으며, 많은 행정 개혁과 오늘날에도 볼 수 있는 건축물을 남겼다. 또한 이 제국의 통치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기록으로 남겼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자신은 제국을 구원하기 위해 신이 보낸 지도자이고 제국 곳곳에서 자신의 권력을 확인할 수 있으며, 이를 성취하기 위해 온 힘과 제국의 모든 자원을 바쳤다고 주장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 권의 책에 의해 이것이 환상임이 드러났다. 궁정 역사가 프로코피우스의 《비사(Historia Arcana)》가 바로 그 책이다. 프로코피우스는 공적으로 유스티니아누스의 전쟁을 다룬 책 여덟 권을 저술하고 황제가 후원한 건축물들을 찬양하는 글을 지었지만, 《비사》에서는 전혀 반대로 온갖 비난을 퍼부었다. 이 책에서 유스티니아누스는 밤만 되면 머리 없이 황궁을 떠돌아다니는 악마의 피조물, 악마의 화신이고 그의 유일한 임무는 모든 존재, 모든 사람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전직 매춘부(이것은 사실이다) 황후 테오도라는 성적으로문란한 인물로 묘사했으나, 테오도라에 대한 서술은 악의로 가득찬 조롱으로밖에 해석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유스티니아누스 휘하최고의 장군 벨리사리우스는 프로코피우스가 오랫동안 그의 밑에서 일했고 앞에서 언급한 전쟁기의 실질적인 주인공이었음에도 테오도라의 절친한 친구이자 허구한날 불륜을 저지르는 아내 안토니나의 꼭두각시로 묘사했다.
프로코피우스가 《비사》를 쓴 목적은 분명하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존경할 만한 인물이 아니라고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눈먼 찬양과 무자비한 비난이라는 두 극단 사이에서 중간 지점을 찾아내기란 어렵다. 유스티니아누스의 긴 재위를 분석하기 위해 제국의발전 과정을 되짚어 보고, 지역별로 변경과 그 밖에서 일어난 상호작용을 살펴보자.
유스티니아누스가 즉위했을 때 캅카스와 시리아 방면에서 페르시아와의 갈등은 고조되어 있고 이탈리아의 정세는 급변하고 있었으나, 전쟁 자체는 벌어지지 않았기에 황제는 일련의 개혁에 집중할 수 있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관료 카파도키아의 요안네스와 트리보니아누스를 중용했다. 트리보니아누스는 이미 존재하는 모든법안을 종합하여 최신화하는 업무를 맡았는데, 지금은 볼 수 없는 이 작업물은 529년에 반포되었고 몇 년 뒤인 534년 유스티니아누스의 이름으로 확장된 두 번째 판본이 발표되었다. 그 후 《학설휘찬(Digesta)》과 《법학제요(Institutiones)》(초학자를 위한 교과서)도 편찬되었다. 이서적들은 로마법의 보전과 발전에 대단한 중요성을 지니고 있으며, 대륙법의 기원이 로마법에 있으므로 아직도 학자들은 이 책들을 연구한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이 작업을 통해 “법률에 새 생명을 불어넣었다”라고 자평했다.
법전 편찬이 진행되고 있는 와중인 532년 초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는 민중봉기가 발생했다. 사건 자체는 새로울 것이 없었다. 정부 당국이 폭력 행위에 연루되어 사형 선고를 받은 대중 정당의 일부 인사를 사면하지 않으려 한 일이 발단이 되었다. 히포드로무스에서 민중과 황제가 만났음에도 해결되기는커녕 봉기는 도시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대중 정당들은 힘을 합쳐 '니카'(승리)를 외치며온 도시를 불태우고 약탈했다. 황제와 조신들이 황궁에 숨어 있는사이 콘스탄티노폴리스 중심부는 완전히 파괴되었다. 측근 몇몇을 해임하라는 폭도들의 요구에 유스티니아누스는 동의했지만, 봉기는 끝날 줄을 몰랐다.
민중은 특정한 지도자를 두지 않았다. 원로원 의원을 지도자로세우려고 시도했지만, 의원들이 모두 숨거나 거부한 탓에 실현되지못한 것이다. 결국 황제는 트라키아에 주둔 중인 군대를 불러 봉기를 일으킨 민중을 모조리 학살하도록 했는데, 사료에는 3만 명 이상이 살육당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과장으로 보인다. 도시 인구의거의 10퍼센트에 해당하는 시체를 감당할 수나 있었을까? 아나스타시우스 1세의 조카 가운데 두 명은 봉기를 일으킨 폭도들이 가까이 다가오도록 허용한 탓에 처형당했고, 원로원 귀족들에게도 숙청의 광풍이 몰아쳤다. 이 무시무시한 경험 이후 유스티니아누스는더욱 단호해지기로 마음먹었던 것 같다.
유스티니아누스 재위 기간의 또 다른 특징은 그가 벌인 여러 전쟁이다. 그의 이름 아래 진행된 대부분의 군사 원정은 자금과 인력부족에 시달렸지만, 그럼에도 몇몇은 눈부신 결실을 거두었다. 첫번째는 533년에 시작된 아프리카의 반달 왕국 원정이다. 이 시점에는 아직 니카 봉기의 기억이 생생하여 유스티니아누스는 단호한 의지를 보이며 당시 호전적인 정책을 요구하는 원로원 일부를 만족시킬 필요가 있었다. 페르시아와의 전쟁이 532년 '영원한 평화' 조약으로 일단락되고 동방 전선이 안정되자. [프로코피우스는 "그리하여 이후 그들은 '영원한 평화'라 불리는 결론에 이르렀다”라고 했다.] 비잔티움 제국은 다른 방면에서 전쟁을 일으킬 여유를 얻었다.
벨리사리우스가 지휘한 반달 원정은 빠르게 승기를 잡았다. 이전의 아프리카 원정은 막대한 자금과 병력이 동원되었음에도 실패한반면, 이번에는 그에 비해 적은 병력이 투입되었으나 반달 왕국 군대를 격파하고 금방 아프리카를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벨리사리우스는 반달 왕국이 축적한 막대한 재화와 함께 콘스탄티노폴리스로돌아왔다. 이후 옛 반달 왕국의 영역이 늘 평화로웠던 것은 아니지만(사하라 사막과 비잔티움 제국 영토 사이에 살던 베르베르인은 꾸준히 약탈을 시도했다), 북아프리카 지역은 비잔티움 제국 내에서 안정적이고 부유한 지역으로 남게 되었고 반달 집단은 역사에서 사라졌다.
비잔티움 제국은 이탈리아에서 오스트로트 왕국과 싸울 때도같은 일이 일어나기를 바랐을 것이다. 테오도리크의 말년부터 이미이탈리아의 정치적 상황은 요동쳤고, 그의 사후에 즉위한 후계자가미성년이어서 혼란은 더욱 심해졌다. 새로 즉위한 왕이 테오도리크의 후계자를 제거했을 때 벨리사리우스가 이끄는 놀랍도록 작은 규모의 군대가 이탈리아에 도착했다. 535년에 시작된 이탈리아 원정은 아프리카처럼 신속하게 끝나지 않고 20년 동안 이어졌으며, 원정군 사령관도 여러 차례 바뀌었다(벨리사리우스는 초전에서 승리했으나 소환당했고 다시 투입되었다가 환관 장군 나르세스로 교체되었다). 552년 프랑크 왕국과 랑고바르드[현대 이탈리아어식 표기로는 롬바르드(Lombard)이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당대 랑고바르드인들의 표현을 존중하여 '랑고바르드'로 통일했다.]에서 모집된 용병의 도움으로 전쟁은 승리로 끝났지만 큰 대가를 치러야 했다. 이탈리아 대부분이 황폐화하여 인구가 급감한 것이다. 554년 황제는 이탈리아 문제를 다룬 문서 〈국사 조칙(Pragmatica Sanctio)〉에서 마치 고트 집단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가장했다. 몰수한 토지와 노예는 원로원 귀족에게 돌려주고 황제의 지배와 비잔티움의 통치를 강요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아프리카와 이탈리아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동방의 페르시아 전선과 발칸 전선에서 군사적·정치적 상황은 그리 밝지 않았다.
페르시아와 맺어진 '영원한 평화' 조약은 540년 후스라우 1세가 안티오키아를 공격하여 약탈하고 시민 다수를 페르시아로 끌고 가면서 끝이 났다. 약탈은 계속되었고 비잔티움 군대가 파견되었다. 어느 쪽도 압도적으로 승리할 수 없었기에 545년 이후에는 캅카스 지역에서 아르메니아, 이베리아, 라지카의 패권을 두고 전쟁이 벌어졌다. 이 지역에서 양 제국의 세력은 엎치락뒤치락을 거듭했다. 전쟁은 교착 상태에 빠졌고 마침내 562년 양국은 평화 조약에 합의했는데, 이에 따르면 협정은 30년 동안 유지되어야 했지만 사실 10년도 채 지속되지 못했다.
발칸의 상황도 다르지 않았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이탈리아 원정기에 게피드왕국과 동맹을 맺어 고트를 견제했다. 그러나 540년대 게피드 왕국의 세력이 확장(대부분 북방의 랑고바르드인을 대상으로 이루어졌다)되자, 황제는 랑고바르드 집단을 지원해 게피드 왕국의 세력을 견제했다. 이로 인해 게피드 왕국의 세력이 약화되자, 새로운 등장인물이라 할 수 있는 슬라브인이 540년대 말에 다뉴브강을 건너 이 지역을 약탈하기 시작했다. 슬라브인들은 550년대에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 지역까지 약탈했고, 550년대 말에는 튀르크계 쿠트리구르[쿠트리구르(Kutrigur)는 튀르크어로 토쿠르 오구르(Toqur Ogur), 즉 '9(개) 부락 연맹'의 그리스어식 표기로 보인다. 중앙아시아사의 석학인 피터 골든에 따르면 여기에서 언급된 쿠트리구르 부락은 앞에서 언급한 불가르의 일부다.]에 합류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하기까지 했다.
이제 노인이 된 벨리사리우스가 다시 불려와 이 위협에 맞섰지만, 다뉴브 전선이 강화되지는 않았다. 이때 비잔티움 사료에 아바르라 불리는 집단이 등장한다. 튀르크계 유목민 집단이던 아바르 집단은 돌궐 제국의 확장(결국 북중국과 몽골고원에서 시베리아 남부까지 세력을 넓혔다)에 밀려 서쪽으로 이주하여 흑해 북쪽에 자리 잡았다. 아바르인은 550년대 후반부터 유스티니아누스에게 사절단을 보내기 시작했다. 비잔티움 제국은 공식적으로는 아바르인이 제국내에 정착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으나, 그 대신 아바르인은 슬라브와 랑고바르드 게피드를 공격하는 대가로 비잔티움 제국으로부터 공물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