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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찾아 떠날 때...
무엇을 가지고 가야 할까요?
더도 말고 자기 자신‘전부’를 가져가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외관상으로만 떠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의 환상과 추상적 모형만을 가지고 갑니다.
그들은 길을 떠나기에 앞서 자기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려 합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만들어진 인물, 채색되고 책에서 모방한 인물로 꾸밉니다.
그리고는 자기 자신의 그림자요 로보트인 이 가공의 인물을, 하느님을 찾아가라고 떠나보냅니다.
그들은 한 번도 그들의 전 존재로써 실지 체험에 뛰어들지 않습니다.
떠나야 할 때는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나귀에 실고
자기 몸, 정신, 영혼을 생긴 그대로 함께 가지고 떠나야 하며
위대함과 약함, 죄로 얼룩진 과거와 원대한 희망들.
가장 천박하고 격렬한 경향들... 이 모든 것을 지고 떠나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모두가 ‘불’속을 지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영혼과 육신이 함께 하느님을 인식할 수 있는 인간적 존재가 되기 위하여,
이 모든 것은 결국에는 하나로 합쳐져야 합니다.
- <정관의 경로> 中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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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총
서울 당산동 산상수훈팀 FB
이 안셀모 (기대)
+ 찬미 예수님!
생각으로 편한 마음을 갖자. 육신으로 일을 편하게 하자. 그러면 모든 것이 순리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순탄치 않은 생각과 행동, 아무리 찾아봐도 돌파구가 나오지 않는다.
5년 전에 나의 일상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 육신의 삶이 아닌 영적인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주님의 은총이 어디 쯤 와 있는지 의구심이 들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나는 정신적으로 은총이 들어와 있음을 느꼈다.
찜통 더위에도 기도문을 암송하니, 온몸의 시원함이 밀려왔다.
추위에도 묵주기도를 암송하니, 따뜻한 온기가 나의 전신을 감싼다.
피곤할 때 성경필사를 하니, 새로운 의욕이 솟구쳤다.
이 얼마나 은총을 받고 있는가... 그대가 있어 삶이 행복합니다.
주님! 저에게 크나큰 은총을 주셨는데, 저는 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아멘...!
한적한 곳으로 가신 예수님
안산 원곡동 세르브스 FB
권 토마 (순)
+ 찬미예수님
세례자요한의 죽음을 들은 예수님은 한적한 곳으로 가셨습니다.
주님은 늘 한적한 곳에 가시어서 기도를 드렸습니다.
배를 타고 가셨지만 그분이 절실히 필요로 한 사람들은 길을 돌아서 주님을 따라갔지요. 당신을 따라온 사람들을 보시고‘그들을 어떻게 먹일까’하는 생각으로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을 행하십니다. 주님은‘오병이어 (吳餠二魚)’의 기적을 그 모인 사람들과 함께 이루셨습니다. 나눔의 기적을 말입니다. 사람들은 어디를 나설 때에 각기 먹을 것을 준비해 다닙니다. 그들은 그 많이 사람들이 주님의 말씀을 듣고 먹을 것을 나누었다는 것입니다.
가끔씩 철야기도를 드립니다.
미사참례하고, 미사 주례신부님으로 부터 안수를 받고, 말씀봉사자의 말씀과 기도를 하기 전에 휴식시간을 갖습니다. 그 시간에 봉사자들이 준비한 간단한 음식을 먹습니다. 그 시간으로 인해 모인 사람들은 늦은 밤의 피곤을 잊곤합니다. 모두 다들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하곤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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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32주일
2011. 11. 6
마태오 25, 1 ~ 13
♠ 복음 연구
* 1~3절 : 슬기로운 자들은 말씀을 듣기는 해도 그에 따라 행동하지는 않는 자들이다. 일부는 기름을 가져왔지만 일부는 빈 그릇만을 가져왔다. 여기서 기름은 생활 속에서 실천되고 있는 복음을 나타낸다.
* 4~6절 : 슬기로는 다섯 처녀는 선행을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기름이 없으면 선행을 할 수가 없다. 미련한자는 "주님, 주님" 하고 부르며 입술로는 고백을 하지만 이러한 고백에 따라 생활하지 않는 것과 같다. 예기치 않았을 때 그분이 오신다.
* 7~10절 : 미련한 처녀들이 "주님, 주님" 하고 외치면서 들여보내 달라고 애원하듯 많은 사람들이 "그날" 똑같이 외칠 것이다. 여기서는 "그 날에는 많은 사람이 나를 보고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 때에 나는 분명히 그들에게 '악한 일을 일삼는 자들아, 나에게서 물러가라.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고 말할 것이다"(마태7, 22-23)
* 11~13절 : 미련한 처녀들은 아무리 주님께 간청하여도 누구인지 모른다고 외면합니다. 심판자는 자기들의 생활양식 속에서 그를 인정한 자들만을 인정할 것이다. 그 밖의 사람들은 심판자에게 속하는 자들이 아니다. 그는 그들을 모른다. 성서가 이해하고 있는 바로는, 누구를 안다는 것은 그에게 "예"라고 말하고 그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신랑을 맞을 준비를 하려면 미리 대비하여 준비하라는 경고의 메시지다.
♠ 복음 요약 : 모든 그리스인들은 사람들을 기다리게 할 수 있는 신랑이 누구인지, 그리고 누가 미련한 처녀이며 누가 슬기로운 처녀인지, 혼인 잔치가 무엇을 상징하며, 특히 닫혀 진 문이 나타내는 공포가 무엇인지를 (마태22,11-13)알고 있다. 예수께서 등잔 속의 기름이나 혼인 예복 또는 바위 위에 지은 집에 대해 말씀하실 때 의도하시는 바는 똑같은 진리다. 그것은 행동으로 나타나는 신앙생활 마다 심판관의 마음에 들 것이라는 것이다. 마태오는 다시 한 번 깨어 있으라고 요구하면서 이 비유와 이 부분 전체를 끝맺고 있다. 청지기로 임명된 종이나 한밤중에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큰 소리에 잠이 깬 처녀들의 경우에서와 같이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어느 때 신랑이 오실지 모르는 그 때를 위하여 미리 대비하여 기름을 준비하는 신앙인의 자세를 말하고 있다.
♠ 대화 방향 : ① 복음에서 어리석은 사람과 현명한 사람의 대조를 볼 수 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어떠한 일을 현명하고 슬기롭게 대처한 체험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② 또한 신앙과 행위가 일치를 이루도록 어떤 노력의 자세를 가져야 할까요?
♠ 참고 문헌 : ▪ 신약성서 영적독서를 위한 마태오 복음 (성요셉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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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33주일 (평신도 주일)
2011. 11. 13
마태오 25, 1 ~ 13
♠ 복음 연구
* 14~23절 : 주인은 각자의 능력에 따라 탈렌트를 나누어 준다. 작은 일에 성실하며 하느님께 받은 탈렌트를 충분히 활용하여 열매를 맺은 종은 주인에게 칭찬을 받는다.
* 24~30절 : 한 탈렌트를 받은 사람은 더 많은 탤런트를 받은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며 의욕상실에 빠질 수 있다. 최선을 다하지 않아 열매를 맺지 않고 탤런트를 썩힌 종은 주인에게 게으르고 악하다는 소리를 듣게 된다.
비발디가 세계 최고의 명품 바이올린 스트라디바리우스로 연주를 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콘서트홀은 대만원을 이루었다. 이윽고 비발디의 연주가 시작되자 청중들은 숨을 죽였다. 아름다운 바이올린 선율에 청중들의 찬사가 쏟아졌다. “역시 악기가 좋으니까 아름다운 소리가 나는구나. 소름이 끼칠 정도로 아름답구나!” 비발디는 청중들의 말을 들었다. 다른 곳에서도 연주할 때 청중들은 똑같이 반응했다. 비발디는 연주를 멈췄다. 그러고는 바이올린을 쳐들어 바닥에 꽝 내리쳤다. 바이올린이 산산조각 났다. 청중들은 그의 행동에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때 사회자가 앞으로 나서서 말했다. “여러분 놀라지 마십시오, 저건 스트라디바리우스가 아닙니다. 싸구려 바이올린입니다. 비발디 선생이 저 바이올린을 부순 것은 참된 음악이란 악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여러분에게 보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사회자의 말이 끝나자, 비로소 청중들의 우뢰와 같은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아무리 좋은 바이올린인 스트라디바리우스라도 바이올린은 연주할 수 없다. 연주는 음악가가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스포트라이트 역시 음악가의 것이다. 악기는 주연이 아니라 조연이다. 탈렌트는 악기에 비유할 수 있다.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의 마음이 중요하듯이 탤런트를 가지고 활용하며 열매를 맺는 것은 사람에게 달려 있다.
♠ 복음 요약 : 공부를 하든, 일을 하든, 고생을 하든, 고통스러워하든, 휴식을 취하든 그 모든 것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기에 하나하나의 행위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거룩한 지향을 두어야 한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바오로 사도의 권고를 살아가게 된다. ‘말이든 행동이든 무엇이나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면서,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콜로사이 3,17) 주님께서 주신 탤런트를 사용하여 주님께 영광을 돌리며 사는 삶이란 바로 주님께 인격적 투신을 하고, 신뢰와 의탁 속에서 주님을 따라가면 무상으로 주어지는 선물이 있다. 바로 세상이 줄 수 없는 내적 평화와 안정이다.
♠ 대화 방향 : ① 나에게 주어진 탤런트가 무엇인가?
② 탤런트를 사용하여 주님께 영광을 드릴 때, 어떤 내적 평화와 기쁨을 얻었는지를 서로 나누어 보자.
♠ 참고 문헌 : ▪ 이야기 속에 담긴 긍정의 한 줄 (양태석 저)
▪ 세상 한복판에서 그분과 함께 (송봉모 신부 저)
▪ 내 이름을 부르시는 그분 (송봉모 신부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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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왕 대축일 (성서주간)
2011. 11. 20
마태오 25, 31 ~ 46
♠ 복음 연구
* 31~34절 : 인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세상종말에 당신의 영광, 즉 권능을 업고 천사들을 거느리고 와서 영광스러운 권좌에 앉아 심판을 집행하실 것이다. 모든 민족이 전 인류의 임금이신 그분 앞에 소집되고, 그 분은 그들을 목자가 양떼와 염소를 가르듯 의로운 이들을 오른쪽으로, 악한 이들을 왼쪽으로 갈라놓으실 것이다. 심판석에 앉으신 인자께서는 오른쪽에 있는 의인들에게 당신 아버지의 복을 받은 이라 부르며 세상 창조 때부터 마련한 왕국을 상속받으라고 축복하신다. 그들은 하느님 아버지의 총애를 받아 이미 그 분의 왕권을 체험하고 세상 종말에는 이 왕권의 혜택을 완전히 누리게 된다. 이 왕권은 하느님이 세상창조이래 의인들을 위해 준비하신 복이다.
* 35~40절 : 예수님이 의인들을 축복하신 이유는 그들이 여섯 가지 역경을 겪고 있는 당신에게 자비를 베풀었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이 역경은 인간이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로 하는 것이 없어서 겪는 시련이다. 그들은 그분이 목말랐을 때 마실 물을 드리고, 그분이 나그네였을 때 따뜻이 맞아드리고, 그분이 헐벗었을 때 입을 것을 드리고, 그분이 병들었을 때 돌보아 드리고, 그분이 감옥에 갇혔을 때 찾아가 뵈었다. 의인들은 이처럼 제사보다 자비를 원하시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자비를 베풀었기 때문에 그분의 자비를 받는 것이다. 의인들은 이렇게 자비로운 활동을 했다고 칭찬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글자 그대로 알아듣고 놀라워하며 언제 그분을 보고 도와드렸는지 질문했다. 그들은 자기들이 사명을 이행한 구체적인 상황을 기억하지 못했던 것이다. 예수님은 그들이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을 당신에게 해준 것이라고 대답하셨다. 이 말은 자비를 받아야 하는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 것 같다. 그분은 비신자들과 원수들까지 사랑하라고 가르치셨기 때문에 도움이 필요한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는 이들을 축복하신다고 여겨야 한다. 예수님은 당신을 어려운 처지에 있는 모든 사람과 동일시하고 보상해주신다. 그분은 하느님의 모습을 닮았다.
* 41~46절 : 예수님은 왼쪽으로 분류된 악한 이들에게는 당신에게 아무런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고 단죄하셨다. 그분은 그들에게 썩 물러가 악마와 그 부하들을 위해 준비된 영원한 불 속으로 꺼지라고 이르셨다. 자비롭지 않은 사람들은 영원한 불 속으로 떨어지는 심판을 받는다. 그들이 언제 예수께 자비를 베풀지 않고 시중을 들지 않았는지 질문하자, 그분은 가장 작은 이들 중 하나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 곧 당신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라고 대답하셨다. 이어서 그분은 그들을 영원한 벌로 단죄한 반면,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으로 포상함으로써 그들을 악한 이들에게서 영원히 갈라놓으셨다.
♠ 복음 요약 : 재림하시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 나라의 주권을 행사하시며 심판자로 나타나실 것이다. 신앙의 가치 가운데 가장 큰 것은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인간에 대한 사랑이다. 최후 심판의 기준은 버림받고 어려움에 취한 이웃을 돌보는 사랑행위의 크기이다. 믿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소외되고 천한 사람들과의 유대와 연대성을 드러내시며 그들과 당신을 동일시 하신다. 겉으로는 손상되어 보여도 모든 사람이 본래 갖고 있는 인간 품위에 대한 재인식이다. 인간에 대한 사랑이 곧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이다. 이웃 안에서 그리스도를 보고 그를 받아들이는 것이 신앙에서 으뜸가는 행위이다.
♠ 대화 방향 : ① 나는 어떤 사람에게 얼마나 자주 자비를 베풀었는지 생각해봅시다.
② 가난한 사람, 소외된 사람들 같은 작은 이들을 만날 때, 그리스도를 뵙는 것처럼 그들을 진심으로 대하는지 생각해 봅시다.
♠ 참고 문헌 : ▪ 말씀의 등불 (가톨릭신문사)
▪ 말씀의 두레박 (생활성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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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 제1주일
2011. 11. 27
마르코 13, 33 ~ 37
♠ 복음 연구
* 33절 : ‘그때가 언제 올지’, 즉 종말과 재림의 때가 언제인지 아무도 모르지만 틀림없이 오기 때문에 항상 긴장하고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신앙인은 주인을 기다리는 문지기와 같은 마음으로 종말을 준비하면서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 34절 : 예수님께서 교회 공동체에 대해서 문지기와 같은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고 당부하시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얼마 뒤에는 이 세상을 떠나서 하느님께로 가시지만 또 언젠가는 틀림없이 다시 오실 것이다. 그러니 교회 공동체의 책임자들과 구성원들은 각자 맡은 책임을 성실하게 수행하면서 예수님을 기다려야 한다.
* 35~36절 : 유대인들은 원래 밤을 삼등분했고 로마인들은 밤을 사등분했는데 예수님 시대에는 로마인들의 방식도 통용되었다. 여기서 저녁, 한 밤중, 닭이 울 때, 이른 아침을 모두 나열한 것은 예수님의 재림 시기의 불확실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밤에 잠도 자지 말고 깨어 있어야 한다는 명령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재림이 갑자기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에 항상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뜻을 강하게 강조하는 비유 말씀이다.
깨어 있는 것은 늘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뜻하고, 잠자는 것은 자만하고 방심하면서 불성실하게 생활하는 것을 뜻한다. 주인이 돌아와서 종들이 잠자는 것을 본다는 것은 불성실한 신앙인은 심판의 대상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 37절 : 13장의 예언을 이스라엘 멸망에 대한 예언으로만 생각한다면 이 예언은 지금의 우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예언이 된다. 물론 사도들은 이스라엘 멸망 예언으로 알아들었고, 지금의 학자들 중에도 그렇게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우리는 종말과 예수님의 재림이 아직도 실현되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지금 내가 죽게 된다면 나에게는 지금이 종말이라는 것이다. 인류 전체의 종말이 언젠가 오기는 오겠지만 한 사람 한 사람 각 개인의 종말은 또 그것대로 개인에게 찾아갈 것이다. 종말의 시기가 언제일지 알 수 없는 것처럼 자신이 언제 죽을지 모르는 것이 인간의 처지이다.
종말은 먼 훗날의 이야기가 아니라, 언제나, 오늘, 지금의 이야기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내일도 아니고, 내년도 아니고, 지금 깨어서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깨어서 기다린다는 것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기다리기만 한다는 뜻이 아니다.
오늘, 지금, 이 순간,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면서 마지막 순간이 언제가 되든지, 어떻게 되든지 당황하지 않고, 후회하지 않도록 오늘 하루를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
♠ 복음 요약 :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진노의 심판을 받도록 정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차지하도록 정하셨다. (1테살 5.6~9) 우리가 깨어서 예수님을 기다리는 것은 벌을 받지 않기 위해서, 즉 심판받는 것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서이다. 혼나지 않으려고 억지로 깨어서 기다리는 것과 사랑하는 이가 보고 싶어서 깨어서 기다리는 것은 아주 다른 것이다.
♠ 대화 방향 : ① 우리는 문지기처럼 늘 깨어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② 언제 올지 모를 각 개인의 종말을 생각하며, 앞으로 하루하루를 어떻게 보내야 할지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져 봅시다.
♠ 참고 문헌 : ▪ 성경 해설 (송영진 모세 신부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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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B, 지금‘창설자 정신’으로 되돌아갑시다.
안산 원곡동 세르브스 FB
권 토마 (순)
+ 찬미예수님!
제가 지금 드리는 것은, 지금 현실적으로 문제가 많거나 제가 지적을 하기 위해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정체성이 염려가 되어서 그러는 것입니다. 지금 40여년의 역사를 가진 FB는 그 연륜에 맞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나이가 들면 성장 하듯이 신앙도 성장해야 하고 공동체도 변화되어야 할 것입니다.
첫째, ‘장기적인 계획’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안정적인 시스템프로그램도 없으면서 장기적인 계획마저 없다면 이는 불안한 요소가 될 것입니다. 이는 각 팀 내에서 신입회원이 얼마나 차지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여름수련회와 겨울묵상회의 프로그램을 다듬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이를 위한 전제조건이 내부강사를 발굴하고 육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부강사를 육성하는 일은 우리 봉사자 안에서 성서를 연구하고 묵상나눔 등, 교제발굴, 후진양성 등을 할 수 있는 기반이 될 것입니다.
둘째, 우리 주위에 많은 ‘성지’가 있습니다. 그리고 ‘피정의 집’이 있습니다. 이들과 연계하는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할 것입니다. 예를 들면 해미와 미리내는 김대건 신부님과 관련이 있는 성지입니다. 성지를 보고 십자가의 길을 순례하고 돌아오는 단순한 성지프로그램이 아니라, 김대건 신부님이 걸었던 그 길을 같이 묵상하면서 걸어 본다든지, 아니면 김대건 신부님이 남기신 편지글을 통해서 묵상해본다든지 하는 특별한 프로그램을 개발 보급하는 일입니다.
셋째, ‘코이노니아 나눔’입니다. 전주에서는 주기적으로 시설단체를 방문하는 일을 하는 것 같습니다. 이를 보편화시켜서 전국적으로 어떤 특정 시설단체와 연계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실천해 나가자는 것입니다. 지난 여름 쌍치공소에서 한 ‘하계연수회’는 전반적으로는 큰 무리가 없었는 듯 합니다. 그러나 FB가 시작한지 물경 40여년이 되어서 신부님이 걸어오신 길과 FB의 발자취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 것은 그나마 다행한 일이라고 여길 수도 있지만, 그동안 우리들이 이를 위해서 노력한 것이 별로 없다는 의미로 들릴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FB발자취와 창립신부님을 기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를 실천하기 위한 우리 공동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서로 논의하고 실천해 나가는 일이 더 소중하지 않을까요? '이태석 신부님'과 이를 보도한 '구수환 KBS PD'에 대한 전주 교구장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우리들은 이를 위한 증거자가 되어야 합니다. 최규업 신부님이 걸어가신 예수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우리들이 열심히 살아가고, 이를 이웃과 함께 나누려는 열정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잘 알고 계시듯 우리들은 가난을 즐거이 하고, 가난을 몸소 실천해보여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들에게는 고통은 반드시 수반되는 일입니다. 고통이 따르지 않는 신앙은 단지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고통을 맛보지 않는 사람들은 그 고통이 무엇인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신앙은 바로 즐거움이나 행복만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들의 신앙은 바로 절망으로 이끌어질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여기서 긴 글을 드리는 것은 제가 즐거움을 함께 누리자는 것이 아닙니다. 고통을 통한 주님의 실천적인 삶을 함께 나눔으로써 주님의 구원을 우리는 몸소 느껴보자는 의미입니다.
‘~에도 불구하고’ 하는 신앙관, 역경을 이겨나가는 우리의 신앙만이 우리를 아나윔 정신으로 우리를 가난하고 나약한 자들과 함께 살아갈 수가 있을 것입니다. 육체적인 노동이 필요로 하는 시점입니다. 최규업 신부님은 다른 사람들이 아주 힘들다고 보는 수백년 동안 시달려온 남미를 택하시어서 그 어려운 일을 사서 하시는지요...
아프리카에서 수행하고 있는 어느 수도자가 우물곁에 있는 살 곳을 열심히 찾고 있었지요.
그러나 그를 따라다니는 이가 바로 천사였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에 그는 그의 천사에게 물었지요. “왜 저를 쫓아다니십니까?” “당신이 한 일을 주님께 보고하기 위해서이죠... 그래야만 당신의 수고에 주님이 보상할 것이 아닙니까...” 라고 말하자, 그 수도자는 우물에서 가장 먼 곳으로 가서 거처를 정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주님이 가르치신 대로 잘 살아가기 위해서 희생이 필요로 하다는 의미입니다. 아마도 우리도 아나윔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고통이 수반될 것입니다. 고통을 원치 않으면 우리에게 아나윔이 갖고 있는 FB는 결국 우리 밖에 있어서 우리 안으로 들어오지 못할 것입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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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B 재정 회계 보고 >
* 매월 FB본부로 보내주시는 의연금은 본당별로 보내지 말고, 각 팀별로 회계 정산하시어, 금액이 크든 적든 매월매월 꾸준히 보내주셔야 합니다...
✟ 2011년 9월 1일 ~ 30일 수입 지출 내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