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일 자정쯤이면 어김없이 개설되는 인터넷 개인방송국의 먹방 채널. 방송 진행자인 BJ들은 거리낌 없이 자신의 식탁을 생중계한다. /아프리카TV 제공
학교 앞 원룸에서 혼자 사는 대학생 이세연(22)씨는 거의 매일 저녁 습관적으로 컴퓨터 모니터를 켜고 화면을 응시한다. 밥을 먹기 위해서다. 밥과 모니터가 무슨 관계일까. 이씨는 태연하게 답했다. "먹방 보면서 밥 먹으려고요." 먹방이란 '먹는 방송'의 줄임말로, 인터넷 개인방송국 BJ(방송 진행자·Broadcasting Jockey)가 음식 먹는 모습을 보여주는 방송이다.
"같이 밥 먹는 기분을 느낄 수 있거든요. 실시간으로 먹방을 보면서 나도 같이 먹으면, 혼자 먹는 것 같지 않아서 좋아요." 그에게는 BJ가 일종의 밥 친구(밥을 함께 먹는 친구)인 셈이다. 메뉴도 먹방에서 등장하는 것으로 통일한다. '치킨 먹방'을 볼 땐 통닭을 배달시켜 먹는 식이다.
"일방적으로 메뉴를 '지정' 당하느냐고요? 제가 BJ를 먹게 할 수도 있어요." 숫자 뽑기와 같은 간단한 게임에서 이기면, 시청자는 그날 방송의 메뉴를 선택할 수 있다. "예전에 제가 당첨됐을 때 떡볶이를 골랐는데, BJ가 그 자리에서 바로 전화로 주문했어요. 진짜 식당서 둘이 먹는 느낌이었다니까요!" 이씨는 음식이 배달되는 동안 같이 기다리면서 '왜 이리 안 오냐'고 푸념도 하고, 앞으로 도착할 음식에 대한 기대감도 함께 부풀렸다.
지난 10일 자정, 대부분의 사람이 잠든 평일 야심한 시각. 인터넷 개인방송 사이트 아프리카TV에 개설된 먹방 채널 수백개 중 하나에 접속해봤다. '먹방의 달인'이라고 불리는 인기 BJ의 채널이었다. 그가 화면을 통해 막 배달된 치킨 상자의 포장을 뜯고 닭다리를 들어 올리자 채팅방이 들썩였다. 순간 생방송 시청자 수가 5000명을 넘어섰다.
BJ는 "이게 다 칼로리가 얼마고 얼마… 큰일 났네"라고 하면서도 붉게 상기된 표정으로 눈을 살짝 감고 닭다리의 향을 음미했다. "히야, 죽이네." 이내 얼굴의 모든 근육을 이용해 입을 크게 벌리고 닭다리를 순식간에 씹어 삼켰다. "쯔업쯔업쩝쩝"하는 씹는 소리가 그대로 전달됐다. 1시간 15분 정도 진행된 그의 '먹방쇼'엔 별다른 게 있는 게 아니었다. 먹는 것을 '흡입'하는 동안 쏟아지는 그의 목소리뿐 사방이 정적이었다. 하지만 바삭한 껍질을 씹어대는 소리와 기름으로 번들해진 그의 입술을 보고 있자니 치킨의 독특한 기름 냄새가 모니터를 타고 흘러나오는 듯했다. 채팅 창은 '먹고 싶다' '이미 시켰다'는 등의 반응으로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이날 밤엔 아프리카TV를 통해서만 15만명이 '먹방'을 봤다. 다른 인터넷 방송국 짱라이브, 인라이브 등을 합치면 20만명이 훨씬 넘는다. 인기 BJ의 채널엔 한 번에 1만5000명까지 들어찬다. 왜 이렇게 많은 사람이 단지 먹는 영상을 보기 위해 모여드는 걸까.
◇"먹방 보면 외롭지 않아요"'먹방'은 대체로 2008년 한 인터넷 개인방송 사이트에서 시작됐다고 알려졌다. '먹방'이란 단어가 이처럼 유행어로 자리 잡은 건 2010년 영화 '황해'에서 배우 하정우가 신들린 듯한 먹는 연기를 선보인 이후. 관객들은 온 신경을 먹는 데 집중한 그의 게걸스러운 연기에 빠져들었고, '하정우 먹방'이라는 용어가 검색어 상위권을 차지했다. 또 최근 MBC 예능프로그램 '아빠 어디가'에 출연한 가수 윤민수의 아들이 라면의 일종인 '짜파구리(짜파게티+너구리)'를 맛깔 나게 먹으면서 다시 한 번 '먹방'이란 단어가 큰 관심을 받았다.
이렇게 먹방이 '대세'로 떠오르면서 인터넷 방송국은 그야말로 너도나도 먹는 모습을 공개하는 '먹방 천국'이 됐다. 아프리카 TV에만 3000개가 넘는 먹방 채널이 개설돼 있다.
이들이 방송하는 방식을 살펴보면 대체로 비슷하다. 자취방을 배경으로 컴퓨터 책상 앞에 앉은 BJ들이 음식을 먹는다. 마이크가 하나 있단 걸 제외하면 일반적인 컴퓨터 앞 풍경이다. 방송을 진행하는 BJ들은 별 시답잖은 이야기들을 늘어놓는다. 어제 한 소개팅에 대한 푸념, 다가오는 중간고사에 대한 걱정까지 친구와 밥 먹으며 할 법한 이야깃거리다. 시청자들은 방송을 보며 꼭 BJ뿐 아니라 채팅 창을 통해 다른 시청자와도 활발하게 이야기를 나눈다. BJ가 영화 '황해'에 나온 하정우의 어묵 먹는 장면을 흉내 내자 "하정우 진짜 조선족 같아" "아 핫바 완전 먹고 싶어"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먹는 핫바가 최곤데" 같은 이야기들이 줄줄이 올라왔다. 서울 서초구에서 혼자 산다는 직장인 박모(32)씨는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서 일상적인 이야기들을 나누다 보면 홀로 있단 생각이 사라진다"고 말했다.
서울대 인류학과 강정원 교수는 "현대사회의 파편화된 개인들이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먹방'이란 '인터넷 식탁'에 둘러앉아 위안을 받는 것"이라고 말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식탁은 언제나 친밀하고 일상적인 이야기가 오가는 공간이었어요. 그런데 1인 가구가 늘어나면서 그런 이야기를 풀어 놓을 공간이 사라진 거죠. 먹방은 그 이야기를 인터넷상에서 오갈 수 있도록 해줍니다." 강 교수는 "먹방은 식탁의 확장판"이라고 말했다. 통계청에 따르면 1인 가구는 작년 기준으로 약 454만 가구로, 전체 가구의 25.3%다. 18년 전의 2배로 늘었다. 2030년이 되면 1인 가구가 33%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강 교수는 "앞으로 친밀함을 공유할 다른 수단이 나오지 않는다면 먹방의 인기는 계속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함께 밥 먹는 경험 나눌 기회 없어, 영상물로 대체
일본에서는 혼자 밥 먹는 이를 위해 타인의 식사 장면을 담은 영상물 '나랑 같이 밥 먹어요, 이팅(eating)'이 판매되기도 했다. 다양한 성격을 가진 연기자 18명이 각기 다른 장소에서 식사하는 장면을 정면에서 녹화한 영상이다. 홀로 밥 먹는 세태를 그린 드라마 '고독한 미식가'도 인기를 끌었다. 중년 독신남인 주인공 이노가시라가 매회 음식점에 들어가 혼자 밥을 먹는다는 내용이 드라마 줄거리의 전부다. 대사라고 해봤자 주인공이 치킨가스를 한입 베어 물고 "확실히 '치킨'이라고 자기주장을 하고 있군. 돼지와는 세계가 달라"라고 말하는 정도가 전부일 정도로 밋밋하지만, 일본에선 3시즌 연속으로 방송될 정도로 인기였다.
서울대 심리학과 곽금주 교수는 "먹는 모습은 지극히 원초적인 행위고 이를 나누고자 하는 경향도 본능"이라며 "이를 공유할 기회가 메말라가고 있기 때문에 영상으로 대체하려는 사람이 늘어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곽 교수는 "먹방뿐 아니라 음식을 주제로 한 웹툰, 요리를 매개로 한 방송 프로그램 등 음식 관련 콘텐츠가 인기를 끄는 건 이런 소통의 결핍을 메우려는 반작용"이라고 말했다.
지난주 금요일 자정 진행된 KBS FM 라디오 '장윤주의 옥탑방 라디오'의 '더 먹방 라이브'는 그러한 기회가 결핍된 사람들의 심리를 적극적으로 이용해 많은 호응을 얻었다. 공중파 라디오에서 아예 '먹방'이라는 코너 이름을 달고 진행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유명 모델 출신 진행자인 장윤주와 '함께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수많은 시청자가 몰려들었다. 이날 DJ 장윤주씨는 야식 먹는 장면을 내보냈는데, 본격적으로 먹방을 시작하기 전 "여러분 15분 남았습니다. 어서 야식을 시키세요"라고 말하며 동참을 호소했다. 특히 '보이는 라디오'로 진행돼 인터넷을 통해 영상도 볼 수 있었다. "후르릅 쩝쩝." 음식 먹는 소리가 전국에 퍼졌다.
이 프로를 연출하는 지성찬 PD는 "'외로움'이라는 정신적 허기에 시달리는 청취자들을 달래주기 위해 기획했고, 매우 성공적이었다"며 "앞으로 종종 '먹방 특집'을 시도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특히 '고상한 척'할 것 같은 연예인들이 우악스러울 정도로 야무지게 먹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시청자에게 친근감도 쌓을 수 있다는 평이다. 수백명의 청취자들은 방송을 들으며 함께 야식을 시켜 먹었다는 인증샷(증명사진)을 방송 게시판에 올렸다. 지 PD는 "물리적으론 떨어져 있었지만 청취자는 방송을 들으며 같이 먹는 즐거움을 누렸다"고 말했다.
◇먹는 모습 보며 '배고픈 맛'으로 대리만족
시청자 중에는 먹방을 보면서 함께 먹는 사람들만 있는 건 아니다. 그저 먹는 것만 보려고 먹방 채널을 찾는 사람도 많다. 그들은 먹방을 보며 "대리만족을 느낀다"고 했다. 날씬한 모습에 강박을 느끼는 현대인은 먹방에서 해방감을 느낀다는 해석도 있다.
체중관리를 위해 오후 6시 이후에 금식한다는 공무원 조모(31)씨는 "야식을 참기 위해 먹방을 본다"고 말했다. "야밤에 무엇인가를 먹고 싶지만 먹으면 살찌니까 그럴 수 없고, 그럴 때 먹방을 봐요. 어차피 못 먹을 거 상상 속에서라도 실컷 먹자 이건데, 먹방은 (상상보다) 훨씬 리얼하니까 더 좋죠." 먹는 모습을 보면서 먹고 싶은 마음을 참는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복스럽게 음식 먹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 뇌는 만족을 느낀다"고 말한다. 서울 백병원 비만클리닉의 강재헌 박사는 "연인이 밥 먹는 모습만 봐도 내가 다 배부른 것처럼 느끼는 것과 같이, 음식 먹는 타인의 모습을 볼 때 마치 '자신이 그러한 행위를 하는 것 같은' 만족감을 느낀다"며 "이 만족감은 포만감과 유사하다"고 설명했다. 꼭 음식을 먹지 않고 먹방을 보는 것만으로도 식욕이 충족된다는 것이다. 조씨는 "먹방을 보면 '배고픈 맛'을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먹방 보면 확실히 나도 따라 먹고 싶죠. 그런데 한참을 보다 보면 BJ가 먹은 걸 나도 먹은 것 같단 생각이 들어요. 우리끼린 그걸 '배고픈 맛'이라고들 하죠.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