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하계수련회때에 방문했던 정남진전망대에서 뜬금없이 안중근의사 동상을 만났습니다...그연유는 동상앞에 있는 안내판에 소상히 소개되어 있지만 관계되는 한시가 있어 소개해 봅니다...^^
장령시문(長寧詩文, 저자 김규정) 보너스 시문(38)
餘慶齋贈安義山 洪天(여경재증안의산 홍천)
여경재 의산 안 홍천 에게 주다.
-曉堂(효당) 金文鈺(김문옥)(1901~1960)
名山初壁五賢門(명산초벽오현문)
명산에 오현문 처음 열리자
脩竹深藏萬壽村(수죽심장만수촌)
긴 대나무는 만수촌 깊숙이 감춘다.
心上經營多歲月(심상경영다세월)
마음 경영 많은 세월 흘렀으니
世間榮落自朝昏(세간영락자조혼)
세간 영욕 아침저녁 다르구나.
風霜白首傾家力(풍상백수경가력)
풍상에 늙은이 집안 힘 기울어도
蘋霜何年薦祖魂(빈상하년천조혼)
선조 혼백에 제수 올리길 몇 년인가.
江海棲棲無定計(강해서서무정계)
강해에 안절부절 정한 계책 없으니
卜居從此向君論(복거종차향군론)
이제부터 거처 마련해 그대 말 따르리라.
注)
*餘慶齋(여경재) - 장흥군 장동면 만년리 만수동 598번지 만수사(萬壽祠)경내에 있는 강당.
*蘋霜(빈상) - 마름 따위의 수초(水草)로 선조의 제사를 경건히 지냄을 이른다.
*안홍천은 고종32년(1895년) 장흥읍 행원리 147번지 태생으로 호는 의산(義山)이고 죽산인(竹山人)이다.
한학자로 장흥향교 전교를 지냈으며 만수사,해동사 창건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습니다.
1973년 서울시 서초동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 고서 한적 741종 2,291책과 고문서 555점을 기증해 개인문고(의산문고)를 열었다 , 소장본 중에는 우리나라 인쇄사의 귀중한 자료인 고활자본 400여 책과 문집류, 고대 소설류, 전기류 및 고문서 등이 포함되어 있어 고전 연구에 큰 도움을 주었다.또한 지방에 흩어진 고서수집을 위한 좋은 표본이 되고 있다.
1955년 안중근의사의 사당을 대한민국 최초로 만수사(萬壽祠)에 짓고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해동명월(海東明月)>이라는 휘호를 받아 현판을 내걸었다.
*해동사 - 장흥군 장동면 만수사 경내에 있는 국내 첫 안중근 의사 추모공간이다.
1984년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71호로 지정되었다.사당 내부에는 안중근 의사 영정 2점과 친필유묵 복사본이 보관돼 있다.
황해도 해주 출신 안중근 의사의 위패를 모시고 제를 지내는 사당이 장흥에 들어서게 된 배경은 뭘까.
해동사 건립 배경은 1955년 당시 장흥읍에 살았던 지역 유림 안홍천(죽산 안씨) 선생이 주도권을 잡으면서 시작됐다. 순흥 안씨 26대손인 안중근 의사가 향년 32세, 중국 여순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했으나 후손이 없어 제사를 지내지 못하는 딱한 사연을 접한 것이 계기가 됐다. 안 선생을 주축으로 안씨 문중과 유림 등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았고, 사당 건립을 추진했다.
안 선생은 당시 이승만 대통령에게 안 의사 사당 관련 건의를 했다. 면담 이후 이 대통령에게 '해동명월(海東明月)' 이라는 친필 휘호를 전해받고 해동사의 현판으로 내걸었다. 마침내 1955년 10월 27일 해동사가 완공됐다. 이날 열린 안 의사 영정 봉안식에는 안 의사의 딸 현생 씨와 당질 춘생 씨(당시 육군 소장,前독립기념관장)가 참석했다. 이후 이 대통령은 매년 음력 3월 12일 지내는 안 의사 제사 때마다 제수용품을 보내왔다고 한다.
관산읍 우산리 정남진 전망대에 세워진 안중근의사의 동상은 안중근의사 서거 100주년을 기념하여 2010년 죽산안씨 문중의 한 독지가가 동상건립비 전액을 기탁하겠다는 헌성을 받아들여 민족의 표상인 안중근의사의 동상을 세우게 되었다.
*金文鈺(김문옥)(1901 ~ 1960) 향년 60
字는 성옥(聖玉), 號는 효당(曉堂). 光山人.
경남 합천에서 김기추(金琪錘)의 아들로 출생했다.
노사 기정진 선생의 적통을 이어받은 정율계(鄭栗溪 1879~1950) 문하에서 경학과 유학을 학습했다.
일제치하에서 몸소 행동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보이다 많은 고초를 겪었고 조국광복을 위해 헌신했다.
호남에서 노론 학맥을 마지막까지 지켰다는 평을 받고 있다.
재치(財痴) 쓰고 옮김...
사족 : 의산 안홍천선생에 대한 기억이 제법 많이 있습니다.어릴적 의산선생의 팔순잔치에 구경갔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의산선생의 손자(안춘(일명 안현문))와 저의 부친이 죽마고우로 지음의 관계이십니다.행원리에서 읍내에 있는 저의 집을 때때로 드나드셨던 의산선생은 어느해인가 99세에 돌아가셨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선생이 돌아가시고 대궐같은 행원리 집을 팔고 짐을 정리할 때 그집에 마지막으로 갔었습니다.(오래된 선풍기 한 대 득템했었음...^^) 손자되시는 안춘씨는 현재 서울 독립문 인근에 살고 계십니다.마지막 사진은 생전의 의산 안홍천선생이십니다...
안중근 의사와 장흥은 깊은 인연이 있군요. 충절의 고장 장흥은 모든 군의 귀감입니다.
한시의 글귀 중 '심상경영'이 눈에 쏙 들어 옵니다.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참 어럽지요. 시인은 이것을 중시여기네요,
성서에도 '무엇보다 마음을 지키라'라고 했지요.
선비의 고장 장흥과 안중근의사의 관계를 공부하고 갑니다.
윤봉길 의사는
충남 예산 생가와 기념관이,
양재 시민의 숲에도 기념관이
있습니다만
안중근 의사는 고향이 이북이라
자손도 적고,
고향 생가와 지자체도 없고,
그나마 장흥이 품어주고
정남진 기념관을 통해 홍보되고 있는것이 다행 입니다
凡愚 위성암ㅣ청계공/34세/관산옥당 님
포용,
그리고 장흥.
총등학교 때 안의사 사당에 소풍갔던 기억이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