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과 계유정란
20세 김맹권. 20세 김치온. 20세 김효종. 21세 김호.
22세 김자중. 24세 김맹윤. 22세 김덕원.
세종대왕이 승하한 뒤 적자 계승의 실현으로 문종이 즉위하였다.
즉위 2년만에 병약한 문종은 승하 하고 말았다.
12살의 단종이 그 뒤를 이어 왕이되었다.
세종대왕이 살아 계실 때 세자는 병약하고, 세손은 어리며,
왕자들은 강성함으로 후일을 걱정하였다.
대신들과 집현전 학자들에게 후사를 부탁하니,
둘째 왕자 수양대군은 이 일을 못 마땅하게 여겼다.
단종 원년에(1453) 수양대군은 권람, 한명회 등과 정변을 일으켰다.
안평대군과 황보인, 김종서, 등을 죽였다.
스스로 영의정과 내외 병마절통사가 되어
나라를 권력을 한손에 쥐게 되었다.
이를 계유정란이라 한다.
세종의 고명대신들은 거의 참살을 당했다.
조정의 실권은 수양에게 돌아갔고,
정란에 가담한 자들은 모두가 정난공신이 되었다.
수양대군은 계유정난 이듬해
단종의 왕비로 송현수의 딸을 왕비로 맞 왕권을 보호하는 듯 보였다.
단종 3년(1455)에 수양대군은 자기 수하의 신하들과 의논하였다.
단종 측근인 금성대군이하 여러 종친과
궁인 및 신하들을 죄인으로 몰아 유배시켰다.
단종은 위협을 느껴 왕위를 내려 놓고 상왕으로 물러나
수강궁(창덕궁)으로 옮겨가고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였다.
세종의 고명을 받드는 신하들 중에 정인지, 신숙주, 최황 등은
세조에가담하는 변절한 신하도 있다.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같은
지조(志操) 있는 집현전 출신 학자들과
유응부 등 무신들이 힘을 합하여, 상왕을 복위 시킬 것을 도모하였다.
동지였던 김질의 배반으로 발각되어 실퍠하고 참형을 당하였다.
이때 연루되어 죽은이를 사육신이라한다.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忠節)의 표본으로 삼고 있다,
복위 사건으로 인해 단종은
상왕에서 노산군으로 감봉되어 영월로 유배 되었다.
세조 3년(1457)에 유배되어 있던 금성대군이
순흥에서 단종 복위를 계획 하다가 발각되어 죽음을 당하며 실패한다.
단종은 서인(庶人)으로 감봉 되었다가 사사되고 세조의 왕권은 강화된다.
김맹권(孟權: 20세)은
세종조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유숙하며 학업을 덖는 반유로 있었다.
세종이 단종의 후일을 부탁한다는 유지를 받았다.
세조가 왕위를 물려받자,
고향인 충남 보령으로 내려가 평생 벼슬을 포기하였다.
후학을 지도하였는데 토정 이지함, 천휴당 이몽규 같은 명인을 배출하였다.
김치온(致溫:20세)은
고양 현감(종6품)으로 있을 때
단종이 수양에 선 위하니 장차 큰 화가 닦아 옴을 알았다.
벼슬을 버리고 고향 장흥에 내려갔다.
사육신의 한 사란인 남효은과 교류하였다.
김효종(孝宗:20세)은
학행으로 벼슬에 올라 단종조에 사복시정(정3품) 이 되었다.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자
세조로 부터 국록을 받는 것을 꺼려 벼슬을 사퇴했다.
고향 부여에서 은거했다가 단종이 영월에서 운명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움막을 짓고 해만 뜨면 궁검대에 올라가서 동쪽을 향해 3년간 통곡을 하였다.
매월당 김시습과도 사귄 절의신이다. 부여 청일사에 배향되었다.
김 호(瑚:21세)는
세종조에 문과에급제하여 함진도 안렴사를 거쳐
이조참판에 이른다.
김자중(自中:22세)
김호의 아들로 사헌부 집의를 지냈고 추원재에 모셔져있다.
김맹윤(孟胤:24세)은
한성부참군(정7품)있을 때 단종이 사사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병을 핑계 삼아 벼슬을 사직했다.
시를 읊며 방랑 생활을 하다가 안평대군의 잔당 으로 몰려
영종도에 귀양가서 죽었다.
김덕원(德源:22세)은
세종조에 문과 급제. 춘추관 기주관으로
문종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예문관 직제학(정3품)으로 세조조에 좌익원공신 2 등에 책록되었다.
광산김씨 약사.
2023년 6월. 편집 선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