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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동방으로 뛰어들고자 했던 이, 잠들다"
이 말은 어느 날 현 대주교님이 공동묘지 어느 곳에 있을 당시의 묘비를
상상하며 떠올린 문구이다. 현재 제주 천주교 황사평 공원묘지에 있는
그분의 묘소에는 이러한 비문은 없지만, 그분이 바로 동방으로 뛰어들어
밝은 빛이 되신 하롤드 헨리(Harold Henry) 현 대주교님이다.
현 대주교님은 미국 미네소타 주 노스필드에서 1907년 7월 11일, 프로
테스탄트 신자인 아버지 프랭크 헨리와 어머니 미네바 쉐스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나 모라비아 교회의 일원이 되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잦은 전직으로 자주 이사를 다녀야 했던 그는
여러 종류의 다양한 종교에 접하게 되었으며, 6년 동안에 초등학교를
무려 일곱 차례나 옮겨 다녀야만 했다.
열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께서 가톨릭 신자인 여성과 재혼하기
까지 일 년여 정도를 친척 집에 얹혀 지내기도 하였다.이처럼 하롤드가
자주 옮겨 다니는 것을 본 이복 누이 이사벨이 그에게 가톨릭 재단인
성 스테파노 학교에 입할 할 것을 권유하였다.
그는 가톨릭 신자가 되지 않아도 좋다는 학교의 승인을 받고 그 학교에
입학했는데, 사실 그 때 그는 가톨릭의 사제란 사악한 힘을 가진 사람
으로서 그 힘으로 자신을 꼼짝 못하게 만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입학한 지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한 신부님으로부터 "성체 안에 계시는
주님"에 관한 강의를 듣고서 가톨릭교회란 성모 마리아만을 흠숭한다고
여겼던 종래 자신의 생각이 그릇되었음을 깨닫고, 가톨릭에 심취하게
되어 드디어 1922년 5월 12일 세례를 받았다.
그 무렵, <동방>이라는 잡지를 통해서 선교사의 삶에 깊은 감명을 받은
그는 중국 선교에 대한 강한 열망을 키우기 시작하여 1918년 설립된
성 골롬반 신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는데 영세한 지가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과 부모님의 결혼 문제로 약간의 어려움을 겪었고, 그곳 오마하에서
일 년을 지낸 후 실버크리크로 옮겨 학업을 마치고 1926년부터 1931년
까지 아일랜드의 성 세넌 대학에서 공부하였다.
그는 스스로 자신이 만일 아일랜드에 가지 않았더라면 성직자가 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여길 만큼 그곳에서의 생활을 소중하게 생각하였다.
성 세넌 대학에서 학업을 마친 후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10년간의
신학교 생활을 마치고 1932년 오마하의 성 골롬반 성당에서 주님의
백성인 목자인 사제로 서품을 받았다.
그리하여 그는 그토록 열망하던 중국 선교를 위한 머나먼 항해에 오르게
되었는데...... 하느님께서는 그를 위해 전혀 다른 곳에 자리를 마련하셨다.
중국 사회가 혼란하여 항해 중에 갑자기 중국 대신 한국 선교로 소임이
바뀌어 항해의 목적지는 중국이 아닌 더욱 낯선 동방의 나라 한국이
되었던 것이다.
1933년 일곱 명의 동료와 함께 한국에 입국한 후 대구에서 언어 수업을
받았다. 아일랜드의 신학교에서 달필로 유명했던 그로서도 한국어를
어디서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막막해 했으며, 더구나 일본 식민지
치하라 일본어까지 배워야 한다는 이중의 부담을 가졌다.
그러나 자신이 배운 바를 전파하고자 하는 열의에 가득찬 젊은 선교사
로서 '한국말 모릅니다"라고 말해야만 하는 고통을 통해서 아주 자연
스럽게 겸손을 익히게 되었고, 학교에서 배우지 못한 많은 부분을
자신의 첫 부임지인 노안 본당에서 신자들과 접촉하면서 터득하였다.
이방인들에게 이 언어 문제와 병행하는 것이 다름 아닌 음식문제이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이러한 언어나 음식에 따르는 문제는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었으니, 정말로 그가 도전해야 할 문제는 본당 신자들이
그를 낯선 이국인으로 바라보는 시각, 그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더 이상 이방인이어서는 안 된다고 판단하고 우리 한국인
들과 동고동락하며 완전히 하나가 되기 위하여, 즉 완전 적응을 위하여
우리의 고유한 문화와 관습을 이해하고자 각종 풍속에 참여하면서
많은 노력을 하였다.
그 후 나주로 부임하여 교세 확장과 더불어 새 성전을 건립하고,
일본의 식민지 정책에 의해 교육을 받지 못하는 학생들에게 배움의
터전을 마련해 주는 등 날로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오랫동안 현 대주교님을 감시해 오던 일본 경찰들의 압력은 더욱 거세
어져만 갔다. 1941년 6월부터는 아에 스물네 시간 내내 감시하더니,
진주만 사건이 터지자 휴가를 요청하여 목포로 내려가 있던 그를 연행
하여 단지 미국이라는 죄명으로 급기야 나주 감옥에 감금시켰다.
다시 광주 사제관으로 이송되어 여금되었다가 1942년 본국으로 강제
송환 당한 이후로는 미국 종군 신부로서 활약하여 동성 훈장을 수상
하였다. 이는 그분이 사제로서 군인 세게에 완전 적응했음을 보여
주는 단적인 증거라 할 수 있다.
전쟁이 끝나자 그는 골롬반 신학교의 강의를 맡았는데, 이 시기는
그 분의 생애 중 가장 평탄했던 시절로서 그분은 그다지 흡족치
못하게 여겼다. 그것은 당신 마음속 깊이 한국이라는 나라가 크게
자리했기 때문이었다.
1947년, 주교 대리로 임명된 후 한국에 다시 온 그는 이제 일본군의
감시가 사라진 대신 새롭게 부딪쳐 오는 문제가 있었으니,
이는 공산주의에 의한 국토의 양분과 사회 혼란이었다.
미국 델라웨어 주에 있는 웰밍톤 다리는 현 대주교에게 있어서
행운의 다리이다. 동란 이후 광주교구의 재건을 위한 모금을 위해
순회하시다가 그 다리에서 대주교가 된다는 수식을 전한 다리이기
때문이다.
6.25동란 후, 재건 사업과 에비자 교육 의식주 해결 등의 문제로 동분
서주 여유가 없는 가운데서도 그는 다시금 병원과 진료소의 필요를
절감하고 수도회의 도움을 받아 의료사업을 시작하였다.
또한 나환자의 자립을 위해 - 나환자들이 존경의 뜻으로 헨리를
한글로 '현'이라 명명한 - 현애원, 호혜원, 그리고 영암 등 세 군데에
자활촌을 마련하였고, 소록도에 미감아를 위한 육아원을 설립하였다.
이처럼 육체는 병원에서 그리고 영혼은 교회에서 돌본다지만, 정신을
위해서는 아직 무엇인가 부족하다고 느낀 그는 한국인들의 교육열에
힘입어 교육 사업을 시작하였다.
그 가운데 대건신하교9지금의 광주가톨릭대학0의 설립만큼 그의
시간과 정열을 소모케 한 것은 없었다. 신학교 설립을 위한 자금
마련에 애쓰다가 심장병이 더욱 악화되기도 했다.
까리따스 수녀회, 골롬반 수녀회, 과달루페 선교회, 글라라 관상
수녀회, 사랑의 씨튼 수녀회, 전주의 성 요한 의료 봉사 수도회,
예수 고난희 등 수도회의 진출과 회 복지 기관의 도움으로 본당과
공소 설립, 병원과 진료소, 중 고등학교, 신학교, 피정쎈타, 유치원
등을 건립하고, 평신도 사도직 활동으로 레지오 마리애를 도입하는
등 노약자나 신체 장애자, 그리고 고아나 가난한 이들을 위해
이처럼 혼신의 힘을 쏟을 수 있었던 것을 그는 당시 공산당에
의해 처참히 죽어간 몬시뇰 브렌난을 비롯한 많은 신앙인들이
피흘림에 대한 대가라고 여겼다.
미국에 다녀오는 길에 일본에서 레지오 주회를 하는 것을 보고
감격하고서 바로 꼰칠리움에 연락하여 1953년 5월 31일 목포
에서 레지오를 창단하였다.
당시 광주교구장이신 현 하롤드 대주교의 지도로 목포시 산정동
성당에 '치명자의 모후' 쁘레시디움과 '평화의 모후' 쁘레시디움
그리고 경동 성당에 '죄인의 으틱' 쁘레시디움이 설립되었다.
이어서 광주, 청주, 춘천, 원주, 전주, 서울, 제주 지역의
각 성당에 확산되어 각 교구에 확장되었다.
초창기 각 쁘레시디움은 아일랜드 더블린의 꼰칠리움 직속 쁘레
시디움으로서 꼰칠리움의 지시를 직접 받았고, 사업보고를 하였다.
1955년 10월 9일에는 한국 초초의 꾸리아가 창단되었는데 산정동
성당의 3개 쁘레시디움인 치명자의 모후 쁘레시디움, 평화의 모후
쁘레시디움, 동신자의 모후 쁘레시디움과 경동 성당의 죄인의 의탁
쁘레시디움 및 함평 전교의 모후 쁘레시디움등 5개의 쁘레시디움
으로 '목표 매괴의 모후' 꾸리아가 탄생되었다.
1956년 8월 7일에는 광주시북동 성당 산하 8개 쁘레시디움으로
'중재자이신 마리아' 꾸리아(CURIA MEDIATRICS)가 설립되었
으며 1956년 12월 6일에는 '중재이신 마리아' 꼬미씨움
(COMITIUMMEDIATRICS)으로 승격되었다.
1957년 3월 3일 한국 최초의 소년 꾸리아인 '목포 천지의 모후
꾸리아'가 창설되었다. 이어서 1957년 6월 10일에는
'광주 바다의 별' 꾸리아가 설립되었다.
레지오 사도직의 홍보가 잘 되어감으로 인하여 교구분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모든 성당마다 앞을 다투어 쁘레시디움 설립이
가속화 되었다.
사제와 수도자의 손과 발의 역할을 하며 정성을 다하여 봉사하고
자신들의 성화에 소홀함이 없이 모범적인 신심생활을 하였다.
특히 광주대교구는 한국 본산지답게 레지오 사도직에 참여도가
높았으며 교본 규칙에 따라 전국을 지도하며 착실히 성장해 나감
으로써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광주대교구에서 회갑을 지낸 현 대주교는 장성한 딸을 부모가
사위에게 내주듯이 한공렬 주교에게 광주대교구를 인계하신 후
1971년 제주교구장을 부임하였다.
죽음이 임박해 오면서 그가 겪은 커다란 변화는 점차 신비를 이해
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인간의 의지로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다고 여겼으나, 이 신비의 영역에 접하면서부터는 자신이
하느님의 도구로서 어떤 역할을 부여받았음을 하느님께
감사드리게 되었다.
현 대주교는 1976년 3월 1일 월요일 아침,
향년 66세로 미사 준비기도 중에 선종하셨다.
장례식에서 김수환 추기경은 그분의 삶을 이렇게 표현했다.
위의 조사는 바로 그분의 삶을 요약해 설명해 준 것이라 할 수 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