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에 대못을 박는 처형으로 순교하신 제주의 첫 순교자
제주시 함덕리에는 이 고을 출신으로서 제주의 첫 영세자이며, 이 고장에서 처음으로 복음 전파의 사명을 수행한 제주지역의 순교자 김기량(金耆良, 1816~1867, 펠릭스 베드로)의 순교 현양비가 건립되었다.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는 함덕리 출신으로서 제주의 첫 영세자이며, 제주 지역의 첫 순교자이다.
제주도에 공식적으로 교회 공동체가 형성되고 전례 행위와 전교 활동이 시작된 것은 1899년 5월 26일이었다. 그러나 이보다 앞서 구원의 기쁜 소식이 단편적으로 이 땅에 전해진 여러 기록들을 볼 수가 있는데 그중의 하나로 1857년 홍콩에서 영세 입교하여 이듬해 고향에 돌아와 전교 활동을 전개한 김기량을 들 수 있다.
김기량 순교자는 1857년 풍랑으로 중국 광동 해역까지 표류하다가 영국 배에 구조되어 홍콩 파리 외방전교회에서 때마침 휴양 중이던 조선 신학생 이만돌 바울리노에게 교리를 배워 그해 5월 31일 루세이유(Rousseille) 신부로부터 영세 입교하였다. 이듬해 우리나라 국경인 의주부(義州府)를 거쳐 귀국해 이 바울리노가 전해 준 서한과 안내 정보를 가지고 많은 어려움과 고생을 겪으며 교우촌을 찾아갔다.
다행히 교우촌에 도달하여 최양업(崔良業, 1821~1861, 토마스) 신부와 페롱(F´eron, 權, 1827~1903, 스타니슬라오) 신부를 만날 수 있었다. 이때 최 신부는 오두재(경북 상주군 모동면 수봉 2리의 오도티)에, 페롱 신부는 이곳에서 10리가량 떨어진 산막골(모동면 신흥1리의 도리원)에 거처하고 있었다.
이때 최양업 신부는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의 성실함과 그의 신앙에 대한 열성을 보고는 그가 제주도의 훌륭한 사도가 되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페롱 신부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래서 최 신부는 김기량에게 여러 서적과 성물들을 주면서 제주에 가서 열심히 복음을 전파하도록 격려했다.
1866년 병인박해가 한창일 무렵, 김기량은 세례 받을 준비를 마친 예비 신자들을 데리고 가족들과 함께 거제도로 나갔으며, 여비를 마련하기 위해 박하유를 팔러 통영에 나갔다가 그곳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다른 교우 4명과 함께 1866년 9월에 통영 관아로 이송된 그는 문초를 받는 과정에서 떳떳이 신앙을 고백하고 함께 갇힌 교우들에게 치명할 것을 의연히 권면하였다.
결국 관아에서는 장살형으로는 그들 5명의 목숨을 끊을 수 없음을 알고 교수형에 처하게 되었다. 게다가 관헌들은 김기량이 다시 살아날 것을 염려하였던지 가슴에 대못을 박기까지 하였다. 이리하여 제주 출신의 첫 신자인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는 장렬하게 순교하니 그때 그의 나이는 51세였다.
김기량이 지은 가사 중에서 훗날의 증언을 통해 그 일부가 알려지게 되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순교야말로 하느님을 최대한으로 섬기는 길임을 밝히고 있다.
김기량의 3대손 김재옥의 증언에 의하면(2001년 5월 29일) 함덕리 4구 평사동(현 함덕해수욕장 동쪽)에 김기량 생가터로 추정되는 건물이 남아있다. 현재 이 생가터에는 게스트 하우스가 있다.
▒ 김기량이 지은 가사
김기량이 지은 가사 중에서 훗날의 증언을통해 그 일부가 알려지게 되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순교야말로 하느님을 최대한으로 섬기는 길임을 밝히고 있다.
"어와 벗님네야 치명(致命)길로 횡행하세
어렵다 치명길이야 평생 소원 사주모(事主母)요
주야 앙망 천당이로다.
펠릭스 베드로는 능도(能到) 주대전 하옵소서."
[주]횡행 : 거침없이 나아감
사주모(事主母) : 하느님과 성모님을 섬김
능도(能到) 주대전 : 하느님 대전에 능히 다다름
▒ 페낭 신학교(College Generale de Pinang)
파리외방전교회가 1807년에 세운 신학교로 1807년 말레이반도 서해안의 작은 섬 페낭(Penang 혹은 Poulo-Pinang)에 신학교를 설립, 운영해 왔다. 페낭에 신학교가 설립되자 박해로 인해 신학교를 설립할 수 없었던 조선, 중국, 베트남, 일본, 버마, 태국, 말라카이 등지의 동양 10여 개국에서 온 신학생들이 사제 수업을 받았다.
마카오에 유학시켜 김대건, 최양업 두 신부를 양성하는 데 성공한 한국 천주교회는 박해가 비교적 완화된 철종 시대에 이르러 다시금 신학생 파견을 서두르기 시작하였다. 1854년 메스트르(Maistre) 신부는 이만돌 바울리노, 임 빈첸시오, 김 요한 등 세 사람을 선발, 페낭으로 유학보냈고, 1858년에는 다시 세 사람을 파송하였다.
그 뒤 병인박해(1866년)로 신학생 파견은 중지되었으나 1876년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되고 점차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자 블랑 주교는 신학생 파견을 재개키로 하고 1882년, 1883년, 1884년 3차례에 걸쳐 21명의 신학생을 유학보냈다.
이 가운데 강성삼, 강도영, 정규하, 한기근, 김성학, 이내수, 김원영, 홍병철, 이종국, 김양홍, 김문옥, 김승연 등은 사제로 서품되었다. 1886년 한불 조약이 체결된 이후 전교 활동의 자유가 허용된 1887년 서울 용산에 예수 성심 신학교를 설립한 한국 천주교회는 페낭 신학생들을 본국으로 소환하였다.
■ 순교자
◆ 복자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 (1816∼1867년)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는 1816년 제주 함덕리(현 제주도 북제주군 조천읍 함덕리)의 중인 집안에서 탄생하였다. 사람들은 그를 ‘김선달’이라고 불렀다. 그는 배를 타고 다니면서 장사를 하던 사람이었는데, 1857년 2월 18일(음력 1월 24일) 동료들과 함께 무역차 바다로 나갔다가 풍랑을 만나 표류하게 되었다. 그는 중국의 광동 해역에서 영국 배에 구조되어 홍콩의 파리 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로 보내졌으며, 이곳에서 프랑스 선교사들과 휴양중인 조선 신학생 이 바울리노를 만나게 되었다.
바울리노는 김기량에게 천주교 교리를 가르쳤고 그의 신앙심은 얼마 안 되어 아주 깊어지게 되었다. 그해 5월 31일 홍콩의 부대표인 루세이유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조선으로 귀국하였다. 귀국 후 그는 가족과 그의 사공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는 데 열중하였으며, 이후로도 육지를 오가면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1866년의 병인박해로 제주의 복음화 노력은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박해가 일어난 직후 그는 여느 때처럼 무역을 하러 경상도 통영으로 나갔다가 그곳의 게섬(현 경남 통영시 산양읍 풍화리)에서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이 밝혀져 체포되었다. 통영 관아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고 ‘그들을 때려 죽이라’는 명령에 따라 그와 그의 동료들에게 다시 혹독한 매질을 했으나 그래도 그들의 목숨이 붙어 있자, 관장은 그들 모두를 옥으로 옮겨 교수형에 처하라고 명령하였다. 이때가 1867년 1월(음력 1866년 12월)로, 당시 그의 나이는 51세였다. 이때 관장은 특별히 그의 가슴 위에 대못을 박아 다시는 살아나지 못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 찾아가는 길
■ 순례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