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루카 3,1-6
1 티베리우스 황제의 치세 제십오년, 본시오 빌라도가 유다 총독으로, 헤로데가 갈릴래아의 영주로, 그의 동생 필리포스가 이투래아와 트라코니티스 지방의 영주로, 리사니아스가 아빌레네의 영주로 있을 때, 2 또 한나스와 카야파가 대사제로 있을 때, 하느님의 말씀이 광야에 있는 즈카르야의 아들 요한에게 내렸다.
3 그리하여 요한은 요르단 부근의 모든 지방을 다니며,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 4 이는 이사야 예언자가 선포한 말씀의 책에 기록된 그대로이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5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굽은 데는 곧아지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되어라. 6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베트남 중부에는 해마다 수 많은 태풍과 홍수로 많은 마을과 사람들이 고립되곤 합니다. 고립된 마을 물위에 떠 있는 지붕 위에서 구조를 기다리는 사람도, 구조를 하려는 사람들도 길이 없으면 도움을 주고 받을 수 없습니다. 도로는 사회의 소통을 위해 꼭 필요한 물리적 수단입니다. 손상된 도로는 사람과 사람을 분리시키고 소통을 저해합니다.
세상에 물리적 도로가 필요하듯이 영적 삶을 위해서 마음 속 영혼의 길이 필요합니다. 그 길은 바로 주님이 오시는 길,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길입니다. 주님의 길이 곧게 뚫렸을 때만이 주님의 은총을 받을 수 있고 주님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래 전에 오셨지만 아직도 우리는 그분을 보지 못합니다. 우리 영혼의 길이 너무 낡고 구부러져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영혼의 길은 교만함의 산 위에 올라 있지는 않습니까? 절대 경쟁사회에서 이긴 자만이 오를 수 있는 오만의 정상, 푸르른 하늘도 찌를 듯한 자만의 정상 위에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 길을 가기 위해 실수도 용납할 수 없고, 용서도 할 수 없는 삭막한 삶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의 영혼의 길은 탐욕과 욕망의 구덩이가 많습니다. 불화와 질투, 의심으로 갈라져 있고 이웃과 자신에게 조차 거짓과 위선, 양심의 결핍으로 왜곡되었습니다. 잔인하고 독한 말들로 점점 거칠어지고, 게으름으로 더러워지고 있습니다. 높고 구부러지고 울퉁불퉁한 길, 갈라진 길은 주님이 오실 수 없습니다.
대림시기를 맞이하여 주님께서 오실 수 있는 바르고 곧은 길, 아름다운 길을 만든다면 그 길 끝에서 기다리고 계시는 주님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오만과 교만의 높은 산을 낮고 평평한 길로 만들어야 합니다. 탐욕과 분열, 불화를 일으키는 구덩이를 채워야 합니다. 욕망과 거짓, 위선으로 왜곡된 길을 바로 펴십시오. 잔인한 말로 거칠어진 길을 부드럽게 만들어야 합니다.
길은 마음입니다. 깊은 구멍을 메우고 구부러진 도로를 수리하는 것은 쉽습니다. 또 더러워진 길을 깨끗하게 만드는 것도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영혼의 길을 새롭게 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대림주간을 맞이하여 세례 요한의 가르침을 따르십시오. 회개와 참회의 마음으로 주님 곁에 다가가야 함을 알고 영혼의 죄를 씻고 마음의 길로 들어가야만이 새로운 영혼을 얻을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작은 주님의 소리도 들을 수 있는 고요한 침묵의 시간을 가지십시오. 주님을 따라 겸손한 삶을 살아가십시오. 그러한 길을 가기 위해 자신의 뜻을 버리는 자신과의 치열한 싸움을 참아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그 길이 시작되는 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단지 우리 마음이 주님과 멀어져 있고 굽어진 길 모퉁이에 있어 볼 수 없을 뿐입니다. 굽은 길이 곧아지고, 거친 길이 평탄하게 되는 그 날이 오면 반드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는 주님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아버지 하느님, 저희가 다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다시 오시는 주님은 나에게 무슨 의미입니까?
2. 나의 마음의 길은 지금 어떤 모습입니까?
3. 나의 마음의 길은 어디를 고쳐야 주님을 볼 수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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