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야
신 동 선
오전부터 틀어둔 라디오에서는 시간마다 전국의 매서운 추위 소식을 전한다. 어느 지역은 폭설이 내리고, 어디에서는 눈길에 교통사고가 크게 났다고 한다. 보온에 신경 쓰고, 감기 조심하자는 멘트도 여러 번 나온다.
어제는 무릎이 이상하다 싶더니 새벽에는 종아리가 뭉치고 오금이 당기고 저리면서 아팠다. 낮에 한의원 침 치료를 받으러 갔다가 스르르 잠이 들었다. 오래전, 지금 내 나이쯤의 할머니께서도 종종 무릎이 붉게 부어올라 쑥뜸을 뜨던 장면이 꿈결인 듯 스쳐 지나간다.
나의 할머니는 스물다섯 젊은 나이에 홀로 되셨다. 부잣집 막내딸로 곱게만 자라 어려운 생활을 겪어 본 적이 없던 분이 결혼 몇 해 후 갑작스러운 여름 독감으로 불과 열흘 만에 다정했던 남편을 떠나보내고, 세 살 된 아들과 태중 아이를 품고 홀시어머니와 살아내셨다.
어린 시절, 우리 집은 왜 고모가 없어요? 물었던 기억이 있다. 조금 자라면서부터 할머니께서 재혼하지 않고 힘든 세월을 이겨 내셨기에 지금의 우리 집안이 존재할 수 있었다는 고마움이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와 깊이 새겨졌다. 오빠를 편애하셔도, 말년에 정신이 맑지 못하여도 할머니에 대한 존경심이 줄어들지 않았다.
그런저런 우여곡절의 세월이 흐르고 흘러 가까운 집안 어르신들은 모두 돌아가시거나 요양원에 계시고, 부모님도 돌아가셨다. 고향 마을에 가도 이제는 할머니나 친정어머니의 택호를 말하는 사람이 없다. 텅 빈 고향 집이 적막하다.
5년 전까지만 해도 수시로 전화를 주고받으며 그날그날의 안부로 수다를 나누던 친정어머니와 친척 할머니가 계셨다. 마무리 인사는 늘 ‘분수에 맞게 살아라, 아이들 건강하게 잘 돌보고, 아픈 곳 없으면 다 살아가게 된다.’ 말씀하시던 어른이 안 계시니 어딘가 허전하고, 무언가 보호막이 사라진 느낌이다.
다행히 여든을 목전에 둔 작은아버지께 가끔씩 안부 전화를 해서 위안을 얻지만, 아무래도 이야기가 단조롭고, 통화는 대부분 짧게 끝나게 된다.
1940년대에 농촌에서 유복자로 태어나 빈손으로 서울에서 자리 잡고 살아내려면 얼마나 힘겨웠을까? 그 어려운 시절을 맨몸으로 살아내신 분이 계셨기에 집안이 이 정도라도 유지되어 온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진심으로 고개 숙여 감사드리고 싶다. ‘작은아버지, 고맙습니다.’ 이런 마음을 전하면 ‘그때 그 시절에 고생 안 한 사람이 누가 있냐, 다 그렇게 살아낸 거지.’ 덤덤히 말씀하신다. 처연하다
작은아버지는 슬하에 아들 둘을 두셨는데 먹고 살기 고단한 시절에 살림살이 일으키는 데만 전념했고, 아이들에게는 친밀하기는커녕 잔정을 표현할 겨를도 없이 세월을 보내셨단다. 이젠 늙고 기운 없어 도움 되지도 못하니 미안하다고 하신다. 자식들에게 번듯하게 해준 것도 없는데 건강하지 못하여 짐이 될까 염려가 많으시다. 매우 규칙적으로 식사하고, 공원을 걸으며 자기 관리를 열심히 하시지만, 내 눈에는 별다른 사는 재미도 없고, 즐기는 게 무언지도 모르고 살아오셔서 여생을 즐길 줄도 모르는 것 같다. 가엾다
지난해 판문점을 견학할 기회가 있어서 작은아버지, 작은어머니를 모시고 다녀왔다. 짧은 하루의 여행이지만 단팥죽으로 저녁까지 먹고 즐겁게 마무리가 잘되었다. 좋아하시던 모습이 생각나서 이번에는 청와대와 고궁 나들이를 제안했더니 ‘다리 힘도 없고, 찬 바람에 어디 탈이 날까 걱정되어 나가고 싶지 않다.’ 하신다. 야간근무를 마치고 피곤하지만, 그래도 가능한 일정을 다시 찾아 ‘좋은 시간을 함께 만들어 보면 어떨까요?’ 몇 번을 연락드렸건만 기운 빠지게 끝내 거절이시다.
며칠 전에 작은아버지와 통화하다가 이래저래 안타깝다고 말씀드렸다. ‘솔직히 일흔 때는 괜찮더니 일흔다섯을 넘어서면서 폭삭 무너지듯 심리적으로 움츠러들고, 관절 건강이 급격하게 나빠지더라.’ 하신다. 작년에 서울역으로 배웅해 주실 때만 해도 지하철 환승에서 두리번거리다가 저만치 민첩하게 앞서가는 작은아버지의 뒤를 허둥지둥 따라가기 바빴는데……. 내 마음속에는 여전히 다부지고 꼿꼿한 모습의 야무진 젊은이 같은 작은아버지의 이미지가 자리 잡고 있는데……. 마음이 아프다.
세월은 쉬지 않는 강물 같고, 주변은 바뀌어 변하고 있는데 난 너무 상황을 모르고 둔감한가 보다. 단순하게 일방적인 내 마음만 생각하고 잠시 서운함을 품었던 것이 죄송하다.
얼마 전에는 미국에서 일하고 있는 큰딸이 전화했다. 4년 가까이 다니던 직장에서 이직하게 되어 이사 가야 한다는 큰딸의 말에 ‘다리품’을 팔아서 살집을 알아봐야 더 확실하지 않겠냐고 했다. 예전에 전세를 구하려면 전봇대나 대문에 벽보를 써 붙인 것을 찾아다녔던 기억이 있다. 거의 30년 전 경험을 뉴욕으로 이사 가려는 딸에게 ‘다리품’이 필요하다고 자꾸만 권했다. 미국은 가보지도 않은 사람이 인터넷도 잘 모르면서 구닥다리 옛날 기억으로 말하고 있다는 것을 전화를 끊고, 몇 번의 카톡이 오고 간 뒤에야 알았다. 검색하여 청하면, 그곳은 워낙 넓은 곳이라 회사에서 셔틀버스가 다니는 노선이며 무난한 주거지의 위치와 가격대까지 안내서로 일괄해 보내준다고 했다. 비행기로 세 시간은 날아가야 할 먼 곳으로 이사 가는데 ‘다리품’이 중요하다고 우기다니! 엉뚱한 소리를 하는 엄마가 얼마나 답답했을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안전한 거주지를 찾아내길 기원하는 엄마의 사랑이고, ‘기도하는 마음’이라는 것을 아이는 알 것이라 믿는다. 작은아버지의 녹음기 같은 레퍼토리는 위에서부터 차례대로 장성한 조카들의 안부를 묻고, 또 그 자녀들의 안부를 묻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이 또한 틀림없는 내리사랑의 표현인 줄 안다. 내 할머니의 조건 없는 내리사랑도 내가 기억하고 떠올리는 한 계속 전해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는 것처럼.
작은아버지께 안부 전화를 드려야겠다. 어쩌면 날이 풀릴 때쯤 좋아하시는 해산물을 준비해 직접 찾아뵙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집에 돌아와 다시 튼 라디오에서는 익숙한 캐럴이 따뜻하게 흘러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