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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이 거의 없는 原文 세개를 발췌하여-만들어 봅니다,-유랑아제,
경북 안동은 ‘선비의 고장’으로 통한다.
하지만 이번엔 떡 이야기 좀 해보자. 1920년대부터 우는 아이 달래고, 고집불통 시어머니도 살살 녹였다는 못난이 찰떡 이야기다.
안동‘못난이’찰떡. 1920년대, 지금은 고인이 된 김노미 할머니가 만들었다. 식구들이 맛있다고 하니, 생계에 보탬이 되겠다 싶어 할머니가 떡을 거리로 들고 나왔다. 결과는 ‘대박’이었다.
며칠만에, 하루에 찹쌀 한 가마씩 떡을 만들어야 했으니 말이다. 안흥동 철둑길에 있던 떡집은 자연스레 벙어리찰떡집이 됐다. 할머니는 아들의 장애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이 가슴 아팠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불러주는 대로 불리는 것’이 사는 모양새인 것을.
24년 만에 부활한 안동 ‘명물
40년 전(1967년), 처음 할머니를 도와 떡집에서 일했다. “떡 잘 팔렸다카이. 일제시대 때는 어찌 소문 듣고 왔는지, 일본 관리가 쌀밥도 못 해먹게 했는데 찹쌀로 떡을 해 먹는 것이 말이 되냐며 떡 만들 찹쌀을 다 뺏어 갔다카대. 할머니는 떡도 못했먹냐며 많이 싸웠다 안카요.”
먹을 것이 귀했던 시절, 큼지막한 찰떡 한 개는 서민들에게 밥 한 그릇과 같았다. “이 떡 안 묵으면 죽나”고 투덜대던 사람들도 결국 줄을 서가며 떡을 사갔단다.
장터에 나무 사러 왔다가 그 돈을 떡 사먹는 데 몽땅 쓰고 마누라에게 혼난 사내의 이야기도 돌았다. 새색시가 벙어리 찰떡을 사가면 시어머니, 시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떡의 명성이 자자했다.
그러다가 남편이 사업에 실패하면서 집과 가게를 잃게 되었다. “떡 팔아 모은 돈 불도저 사업한다고 다 날린기라. 기양 떡집만 하자고 그래 말렸다카이.” 이때부터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벙어리찰떡이 서서히 잊혀지게 된다. 그리고 24년이 흘렀다. 떡에 대한 생각은 간절했지만, “벙어리찰떡의 마지막 기억이 안 좋아, 누구 하나 다시 떡집을 하자는 사람이 없었다.”
앞장 선 사람은 아들 배재한(42)씨였다. 어느날 갑자기 떡이 좋아지더란다. 마침 비슷한 상호의 가게가 여기저기 소개되는 것을 보고 “우리 외증조할머니랑 어무이가 만들었던 떡인데”라는 생각 때문에 마음이 더욱 급해졌다.
어머니도 “요즘 먹을 게 많은데 누가 떡 먹겠노, 그때만큼 장사도 안 될기라 카이”하시며 조심스러웠다. 그래도 추억을 간직한 사람들이 있어 힘을 얻었다. 안동 시내 돌아다니며 “벙어리찰떡 아시오?”하면, “잘 알지, 철둑길 밑에 있던, 그 못생긴 찰떡 아이가”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작년에는 간신히 상표권도 되찾았다. “다시 떡 만들게 되니 기양 좋았다. 무신 이유가 있겠노.” 선대에 이뤄놓은 가업을 당신이 다 날려 버린 것 같아 늘 찜찜했는데…. 천 할머니는 그저 아들에게 고맙고, 믿고 따라 준 며느리가 고맙고, 24년 동안 변하지 않은 자신의 감각이 고맙다.
찹쌀이 물기를 먹어야 떡살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다음 물 먹은 찹쌀을 원통 시루에 넣고 2시간 정도 푹 찐다. 찐 찹쌀에 소금을 살살 뿌려가며 간을 맞춘다. 소금간을 맞추는 것이 맛의 포인트다. 간이 제대로 잘 배야 맛이 심심하지 않다. 물론 이 일은 천 할머니의 몫이다. 소금간이 밴 찹쌀을 떡판에 펼쳐 놓고 떡메질을 한다.
천 할머니는 “아들이 있으니 든든하지” 하면서도 아들의 메질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가끔 직접 떡메를 든다. 찹쌀 한 가마 분량을 떡메질 하는데 두세 시간은 족히 걸린다. 얻어맞으면 맞을 수록 찰진 떡살이 되는기라. 인생도 그런기라. 맞을 수 로 질겨지는기라카이.” 그 다음 평평하게 펴 칼로 자르면 떡살이 완성된다
맷돌로 갈고, 떡메질 하고, 100% 수작업 고물은 떡의 ‘생명’이다.
특히 껍질을 깐 팥으로 만든 거피 고물이 벙어리찰떡의 별미다. 거피 고물 만드는 방법은 또 이렇다. 팥을 맷돌로 간다. 맷돌로 갈아야 팥이 균등한 크기로 쪼개진다. “어떤 정밀한 기계도 따라올 수 없는 맷돌의 힘”이다. 그리고 20~30분 동안 손으로 치대 껍질을 벗긴다. 조리로 불순물을 걸러 내고 불을 조절해 익히는데, 이때도 소금과 설탕으로 간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붉은팥, 콩, 깨 등을 고물로 쓰기도 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떡은 감칠맛이 나면서도 짭짤한 뒷맛이 있어 물리지 않는다. 수십 년 전 먹었던 사람들이 물어물어 찾아와 “맞다, 그 맛이네”하는 소리 듣는 것이 할머니에게 가장 큰 보람이다. “우리 어무이 팥 삶고 떡 만드는 것 하나는 대한민국에서 최고입니더”라는 아들의 칭찬은 기분 좋은 덤이다.
천 할머니와 아들 배재한 씨, 그리고 며느리 권복이 씨(39)가 함께 가게를 운영한다. 아들이 떡메질을 할 때면 고부가 옆에서 조심스레 떡살을 모은다. 그리고 나란히 앉아 떡을 자르고 고물을 묻힌다.
천 할머니가 만든 떡은 크고 모양이 투박한, 그야말로 옛날식 떡이요,
며느리의 떡은 날렵하고 예쁘다고 사람들이 우스갯소리로 이야기한다. 힘들고 어렵게 다시 살린 가게, 크지도 화려하지도 않은 공간이지만 세 가족이 웃으며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을 보면 배재한 씨의 가슴도 벅차다. ‘이게 사는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
떡 한 봉지 사는 사람에게 “망할 놈아, 그거 먹고 배부르냐?”며 떡 하나 더 던져 주시던 ‘향기 나는 외할머니의 욕’을 닮고 싶다. 힘들게 하루를 나는 품팔이꾼에게 거저 떡을 나눠 주시던 외할머니의 넉넉한 인심을 닮고 싶다. 그렇게 살고 싶다. 허기진 객에게 ‘툭’하고 떡 하나 건네는 따뜻한 떡집으로 기억되고 싶다.
원문 출처 :이원이야기 원문보기▶ 글쓴이 : 이원
아래주소-버버리찰떡 만화
cafe.daum.net/bkn27/4Sl7/45...
*원문을 좀더 재미있게 하기위해 "안동 사투리" 로 바꿈을 해량 바랍니다^^
간고등어로 유명한 안동, 2004년 ‘찰떡 붐’이 일어난다. 벙어리, 버버리 찰떡집이 그 주인공이다. 지역민들은 부활한 추억의 찰떡을 반겼다. 떡은 온라인을 통해 삽시간에 전국으로 번져나갔다. 호사다마랄까, 금곡동 금곡빌딩 1층 벙어리 찰떡집의 배재한 사장과 안동경찰서 네거리 버버리 찰떡집 신형서 사장은 동향인이면서 ‘찰떡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고 송사에 휘말린다.
솔직히 외지인들은 ‘일란성 쌍둥이’ 같은 두 찰떡 앞에서 난감해 할 수밖에 없었다. 외형상 두 떡 스타일은 너무 비슷하다. 조리법의 특징을 분석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그보다는 두 브랜드의 태동 배경을 알아보는게 더 중요할 것 같다. 두 집의 위상을 감안해 벙어리, 버버리 찰떡을 편의상 ‘안동찰떡’으로 표현했다.
안동찰떡의 원류를 거슬러 올라가면 벙어리 찰떡과 만나게 된다. 이떡은 1978년 타계한 김노미 할머니로부터 비롯된다. 1894년생인 할머니는 피멍든 가족사로 인해 한 많은 삶을 살다갔다. 할머니의 둘째아들 봉필씨는 농아였다. 너무 가난해 김 할머니는 함지박을 이고 거리로 나섰다. 1920년 일제 때 안동의 최고 번화가 사무뜰(현재 조흥은행 안동지점 앞) 근처를 돌아다녔다. 손님들은 김할머니의 둘째아들이 벙어리인 줄 알고 그 찰떡을 ‘벙어리 찰떡’‘ 버벌네 찰떡’ 이라고 불렀다.
이와 관련, 벙어리 찰떡 측은 “벙어리 아들 때문에 생겨난 이름” 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버버리 찰떡 측은 “먹으면 벙어리가 될 정도로 차지고 맛있는 떡”이라고 달리 해석한다. 세끼 다 챙길 수 없던 배고팠던 시절, 어른 손바닥만한 안동 찰떡 한 개만 먹어도 배가 불렀다. 한 끼 요깃거리였다. 김 할머니는 떡장사는 잘됐지만 둘째아들을 팔아 장사하는 것 같아 속이 상했다. 가끔 손님들이 노골적으로 “벙어리 찰떡을 달라”고 하면 버럭 화를 내며 떡을 팔지 않아 속 모르는 단골로부터 ‘욕쟁이 할매’로 놀림을 받기도 했다. 먹고 사는 게 중요 했으니 아니꼽지만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김 할머니는 곧 안동시 안흥동 경북선(안동~예천) 철길 아래서 노점을 시작했고 막바로 6.25를 맞는다. 피란 중 살던 집이 피격돼 한때는 가건물에서 찰떡을 팔기도 했다. 60년쯤 일명 ‘보신탕 골목’으로 알려진 현재 중앙시장 근처를 거쳐 신시장 입구 옥야동으로 이사와 확고한 기반을 다졌고 옥야동도 점차 ‘찰떡골목’으로 유명해졌다. 60년대 후반부터 김 할머니의 기력은 극도로 쇠약해진다. 가업을 이를 만한 사람을 찾았다. 그러나 두 딸은 모두 외면했다. 72년 어쩔 수 없이 외손녀 천영조씨를 설득해 가업을 잇게 했다.
옥야동 찰떡 골목엔 벙어리 외에 또 다른 떡집이 있었다. 2001년쯤 문을 닫은 ‘시장 찰떡’이다. 벙어리 찰떡은 고물로 쓰는 팥의 껍질을 벗기지만, 시장 찰떡은 벗기지 않아 벙어리 찰떡보다 더 붉은 기운이 감돌았다.
이 무렵 벙어리 찰떡 집에 김동순 할머니가 등장한다. 할머니는 젊을때 생활이 어려워 벙어리 찰떡 집에서 일을 도와주며 더부살이하다가 분가해 경안네거리 근처에서 ‘두꺼비 찰떡집’을 경영했지만 몇 년 가지 못해 문을 닫는다.
우환의 가족사는 계속됐다. 2대 사장 천씨의 남편이 사업 때문에 재산을 탕진한 것이다. ‘ 빚잩치’ 직후 식구들은 집 밖으로 나앉게 된다. 찰떡도 졸지에 공중분해된다. 천 사장의 장남 배재한씨도 안동을 떠나 구미공단에 취직한다. 벙어리 찰떡은 그렇게 날벼락을 맞고 맥없이 무너지는 듯했다.
2001~2003년 안동에서 안동찰떡이 사라진다. ‘안동찰떡 무주공산(無主空山)’시기였다. 하지만 명물 하나가 사라지는 걸 안타까워한 안동 시청이 브랜드 고수작전을 전개한다. 2001년 10월 17일 안동시 명의로 안동대표 찰떡명을 ‘버버리’로 정해 상표등록한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버버리였을까. 안동시 관계자들은 찰떡 유래에 대해 세밀하게 조사하지 못했던 것 같다. 유래를 더 면밀하게 조사하고, 기술 보유자인 천사장도 만났어야만 했는데 그렇게 하질 못한 것이다.
그런 가운데 신씨가 2004년 11월쯤 버버리 찰떡 집을 먼저 개점한다. 처음엔 장사가 별로였다. 영업용 택시등을 통해 광고를 했지만 반향이 없었다. 그래서 안동 시장, 관계 공무원에게 홍보용 떡을 나눠줬다. 버버리 찰떡 상표권을 가진 안동시청이 신씨한테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버버리 찰떡은 졸지에 뉴스메이커가 된다. 이 사실을 안 배씨가 급히 안동으로 내려와 비상가족회의를 소집했다.
그렇게 해서 버버리 등장 1개월쯤 뒤에 벙어리가 나타난 것이다. 20여년간 ‘휴면기’에 들었던 벙어리 찰떡 기술이 2대 사장 천씨를 거쳐 3대 사장 장남 배씨 내외에게 전해진다. 두 집이 동의할 진 모르겠지만 브랜드 전통성은 벙어리 측, 사업적 순발력은 버버리 측에 있다고 봐야 될 것같다. 그렇지만 3대재 명맥이 이어지고 있는 벙어리의 전통성이 존중되는 동시에 ‘신생 부활브랜드’ 버버리의 기득권도 존중돼야 할 것이다.
안동찰떡은 찹쌀에 굵은 팥고물을 묻힌 것인데, 평안북도 신의주의 대표적인 떡이었다. 그런데 일제 때 남북한 왕래가 자유로워 쉽게 안동으로 흘러든 것이다. 안동찰떡은 그렇게 독특한 떡은 아니다. 팥고물대신 콩가루를 묻히면 인절미, 찹쌀 대신 멥쌀을 사용하면 시루떡, 팥고물이 소로 사용되몀 찹쌀떡이 되는 것이다.
안동찰떡의 원형은 찹쌀 위에 팥고물을 두툼하게 올린 형태, 김노미 할머니가 만든 초창기 찰떡은 거피(去皮 껍질을 벗겨냄) 팥만 사용해 회색으로 보인다. 나중에 시장 찰떡이 거피하지 않은 팥을 씉 찰떡을 개발한다.
우선 팥을 맷돌로 갈아 물 속에 넣어 10시간 정도 불린다. 이어 손으로 치대면서 팥 껍질을 벗긴다. 그걸 약 1시간 삶는다. 다 삶은 팥은 약 30분 식힌다. 떡메질 해 썰어낸 찰떡에 팥고물을 찰떡 양면에 두껍게 입히면 된다.
버버리찰떡 관련만화도 있네요^^
이상 안동 버버리 찰떡 이었습니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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