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조에 갇힌 종교, 잃어버린 달
종교적 신조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일 뿐
종교적 신조는 실재 그 자체에 대한 진술이 아니다. 그것은 암시이며, 방향 표지이며, 인간의 언어와 사유가 끝내 도달하지 못하는 저편을 향해 내미는 하나의 손짓이다. 말하자면 종교적 신조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일 뿐이다. 손가락은 달이 아니고, 달의 빛을 만들어내지도 않는다. 그저 어둠 속에서 “저쪽이다”라고 방향을 가리킬 뿐이다.
그럼에도 인류의 종교사는 이 단순한 비유를 끊임없이 배반해왔다. 많은 종교인들은 달을 보지 않고 손가락을 본다. 더 정확히 말하면, 손가락만을 본다. 손가락의 길이와 굵기, 피부색과 주름을 연구하며 거기에 집착한다. 어떤 이들은 그 손가락을 성물처럼 숭배한다. 어떤 이들은 손가락을 입에 넣고 빨며, 거기서 위안과 안락을 얻으려 한다. 더 심각한 이들은 그 손가락을 무기 삼아 자기 눈을 찌른다. 스스로를 눈멀게 하면서도, 그것이 진리 수호라고 믿는다.
종교적 맹신이란 대개 이런 방식으로 형성된다. 신조를 실재로 착각하는 순간, 상징을 절대화하는 순간, 인간의 말로 표현된 것을 신의 자리에 올려놓는 순간, 종교는 더 이상 구원의 길이 아니라 폭력의 체계가 된다. 종교는 원래 인간을 열어젖히는 통로였으나, 그 통로가 닫히는 순간 종교는 감옥이 된다.
신조는 언제나 임시적이다. 특정한 시대, 특정한 문화, 특정한 언어 안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삼위일체”라는 말도, “공(空)”이라는 개념도, “도(道)”라는 글자도, 모두 어떤 경험을 가리키기 위한 표지일 뿐이다. 그 경험 자체는 말 이전에 있고, 개념 이전에 있으며, 언어로 포획될 수 없다. 그런데 인간은 그 불가해성을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경험 대신 개념을 붙잡고, 신비 대신 교리를 움켜쥔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손가락을 붙잡은 사람은, 자기가 달을 보고 있다고 착각한다. 더 나아가 자기 손가락과 다른 손가락을 내민 사람들을 이단이라 부른다. “왜 저런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느냐”고 묻는다. 심지어 “저 손가락이 가리키는 것은 달이 아니다”라고 단정한다. 그렇게 해서 종교는 진리를 향한 길이 아니라 경계선이 된다. 안과 밖을 나누고, 우리와 그들을 가른다.
기독교 역사만 보아도 이 손가락 집착이 얼마나 참혹한 결과를 낳았는지 알 수 있다. 예수가 말한 것은 하나님 나라라는 ‘경험’이었지, 교리 체계가 아니었다. 그는 바람처럼 임하는 하나님의 통치를 말했지, 신조 문장을 낭독하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의 체험은 곧 문장으로 굳어졌고, 문장은 교리가 되었으며, 교리는 권력이 되었다. 그 순간부터 기독교는 예수를 따르는 종교가 아니라 예수를 관리하는 종교가 되었다.
불교도 예외가 아니다. 붓다는 “내 말에 집착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뗏목의 비유에서 그는 법마저도 강을 건너기 위한 도구일 뿐, 머리에 이고 다닐 짐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러나 불교 역시 수많은 교리와 종파를 낳았고, 그 교리와 종파를 지키기 위해 서로를 배제하고 공격해왔다. 뗏목은 어느새 성물이 되었고, 강은 잊혔다.
이슬람, 유대교, 힌두교 또한 마찬가지다. 경전은 길이었으나 목적지가 되었고, 계시는 초대였으나 명령이 되었다. 신의 말씀이 인간을 자유롭게 하기보다, 인간을 통제하는 도구로 변질되었다. 그 모든 과정의 중심에는 하나의 착각이 있다. 손가락을 달로 오해하는 착각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종교인은 누구인가. 그는 신조를 버리는 사람인가?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진정한 종교인은 신조를 ‘통과하는’ 사람이다. 신조에 머무르지 않고, 신조를 디딤돌 삼아 그 너머를 바라보는 사람이다. 그는 신조를 절대화하지 않기에, 신조를 부정하지도 않는다. 그는 신조가 가리키는 방향을 알고, 그 방향으로 걸어간다.
이런 사람들은 언제나 소수였다. 그리고 언제나 오해받았다. 그들은 신조를 넘어섰다는 이유로 신성모독자로 낙인찍혔다. 교리보다 경험을 말했기에 위험한 인물로 취급되었다. 신의 이름으로 말하기보다 침묵했기에 의심받았다. 역사 속의 예언자들, 신비가들, 영성가들이 그랬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요한네스 타울러, 루미, 장자, 하리다스 같은 이들은 언제나 체제 종교의 변방에 있었다.
그들이 공통으로 말한 것은 이것이다. “말을 넘어가라.” “형상을 버려라.” “이름을 내려놓아라.” 그들은 신을 설명하려 하지 않았다. 신 앞에서 설명은 무례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대신 그들은 신을 향해 열려 있는 삶을 살았다. 그들의 신앙은 명제가 아니라 태도였고, 교리가 아니라 방향성이었다.
오늘날 종교의 위기는 신의 부재가 아니다. 신에 대한 왜곡된 집착이다. 달은 여전히 떠 있는데, 사람들은 손가락을 놓지 못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손가락을 놓으면 불안해진다. 손가락은 눈에 보이지만, 달은 멀고 희미하기 때문이다. 신조는 확실하지만, 신은 위험하다. 신조는 관리할 수 있지만, 신은 통제할 수 없다.
그래서 많은 종교는 안전한 신을 만든다. 말로 가둘 수 있는 신, 문장으로 재현할 수 있는 신, 교단과 교회가 독점할 수 있는 신을 만든다. 그러나 그런 신은 이미 신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만든 우상이다. 유일신 신앙이 우상이 되는 순간은 바로 여기서 발생한다. 신이 하나이기 때문에 문제가 아니라, 그 하나를 인간이 소유하려 할 때 문제가 된다.
종교적 성숙이란 결국 손가락을 놓는 용기다. 손가락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손가락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비로소 시야가 열린다. 눈은 다시 어둠에 익숙해지고, 희미한 달빛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 빛은 선명하지 않다. 오히려 불확실하고, 때로는 두렵다. 그러나 그 빛은 우리를 넓은 세계로 이끈다.
종교는 확신을 주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종교는 질문을 깊게 하기 위해 존재한다. 종교는 답을 주기보다, 우리가 어떤 방향으로 살아야 하는지를 묻는다. 그 방향이 바로 달이다. 손가락은 언제든 바뀔 수 있다. 문화가 바뀌면, 언어가 바뀌면, 손가락의 모양도 달라진다. 그러나 달은 여전히 거기에 있다.
그러므로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가. 손가락인가, 달인가. 우리가 지키려 애쓰는 것은 신앙인가, 신조인가. 혹시 우리는 손가락을 움켜쥔 채, 서로의 눈을 찌르고 있지는 않은가.
종교의 미래는 더 많은 신조를 만드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신조를 넘어서는 사람들을 얼마나 품을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손가락을 내려놓고, 함께 달을 바라볼 수 있는 용기. 그 용기야말로 오늘날 종교가 회복해야 할 가장 오래된 덕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