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물처럼
김정옥
아파트 입구에 배롱나무가 선홍빛으로 물들었다. 코로나로 세상이 어수선해도 꽃은 피고 지며 계절이 바뀌고 시간 따라 세월도 흘러간다. 강물도 굽이굽이 감돌아 물꼬리를 휘갈기다 잔원하게 흐르는데 고붓고붓한 인생길이 한 모롱이를 도나 보다.
돌아간 모롱이에서 난기류를 만나기라도 했나. 돌연 허리가 까탈을 부린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아픈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한 발짝이라도 걸을라치면 다리가 당기고 저리고 엉덩이가 아파서 움직일 수가 없다. 누워 있으면 그나마 조금 나으니 밥 한술 뜨고 침대에서 온종일 시간을 보낼 수밖에 도리가 없다. 친구들이 내가 그중 건강하다고 부러워해서 은근히 기분 좋았는데 이 지경이 되니 그 말을 도로 무르고 싶다. 유성 ‘수통골’ 둘레길 걷자고 미리 날짜 맞춰놓은 것도 나 때문에 무산되었다. 여타 모임도 모조리 취소하고 올 스톱이다. 예전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들어 조바심이 나고 애가 탄다.
세간의 우려대로 잠시 잠잠해지나 했던 코로나19 확진자가 갑자기 급등세다. 모임과 외출을 자제하라고 안전 재난문자가 연신 빗발친다. 탁구장도 폐쇄하고 평생교육원도 개강이 연기되었다. 남들도 집에 콕 박혀 있을 때 난 아파서 나갈 수 없는 처지니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몇 년 전 어깨 고장이 났을 때 다녔던 정형외과에 갔다. 몸을 요리조리 돌려가며 여러 방향으로 엑스레이를 찍는다. 척추관절염이라고 한다. 척추 신경이 눌려 엉덩이와 다리가 아픈 거라며 허리와 엉덩이에 비보험非保險 인대 강화 주사와 진통제를 맞고 4일 치 약 먹고 보자고 한다. 팔만 원이나 하는 주사 맞았으니 좀 나아지겠지.
껍적거리다 제풀에 주저앉은 형국이다. 생각해보니 젊은 사람들 혈기에 질세라 그들과 똑같이 밤 11시까지 탁구를 치며 물색없이 촐랑댔다. 운동하고 와서도 밤 한두 시까지 변변찮은 글 나부랭이 쓴다고 책상에 앉아 있으며 아직 끄떡없다고 떵떵거리며 큰소리도 쳤다. 강물이 바위를 만나면 대들듯이 부딪치고, 낭떠러지를 만나도 겁 없이 내리뛰는 오만을 저지르듯 멋모르고 세월에 항거했나 보다.
딸들이 갑자기 무슨 일이냐며 연신 전화를 해댄다. 갈비탕을 사 오고, 택배로 설렁탕이며 사골곰탕을 보낸다. 바쁜 애들 공연히 신경 쓸까 봐 아프다고 말을 안 하려고 했는데 작은딸이 다니러 온다는 바람에 실토할 수밖에 없었다.
진단이 잘못되었나, 치료가 문제인가 나흘이 지나도 차도는커녕 더 아팠다. 누워도 아프고 앉아도 괴롭고, 답답해 죽겠다. 몸이 아프니 마음은 잿빛으로 낮게 드리운 구름처럼 가라앉아 찌뿌드드하다. 지인들이 병원은 한 군데만 다녀서는 안 된다며 여기저기 다녀보란다. 한의원에 가서 침도 맞아보라고도 한다. 딸들이 수시로 전화하고 지인들이 하루돌이로 차도를 묻는다. 진심으로 염려하는 마음이 전해온다. 그들이 고맙다.
문우에게 용한 병원이라고 소개받았다. 엑스레이로 본 소견으로 척추관 협착증이란다. 먼젓번 병원 의사와 진단부터 다르고 치료비마저도 적다. 주사 맞고 물리치료를 받고 왔는데 기분부터 나아진다. 하룻밤 자고 나니 조금씩 차도가 보인다. 문우가 용한 병원이라고 하더니만 용하긴 용한가 보다.
척추관 협착증을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니 척추 중앙의 척주관이 좁아져서 허리의 통증이나 다리의 복합적 신경 증상을 일으키는 질환으로 제일 큰 원인은 퇴행성이란다. 퇴행성은 몸의 기관을 많이 사용하거나 노화하여 그 기능이 퇴화하는 성질이다. 서글픈 일이지만 이제 몸이 고장 나면 모두 노화老化로 귀결이 된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얼마 전부터 ‘나 힘들어’하며 허리가 말을 걸어왔었다. 책상에 오래 앉았다 일어설라치면 굽혔던 허리를 펴는데 한참씩 걸리곤 했다. 심지어 머리 감고 일어설 때도 잠깐씩 뜸을 들였다. 노구老軀가 삶에 무게를 견디느라 힘들었나 보다. 몸은 노화로 힘겹다고 투정인데 짐짓 아직은 늙지 않았다고 도리질해댔던 주책없는 노추老醜가 부끄럽다.
오래 써먹어 낡은 육신이 힘들다고 말을 걸어올 땐 한 번씩 쳐다보고 다독다독해야겠다. 어르고 달래며 밀고 당기면서 사랑하는 사람처럼 보듬어야지. ‘팔준마八駿馬라도 주인을 잘못 만나면 삯말로 늙는다.’는데 준마도 못 되는 몸, 주인의 꼴같잖은 만용으로 고로롱고로롱하며 늙어 가면 되겠는가.
‘상수여수上壽如水’란 건강하게 오래 살려면 흐르는 물처럼 도리에 따라서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흐르는 것은 거슬러 올라가지 못하는 게 섭리일 터이다. 그런데 나이가 무색하도록 주책없이 나부댔다. 세월을 거슬러보려고 볼썽사납게 껍적댔다. 흐르는 강물처럼 물의 순리대로 그저 구름이 바람결 따라 흐르듯이 나도 그랬어야 했다.
‘천천히 걸어야 멀리 간다.’는 말을 거울삼아 이제부터 뭐든 슬슬 해야겠다. 지나친 과용果勇도 오만도 넘치는 욕심도 과감하게 버리자. 강물처럼 유유히 흐르다 풀등에 앉아 쉬기도 하고 일렁이는 물살에 살살 리듬도 타며 살아야겠다. 굽이쳤던 강물이 평평한 곳에서 다시 안온하게 흘러가듯 구붓했던 내 굽이도 평온해지기를 갈망한다.
이제 통증은 좀 가셨지만 두 다리가 천근만근이다. 가을 하늘은 풍덩 빠지고 싶을 만큼 파랗고 삽상한 건들마 한 자락이 코끝을 스치는데 나는 아직도 답답한 집안에서 빌빌거리고 있다.
선홍빛 배롱나무가 물색이 바래지기 전에 산책이나 슬슬 나가볼까.
월간 『한국수필』 등단. (2018) 한국수필가협회, 한국수필작가회, 충북수필문학회, 내륙문학회 무심수필문학회 회원. 제2회 한국수필독서문학상 수상.
첫댓글 창작 연습방에 올렸던 글이니 바쁘신데 새로 답글 안 달으셔도 괜찮습니다. ~~^^
시람의 몸도 흐르는 물처럼 순리를 따라가야 고장이 안나나 봐요.
이제 쉬엄쉬엄 가야할 것 같아요.
맞습니다. 몸이 말을 합니다.
용한 병원 소개해준 문우가 누군가요?
이 ※※이라고 사모님께서 말씀하셨다고~~^^
저와 비슷한줄 알았다가
깜짝 놀랐는데 조심하셔야겠군요.
용한 병원 엄청 궁금하네요.
최운숙선생님도 허리가 안 좋아요? 용한 병원 궁금하면 따로 알려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