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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 3 - 제갈팔괘촌에서 제갈공명을 모신 승상사를 구경하고 마을을 둘러보다!
2023년 10월 31일 후저우(湖州 호주) 역에서 고속기차를 타고 진화 金华(금화) 에 도착해 호텔에
체크인후 808 路 란시(兰溪) 행 버스를 타고 란시(兰溪) 시내 진자오상사
(今朝商廈)에서 내려 택시를 타고 주거바과촌 诸葛八卦村 (諸葛八卦村 제갈팔괘촌) 에 도착합니다.
문표를 끊어 10분을 걸어서 마을로 들어가서는 태극을 묘사한 연못을 보는데 옛날 태극 모형
이니 이 마을이 테극의 원리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상징이라 하는데 골목길로
들어가서는 제갈씨족(诸葛氏族) 들이 제갈공명을 모신 청샹츠 丞相祠(승상사) 를 구경합니다.
승상사 는 명(明) 나라 때 세워졌으며 '회(回)' 자형 배치로 되어 있고 헝탕[亨堂] 에는 제갈량(诸葛亮) 의
좌상이 모셔져 있으며 충신탕[崇信堂], 융무탕[雍睦堂] 및 상리탕[尚礼堂] 사당이 있는데 제갈공명
은 중국 후한 말의 인물이자 삼국시대 촉한의 재상으로 공명(孔明) 은 자(字) 이며 이름은 양(亮) 입니다.
제갈량의 14대 손 '제갈리' 가 소흥 수창현 현령으로 부임했다가 죽은후 아들 '제갈청' 이 북송때 1018년
난계에 정착하는데 그후 27세 손 '제갈대사' 가 남송 말기인 1280년 온 가족을 이끌고 高隆
(제갈팔괘촌)으로 이사해 제갈량의 구궁팔괘진 (九宫八卦陣) 과 같은 형태로 마을을 건축했다고 합니다.
구궁팔괘진(九宫八卦) 은 오방진(五方陣)·일자장사진(一字長蛇陣)·팔문금찬진
(八門金鑽陣) · 원앙진 (鴛鴦陣)· 오행진(五行陣)·
육화진(六花陣)· 둔갑진 (遁甲陣) 과 함께 팔진법 놀이 때 연행됐다고 합니다.
중츠 钟池(충지) 를 핵심으로 외부로 뻗어 있는 8갈래의 작은 통로가 내팔괘 (內八卦)
를 형성하고, 마을 바깥쪽은 8개의 산으로 둘러싸여 외팔괘(外八卦)
를 형성하니 주거촌 诸葛村(제갈천) 을 바과촌 八卦村(팔괘촌) 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여기 오래된 옛 마을을 구경하다 보니 문득 이준식 성균관대 명예교수가
동아일보 ‘이준식의 한시 한수’칼럼에 쓴 “시인과 화가가 떠오릅니다.
나와 헤어져 어디론가 간다던 위언(韋偃), 무적의 자기 그림 솜씨를 내가 좋아한단 걸 알고
장난스레 몽당붓 잡고 붉은 준마를 그리자, 한순간에 천리마가 동쪽 벽에 나타났네.
하나는 풀을 뜯고 하나는 울음 우는데, 순식간에 천리 길이 저들의 발굽 아래 놓일
기세. 위태로운 시국에 어찌하면 이런 말을 구해서, 나와 함께 생사를 같이할 수 있을는지?
(韋侯別我有所適, 知我憐渠畫無敵. 戱拈禿筆掃驊騮, 欻見騏驎出東壁. 一匹齕草一匹嘶,
坐見千里當霜蹄. 時危安得眞致此, 與人同生亦同死.)
―‘위언이 벽에 그려준 말에 부치는 노래’(제벽상위언화마가·題壁上韋偃畵馬歌) 두보(杜甫·712∼770)
자기 그림을 좋아하는 시인에게 화가는 이별의 선물로 벽에다 말 그림을 남긴다. 그러자 시인은 화필의
기세와 화폭에 담긴 준마의 역동적 기운에 감복한다. 생동감 있게 벽 위에 등장한 준마 두 필.
지금은 한가로이 풀을 뜯거나 힝힝대고 있지만 저들이야말로 단숨에 천 리를 내달릴 수 있는 천리마.
이런 그림을 장난치듯, 그것도 끝이 나달나달해진 몽당붓으로 그려내다니 그 묘필(妙筆) 에
대한 시인의 감흥이 오죽했으랴. 그림 속 준마의 기세와 함께
‘위태로운 시국에 이런 말을 구해서 생사를 같이하고 싶다’는 시인의 우국지정 또한 유별스럽다.
시인이 사천성 성도(成都) 의 초당에 머물던 시절, 이때 만난 이가 말과 노송 그림
으로 명성을 떨치던 화가 위언이었다. 두보는 위언의 그림을 예찬한
제화시(題畫詩·그림을 소재로 지은 시)를 여러 편 남겼는데 이 시는 그중의 하나다.
전형적인 종족사회의 문화가 남아있으며 200여곳 명청(明淸) 시기의 오래된 건축물이 있는데 청샹츠 丞相祠
는 제갈씨족(诸葛氏族) 제사를 올리는 장소로 제갈공명을 모신 청샹츠 丞相祠(승상사) 가 유명합니다.
주변에 장악촌(长乐村) 은 쑹위안대의 절동학파(浙东学派)의 중심인물인 김이상(金履祥)
의 후예가 집단으로 거주하고 있는 지역으로 명대 이래로 과거에 급제하며 많은
사당과 장식이 뛰어난 주택이 건립되었으며 수십개소의 명청 민거건축 이 남아 있습니다.
마을이 형성된후 700여년 동안 전쟁과 혼란속에 수많은 건물과 유적, 원림 등이 불타고
훼손되었지만 팔괘촌 은 세외도원 같이 세상의 풍파를 겪지않고 그대로 보존되어 왔으니....
1925년 북벌전쟁 시 남방의 국민혁명군 '초경광' 부대와 군벌 '손전영' 부대가 제갈촌
부근에서 3일간 격전 를 벌였는데, 총알하나 포탄한발 떨어지지 않았으며 또한
중일전쟁시 일본군이 마을 밖 큰길로 진격을 하며 마을이 있다는걸 발견치 못했다고 합니다.
꼬불꼬불하고 가파른 골목길을 걸어서 언덕에 올라서니 대회당이라고 부르는 모양인데... 여기서
보니 산 너머 저쪽에도 기와집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으니 그럼 저기 까지가 제갈팔괘촌인
것일까요? 호텔 패키지 여행사의 단체 관광객들이 이곳 저곳에 앉아 휴식을 취하는 모습을 봅니다.
가이드는 사람들을 안내해 와서 마을에 대해 설명을 한후 반시간 정도는 휴식내지 자유시간을 주는
모양입니다. 잘 지은 기와집들을 내려다 보면서 여기 제갈팔괘촌은 부자마을이라는데 생각이
미치니 문득 김홍수 기자가 조선일보 ‘만물상’ 칼럼에 쓴 “수도승 억만장자” 라는 기사가 떠오릅니다.
얼마전에 세상을 떠난 면세점(DFS) 거부 찰스 척 피니는 ‘자선사업계의 제임스 본드’
라 불렸다. 그는 직원들에게 이면지 사용을 강요하고, 변호사 수임료를 무자비하게
깎고, 모임에선 밥값을 내지 않으려고 먼저 자리를 뜨는 등 욕심 많은 구두쇠로 비쳤다.
1997년 루이뷔통 그룹과 법적 분쟁 과정에서 대반전이 일어났다. 법정에서 공개된 그의 회계장부에서 그가
15년간 40억달러를 대학과 사회단체 등에 기부한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그는 3년전 남은 재산까지
모두 기부한 뒤, 자신은 10달러짜리 전자 시계를 차고, 방 두 칸짜리 임대 아파트에서 살다가 생을 마감했다.
친환경 아웃도어 브랜드 ‘파타고니아’ 를 만든 이본 쉬나드 회장도 무소유를 실천한 수도사형 기업가다. 그는
작년에 “소수의 부자와 수많은 빈자로 귀결되는 자본주의가 아닌 새 자본주의 형성을 바란다” 면서
30억달러가 넘는 회사 지분을 환경단체에 통째로 넘겼다. 파타고니아는 이 소식을 알리면서 “이제는
지구가 우리의 유일한 주주” 라고 밝혔다. 쉬나드 회장은 낡은 옷을 입고, 컴퓨터와 휴대폰도 사용하지 않는다.
지난해 세상을 떠난 일본 교세라 창업자 이나모리 가즈오 회장은 ‘경천애인’ 을 사시로 삼고, 도를
닦듯 기업을 경영했다. 27세에 창업해 연매출 70조원, 종업원 13만명의 초우량 기업으로
키운 뒤, 회사 지분을 사회에 기부하고 은퇴했다. 퇴직금 6억엔도 전액 대학에 기부했다.
그가 손님을 접대할 때 애용한 식당은..... 한 끼에 500엔 이하의 저가 프랜차이즈 식당이었다.
얼마 전 방한한 홍콩 영화배우 주윤발은 “내게 필요한 것은 점심·저녁 먹을 흰 쌀밥 두 그릇뿐” 이라면서
1조원에 달하는 재산 99% 를 기부하겠다고 밝혔다. 미국 배우 키아누 리브스도 무욕의
삶으로 유명하다. 수천억원대 재산을 기부하고, 집도 없이 싸구려 호텔을 전전하며 지하철을 타고 다닌다.
우리나라에도 무소유와 박애주의를 실천한 기업가가 있다. 유한양행 창업자 유일한 박사는
경영을 돕던 외아들도 사표를 내게 하고 기업을 종업원 지주회사로 만들었다. 그는
유언장에 “손녀 대학 학비 1만달러만 남기고, 전 재산을 교육, 사회사업에 기부하라” 고 썼다.
미국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는 “부자인 채로 죽는 것은 부끄러운 일” 이라면서 현재
가치 3000억달러가 넘는 재산을 사회로 환원하며 박애주의를 실천했다.
아낌없이 나눠주고 빈손으로 가는 괴짜 억만장자를 더 자주 볼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런데 죽을 때 많은 재산을 남긴게 왜 부끄럽다는 것일까요? 세상의 모든 재산은 하나님의 소유이니
하나님께서 내게 잠시 맡긴 것인데.... 기도를 통해 어디에 써야하는지 하나님의
응답을 받아서 그대로 써야 하는데 게을러서 기도를 제대로 못해 재산을 흩지 못했으니 수치스럽다는?
마을을 둘러보면서 제갈공명의 시대에 유비와 관우 그리고 장비가 떠오르는데 그 중에 관우는
제갈공명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신격화가 되었으니 국제신문에 역사학자 마바오지
가 쓴 평전 “中서 추앙받는 관우... 명장은 어떻게 신이 되었나” 라는 글이
떠오르는데 중국 징저우(형주)에 있는 관우사당에는 관공(關公)상이 우뚝 서 있다고 합니다.
어느 탁월한 고전학자와 대화할 때였다. “한·중·일을 ‘상징’ 할 만한 한자를 한 글자씩만 꼽아본다고 칩시다.
어떤 글자가 떠오르나요?” 흥미롭지만, 답하기 어려운 과제였다. 질문을 받고 우물쭈물 답변을 내놓지
못한 뒤로 한동안 ‘한·중·일을 각각 상징할 만한 한 글자’ 를 놓고 나름대로 답을 찾아보고자 애썼는데,
다음과 같은 잠정 결론에 닿았다. 한국은 옳을 의(義), 일본은 화할 화(和)나 충성 충(忠), 중국은 믿을 신(信).
이런 방식에 ‘지나친 단순화’ 의 위험이 따르는 건 분명하지만, 인문 관점으로 사유하는 훈련을 하는 데
도움이 됐다. 그래서 질문을 확장해 보았다. ‘한·중·일을 상징할 만한 문화·역사 코드를 특정한 인물
에서 뽑아본다면, 누구를 꼭 포함해야 할까’. 한국과 일본은 일단 놔두고, 중국의 ‘절대 빼서는
안 될 인물’ 한 사람은 단박에 떠올랐다. 맞다. 당신이 생각하는 바로 그 사람이다. 그 사람은 관우다.
데워놓은 술이 식기도 전에 적장 안량을 베고 돌아온 그 관우, 오관참육장의 그 관운장, 도원결의
속에서 빛나는 그 미염공(美髥公), 조조의 맹장 우금을 사로잡아버린 그 명장,
적토마와 청룡언월도…. (참고로 역사기록에 따르면 또 다른 적장 문추는 관우가 베지 않았다.)
중국의 역사학자 마바오지(馬寶記· 허창대학교 교수) 가 쓴 ‘신이 된 영웅 관우’ 는 중국 삼국시대의
명장 관우에 관한 탁월한 평전이다. 1986년부터 교수로 활동한 저자는 방대한 자료와
현지답사를 잘 엮어, 관우가 중국 역사· 문화· 사회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종합·입체로 깊게 보여준다.
작가 이문열의 ‘평역 삼국지’ 는 한국 사회 가치체계를 상당히 바꿔 놓았다. 관우를 오만하고
고집만 센, 미욱한 데가 있는 인물로 해석할 여지를 연 점도 그중 하나다.
그전까지 ‘삼국지’에서 관우는 범접할 수 없이 거룩하고 강하며 저 위 어딘가에 있는 존재였다.
이문열의 ‘평역 삼국지’ 가 나왔을 때 한국은 자본주의와 산업이 엄청나게 발전하던 때라,
의리·명분을 고집하다 죽은 관우보다 실리·명분을 모두 챙겨
왕조를 연 조조의 가치가 재발견될 수밖에 없었는데, 이문열 작가는 그 대문을 열어젖혔다.
하지만 마바오지 교수의 ‘신이 된 영웅 관우’ 를 읽으니 이문열 작가가 그린 관우가 어쩔 수 없이 한쪽
면만 강조된 점도 드러난다. 저자는 나관중의 ‘삼국연의’ 와 진수의 정사 ‘삼국지’ 속 관우를
대비하는 것은 기본이고, 중국 역사에서 수없이 나온 관우 관련 기록· 해석· 논평을 폭넓게 활용한다.
또 “관우가 평범한 역사 인물에서 남녀노소 누구나 숭배하는 존재로 신격화되는 과정 전반” 을 추적한다.
그가 살핀 자료에는 민담·전설·신앙 (중국의 유교·불교·도교 모두 관우를 추앙한다) 까지 두루 포함된다.
저자에 따르면 ‘삼국연의’ 를 따르든, 정사 ‘삼국지’ 를 따르든 관우는 매우 뛰어난 장수이자
지휘관 이었다. 중국 역사에 그런 장수는 많았지만, 왜 관우만 민중과 권력층
모두에게서 ‘공자에 버금가는, 신앙의 대상’ 이 되었는가. 저자는 이 질문을 줄곧 던진다.
“청나라 건륭제 시대에 제작한 도성 지도에 표시된 관묘(관우를 기리는 공간) 가 무려
116개에 달했다. 특히 자금성에 4곳, 원명원에 6곳이 몰려 있다.”
“청나라 황제들이 수차례 시호를 추가한 끝에 (관우의) 최종 시호는 다음과 같이 되었다.
충의신무영우인용위현호국보민정성수정익찬선덕관성대제.” “청나라 옹정 8년
(1730년), 관제묘를 무묘(武廟)로 바꾸고… 이때 부터 관우는
문성(文聖) 공자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명실상부한 무성(武聖) 으로 등극했다.”
오래된 골목길을 거닐다가 문득 이준식 성균관대 명예교수가 동아일보 ‘이준식
의 한시 한수’ 칼럼에 쓴 “시인의 소명의식” 이라는 글이 떠오릅니다.
숯 파는 노인, 남산에서 나무 베어 숯을 굽는다. / 얼굴은 온통 재와 그을음, 희끗희끗한
귀밑머리에 새까만 열 손가락./숯 팔아 번 돈은 어디에 쓰나. 몸에 걸칠 옷과
먹을거리에 쓰지./불쌍하구나. 홑옷을 걸치고도 숯값 떨어질까 걱정하며 추워지길 바라다니.
기세등등 말 타고 온 저 두 사람 누구인가. 누런 옷 입은 관리와 흰옷 입은 시종./손에는 문서 들고 어명이라
소리치며, 숯 수레 돌려 소 몰아 북쪽으로 끌고 간다./수레 한가득 실은 숯은 천 근 남짓. 궁중 관리가 몰고
가니 아까워도 어쩌지 못한다./붉은 비단 반 필과 무늬 비단 열 자, 소머리에 걸쳐 주며 숯값으로 치는구나.
(賣炭翁, 伐薪燒炭南山中. 滿面塵灰煙火色, 兩鬢蒼蒼十指黑. 賣炭得錢何所營, 身上衣裳口中食. 可憐身上衣正單,
心憂炭價願天寒. (…) 翩翩兩騎來是誰, 黃衣使者白衫兒. 手把文書口稱勅, 廻車叱牛牽向北. 一車炭重千餘斤,
宮使驅將惜不得. 半匹紅紗一丈綾, 繫向牛頭充炭直.) ―‘숯 파는 노인’(매탄옹·賣炭翁) 백거이(白居易·772∼846)
궁중 물품 조달에 당 황실은 전담 관리를 저자로 파견했는데 후일 이 업무가 환관의 손에 넘어가면서 그 횡포가
특히 심해졌다. 지나치게 값을 낮게 매기거나 ‘발품값’, ‘통행료’ 등 이런저런 명목을 붙여 상인을 괴롭힌 것이다.
약탈이나 다름없는 이런 행태 때문에 환관이 저자에 등장하면 문을 닫는 가게도 있었다고 한다. 당시
시인의 직책은 좌습유(左拾遺), 황제에게 국사의 폐해를 지적하여 시정을 요구하는 간관(諫官)
이었다. 환관의 권한이 막강했지만, 소명의식이 투철했던 햇병아리 관리는 악습을 수수방관하지 않았다.
노인이 ‘홑옷을 걸치고도 숯값 떨어질까 걱정하며 추워지길 바라는’ 것에 대한 연민의 정도
작용했을 터다. 시에는 ‘황실의 물품 구매 방식이 마음 아프다’ 라는 부제까지 붙어 있다.
문학성보다 시의 사회적 기능을 중시한 태도, 이는 한대 이후 민가의 비판 정신을 계승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