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 병영성 마천목 비자나무
강진 병영에 전라병영성을 쌓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무장 마천목은 공민왕 7년(1358)에 장흥의 속현 회령에서 태어났다. 15살 때에 온 가족이 어머니의 고향인 곡성으로 이거 했다.
마천목은 틈만 나면 마을 앞 두계천에서 고기를 잡아 부모를 모셨다. 어느 날 강가에서 푸른 빛이 나는 둥근 돌을 주웠다. 그날 밤, 도깨비 무리가 찾아왔다. ‘돌이 우리 대장이니 돌려달라’ 요청했고, 마천목은 ‘두계천에 어살을 만들어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니까 섬진강 상류 두계천의 물고기를 모아 잡는 도깨비살은 이때의 마천목 효심 이야기이다.
고려 말 우왕 7년, 23살의 마천목은 산원이라는 정8품 무관이 되었다. 이는 당시 나주 출신으로 전라도의 왜구를 물리친 정지 장군의 도움과 발탁으로 여겨진다.
이어 조선 태조 7년(1398)의 제1차 왕자의 난에 마천목은 정안군(태종)을 도와 대장군이 되었다. 이듬해 제2차 왕자의 난에는 선봉으로 공을 세워 회령군에 책봉되었다.
이렇듯 조선 초기 정권의 든든한 버팀목의 마천목이 전라병영성을 쌓은 것은 태종 17년(1417)이다. 당시 지방 군제는 관찰사가 겸임하는 본영과 병마절도사가 관장하는 병영이 있었다. 따라서 전라 본영은 전주에 있고 병영은 처음 광주에 있었으나 이때 강진으로 옮겼다. 잦은 왜구의 노략질을 막기 위함이었다.
이때의 전라병영성은 전라도와 제주도를 포함한 53주 6진을 총괄하는 육군의 총 지휘부였고 최대의 군사주둔지였다. 하지만 1894년 갑오농민전쟁에 성이 함락되어 건물이 불에 탔고, 1895년 갑오경장에 영을 폐한 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성곽마저 허물어지고 터만 남았다.
이 병영성을 쌓을 때다. 마천목이 첩첩 수인산을 둘러보며 성터를 찾다 깜박 졸았을 때이다. 꿈결에 백발노인이 활을 주며 시위를 당기라 했다. 그 활 나는 소리에 잠이 깬 마천목이 꿈에 화살이 날아간 곳을 찾으니 진짜 화살이 있었다. 이곳이 동헌 자리구나 하고 그곳에 머물렀는데 밤새 눈이 수북이 내렸다. 그런데 눈이 쌓이지 않은 곳이 있었다. 마천목은 그 눈이 없는 곳을 따라 성벽을 쌓았다. 병영성을 눈의 성인 설성(雪城)이라고도 하는 연유이다.
마천목은 세종 2년(1420) 정헌대부 병조판서가 되어 북방 6진의 설치를 처음으로 주장하였고 1423년 9월에는 판우군도총제부사가 되었다. 1424년 3월 홀어머니를 모시러 곡성에 왔으나 곧 상을 치러야 했다. 1428년 복직하여 장흥부원군에 올랐으나 1431년 2월 1일 세상을 떴다, 이에 세종은 3일간 조회를 열지 않고 조문케 하였으며 영의정으로 추증하였다.
마천목 장군이 터를 닦은 강진 병영성 마을에 6백여 살 비자나무가 있다. 이 비자나무는 집짓기, 배의 건조 등에 쓰이는 고급목재이다. 또 동의보감 등 옛 의서는 ‘열매는 다섯 가지 치질을 치료하고 세 가지 충을 없애며 음식을 잘 소화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무튼, 나라의 변고에 밤이면 소리 내어 울었다는 여기 병영성 삼인리 비자나무는 나이로 보면 마천목 장군이 성을 쌓을 무렵 씨가 떨어져 자랐으리라. 아니면 적의 움직임을 잘 살피기 위해 당시 성 안팎의 큰 나무들을 모두 베어낼 때 살아남았을 수도 있다.
굽은 소나무 선산 지킨다는 말처럼 이 밑동 굽은 삼인리 비자나무 역시 어린나무일 때는 볼품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굽은 소나무 낙락장송 되어 저녁노을 안으면 한 폭 그림의 아름다움이니, 못남과 잘남은 다름이 아닌 같음이다. 이 비자나무 역시 볼품없는 어린나무였기에, 또 그 때문에 살아남아서 병영성 이야기를 오늘에 잇는 것이다. 한 치 앞도 모르며 경거망동은 결코 안 된다는 깨우침이다. 못 생기고 못난들 어쩌랴? 늘푸른 비자나무에게 허리를 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