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영국 노동사를 개관한 글 <영국 산업사회의 성립과 노동계급, 1780-1914>(1997)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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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 파괴자들
18세기에 집단항의는 폭동(riot)의 형태로 나타났다. 특정한 문제에 불만을 가진 군중이 모여 시정을 요구하고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에는 집단행동을 통해 해결하려고 했다. 이 시기에 가장 일반적인 것은 식량폭동이지만, 그밖에 다른 문제들과 관련해서도 비슷한 형태의 집단항의가 가끔 발생했다. 가톨릭 배척운동이라 할 수 있는 1780년의 고든(Gordon) 폭동, 공화주의자들을 공격한 ‘교회와 왕(Church and King)’ 군중운동 등이 이에 해당한다.
에드워드 톰슨은 이러한 군중행동을 ‘도덕경제(moral economy)’의 개념으로 설명한다. 집단항의에서 표출된 요구의 이면에는, 부자건 가난한 사람이건 모든 사람들은 공동체 안에서 수행해야 할 어떤 역할이 있으며 이러한 도덕적 전제가 침해받을 때에는 시정해야 한다는 전통적 사회관이 놓여 있었다는 것이다.
식량폭동의 예를 들어보자. 민중의 생활비에서 식비의 비율이 높기 때문에 식량가격의 상승은 저항을 받게 마련이었다. 생필품의 가격은 공급과 수요곡선의 접점이 아니라 ‘공정가격’의 원리에 입각하여 정해져야 할 것이었다. 곡물폭동은 식료품값을 정상적인 수준으로 묶으려는 의도에서 특별히 매점했을 것이라고 의심이 가는 제분업자나 빵집 또는 중매상을 공격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참가자들은 실제로 폭력을 사용하지는 않았으며 집단항의를 통하여 가격인하를 강요할 뿐이었다. 이것은 일종의 소비자 항의의 형태로서 노동조합 조직이 없는 상황에서 때로는 단체교섭의 성격을 갖기도 했다.
러다이트 운동 또한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1811년 노팅엄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네드 러드(Ned Ludd)’의 협박장이 날아든 다음에, 한 무리의 편직공들이 밤중에 떼를 지어 고용주의 편물기들을 부수었다.
"그대가 저 혐오스런 털깎기 기계 주인이라는 제보가 들어왔다. 내 부하들은 내가 당신에게 편지를 보내어 그것을 폐기하라고 경고하기를 원했다. 그러므로 그대는 이제부터 본관이 하는 말을 잘 듣기 바란다. 다음 주말까지 그 기계들을 없애지 않으면, 그것을 부수기 위해 내 부관과 300여명의 부하를 파견할 것임을 경고한다. 나아가 그때까지 우리가 몸소 가도록 하는 수고를 끼친다면 그대의 공장이 잿더미로 변하는 재앙을 당할 것이고, 그대가 내 부하 가운데 어느 누구에게라도 발포하는 무분별한 행동을 저지른다면 그들에게 당신을 살해하고 당신의 집을 온통 불질러버리라고 명령할 것이다. 결국 그대는 기계소유자들인 그대 친지들에게도 빨리 자신의 기계를 없애지 않으면 똑같은 운명이 기다리고 있음을 깨닫도록 하는 호의를 베풀게 될 것이다.
구세군의 장군 네드 러드의 사무관이 서명함
진실을 위한 구세군"
그 후 1816년까지 이러한 사건들이 노팅엄, 요크셔, 랭카셔와 같은 직물업 중심지에서 일어났다. 이 집단항의는 모두 기계파괴의 형태를 띠었기 때문에 러다이트 운동이라고 불리지만, 세 지역을 면밀히 검토하면 그 동기가 조금씩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노팅엄 편직공들의 불만은 임금하락, 편물기 임대료 인상, 현물급여제, 무자격자 고용 등에 있었다. 그들은 기계가 그들을 구축해서가 아니라 이런 불만을 야기한 고용주의 소유물이기 때문에 파괴했다. 이와는 달리 요크셔의 직물 마무리공(cropper)들은 기계의 도입으로 인한 실업과 그들의 특권적인 지위가 손상될까 두려워 기계파괴에 가담하였다. 랭카셔의 경우는 앞의 두 사례와 또 달랐다. 이 지역의 수직포공들은 역직기를 파괴했지만, 역직기가 본격적으로 보급된 것은 1830년대의 일이기 때문에 기계와의 경쟁 때문인 것 같지는 않다. 그들이 직포공장을 공격한 것은 그 공장이 그들을 경제적 곤경으로 몰아넣은 어떤 상징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편 농업지역에서도 러다이트와 비슷한 항의의 형태가 나타났다. 1830년 8월 윌트셔를 비롯한 농촌지역 농업노동자들이 일으킨 스윙폭동(Swing Riot)이 그것이다. 이 항의는 탈곡기의 도입에 자극 받은 농업노동자들이 대장 ‘스윙’의 서명이 있는 협박장을 보내고 지주의 탈곡기를 파괴하는 형태로 전개되었다.
스윙 폭동을 끝으로 영국 노동사에서 톰슨이 설명하는 이와 같은 유형의 집단항의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이것은 시장경제로 재편되는 과정에서 일어난 과도기적 항의형태이다. 이 경제적 약자들은 그들이 처해 있는 상황에 극단적으로 저항했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노동자집단의 동조를 얻지 못했으며 항의과정에서 사실상 고립되어 있었다. 정부의 과잉진압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하찮은 노동자들이 감히 폭력적인 음모를 꾸민 것에 두려움을 느낀 정권이 과민반응을 취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지배층은 쉽게 잊혀지지 않을 교훈을 남겨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대규모로 군대를 투입했을 뿐만 아니라 가담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사형이나 유형과 같은 중형을 선고하였다. 예컨대 1812년 4월 로폴드의 카트라이트 공장 습격에 참가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된 혐의자 100여 명 가운데 14명은 처형되고 7명이 추방(유형)당했다. 그 후 이 산업자본주의의 희생자들은 점차로 경제적 강자들의 운동에 편입되었다.
그렇다면 기계파괴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그것은 경제적 약자들의 “폭동을 통한 집단협상”이다. 그것은 노동시장의 위기와 산업화의 위협에 직면한 수공업자들이 실업을 방지하고 이전의 생활수준과 지위를 유지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그러나 그 항의가 단순히 산업투쟁의 성격만을 가졌는가의 여부는 아직 판명되지 않았다. 전통적인 역사가들은 러다이트 운동이야말로 다른 정치적 의도가 없이 무계획적으로 진행된 산업투쟁이었다고 단정한다. 그러나 항의의 음모성, 1만 2,000명 이상의 군대를 동원한 정부의 강경한 진압, 부분적으로 밝혀진 비밀혁명집단 등은 이 항의가 경제적 차원 그 이상의 목적을 지닌 혁명적 지하운동의 표출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낳게 하지만, 아직은 추측의 단계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아마도 러다이트 운동은 계급적 연대보다는 지역사회의 공동체적 연대에 더 기초를 두었던 것 같다. 그 운동은 반란의 성격을 지닌 담론 및 행동 양식을 스스로 만들어 나갔지만, 혁명적 조직의 수준까지 도달할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