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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품의 감상과 요령
미술 작품을 감상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순수예술 분야의 작품 감상은 더 난해할 수 있다. 특히 현대미술에 있어서는 난해함과 모호함으로 가득찬 작가의 주관적 멧시지를 읽어내기란 전문가가 아닌 이상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본인 스스로를 이해하지 못하는데, 남을 이해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더우기 남의 예술작품을 이해하기란 대단히 어려운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 스스로 노력하지 않고 무관심한 상태에서 남의 작품을 감상했을 때, 전해져 오는 감동과 희열을 느끼려 하는 것은 지극히 이기적인 생각이라고할 수 밖에 없다.
시각을 가진 인간이 아닌 동물도 사물을 볼 수는 있다. 그러나 그들은 본 것에 대한 이해와 느낌, 감동을 갖
지는 않는다. 표피적 외형 파악에 머물 뿐, 대상에 대한 사유는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인간은 대상에 대한 느낌과 생각을 갖는다. 이것이 인간과 동물의 차이이고 인간이 다른 동물과는 달리 예술품을 창조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즉, 아름다움에 대한 이해를 갖기 때문에 예술을 양산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술, 특히 미술품의 감상 역시 마찬가지다. 미술품을 보고, 관심을 가지고, 느끼고, 생각함으로써 비로소 자신의 감성을 표출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은 자기만의 시야가 있다. 그 시야라는 것은 그 사람만의 시각적 한계를 의미한다. 미술품 감상의 시각적 한계는 그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지적 시야만큼 볼 수 있다. 즉, 동물의 시야는 표피적 시야이고 인간의 시야는 대상에 대한 관심도와 흥미, 지적인 이해도만큼의 시야인 것이다.
그러나 그 시야라는 것은 관심도와 흥미유발의 정도 그리고 지속적인 연구여부에 따라서 충분히 넓힐 수 있다. 예컨데, 난초를 재배하는 취미를 가진 이가 지속적으로 난초에 대한 연구와 관심에 따라 난초에 대한 상식과 배양의 노하우를 스스로 터득하듯, 미술품의 감상 역시 지속적인 관심과 흥미의 정도만큼 미술품의 감상 시야는 넓혀진다는 뜻이다.
자유롭게 편안하게 그리고 부담없이
우선 미술품 감상의 전제 조건이 있다. 그 전제 조건이란 다름아닌 부담을 가져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예술은 부담스럽거나 어렵거나 분석적이어서는 예술로서의 가치는 많이 반감된다. 특히 미술품은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고찰하는 분야라고 본다면 어렵고 부담스러운 아름다움은 이미 아름다움으로서의 가치를 많이 상실했다고 보야야 하기 때문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미술관에 들러서 즐기듯 감상하는 것이 예술의 본래 의미이고, 여기에 감동과 희열까지 느끼게 된다면 진정 예술만이 갖는 고유의 가치라 볼 수 있다.
이처럼 조각작품이나 그림은 자유로운 감상자의 자세가 전제되어야 하고, 그래야만 그 예술품의 이해도와 작가의 의도를 보다 빨리 파악할 수 있다. 스스로 자유로움을 포기하고 골치 아픈 논리를 펴거나 형식의 틀을 덧씌우는 부담스러움은 절대 피해야 한다. 단지 나 자신이 작품에 관심을 가지고 흥미로운 유희를 즐기듯하면, 작품의 이해도가 빨라질 수 있고, 이는 나 자신의 예술적 안목을 높히는데 도움이 될 수도 있다. 가볍게 감상하되 성급과 조급한 마음보다는 느끼고 생각하는 시간을 많이 가질수록 눈 높이는 높아져 가고, 작품을 보는 나만의 심미안이 생긴다고할 수 있다.
나만의 방식으로 나만의 시각으로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미술작품들이 있다. 그 중에는 비싼 미술품이 있는가 하면 의외의 저가 미술품도 있다. 얼마전 한국의 모씨가 고흐의 괏슈 작품을 소장하고 있어서 화제가 된적이 있었는데, 그 작품을 러시아의 부호가 물경 3000억에 매입하겠다고 해서 뉴스의 한 면을 장식한 적이 있었다. 과연 고흐의 그 그림이 3000억의 금전적 가치가 있는지 나는 매우 혼란스러웠다. 물론 고흐가 위대한 예술가인 것은 틀림없지만 내가 그 러시아의 부호라면 그 작품을 매입하는데 3000억을 투자하지는 않겠다. 왜냐하면 나는 나만의 취향이 있고 나의 선호도가 따로 있기 때문이다. 비싼 그림이 반듯이 예술성이 뛰어나고 지금껏 인류가 창조해낸 최고의 문화적 가치 소산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는 어찌보면 미술품의 금전적 가치 매김의 왜곡된 단면일 수도 있는 것이어서, 반듯이 비싼 미술품이 예술성이 뛰어나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고 보는 것이 나의 시각이다.
다만 나만의 시각과 나만의 취향이 중요하다. 남이 좋은 미술품이 곧 내가 좋아하는 미술품이 될 수 없듯이 스스로의 취향과 식견이 요구될 뿐이다. 간혹 나의 취향을 내팽개치고 무조건 비싸고 작가의 유명도에만 휘둘리는 일부 미술품 매입자들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자기 주관을 내버리고 남의 말에 부화뇌동하는 우매함을 범하는 것 같아서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겹고 졸리운 클래식 음악도 자주 들으면 감동과 전율을 느낀다. 평소 무관심의 분야일지언정 그 분야에 몰입하고 집중하면 그 분야의 새로운 시야가 트인다. 그리고 이에 익숙해지면, 보다 자유로운 그만의 식견이 생기며, 취향이 형성될 뿐더러 보다 넉넉한 여유가 생긴다. 미술품의 감상도 나만의 자유스런 취향과 심미안이 필요하다. 남의 선호도가 나의 선호도가 될 수 없다. 최소한 문화 생활의 취향만은 나만의 심미안이 필요하고 나 스스로의 문화적 정체성은 반듯이 갖추어야 할 필요조건이다.
작품의 제작연도와 시대상, 당시의 미술 사조를 주목하라.
대개 어느 시대나 그 시대의 트랜드와 사조는 존재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미술작품의 경향은 동시대의 사조를 근거에 둔 작품의 양산이 많다. 예를 들어 인상파의 광풍이 불었던 19세기에는 대부분의 작가들이 인상파의 사조에 동조하는 경향을 띄며, 이는 제작연도에 따라서 작품의 경향이 비슷해 지는 요인이기도 하다. 이는 그 시대의 주류를 이루는 미술 사조를 이해하면서 작품을 감상하면 그만큼 이해도가 빠를 수 있다.
또, 예술이란 항상 머물러 있지 않고 끝임없이 변화를 모색하는 기본적 속성이 있어서 새로운 양식의 개발을 추구하는 양상이므로 미술사적 변천의 과정이나 회화적 논리의 표현은 중요한 부분이므로 이를 주목해야 한다. 그러므로 기본적인 미술사나 당시의 사회상의 지식을 동원하면 더욱 쉽게 작품에 접근할 수 있다.
작가의 출생과 성장 배경을 살펴라.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이는 환경의 지배를 받는 동물이라고도 바꿔 말 할 수 있다. 출생지, 가족, 빈부의
여부, 교육정도, 사회적 상황에 따라서 인간의 성격과 품성이 달라질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작가의 환경은 중요한 문제이다. 이는 작가의 자의식 속에 살아 있는 모든 요소가 작품의 경향을 좌우하고, 작가의 추구하는 방향이 결정되기 때문이며 그 작가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작가의 작품 경향이나 추구하는 화풍은 그의 성장 배경과 밀접한 관계에 있으며,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예를들어 로코코 시대의 대표작가인 프랑스의 화가 샤르댕은 당시 화려하며, 장식적이고, 사치스러운 로코코풍의 화풍과는 분명히 다른 차이가 있었다. 그 이유는 그의 출신과 관계되는데, 그의 출신은 귀족이 아닌 평범한 가구를 만드는 장인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화려한 로코코풍의 그림을 그리지 못한 요인이었다. 왜냐하면 그의 가정은 가난했고, 생활고에 찌드는 평범한 환경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로코코 본래의의 화려한 귀족적 화풍에서 벗어날 수 밖에 없었다. 위의 그림은 샤르댕이 그린 정물화이다. 지극히 서민적인 평범한 주방의 식기를 주제로 그린 그림이다. 당시 유행했던 로코코의 화려함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이처럼 작가의 성장 배경은 작가의 화풍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고 할 수 있다.
작품의 구도와 구성, 통일, 균형의 미적 조화를 따져본다.
작품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기본적인 구도와 화면의 배치, 짜임새를 꼼꼼히 따져보는 세심함이 필요하다. 학창시절 배웠던 구도의 3요소라든지 하는 기본적인 미술의 조형이론을, 막상 작품 앞에 서는 감상자들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만다. 막연히 피상적 시각으로만 그림을 응시할 뿐 심층적 이해를 시도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러나 그 조형적 이해는 훈련이 필요하며, 아무에게나 눈에 띄는 것은 아니다.
특히 형태나 소재로 등장하는 화면의 구성 요소들이 지루함은 띄고 있는 것은 아닌지, 위치나 색채의 변화는 어떠한지, 질감은 어떠한지 하는 관찰력과 집중력이 요구되기도 한다. 또한 작품의 주제는 어떠한 요건 속에서 부각되고 있는지, 혹 주제가 산만하지는 않은지 등을 따져보며, 시선의 분산에 관해서도 관심을 갖는다.
미술 작품은 살아 움직여야 한다. 틀에 짜여진 답답함 보다는 좌우의 균형감이 명랑한 율동감으로 느껴져야 한다. 작품의 주제가 지나치게 한쪽으로 치우친다거나 너무 정 중앙에 위치하여 움직임이 전혀 없는 것은 지루함을 느껴 좋지 않다. 특히 인물화의 경우 인물의 위치가 시선의 방향을 좁게 할애하여 인물이 답답하게 느껴지거나 옹졸한 인상을 주게 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이런 부분도 주의 깊게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작품의 대비와 강조를 통한 긴장감의 여부를 살펴본다.
미술 작품은 작가의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작가의 의도를 눈으로 느끼며 작가의 이야기를 들을줄 알아야한다. 즉, 작가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는 작품의 주제를 찾아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화면 속의 대비와 대조,강조라는 조형 원리를 꾀뚫어 보는 시야가 필요하다. 이는 주제를 부각시키기 위해 반대되는 요소를 대립시키는데, 형태의 대비, 명암의 대비, 선의 대비, 또는 질감의 대비로 작가는 주제를 흔히 부각시킨다. 작품속의 서로 반대되는 요소를 찾음으로써 작가의 의도와 표현의 사고를 눈으로 읽을 수 있다.
작품을 감상할 때 우선 선이나 색, 질감 등이 강하게 시선을 끄는 것을 파악해 본다. 작가가 강조하고자 하는 요소를 파악해 보면 좀 더 작품에 가깝게 다가갈 수 있다. 작가는 주제를 강조하기도 하고 색채나 명암을 강조하기도 하며 또는 화면의 분위기를 강조하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작품 속에서 강조되는 요소를 눈으로 읽으면 작품의 이해가 쉬워진다.
위의 그림은 외젠 들라크루와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이라는 작품이다. 빛의 강렬한 주제의 투영, 전면에 어지러히 널려있는 시체들, 여신을 추종하는 한무리의 군중 등을 보면 작품의 주제는 명백 해진다. 당시 프랑스 혁명의 격랑에 빠진 어지러운 사회상을 작가의 상상력을 기초로 충실히 구현하고 있으며, 역사화의 전형을 보여 주는 작품이다. 전면에 널려있는 시체는 불합리에 빠진 전제주의 왕권의 폭정을 의미하며, 어둡게 채색된 전면부와 여신을 따르는 후면부의 군중의 무리는 여신이라는 주제를 강조하기 위해 대비되는 색채를 채용하여 주제를 극적 긴장감 속에서 강조하고 있다.
작품 속에 내포되어 있는 운동감, 동세, 생명력을 살펴본다.
흔히들 잘 묘사되고, 극적 효과를 거둔 작품을 사람들은 살아있는 것 같다고 한다. 물론 잘 훈련된 묘사력
으로 그려지면 그 생명력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보다 극적인 효과를 거두려면 감상자로 하여금 시선의 방향을 한 곳에 고정시키게 하지 않고 작품의 구석구석을 옮겨 다니게 하면 더욱 살아 있는 그림이 될 수 있다. 이는 작가의 입장이겠지만 대부분의 작가들은 이런 이유 때문에 보다 극적인 효과를 거두기 위해 골몰하고 있다. 그래서 감상자 역시 작가의 극적인 효과를 주시하며, 생명력과 운동감 또는 동세를 느낀다면 그 역시 성공적인 작품의 감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작품의 기본적인 소재에 따라 다르겠지만 풍경화의 경우는 대부분 원경에서 시작하여 근경으로 시선이 머물기도 하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구도와 화면을 이루는 주제와 소제의 배치에 따라 다르겠지만, 결국 시선의 흐름 속에서 운동감이나 동세를 느낄 수 있다. 또한 인물화의 경우는 얼굴에 시선이 머물다가 서서히 몸통이나 다리 쪽으로 시선이 이동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어쨌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시선을 의식치 못하며 맹목적인 응시에 머물기도 하여 작품이 내포하는 극적인 효과나 감상에서 느껴오는 전율을 놓칠 때가 많다. 이는 작품이 얘기하는 이야기를 듣지 못하는 결과이기도 하여, 하루 빨리 작가와의 대화가 가능한 심미한을 터득할 필요가 있다.
그림이란 이차원의 평면위에 삼차원의 허상을 구현하는 예술이다. 또 그림이란 평면의 관념에서 보이는 형과 색 등의 조형요소가 감상자의 몰입과 집중 여부에 따라서 감상자가 작품 속에 빨려 들어가는 착각을 종종 느끼게 된다. 흔히 얘기하는 빠져든다는 표현은 이런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작품 속에 펼쳐진 허상의 공간에 얼마 만큼의 깊이로 빠져드는지 느껴보는 습관은 한편으로는 자기 집중이긴 하지만 작품 이해의 지름길이기도 하다.
비례와 형의 왜곡을 경험해 보라.
모든 형태는 황금비율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그 황금비율이라는 의미는 보다 효율적이며, 시각적으로 가장 아름답다는 의미이다. 비례란 가로에 비교되는 세로의 폭이 타당한지를 살펴 보는 감각으로 비례가 잘 맞아야 형태가 아름답게 표현된다. 따라서 작품 속에 구현되는 형태들이 알맞게 표현되었는지를 파악하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어떤 작가는 의도적으로 형태의 왜곡을 시도하기 때문에 감상자는 비례와 형태의 왜곡을 동시에 가늠해 보는 직관력도 필요하다.
특히 이차원의 평면에 구현되는 여러가지 작품의 구성 형태들은 인물화의 경우 비례가 맞지 않는 인물로 표현되었을 경우 어린아이가 할아버지의 모양을 취하기도 하고 신체적으로 부자연스러운 불구의 형태를 취할 수가 있다. 또 풍경화나 정물화의 경우에는 물체가 공중으로 튀어 올라가는 형태로 보일 수도 있으며, 공간 밑으로 사라지는 형태로 보일 수 있다. 따라서 사실주의에 입각한 구상작품은 형태와 명암들이 비례에 알맞는지를 따져 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요즘은 형태의 왜곡이 작가의 의도된 경우도 있어서 그 의도된 왜곡의 저의를 헤아릴 필요도 있다. 형태의 왜곡이 갖는 특유의 미적 요소도 있지만 이를 전혀 받아 들이지 않는 닫힌 감각의 소유자도 있다. 스스로의 미적 감각이 따라갈 수 없는 새로운 방향의 요소들일지라도 감상을 포기하거나 외면하는 우는 범하지 말아야 한다. 왜 작가는 왜곡의 표현을 노렸을까하는 의문을 가짐으로써 감상자의 시각은 그만큼 넓어질 수 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은 문제가 되지 않지만 모르는 새로운 문제는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그래야만 낯선 작품 속으로 쉽게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미술작품 속에 등장하는 조형의 요소와 원리는 다양하다. 그러나 그 많은 요소 중 단 한가지만 가지고도 작품화 할 수도 있다. 예술가는 자유로움에 능숙한 사람이라고 볼 수도 있으나 사실은 그렇치도 않다. 항상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야 하고 창조의 산고 속에서 몸부림쳐야 하는 고뇌와 갈등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회화의 기술적인 조형 요소나 원리에 대한 고민도 고민이지만 현실과 이상의 문제, 의도와 주관에 대한 고민, 발상과 표현과의 간극에서 느끼는 괴리 등 수 많은 고민 속에 휩싸여 있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작가들의 고민에 대한 감상자들의 자그마한 이해는 그들에게 힘을 줄 수 있으며, 미술품 감상의 새로운 흥미일 수 있다. |
첫댓글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