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흥왕이궁(興王離宮)과 접연화앙산정(蝶然花仰山亭)
흥왕이궁지(興王離宮址) / 서해안의 섬들 / 마니산 참성단 / 제국대장공주
강화 마니산 뒤쪽 흥왕(興王)리의 흥왕초등학교가 있던 곳에서 장화리 쪽으로 조금 가다 보면 ‘흥왕이궁(興王離宮)’이라는 돌에 새겨 세워놓은 조그만 표지석이 보인다. 거기에서 골짜기를 따라 조금 거슬러 올라가면 우거진 수풀 속에 거대한 석축의 흔적이 보이고 주춧돌 흔적도 보이는데 이곳이 이궁(離宮)이 있던 자리로, 지금은 길도 없는 수풀 속에 버려지듯 빛바랜 작은 안내판이 을씨년스럽게 서 있다. 쓸쓸하기 짝이 없는, 잊혀져 가는 우리 역사의 한 편린(片鱗)이다.
이궁(離宮)이라면 떨어진 궁, 즉 별궁(別宮)쯤으로 보면 된다.
고려 말, 몽골의 병란을 피하여 강화로 오신 고려 제23대 고종(高宗)은 강화 읍내에 궁궐을 짓고 또 이곳에 별궁을 지으셨던 모양인데 기록으로 보면 고종 49년 기미(己未) 2월(1242년)에 창건하였다고 한다.
접연화앙산정(蝶然花仰山亭)은 정자(亭子)인데 기록에 의하면 이궁(離宮)에 기거하던 고려 궁인(宮人)의 이름이 접연화(蝶然花)였고 그 궁인에 의하여 세워진 정자가 앙산정(仰山亭)이라고 한다.
정자(亭子) 이름에 나타나 있듯이 이곳은 깎아지른 마니산이 바로 뒤에 병풍처럼 둘러서 있고 고개를 젖혀 쳐다보면 참성단(塹星壇)이 아스라이 보인다. 또 고개를 돌리면 드넓은 서해가 펼쳐지는데 신도(信島), 시도(矢島), 모도(茅島) 등 작은 섬들이 그림처럼 떠 있는 것이 한눈에 들어온다. 현재, 이 앞의 갯벌이 철새도래지로 보호되고 있는 것을 보면 당시에도 철새들이 날아들었을 것으로 생각되니 이 앙산정(仰山亭)의 풍광이 수려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인근 골짜기 안쪽에는 흥왕사(興王寺)라는 절이 있었는데 충렬왕(忠烈王) 2년(AD 1276)에 왕비인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 일명 莊穆王后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의 딸)와 이 절에 왔다가 아름다운 금탑이 있는 것을 보고 궁궐로 옮겨갔는데 흥왕사의 스님들이 돌려줄 것을 간청하였으나 공주는 끝내 거절하였다는 일화도 있다. 재미있는 것은 내가 이 부근의 촌로(村老)들로부터 직접 들은 이야기로, 흥왕사는 나중 화재로 소실되는데 그 원인이 절에 빈대가 너무 많아 스님들이 일부러 불을 놓아 태웠다고 하는데 사실 여부를 떠나 재미있는 이야기이다.
3. 우리나라 최초의 사찰(寺刹) 전등사(傳燈寺)
전등사 대웅전 / 대웅전 추녀 끝 나부상(裸婦像:裸木女) / 범종(중국 宋나라 제작)
강화 마니산록의 자랑인 전등사(傳燈寺)는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사찰 중 가장 오래된 사찰이라고 하며 고구려 소수림왕 11년(AD 381)에 창건된 우리나라 최초의 사찰(절)이다.
창건 당시의 이름은 진종사(眞宗寺)였는데 충렬왕 제2 비인 정화궁주(貞花宮主)가 옥(玉) 등잔(燈盞)을 시주한 후 전등사(傳燈寺)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고 하며, 전등사가 정화궁주의 원찰(願刹)이었다고 한다.
전등사는 오랜 역사와 더불어 또 한 가지 지금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는 것 중의 하나가 대웅전 추녀 끝의 나목녀(裸木女:벌거벗은 여인이 쪼그려 앉은 모양)이다. 여기에 관해서 몇 가지 이야기가 전해오는데 대웅전 앞 안내판에 설명도 되어있다.
<당시의 시대 상황>
고려역사를 잠시 살펴보면 태조(太祖) 왕건(王建)에 의하여 고려가 개국 된 것이 AD 918년이고, 일곱 차례에 걸친 몽골의 침입으로 제23대 고종 때(AD 1232) 수도를 강화로 옮기며 항전하였으나 마침내 제24대 원종 때(AD 1270년) 원나라에 항서(降書)를 쓴다.
그 이후 몽골의 내정간섭이 극심하여 고려의 왕은 정식 왕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수모를 겪다가 34대 공양왕(恭讓王AD 1392년)에 이르러 이성계에 의하여 공양왕이 폐위(廢位)되면서 고려 시대는 결국 막을 내리게 된다. 원종(元宗/24대) 이후 공양왕(恭讓王/34대)까지의 약 120년 동안에 열 명의 왕이 재위했는데 이 시기는 몽골의 간섭으로 국가기관도 대폭 축소・개편되었고 나라의 위상도 그 앞의 고려와는 사뭇 다른, 몽골(元)의 부마국(夫馬國)으로 격하되었는데 몽골인의 피가 섞이지 않으면 왕위에 오를 수도 없었다고 하니 우리의 서글픈 역사가 아닐 수 없다. 실례로 25대 충렬왕과 제국대장공주(몽골 쿠빌라이의 딸-처녀이름: 보르지긴 쿠틀룩 켈미쉬)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26대 충선왕(忠宣王)이다.
이때는 고려의 왕족들은 몽골 여자와 결혼하는 것이 통례였으며, 또 몽골에서 시녀(侍女)들도 따라 왔다고 하니 조금 전 이야기지만 접연화(蝶然花)도 어쩌면 몽골 여인이었을지도 모른다.
고려 32대 우왕(禑王) 때 이르러 중국 변방 족인 몽골족이 세운 원(元)나라가 쇠하고 한족(漢族)이 세운 명(明)나라가 들어서면서 우리나라와 묘한 국경문제가 불거졌는데 고려의 왕권회복을 내걸고 반원(反元) 기치를 높이 내걸었던 우왕(禑王)은 총사령관 최영 장군을 앞장세워 요동 정벌의 야망을 불태웠으나 이성계(李成桂)의 위화도(威化島) 회군(回軍)으로 정권(政權)은 이성계로 넘어간다.
이성계는 우왕을 폐위시키고 아들 창왕(昌王/9세)을 세웠는데 1년 후 우왕은 강릉에서, 창왕은 강화도에서 살해된다. 곧이어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恭讓王)이 왕위에 오르지만, 1392년 이성계에게 왕위를 이양(移讓)하고 1394년 삼척부(三陟府)에서 살해되어 마침내 고려는 사라지게 된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이성계가 공양왕을 폐위시키고 조선왕조(朝鮮王朝)를 세운 것이 민족의 정통성을 바로잡는 일이라는 명분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늙은 고종의 총애를 한 몸에 받은 젊은 궁녀 접연화는 나긋나긋하고 날렵한 몸매를 아름답고 화려한 비단옷으로 감싸고 우뚝 솟은 앙산정(仰山亭)에 올라 정자 기둥에 기대어 마니산을 올려다보다가는 앞에 펼쳐진 드넓은 서해와 섬들에 눈을 돌리곤 했을 것이다. 젊고 아름다운 궁녀가 궁중생활의 외로움을 달래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면서 아울러 역사의 무상함이 가슴에 와 닿는다.
♤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
충렬왕은 세자(世子)시절이던 25세 때 신종(申宗)의 증손녀 왕씨(훗날 정화궁주<貞和宮主>)와 결혼하여 아들까지 있었으나 39세 되던 해 몽골(元)에 사신으로 갔다가 원(元) 세조(世祖) 쿠빌라이 칸의 딸인 16세의 쿠틀룩 켈미쉬(훗날 제국대장공주:장목왕후<莊穆王后>)와 강제로 결혼하게 된다.
이듬해 원종(元宗)이 죽자 왕위에 오르는데 정실부인이던 정화궁주를 밀어내고 제국대장공주가 제1 비(장목황후), 정화궁주가 제2 비가 되고 나중에 낳은 제국대장공주의 아들이 왕위(忠宣王)에 오르게 된다.
♤ 화냥년(還鄕女)과 호로(胡虜)새끼
당시의 슬픈 이야기로 화냥년과 호로새끼가 있다. 국어사전을 보면 ‘화냥’은 ‘자기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와 몰래 정을 통하는 여자’를 말하고 그 화냥을 속되게 부르는 말이 ‘화냥년’이라 되었다고 한다.
호로새끼는 규범적 표기는 ‘호래자식’, 또는 ‘후레자식’인데 ‘배운데 없이 막되게 자라 교양이나 버릇이 없는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로 되어있으며, 바로 화냥년이 낳은 자식들을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고려의 역사를 되짚어보면, 제23대 고종 때(AD 1232)때 강화로 피신하여 몽골(元나라)에 항전했으나 제24대 원종 때(AD 1270년) 항서(降書)를 쓰게 되고 34대 공양왕(恭讓王AD 1392년)에 이르러 이성계에 의하여 공양왕이 폐위(廢位)되면서 고려시대는 결국 그 막을 내리게 된다. 그러니 이성계가 정권을 잡기까지 120여 년간, 고려는 열 명의 왕이 대를 이어 가지만 원나라의 사위 나라라는 부마(駙馬)국으로 격하되고 해마다 엄청난 공물을 바치는 수모를 당한다. 또, 충렬(忠烈)왕, 충선(忠善)왕, 충숙(忠肅)왕.... 모든 고려의 왕들은 원(元)나라에 충성한다는 의미로 충성 충(忠) 자를 붙여야만 했다.
고려는 원나라에 바친 공물(貢物)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특히 가슴 아픈 일은 처녀는 물론 부녀자를 포함하여 엄청난 수의 공녀(貢女)를 바쳐야 했다. 고려에서 원나라에 포로(捕虜)로 끌려간 사람들이 총 60만이나 되었다는데 그중에서 여성이 50만이었다고 한다.
원나라에 공녀로 끌려간 여인들은 하녀, 첩살이, 궁중의 시녀 등으로 그야말로 온갖 수모를 겪게 되는데 그중에는 궁중의 시녀로 들어가 황제의 아들을 낳아 황후의 자리에까지 오른 기황후(奇皇后)도 있다.
공녀로 간 고려 여인들은 고향으로 돌아오기 위하여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도 기회를 잡아 목숨을 걸고 탈출하여 고향으로 돌아오는데 그들이 환향녀(還鄕女)-이른바 ‘고향으로 돌아온 여인’이다.
그러나 고려에서는 원나라에 공녀로 갔다가 돌아온 여인들은 사실 여부를 가리지도 않고 몽땅 싸잡아 오랑캐들의 성(性) 노리개 노릇을 하다가 왔다고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녀들은 결혼도 할 수 없었고 부녀자의 몸으로 끌려갔다가 갖은 고생 끝에 고향으로 돌아오지만, 시가(媤家)에서 며느리로 인정하지 않고 내쫓는 것은 물론 친정에서도 받아주지 않았다고 한다.
오죽했으면 인조(仁祖)는 고향으로 돌아오는 환향녀들은 홍제원 냇물(현 연신내)에서 목욕하면 몸이 깨끗한 여인으로 간주하고 만일 그런 여인들을 보고 정조(貞操) 운운하면 엄벌(嚴罰)을 내리겠다고 공포(公布)까지 하였다니 웃지 못할 슬픈 우리의 역사(歷史)이다.
시녀로 황제의 시중을 들던 기(奇)황후가 원(元)의 황후가 된 이후 고려의 공녀제도가 없어졌다니 기황후의 업적이라 하겠지만 고려에서는 기황후의 오빠들이 엄청난 권력을 휘두르다 결국 공민왕에 이르러 제거되는데 그 연유로 기황후는 우리나라에서는 별로 인정을 받지 못한다고 한다.
그러나 중국 역사에서 고려 여인 기(奇)황후는 위대한 황후(皇后) 중 한 명으로 꼽힌다고 한다.
그때 몽골로 끌려갔다가 고향으로 돌아온 여인들이 환향녀(還鄕女), 바로 ‘화냥년’의 어원(語源)이다.
그 환향녀들이 낳은 자식들은 호로(胡虜)새끼- 즉 ‘되(胡)놈들한테 포로로 잡혀갔던 사람의 자식’이라는 의미인데 변하여 ‘호래자식, 후레자식’이 되었고,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다니 슬픈 우리의 역사이다.
♤전등사 나목녀(裸木女)
우리나라 목조(木造) 전통가옥을 보면 건물의 네 귀퉁이 기둥 위 지붕 끝부분(서까래)을 추녀라고 하는데 전등사 대웅전 추녀를 보면 벌거벗은 여인이 쪼그려 앉아 두 손으로 추녀를 받치고 있는 목상(木像)이 있어 신기한데 항상 관광객들의 눈길을 끈다.
이 전등사 추녀를 받치고 있는 괴상한 나무조각상을 나목녀(裸木女)라 하는데 재미있는 설화가 전한다.
추녀 아래 안내문이 있는 기록을 약술(略述)하면 다음과 같다.
① 전등사 대웅전을 고쳐 지을 때 대목수의 돈을 가지고 도망간 주막집 여자를 원망하여 대목수는 벌거벗은 몸으로 추녀를 받치고 있도록 하여 영원한 벌을 받게 했다.
② 불교 설화에서 산에 있던 원숭이들이 몰려와 불사(佛事)를 도왔다는 데서 벌거벗은 여인이 아니고 원숭이를 새겼다.
③ 충렬왕의 비인 정화궁주가 몽골 황제의 딸인 제국대장공주에 밀려 제2 비(妃)로 책봉되자 그 원한으로 제국대장공주의 모습을 벌거벗겨 추녀를 받치고 있는 모습으로 새기게 했다.
이 우리나라 최초의 절 전등사는 정화궁주의 원찰(願刹)이었다고 한다.
고려궁궐지(高麗宮闕址)
여랑(旅浪) 백충기(白忠基)
그날
몽골의 거센 흙바람 염하(鹽河)하늘 뒤덮고/ 쏟아지는 화살은/ 살곶이(矢串) 언덕 메웠으리
휘몰아치던 거친 바람이사/ 세월이 잠재웠는가/ 님의 한숨 배어나는 이끼 푸른 돌 담장 밑
햇빛 따슨 양지 녘에 앉아/ 가슴 속을 스치는/ 역사(歷史)의 바람소리를 듣는다.
님은
구중궁궐(九重宮闕) 육조(六曹) 넓은 마당 저기 버려두시고
강화나루 찬바람 가슴으로 받으시며/ 손돌목 휘몰아치는 여울/ 눈물로 건느셨으리
전장(戰場)의 아우성 쓰린 가슴 붙안고/ 강화 북산(北山) 가파른 언덕배기/ 지친 몸 누이시며
시름을 달래시던 님의 그 모습이/ 이토록 가슴 저미는 아픔일 줄은...
황톳빛 스산한 바람이/ 뜰 안을 가로지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