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선형 상호인과율로서의 연기
조에너 메이시 지음
2. 제일 원인은 없다
선형적 인과율은 우리에게 사물들이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인과의 연결고리들을 제공한다.
D는 C가 원인이 되어 나타났고, C는 B에 의해서 생겨났으며, B는 A의 결과이다 등등으로. 그래서, 버터기름에서 생유로든, 당구대 위의 마지막 공의 상태에서 첫번째 공에 대한 타격으로든, 원인이 되는 작용을 소급해 갈 수 있다. 그러면 우유를 만든 것은 무엇인가?
당구 큐를 잡은 사람은 누구인가? 그리고 같은 질문이 암소와 당구 선수에 대해서도 물어질 수 있다.
선형적 인과의 연결고리는 제일 원인이나 무한한 소급을 요청한다. 어느 편이든 우리는 형이상학적 억설인 부동의 원동자(Unmoved Mover)나 아니면 현기증 나는 무한소급(regressus ad infinitum)으로 끝나게 된다.
양자는 모두 알고 있는 것(결과)으로 알지 못하고 있는 것(원인)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번즈(Bunge)가 지적했듯이, 거꾸로 알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다.13)
제일 원인이라는 관념은, 논란의 여지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논리적 요청으로서, 그리고 종교적 경향으로서 단일 방향적 인과관계 속에 내재해 있다. 자신들의 전통인 선형적 가정들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는 서양과 힌두교 배경을 갖는 많은 불교학자들은 선형적 가정들을 불교 교리 탓으로 돌려왔다.
무명(無明, avijja?이 연기지(緣起支)의, 즉 현 존재의 조건이 되는 요인들의 맨 앞에 위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들은 무명을 최초의 원인으로 취급해온 것이다.
이러한 학문적 동향은 불교학 분야의 몇몇 저명 인사들에 의해 이루어졌다.―무명(avijja?을 아직 개인화되지 않은 의식의 “최초의 활동(the first act)”이라고 소개한 서양불교연구의 창시자인 브라이언 호즈슨(Brian Hodgson)으로부터
그들의 팔리-영어 사전에서 무명(avijja?을 “모든 현 존재의 근본 원인”이라고 의미 규정한 리스 데이비스(T. W. Rhys Davids)와 윌리엄 스테드(William Stede)에 이르기까지 그러했다. 체르바스키조차도, 어떤 점에서는 불교 인과율 속에 있는 상호의존의 원리를 인정하지만, 무명(avijja?을 “인생 윤전(the Wheel of Life)의 최초의 근본 요소인 제1의 원리”로 보는 관습에 빠져 있다.14)
냐나틸로카(Nyanatiloka)는 연기(pat.icca samuppa?a)에 대한 “불합리한 생각”을 안타까워한다. 그는 특히 다음과 같이 해석하는 “서양의 불교학자와 저술가들을 볼 때” 실로 안타깝다고 이야기한다.
무명(avijja?을, 그것으로부터 의식과 신체적 삶이 전개되어 나오는, 원인 없는 최초의 원리로 (해석하는 학자들을 보면 안타깝다.)15) 붓다는 현 존재의
절대적인 최초의 기원은 헤아릴 수 없는 것이라고(Anamatagga-Samyutta), 그리고 그와 같은 사색은 모두가 어리석은 짓이 될 뿐이라고(An.guttara Nika?a, IV. 27), 그리고 실존에 무명과 갈애가 없었던 때를 결코 상상할 수 없을 것이라고(An.guttara Nika?a, X. 61) 거듭해서 분명히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해석들을 하다니.16)
이러한 오류는 서양인들에게만 한정되는 것도 아니고, 우리 시대에 한정되는 것도 아니다. 경전들(예를 들면 An.guttara Nika?a, IV. 27; V. 113, 116; X. 61)을 보면 붓다의 뜻에 어긋나는 논법으로 판단하는 사례가 초기불교 시대에도 흔히 있었다.
붓다고사(Buddhaghosa)는 보다 분명하게 인과적 제일 원인을 무명으로 돌리는 경향을 논박하고 있다. 그는 인과 계열(12支緣起)에서 무명이 출발점에 있는 것은 단지 회화적이며, 교육적인 방편일 뿐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런데 왜 무명이 여기에서 기원으로 설해지고 있는 것일까? 그러면 무명이 세계의 원인 없는 근본원인이란 말인가……? 무명은 원인이 없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무명의 원인은 다음과 같이 설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번뇌의 발생과 함께 무명의 발생이 있다.’(Majjhima Nika?a, I. 54) 그러나 회화적인 표현 방법에 속에서는 무명이 근본원인으로 처리될 수 있다.
그것은 어떤 방법인가? (생성을) 원으로 설명하면서 무명이 출발점 구실을 하도록 만들어졌을 때를 말한다.17)
단일 원인으로부터는, 그것이 단일한 것이든 다수의 것이든, 어떤 종류의 결과도 나오지 않는다. …… (그러나) 세존께서는 그것이 고상한 가르침을 펴는 데 적합할 때, 그리고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개성에 알맞을 때, 하나의 전형적인 원인과 결과를 채용하신다.18)
학자들에 의해서 제일 원인으로 취급될 때, 무명은 일반화된 원리나 최초의 상태가 된다. 대조적으로 올덴베르크는 초기불교의 경전들은 무명을 어떤 특정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못한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거기에서 무명은 사성제(四聖諦)를 알지 못하는 것, 괴로움의 발생과 소멸의 원인을 모르는 것으로 되어 있다.19)
‘무명’은, 원인 없는 제일 원리이기는커녕, 붓다가 가르쳤듯이, “인과적으로 조건 지워진다”.20)
실제로 경장과 율장 속에 최초의 그리고 원인에 기인하지 않는 출발점으로 제시된 그 어떤 실체나 본질 또는 조건은 없다.
붓다는 그 어떤 제일 원인이 실재한다고 가르치기를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제일 원인을 찾지 못하게 했다.
비구들이여, 그대들이 이와 같이 알고 있고, 보고 있다면, 사물의 과거의 끝을 찾거나[축어적으로는 “뒤로 돌아가다(run behind)”] …… 사물의 미래의 끝을 추구하겠는가?[축어적으로는 “뒤쫓아가다(run after)”]21)
법우들이여, (중생들의 삶의) 여정에서 출발점은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무명에 뒤덮이고, 욕망에 묶인 중생들이 끊임없이 생사를 거듭하면서 떠도는 여정의 최초의 출발점은 드러나지 않는다.22)
여기에서 “헤아릴 수 없는(incalculable)”이라고 번역한 술어는 아나마타(anamata)인데 그것은 “생각될 수 없는”의 의미이다. 출발점들을 생각할 수 없는 까닭은 그것들이 시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어서일 뿐만 아니라,
생각하는 마음이 인과적 발생의 일부이며, 인과적 발생으로부터 나타나고 있으며, 인과적 발생에 기여하고 있으며, 인과적 발생의 기원을 찾는 여정에서 벗어나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장은 확정되지 않는 문제들에 대한 붓다의 그 유명한 침묵(無記)이 연기(pat.icca samuppa?a)와 관련을 맺고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추상적인 문제들에 대한 사변은, 붓다가 밝혔듯이, 바른 사유의 길을 어지럽히는 공허한 것이 될 수 있으며, 불화의 근원이 될 수 있다
아마도 붓다는 거기에서 다른 위험―제일 원인을 가정하거나 추구하는 위험―을 감지했는지도 모른다.
영원의 문제들에 대한 갖가지 견해들은 왜 생기며, 세계의 근원과 존속 같은 주제들에 대한 논쟁은 왜 일어나는가에 대하여 질문을 받았을 때, 붓다는 인과적 요인들의 생성과 소멸에 대한 무기 갖가지 견해와 논쟁이 발생한다고 대답했다.
이는 이러한 형이상학적 논쟁이, 붓다가 보기에는, 제일 원인이 있을 것이라는, 그리고 확인될 수 있을 것이라는 가정―연기(pat.icca samuppa?a)와 연기가 강조하는 전적인 조건성에 의해 뿌리뽑힌 가정―이 조건이 되어 나타난다는 것을 시사한다.
모든 원인들이 밀접하게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은, 그 관계 속에서 단독으로 결정력을 가지고 나타나는 요인은 하나도 없다는 것은 초기 불경 속에서 많은 은유와 유비로 표현된다.
초목을 예로 들면, 초목을 자라게 하는 조건들을 나타낼 수 있는 적절한 선형적 인과의 고리는 없다. 씨앗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토양도 필요하고 습기도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사건들의 결합에서, 즉 관계로부터 불이 붙는다. 두 개의 막대기를 맞대어 문지르면 열이 나고, 불꽃이 생기지만, 그 두 막대기를 떼어놓으면, 마찰의 결과인 열은, 마찰이 그치면, 식게 된다. 건축된 집도 마찬가지다.
집에서 서까래들은, “모두가 지붕 꼭대기로 집중하여, 균등하게 지붕 꼭대기에 의지하고 있으면서”, 서로 의존하는 가운데 각기 다른 것을 버텨주며, 혼자 버티고 있을 수 있는 서까래는 하나도 없다.
붓다고사는, 어떤 하나의 인자의 탁월성을 반박하면서, 덩굴 식물의 비유를 들었다. 덩굴은 지면을 따라 뻗어가면서, 연기의 가르침과 마찬가지로, 어느 지점에나 (뿌리내려) 붙을 수 있다.
즉, 처음부터 말씀하시기도 하고, 중간에서 끝으로 올라가며 말씀하시기도 하고, 끝부터 말씀하시기도 하고, 중간에서 처음으로 내려가며 말씀하시기도 했다. ……
세존께서는 왜 (연기를) 이와 같이 가르치셨을까? 연기가 유익하기 때문이다. 네 가지 출발점 가운데 어느 곳에서 출발해도, 그것은 결국 바른 길(中道)을 통찰하게 될 뿐이다.23)
첫댓글 어느 카페에서 기독교인 듯한 분이 부처가[제일 원인은 없다이것은 알수가 없다라고..]했다고 깨달은 사람이 이것도 모른다며 부처를 믿지 못하겠다고 하더군요.[절대적인 최초의 기원은 헤아릴 수 없는 것이라고..] 본문에도 나오는군요. 이말을 이 기독교인 처럼 받아드려야 할까요^^
경전을 보면 석가모니부처님의 가족사항이 나와 있습니다 또는 친지 친척들이 등장하는 경우를 많이 보았을겁니다 무명은 자신으로부터 선대조상의 업식을 관찰하게 하기위한 방편이요 닦아가는 원인을 밝힌 것입니다 무명을 알고자 하는가 과거의 업식은 부모요 현재는나요 미래는 자식입니다 이렇게 업을 따라서 업의 업력을 따라 상응하여 일가친척 동무 친구 들로 형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알아야 남을 알고 부모를 알고 자식을 알게 되는 인연법 깊고 깊습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고 학문으로 헤아려 무시이래많은 시간 윤회하여 돌아다닌 흔적을 무엇을 근거로 윤회라고 근거를 제시할수 있으리까
근본무명, 불성, 법신, 본래성불, 공, 반야, 삼보디. 한마디로 번뇌와 열반, 속제와 진제, 중생과 부처는 상대적이면서 한뿌리입니다. 근본 제일원인이라는 말을 불교에서는 쓰지 않습니다. 절대적이라는 의미의 '하나'라는 것도 인정하지 않는 것처럼. 단지 하나와 여럿, 부분과 전체라는 것으로 구분 지을 뿐입니다. 오직 하나라는 개념 즉 절대적인 것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 붓다의 가르침이듯이 근본무명이라는 의미도 절대적인 것일 수 없습니다. 번뇌의 뿌리가 무명이라는 것이지 무명이 존재의 근원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존재의 근원은 공성이고 무아입니다.
무명이 존재의 근원이고 그 근원에는 공성과 무아가 있는 것이지요 근본 근원이 없이 공성과 무아가 성립이 될까요 그 다음에 불성법신 등등..... 한뿌리가 되는것이지요 이 속에 하나와 전체가 있어서 하나가 열이 되고 열은 다시 하나가 되는 법게가 있지요 번뇌의 뿌리도 무명이고 무명이 존재의 근원이기도 합니다 만일에 존재의 근원을 알고자 한다면 무명에서 밝음으로 밝아지면 무명은 사라지고 존재의 근원은 파악됩니다
글 잘 보았습니다 ㅎㅎㅎㅎ 역시 연기를 알아야 무명을 잘 알게 되리라 봅니다 항상 밝은 미소 보내며
제목이 주는 이미지와 같이 선형이라는 말은 단일방향적 인과 패러다임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 말속에서 사물의 인과를 측정 하는 실체와 동일성이라는 말이 떠 올려집니다. 그러나 불교의 연기는 선후관계로 보는 인과율이 아니라 상호적으로 의존하면서 공존하는 상호인과율 이기에 한 단일 윈인을 가정하는 선형은 거리가 있다고 생각되는군요. 부처의 제일 원인은 없다는 말을 그대로 이해하기 앞서
이말은 연기의 상호의존적 인과률을 설명하기 위한 (실체에서 관계로) 언어로 연기를 강조하고 있으며 제일원인은 있습니까 없습니까 물으면 이 대답으로는 '무기' 가 적당한 답이라고 생각되는군요. 제일 원인이라는 말 자체가 이미 실체를 상정하고 하는 언어로 '제일 원인은 없다'이 말을 하는 저의를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