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가을 가족여행지는 경북 영양군이다. 추석 연휴라 고속도로가 끼인 지역은 복잡해서 이동이 불편한데다 가까운 지역의 여행은 그동안 등한시 했다는 생각에 이번에는 경주에서는 결코 가깝지는 않지만 그래도 경북지역인 영양으로 행선지를 정한다. 이번에 막내 원중이도 경주로 내려오고 민희도 서울에서 추석 쇠러 경주로 내려와서 가족이 Reunion되어 모두들 즐거워하고 있다.
우리가 가는 경북 영양군은 靈山인 일원산의 정기를 받아 예로부터 충의열사와 문인들이 배출된 유서깊은 선비의 고장이며 천혜의 수려한 자연경관을 보유한 청정지역으로 유명한 지역이다. 영양의 문화재는 국보 제187호인 봉감모전5층석탑을 비롯하여, 보물, 천연기념물, 민속자료, 유-무형문화재 등을 많이 보유하고 있고, 특산물로는 고추 사과, 담배, 더덕, 천궁, 천마, 어수리와 곰취나물 등이 유명한데, 특히 영양고추는 산간고랭지 기후와 토양의 특성으로 매운 맛과 단맛이 잘 어우러져 전국에서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고 있다. 뭐? 순창고추가 최고라고? 천만에....그건 옛날 말씀이다. 영양에 와서 영양의 고추밭을 보면 이해가 된다. 완전히 청정지역에 특급수의 맑은 물이 흐르는 지역에서 재배되는 고추라....크! 벌써 입이 맵다.
경주에서 동해안 7번국도를 따라 올라가다 보면 유명한 화진포 해수욕장이 나온다. 우리는 해수욕장 때문에 여기에서 쉬어 가는 것이 아니고 화진휴게소가 원래 유명한 곳이어서 들른다. 해안이 명사십리라 시원하게 펼쳐져 있다. 서울과 포항에서 다시 경주로 합류한 둘째와 막내, 둘은 유별나게 친하다. 오죽하면 둘째는 막내의 장애때문에서 다니던 대학도 바꾸었다.
동해안 7번국도를 타고 영덕에 닿아 좌측 안동 방면으로 꺾어 들어 달리다 보면 낙동정맥이 지나가는 황장내 못 미처 우측으로 석보 방향으로 들어 다시 좌측 골짜기로 접어들면 나오는 삼의계곡. 물이 맑기로 유명해 들어가 본다. 계곡이 철이 지나 사람들이 없지만 물은 여전히 차기만하다.
삼의계곡에서, 집에서 준비해온 버섯쇠고기샤브샤브를 끓인다. 이번 여행에서 우리가 결정한 것은 음식에는 절대로 돈을 쓰지 않는다...이다. 그래서 음식은 우리가 손수 끓이기로 계획하고 왔다. 그 첫번째 음식이 샤브샤브이다. 국물이 시원하여 맛이 아주 좋았다.
삼의계곡에서 나와 북으로 달리면 영양군 석보면이 나온다. 석보에는 유명한 두들마을이 있다. 이곳에는 전통한옥체험관, 이문열문학관인 광산문학관, 정부인 안동장씨 예절관 등 많은 시설이 있는 전통마을이 있다.
전통마을인 두들마을 입구.......해바라기가 우리 가족을 반가이 맞는다. 그러고 보니 세째가 빠졌다. 추석 뒤 바로 모의고사라고 공부한다나? 가리늦게 공부에 미치니 참, 청개구리작전도 유분수다.
영양군 입암면에 있는(면 이름 그대로 주변에는 강이 흐르고 바위벽이 늘어서 있다) 국보 187호 봉감모전5층석탑. 모전탑으로는 그 우수성이 두드러진다는 평이 있다. 주변 경관이 탑과 잘 어우러져 아주 인상이 깊었다.
선바위관광지 내에 있는 조형탑. 선바위관광지 내에는 야생식물전시관, 분재관, 민물고기전시관, 영양고추전시관, 수석전시관 등 많은 볼거리의 시설들이 있었다. 선바위관광지는 영양의 유명한 관광지 선바위와 남이포가 있는 지역에 있다.
선바위관광지 내에 있는 분재수석야생화전시관에 들어와서 분재 구경을 하고 있다.
분재되어 자라고 있는 야생식물 속에 맺힌 물방울들이 이채롭다.
남이포와 선바위. 불룩 솟은 바위가 선바위이다. 이런 바위가 이 일대에 더러 있다.
남이포 강 건너에 있는 바위벽이다. 이 일대의 경관이 수려하다.
남이포. 선바위와 남이포는 같은 지역에 있어 이 지역 전체를 선바위관광지라 불리운다. 선바위, 남이포는 강변 경승지이다. 멀리 일월산에서 발원해 영양을 가로질러 안동으로 들어가는 반변천은 이 남이포에서 청계천과 만난다. 청계천은 보통 동천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서석지 앞을 지나 연당리에서 반변천을 만나 그대로 반변천이 된다. 이 두 물줄기가 만나는 곳이 바로 남이포이다. 그리고 남이포 절벽 앞에 촛대처럼 서 있는 바위가 선바위이다.
영양군 입암면 연당리에 있는 정원 속의 연못. 호남 소쇄원 등과 함께 조선 3대 정원이라 불리우는 곳으로 아름답다.
1640년경에 정영방(鄭榮邦:1577~1650)이 축조하였다고 한다. 정영방은 1605년에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나라가 어지러움을 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은둔생활을 하였으며, 병자호란 후에 넷째아들인 제(悌)를 데리고 이곳에 와서 학문연구에 몰두하였다. 먼저 서쪽 구릉 아래에 연못을 파서 서석지라 이름하고 양 옆에 정자를 세웠는데 오른쪽을 주일재, 왼쪽을 경정(敬亭)이라 불렀다. 서석지라는 명칭은 이 연못 속에 있는 암반(岩盤)인 서석군(瑞石群)에서 유래한다. 나도 이런 아름다운 정원을 지닌 집을 갖고 싶다.
서석지 근방에 있는 연당리석불좌상. 내가 보기에 균형미와 정교함은 떨어지지만 신라시대 것이라 가치가 있다고 한다.
영양 관광은 해가 져서 어두워지자 그만 중지하고 우리가 숙박하기로 정한 백암온천으로 날라왔다. 영양에서 백암온천에 오기 위해서는 낙동정맥이라는 큰 산줄기를 넘어야 한다. 아슬아슬한 절벽길을 어두운 밤에 달려 어렵사리 백암에 도착한다. 숙박할 장소는 백암스프링스호텔. 우리는 온천욕을 하고 방안에서 고기를 굽는다고 생 쇼를 벌인다. ㅋㅋㅋ
백암온천에서의 하루밤을 지낸 뒤 아침에 다시 낙동정맥 구주령을 넘어 영양으로 들어가려 한다. 영양 구경에 완전히 뿌리를 뽑으려고 한다. 백암온천이야 설명할 필요가 있겠는가? 모두가 다 익히 알고 있는데...........아마 한국 최대, 최고의 온천이 아닐까? 그래서 옛날부터 이 고장 이름이 온정이다. 온정(溫井)..........따뜻한 우물이라!
백암에서 영양으로 넘어가는 령인 구주령에서 본 풍광. 백암온천 뒤의 백암산은 등반로가 잘 닦여져 있지만 그 뒤는 선시골이라고 한국에서 아직 개척되지 않은 비경지대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안다.
구주령. 이런 길이 뚫리기 전에는 동해안에서 내륙으로 들어가는 길이 없었다. 사실 동해안 지방은 따로 행정지역을 편성해야할 지경이었다. 동해도.......라고. 동해안에서 내륙으로 넘어가려면 포항,경주로 나오든지, 아니면 저 위로 올라가 강릉에서 대관령으로 나가든지 이다. 그도 하기 싫으면 산을 넘어가야했겠지. 그러다 산에서 밤을 만나고 초가집에 혼자사는 처녀를 만나서 귀신이 되고................우리네 전설에는 이런 얘기가 수 없이 많지.
영양의 마스코트는 반딧불인 것같다. 등 뒤에 등불을 달고 있는 귀여운 반딧불.ㅋㅋㅋ 경주의 마스코트가 깨어진 기와장인 것으로 아는데 거기 비하면 산뜻하다. 반딧불을 내세운다는 것은 그만큼 생태계가 살아있다는 얘기겠지. 하긴 영양 수비에 들어가면 아마 한국에서는 가장 오지에 들어가는 것이 아닐까? 오늘 우리는 거기로 들어간다.
말로만 듣던 영양 수비의 수하계곡. 계곡의 암반에 다슬기가 새카맣게 붙어있다. 채취 금지이다. 그만큼 물이 깨끗하다는 것이겠지. 아마 한국에서 이보다 더 오지의 계곡이 있을까? 오기 조차 힘들다.
수하계곡의 맑은 물.
막내는 벌써 옷 벗고 텀벙이다. 물도 차지 않다. 돌이 많지만 그대로 둔다. 다쳐봐야 자연속에서의 play이다. 그대로 받아들이면 된다. 수하계곡은 여기서 부터 왕피천으로 바뀐다.
가족들의 음식 준비. 이번 여행은 돈이 들지 않았다. 승용차의 개스비 밖에.........모든 음식은 우리가 만들어 먹었다.
영양 주실마을에 있는 조지훈 문학관에 왔다. 주실마을은 경북 북동부 지역의 깊은 산골짝 영양군 일월면에 자리하고 있다. 백두대간이 한반도 등줄기로 내려오다가 태백산에서 소백산 줄기로 갈빗대처럼 서쪽으로 뻗어나가는 갈림목, 바로 그 남서쪽 첫 번째 골짜기가 영양이고, 그곳에 바로 주실마을이 있다. 물론 그곳은 첩첩산중이라 숨이 턱 막힐 만큼 좁으니, 풍요한 살림을 일굴 만한 넉넉한 토지라고는 꿈에서조차 찾을 수 없는 곳이다. 그런데 이 마을에서 한국사에 독보적인 자취를 남긴 인물들이 쏟아져 나왔으니, 놀랄 일이다. 지역마다 인물이 많이 나는 지역이 있다. 경주 같으면 내남 덕천마을 같이...............
이 마을은 조광조의 후손인 한양 조씨 집성촌으로 17세기 초반에 형성된 마을이다. 현재 60여 가구 200명 내외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 조그만 마을 단위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16명의 박사가 배출돼 '박사마을'이라고 불린다. 14명의 대학교수와 19명의 학교장이 배출된 자녀 교육의 명소로 꼽힌다. 한국에서 그런 마을이 비단 주실 마을뿐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궁벽한 산골 마을이 개화와 근대화의 선봉에 섰다는 점도 믿기 어려운데, 그러한 와중에 나타날 수 있는 반민족적 행적조차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은 주실마을만의 특징이다. 학자들은 마을의 지세와 풍수적인 해석, 입향 과정, 조덕순·조덕린 형제의 삶이 준 영향 등이 그 이유라고 들고 있다.
주실마을 속에 있는 호은종택. 이른바 조지훈 생가이다. 이 생가는 경북 기념물 제78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집은 청록파(靑鹿派) 시인의 한 사람이며, 대표적인 한국 현대시인이고 국문학자였던 조지훈(1920~1968) 선생이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그의 본관은 한양(漢陽)이고 본명은 동탁(東卓)이며 지훈은 호이다. 선생은 1939년 문장지(文章誌)에<고풍의상, 古風衣裳>이 추천되면서 문단에 나와 ≪청록집≫, ≪풀잎단장≫, ≪조지훈시선≫ 등을 남겼다. 그는 시인이자 국문학자로서 유명한 것은 물론 지조(志操)있고 풍류(風流)있는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집은 주실마을에 처음 들어온 입향조(入鄕祖) 조전(趙佺)의 둘째 아들 조정형(趙廷珩)이 조선 인조(仁祖) 때 지은 것이다. 이 집은 경상도 북부지방의 전형적인 양반가(兩班家)의 모습을 하고 있는 ‘ㅁ'자형집으로 정침(正寢)과 대문채로 나누어진다. 정침은 정면 7칸, 측면 7칸이며 정면의 사랑채는 정자 형식으로 되어 있고 서쪽에는 선생의 태실(胎室)이 있다. 대문채는 정면 5칸 측면 1칸으로 되어 있고 솟을대문이 있다. 6?25전쟁 당시 일부가 소실되었으나 1963년 복구되었다.
주실마을에는 이 외에도 옥천종택을 위시하여 많은 문화재들이 있지만 그만 생략하기로 한다. 우리의 여행은 테마가 마을 연구가 아니기 때문이다.
영양을 거쳐 남으로 남으로 내려와 진보에서 다시 남으로 꺾어 청송으로 들어온다.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더 들러보는 곳이 청송 주왕산 북편에 있는 달기폭포이다. 가뭄이 심해 수량이 적지만 폭포 주변의 바위벽들이 예사롭지가 않다. 하긴 이 근방에서 가장 유명한 폭포가 아니더냐?
폭포 주변에 있는 바위벽들. 어찌 이것 뿐이랴? 사진에는 늘 축소되어 찍히는 법이다.
달기폭포 밑에 있는 달기약수터. 입구부터 원탕, 중탕, 상탕이 차례로 있는데 원래 오리지날이 지금의 첫번째 약수터 원탕이다. 달기약수는 경주 사방의 신물 약수나 영천 황물탕의 쇳물약수와는 그 질이 다르다. 여러가지 금속물질인 미네랄이 섞여 그 맛이 독특하다. 하지만 원중이는 입에 넣자마자 바로 뱉어 버린다. 아! 그러고 보니 바로 앞에 원중이가 있네. 등에다 '어린이는 칭찬을 먹고 자란다' 는 글을 써 붙여 다니지만 원중이는 이렇게 고치는 것이 낫겠다. '원중이는 닥치는대로 먹고 자란다'
자! 우리의 가을 가족여행은 여기서 끝이다. 마지막으로 달기약수터의 약수물이나 한잔식 할까나? 단미! 한잔 떠 주구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