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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 - 3. 딸깍발이
일석(一石) 이희승(李熙昇)선생의 회고록 ‘딸깍발이 선비의 일생’을 읽었습니다. 책장사로서 인기품목‘민중국어대사전’의 대표저자인 선생의 함자를 기억하고 있었으므로 책이 사입된 후 곧바로 읽게 되었습니다.
선생은 1896년에 태어나셔서 1989년에 작고하신, 격동의 20세기를 사셨던 현대사의 증인이십니다. 나라가 왜적에게 합병된 어두운 시대에 한글맞춤법 통일안을 마련하고 우리말큰사전을 편찬하여 민족의 혼을 지켜내신 공로자 중의 한분으로, 조선어학회사건으로 핍박을 받고 갖은 고초를 겪은 끝에 8.15 해방을 감옥에서 맞으셨습니다. 선생의 수필 ‘딸깍발이’를 읽고 깊이 빠져든 후학으로서 3·1절을 앞둔 이때 선생의 회고록을 대하게 됨을 다행으로 알고, 삼가 여기에 옮겨 남기신 뜻을 기리려 합니다.
아래는 선생의 회고록 중에서 찾은 3·1절의 기록입니다.
내가 직접 보고 겪은 기미 독립만세, 그것은 팔순이 넘은 지금도 가슴 설레는 기억의 하나다.
중앙학교를 졸업한 이듬해 경성직뉴회사의 서기로 있으면서 나는 3·1만세의 봇물 속에 뛰어들었다.
……
나는 급히 탑골공원으로 달려갔다. 수많은 학생들이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짖으며 공원 문으로 밀려나오고 있었다. 콧잔등이 시큰하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왔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들의 틈바구니에 끼어들어 정신없이 만세를 외쳐댔다.
……
본격적인 탄압과 제재가 가해지기 시작한 것은 사흘째인 3월 3일부터였다. 그날은 서울역 앞에서부터 만세를 부르자는 사발통문이 돌았다.
……
나는 2일 밤, 중동(학교) 때부터의 친구인 이병직 군의 집에서 태극기를 그렸다. 3일이 되자 밤새워 만든 태극기 50여 개를 가슴에 품고 아침 일찍 서울역 앞으로 나갔다.
……
만세 행렬의 선두가 남대문에 닿았을 때 미리 진을 치고 있던 일본군 기병들이 칼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
지금의 시경 앞쯤에 이르렀을 때 나는 일본인 순사에게 붙잡혔다. 그가 여학생 한 명을 왼손으로 붙잡고 있는 터여서 나는 본능적으로 있는 힘을 다해 팔을 뿌리치고 도망쳤다. 지금도 두고두고 마음에 걸리는 것은, 그때 내가 도망치는 일에만 마음이 급급해 그 여학생을 구할 생각을 못한 점이다.
이후 선생은 다니던 직장에서 등사기를 훔쳐 지하신문을 찍어 배포하는 등으로 독립운동의 일선에서 일을 하다가 동지가 구속된 후 경성제국대학에 진학하여 국문학에의 길로 들어섭니다. 선생이 조선어문학과를 선택할 때 졸업 후의 진로 문제로 주위의 반대가 많았다고 하는데, 선생은 이때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셨습니다.
나는 당시 취직 같은 것은 염두에도 둔 일이 없었다. “땅은 이름 없는 풀을 내지 않고, 하늘은 녹(祿)이 없는 사람을 내지 않는다(地不生無名之草 , 天不生無祿之人)”는 명구를 믿었을 뿐이다.
경성제국대학을 졸업한 선생은 경성사범학교의 교사를 거쳐 이화여자전문학교의 교수가 됩니다. 이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우리글 살리기에 나서시는데 각 지방을 순회하며 한글강습회를 열고 조선어학회에 가입하여 우리말대사전 편찬 작업을 시작하셨습니다.
…우리는 한글이 세계에서 으뜸가는 소리글이라는 자부심만 가졌을 뿐 사전 한 권도 갖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했던 것이다.
오히려 외국인들이 우리말 사전을 먼저 만들었다는 사실은 더할 수 없는 수치였다. 1880년 프랑스 외방(外邦) 선교회 신부들이 ‘한불자전(韓佛字典)’을 만들어낸 데 이어, 영국인 게일이 ‘韓英字典’을, 언더우드가 ‘한영사전(韓英辭典)’을, 심지어 총독부에서까지 ‘조선어사전’을 만들어냈다.
조선어사전 편찬의 최초 움직임은 1914년 주시경 선생이 타계한 후 광문회를 중심으로 일어났다고 합니다. 주시경선생의 제자들인 김두봉, 권덕규, 이윤재 등이 “말광을 편찬한다”고 광고를 내고 서둘렀지만 경비 문제로 무산되었다고 하였습니다.
‘말광’은 ‘사전’의 순수 우리말인 모양입니다. ‘말’의 ‘광’이니 참 좋은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국어말광, 영한말광, 한불말광…… 듣기에 좋네요. 암튼 ‘말광’의 편찬을 주도했던 분들 중에 김두봉 선생이 그간 모은 자료를 가지고 상해로 가신 탓에 이윤재 선생을 파견하여 모셔오려 하였다가 실패하는데, 이 일이 훗날의 조선어학회 사건의 빌미가 됩니다. 김두봉 선생은 사회주의 성향의 독립운동을 하신 분으로 그분을 만나 조선어사전의 자료를 구한 것을 일본경찰은 ‘상해임시정부의 밀명으로 사전 편찬 작업을 하였다’로 꼬투리를 잡았던 것입니다.
사전 편찬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한글맞춤법 통일안을 먼저 마련하고자 권덕규, 김윤경, 박현식, 신명균, 이희승 선생 등 열여덟 분이 선출되어 심의 작업에 들어갑니다. 맞춤법 통일안 제정의 제1독회는 1932년 12월 26일부터 열흘 동안 개성에서 열렸는데 어찌나 열성이셨는지 많은 일화들이 생겼다고 하였습니다.
학자는 원래 고집이 세게 마련이지만, 그중에서도 유명한 고집쟁이로 최현배, 신명균, 이만규, 김선기, 정인섭 등을 꼽을 수 있다. 최현배와 정인섭은 ‘경상도 고집’으로 특히 유명했는데…
……
나 역시 학문적인 면에서는 보통은 넘는 고집이어서 외솔과 나는 자주 대립을 하곤 했다. 정인섭과도 자주 싸웠다. 우리뿐만 아니라 18명의 위원간에는 사사건건 난마(亂麻)처럼 고집이 얽히곤 했다. 토의를 하는 중에 큰소리와 삿대질이 오가는 것은 예사요, 심할 대는 목침이 날기도 했다.
회의의 결론은 언제나 다수결에 의한 표결로 매듭지어졌는데, 일단 표결로 결정된 사항에 대해서는 누구나 뒷말 없이 따랐다. 토의가 끝나면 언제 삿대질을 했느냐는 듯이 깨끗하게 화해가 되는 것이었다.
참으로 딸깍발이 선비들다운 풍경이셨을 것입니다. 학자들이란…… 암튼 그렇게 해서 통일안의 기초 원칙이 마련되었습니다.
(1)맞춤법은 표준말을 소리 나는 대로 적되 어법에 맞도록 하고,
(2)표준말은 대체로 중류층에서 쓰는 서울말로 하며,
(3)문장의 각 단어는 띄어 쓰되 토는 윗말에 붙여 쓴다.
…이하 64개조에 달하는 원칙을 만들었다.
소위원회에서 세부사항을 손질하고, 제2독회를 열고…… 만 3년 동안 연인원 1500명이 동원되어 125차례의 회의 끝에 이룩된 통일안은 1933년 10월 29일 한글날에 발표됩니다.
한글날은 원래 1926년 11월 4일 한글 반포 8회갑(480년)을 기념하면서 이 날을 ‘가갸날’이라고 칭한 게 기원이었다는데, 조선왕조실록 세종 28년 9월 조에 ‘시월훈민정음성(是月訓民正音成)’이라고 기록된 것을 근거로 9월의 끝날인 음력 29일을 기념하였다 합니다. 1932년부터 음력을 양력으로 고쳐 10월 29일이 되었고, 오늘날처럼 10월 9일이 된 건 1945년 광복 후부터라지요. 1940년 경북 안동에서 훈민정음해례본(訓民正音解例本)이 발견되었는데, 서문에 기록된“정통 11년 9월 상한(正統 十一年 九月 上澣)”의 ‘9월 상한’을 9월 상순의 끝날인 음력 9월 10일로 잡고 그것을 양력으로 환산한 10월 9일로 정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지금은 국경일이 되어 있는 한글날이지만 당시는 일제 식민통치시대, 총독부 관리들의 눈에 거슬려 후일의 조선어학회 사건의 빌미가 됩니다. 더구나 동아일보와 손잡고 맞춤법 통일안의 책자를 만들어 배포하고 전국을 돌며 강습회를 열었으니…… 선생의 표현을 빌면 ‘강습에서는 맞춤법뿐만 아니라 민족주의적인 색채를 띤 내용도 종종 나오곤 해서 총독부의 신경을 날카롭게 했다.’였습니다.
1940년대의 조선은 일제의 발악적인 문화말살정책이 극을 달리던 시기, 이 무렵 사전 편찬 사업에 열중하던 선생과 조선어학회는 일대 시련을 겪습니다. 이하 선생의 글을 빌려 사건의 시종을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1942년 10월 1일 새벽 우리 집에 들이닥친 두 명의 형사는 “잠깐만 같이 가자”고 했다. 무엇 물어볼 것이 있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그들을 따라나선 것이 이른바 조선어학회 사건의 시작이었다. ‘잠깐’이 뼈를 깍이듯 고통스런 3년간의 옥살이로 변했다.
……
몇 시간 뒤 장지영, 최현배, 김윤경 등이 차례로 옆방에 들어왔다. 이런 사실은 간수의 호명 소리를 듣고 김선생(감방 동료)이 옆방에 ‘통방’을 하여 확인했다. 나는 그제서야 “아하, 조선어학회에 무슨 통티가 났구나”하고 짐작했다.
……
10월 1일 우리 11명이 검거된 데 이어 10월 20일을 전후하여 제2차로 이병기, 이만규, 이강래, 김선기, 정열모, 김법린, 이우식 등 7명이 검거되었고, 12월 23일부터 1943년 1월초에 걸쳐 제3차로 서승효, 안재홍, 이인, 김양수, 장현식, 정인섭, 윤병호, 이은상, 김도연, 서민호 등이 차례로 검거되었다.
이듬해 3월 초에 검거된 신윤국, 김종철 등을 합하여 피의자로 검거된 사람은 모두 33명이요, 50여명이 증인으로 연행되었다.
사건은 참으로 엉뚱한 곳에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함경남도 흥원읍 흥원경찰서에 근무하는 조선인 형사 안정묵이 읍내 영생여학교에 재학 중인 한 여학생의 일기장 속에 있는 근거 없는 글 한 구절을 트집 잡아 사건을 만들었다는데, 이 자는 야스다(安田)라는 성(姓)으로 창씨를 한 자로 공명심에 눈이 어두워 평소에도 동포들을 괴롭힌 악질이었다고 합니다.
안정묵은 무엇이라도 한 가지 끄집어낼 욕심으로 “일기장이 재미난다”며 빌려가는 형식을 취했다. 그리고 그날 밤 박양의 일기장을 읽던 안정묵은 무릎을 쳤다. “국어(國語)를 상용(常用)하는 자를 처벌하였다”는 한 구절을 발견한 것이다. 국어란 일본어가 아닌가. 일본어 상용자를 학교에서 처벌했다니 이런 반국가적인 행위가 어디 있는가.
안의 눈동자는 공명심으로 빛났다. 더욱이 담임교사의 검인까지 찍혀 있으니 영생여학교의 공식적인 확인이 된 셈이다. 이튿날 안은 주임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고 입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학생들을 매질하여 학교에 근무하셨던 정태진 김학준 선생의 이름을 끌어내고, 때마침 사전 교정 일을 맡아 조선어학회를 돕던 정태진 선생을 고문하여 사건을 만들었으니, 황당해도 이런 황당한 일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시작된 사건은 일제 경찰의 고문과 조작을 거쳐 조선어학회 관계 학자들 모두를 감옥으로 끌어넣는 일대 사건이 됩니다. 침소봉대의 사례를 본 듯한 그 사건에는 원인이 따로 있었으니, 다음과 같은 총독부의 방침 때문이었습니다.
그 뒤 총독부에서 “요시찰인 중에서 위험분자는 모두 검거하여 엄중 처벌하라”는 예비 검속령이 내렸다. 현지 경찰은 이 명령이 어학회 관계자들을 엄중 조치하라는 뜻으로 해석하고 본격적인 고문으로 사건을 조작하기 시작한 것이다.
요컨대 “미운 놈, 잘 걸렸다” 격이었던 것입니다. 가뜩이나 눈총을 받던 조선어학회의 학자들은 총독부의 방침에 충실히 따른 일본 경찰들의 고문을 받고 있지도 않은 사건을 자백하게 됩니다.
이들은 감방에서 우리를 한 사람씩 불러내서 조선어학회에서 한 일을 조목조목 들어가며 상세히 자술서를 쓰라고 지시했다. 그래서 맞춤법 통일안 제정, 표준어 사정, 외래어 표기법 통일 등을 적어냈더니 “이 따위 것을 쓰라고 예까지 데려온 줄 아느냐”며 알맹이 있는 내용을 쓰라고 강요했다.
……
그들이 고대하는 내용이 눈에 띄지 않자 본격적으로 고문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요구하는 진술은 ‘조선의 독립을 획책하기 위하여 상하이 임시정부 지령에 따라 사전을 만들고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
이극로는 조선어학회의 대표라 해서 독방에 갇혔고 남보다 심한 고문을 당해야 했다. 이윤재는 상하이에 갔다 온 사실로 더 고초를 겪었다. 김두봉을 데려오기 위해 상하이에 갔던 일을 저들은 임시정부의 지령을 받고 온 것이라 우겨댔던 것이다.
……
그들은 어휘카드(사전을 만들기 위한 낱말 카드)에서 ‘태극기는 대한제국의 국기’, ‘창덕궁은 대한제국 황제 순종이 거처하던 궁궐’이라 주석한 것을 내놓고 민족정신을 함양하기 위한 것이 아니냐고 물었고, 심지어 ‘서울’에 대한 주석이 ‘토오꾜오’보다 길고 자세하다고 트집을 잡기도 하였다.
사건의 조작을 시작한 흥원경찰서의 조선인 경찰 안정묵은 고문의 명수라고 해서 ‘사람 백정’으로 불렸다고 합니다. 선생은 그 ‘사람 백정’이 담당 형사여서 가장 큰 고초를 겪었다고 하셨습니다.
저들의 표현에 의하면 고문에는 육전(陸戰), 해전(海戰), 공전(空戰) 이렇게 세 가지 종류가 있었다. 육전이란 각목이나 목총이나,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집어 아무데나 마구 후려치는 것이다. 목총이 뎅겅뎅겅 부러져 달아나고 머리가 터져 피가 흘러내리는데, 처음 몇 대를 맞을 땐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고통스럽지만 나중에는 별 감각이 없어진다. 그러면 그들은 해전이나 공전으로 들어간다.
길다란 나무 판대기 걸상에 반듯하게 뉘고 묶은 뒤에 커다란 주전자로 콧구멍에 물을 붓는 것이 이른바 해전이다. 콧구멍으로 들어간 물은 기관을 따라 폐부에 스며들고 입으로 들어간 물은 위로 들어가 삽시간에 만삭의 여자처럼 배가 불러진다. 그러면 누구든 기절을 하고 마는데, 저들은 기절한 사람을 감방에다 처넣고 주사를 주고 약을 먹여 정신이 들게 한다. 그러면 공전에 내보낸다.
두 팔을 묶어 팔 사이에 작대기를 지르고는 양쪽 끝을 밧줄로 묶어 천장에 달아맨다. 처음에는 짚단을 발밑에 괴어주지만 저들이 지어낸 물음에 “모른다”고 대답하면 짚단을 빼버린다. 그러고는 달아맨 두 줄을 마치 그넷줄 꼬듯 한참 꼬았다간 풀어놓는다. 팔이 떨어져나갈 듯한 고통과 심한 어지러움으로 누구든 10분도 못 되어 혀를 빼물고 기절하고 만다.
옮기는 저도 치가 떨리는 고문인데 하물며 당하신 선생의 고초야…… 더구나 오로지 학문 한 가지만으로 세상을 살아오신 선비로서 그 고통과 굴욕을 어찌 참으셨을지……
그렇게 고문으로 조작한 죄로 소위 재판을 받고 선생을 비롯한 조선어학회 사건 관계자들은 중형을 선고받습니다.
예심은 다음해 9월 30일에야 종결됐다. 장지영과 정열모는 면소가 됐고, 이윤재, 한징 등 두 동지가 옥중 원혼이 됐기 때문에 12명만이 기소가 확정되어 재판에 넘겨졌다.
……
많은 수인들이 죽어 나갔다. 한밤중 나막신 소리가 저벅저벅 울려오고 옆 감방 문이 덜컹 열리는 소리가 들린 뒤 다시 나막신 소리가 멀어져 가면 예외 없이 굶주림과 추위로 죽은 시체를 실어내는 것이었는데…
……
1943년 12월 8일 이윤재도 그렇게 죽었고 1944년 2월 22일 한징 동지도 그렇게 옥중 원혼이 된 것이다.
……
1945년 1월 18일 함흥지방법원은 어학회 사건으로 기소된 12명에 대해 전원 유죄 판결을 내렸다. 이극로 징역 6년, 최현배 4년, 이희승 3년 6월, 정인승, 정태진 각 2년의 실형이 선고되었고, 김법린, 이중화, 이우식, 김양수, 김도연, 이인 등 6명은 각각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장현식은 무죄를 선고받아 즉시 석방되었다.
1942년 10월 1일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수인 생활을 시작한지 3년, 1945년 8월 15일 마침내 조국의 광복을 보시게 됩니다. 그날의 감격을 선생은 아래와 같이 기록하셨습니다.
8월 15일 오후 1시께였다. 형무소 의무실에서 근무하던 한국인 의무관이 감방으로 달려와 문을 열더니 나오라는 것이었다. 일본이 항복을 했으니 만세를 부르자고 했다. 그때의 감격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을 것인가. 이극로, 최현배, 정인승, 그리고 나 네 사람은 부등켜안고 목이 터져라 만세를 외쳤다. 만세라기보다 차라리 피울음이었다.
이후 선생은 해방된 조국에서 후생을 기르며 염원하던 우리말대사전의 편찬을 마치십니다. 바로 우리가 지금 대하는 을유문화사판 ‘우리말 큰사전’인데, 그 제1권이 나온 1947년 선생과 조선어학회의 어른들은 다음과 같이 서문에 쓰셨습니다.
…제 말의 사전을 가지지 못한 것은 문화 민족의 커다란 수치일 뿐 아니라, 민족 자체의 문화 향상을 꾀할 수 없음을 절실히 깨달아, 이 수치를 씻고자, 우리 문화 향상의 밑천을 장만하고자, 우리가 우리 손으로, 조선말 사전의 편찬 사업을 처음으로 계획한 것은 융희 4(서기 1919)년부터의 일이었으니, 당시 조선광문회에서 이 일을 착수하여, 수년 동안 재료 작성에 힘을 기울였던 것이다. 그러나, 사정으로 인하여 아깝게도 열매를 맺지 못하였고, 십여 년 뒤에 계명구락부에서 다시 시작하였으나, 이 또한 중도에 그치고 말았었다.
이 민족적 사업을 기어이 이루지 않고서는 아니 될 것을 깊이 각오한 우리 사회는, 이에 새로운 결의로써 기원 4261(서기 1928)년 한글날에 조선어 사전 편찬회를 창립하였다. 처음에는 조선어학회와 조선어 사전 편찬회가 두 날개가 되어, 하나는 맞춤법, 표준말들의 기초공사를 맡고, 하나는 낱말을 모아 그 뜻을 밝히는 일을 힘써 오다가, 그 뒤에는 형편에 따라 조선어학회가 사전 편찬회의 사업을 넘겨 맡게 되었으니 이는 조선어학회가 특별한 재력과 계획이 있어서가 아니라, 다만 까무러져 가는 사전 편찬회의 최후를 거저 앉아 볼 수 없는 안타까운 심정과 뜨거운 정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포악한 왜정의 억압과 곤궁한 경제의 쪼들림 가운데서, 오직 구원한 민족적 정신을 가슴 속 깊이 간직하고, 원대한 문화적 의욕에 부추긴바 되어, 한 자루의 모지라진 붓으로 천만가지 곤란과 싸워 온 지 열다섯 해만에 만족하지 못한 원고를 인쇄에 붙이었더니 애닯도다. 험한 길은 갈수록 태산이라, 기어이 우리말과 글을 뿌리째 뽑아버리려는 포악무도한 왜정은 그해, 곧 기원 4275(서기 1942)년의 시월에, 편찬회의와 어학회에 관계된 사람 삼십여 명을 검거하매, 사전 원고도 사람과 함께 흥원과 함흥으로 굴러다니며 감옥살이를 겪은 지 꼭 세돐이나 되었었다.
그 간에 동지 두 분은 원통히도 옥중의 고혼으로 사라지고, 마지막의 공판을 받은 사람은 열두 사람이요, 끝까지 옥에서 벗어나지 못한 다섯 사람은 그 실날 같은 목숨이 바람 앞의 등불같이 바드러워, 오늘 꺼질까, 내일 사라질까 하던 차에 반갑다, 조국 해방을 외치는 자유의 종소리가 굳게 닫힌 옥문을 깨뜨리어, 까물거리던 쇠잔한 목숨과 함께 흩어졌던 원고가 도로 살아남을 얻었으니, 이 어찌 한갖 조선어학회 동지들만의 기쁨이랴?
서울에 돌아오자, 곧 감옥에서 헤어졌던 동지들이 다시 모여, 한편으로는 강습회를 차려 한글을 가르치며, 한편으로는 꺾이었던 붓자루를 다시 가다듬어 잡고, 흩으러진 원고를 그러모아, 깁고 보태어 가면서 다듬질하기 두 해만에, 이제 겨우 그 첫 권을 박아, 오백 한 돌인 한글날을 잡아, 천하에 펴내게 된 것이다. 그 내용에 있어서는 다시 기움질을 받아야 할 곳이 많으매, 그 질적 완성은 먼 뒷날을 기다릴 밖에 없지마는 우선 이만한 것으로 하나는 써 조국 광복 문화 부흥에 분주한 우리 사회의 기대에 대답하며, 또 하나는 써 문화 민족의 체면을 세우는 첫 걸음을 삼고자 한다.
돌아보건대, 스무 해 전에, 사전 편찬을 시작한 것은 조상의 끼친 문화재를 모아 보전하여, 저 일본의 포악한 동화정책에 소멸됨을 면하게 하여, 써 자손만대에 전하고자 하던 일에 악운이 갈수록 짖궂어, 그 극적 기도조차 위태한 지경에 빠지기 몇 번이었던가? 이제 그 아홉 죽음에서, 한 삶을 얻고 보니, 때는 엄동설한이 지나간 봄철이요, 침침칠야가 밝아진 아침이라, 광명이 사방에 가득하고, 생명이 천지에 약동한다. 인제는 이 책이 다만 앞 사람의 유산을 찾는 도움이 됨에 그치지 아니하고, 나아가서는 민족 문화를 창조하고 활동의 이로운 연장이 되며, 또 그 창조된 문화재를 거두어들여, 앞으로 자꾸 충실해가는 보배로운 곳집이 되기를 바라 마지 아니한다.
……
아래는 선생의 수필 ‘딸깍발이’의 전문입니다. 감히 말씀드리기 송구스러워 글을 옮기는 것으로 인사말에 대신하겠습니다. 이제 몇 시간 후면 3·1절인데, 뜻 깊은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딸깍발이’란 것은 '남산(南山)골 샌님'의 별명이다. 왜 그런 별호(別號)가 생겼는가 하면, 남산골 샌님은 지나 마르나 나막신을 신고 다녔으며, 마른 날은 나막신 굽이 굳은 땅에 부딪쳐서 딸깍딸깍 소리가 유난하였기 때문이다. 요새 청년들은 아마 그런 광경을 못 구경하였을 것이니, 좀 상상하기에 곤란할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일제 시대에 일인들이 '게다'를 끌고 콘크리트 길바닥을 걸어 다니던 꼴을 기억하고 있다면, '딸깍발이'라는 명칭이 붙게 된 까닭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남산골 샌님이 마른 날 나막신 소리를 내는 것은 그다지 얘깃거리가 될 것도 없다. 그 소리와 아울러, 그 모양이 퍽 초라하고, 궁상이 다닥다닥 달려 있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인생으로서 한 고비가 겨워서 머리가 희끗희끗할 지경에 이르기까지, 변변하지 못한 벼슬이나마 한 자리 얻어 하지 못하고, 다른 일, 특히 생업에는 아주 손방이어서, 아예 손을 댈 생각조차 아니 하였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는 극도로 궁핍한 구렁텅이에 빠져서, 글자 그대로 삼순구식(三旬九食)의 비참한 생활을 해 가는 것이다. 그 꼬락서니라든지 차림차림이야 여간 장관(壯觀)이 아니다.
두 볼이 야윌 대로 야위어서 담배 모금이나 세차게 빨 때에는 양 볼의 가죽이 입 안에서 서로 맞닿을 지경이요, 콧날이 날카롭게 오똑 서서 꾀와 이지(理智)만이 내발릴 대로 발려 있고, 사철 없이 말간 콧물이 방울방울 맺혀 떨어진다. 그래도 두 눈은 개가 풀리지 않고, 영채(映彩)가 돌아서, 무력(無力)이라든지 낙심의 빛을 나타내지 않고 있다. 아래·윗입술이 쪼그라질 정도로 굳게 다문 입은 그 의지력을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내고 있다. 많지 않은 아랫수염이 뾰족하니 앞으로 향하여 휘어뻗쳤으며, 이마는 대개 툭 소스라쳐 나오는 편보다 메뚜기 이마로 좀 편편하게 버스러진 것이 흔히 볼 수 있는 타입이다.
이러한 화상이 꿰멜 대로 꿰맨 헌 망건(網巾)을 도토리같이 눌러 쓰고, 대우가 조글조글한 헌 갓을 좀 뒤로 젖혀 쓰는 것이 버릇이다. 서리가 올 무렵까지 베 중의 적삼이거나, 복(伏)이 들도록 솜바지 저고리의 거죽을 벗겨서 여름살이를 삼는 것은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그리고 자락이 모지라지고 때가 꾀죄죄하게 흐르는 도포(道袍)나 중치막을 입은 후, 술이 다 떨어지고 몇 동강을 이은 띠를 흉복통에 눌러 띠고, 나막신을 신었을망정 행전은 잊어버리는 일이 없이 치고 나선다. 걸음을 걸어도 일인(日人)들 모양으로 경망스럽게 발을 옮기는 것이 아니라 느럭느럭 갈지[之]자 걸음으로, 뼈대만 엉성한 호리호리한 체격일망정, 그래도 두 어깨를 턱 젖혀서 가슴을 뻐기고, 고개를 휘번덕거리기는커녕 곁눈질 하는 법 없이 눈을 내리깔아 코 끝만 보고 걸어가는 모습, 이 모든 특징이 '딸깍발이'란 말 속에 전부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이런 샌님들은 그다지 출입하는 일이 없다. 사랑이 있든지 없든지 방 하나를 따로 차지하고 들어앉아서, 폐포파립(弊袍破笠)이나마 의관(衣冠)을 정제(整齊)하고, 대개는 꿇어앉아서 사서오경(四書五經)을 비롯한 수많은 유교 전적(儒敎典籍)을 얼음에 박 밀듯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내리 외는 것이 날마다 그의 과업이다. 이런 친구들은 집안 살림살이와는 아랑곳없다. 게다가 굴뚝에 연기를 내는 것도, 안으로서 그 부인이 전당을 잡히든지 빚을 내든지, 이웃에서 꾸어 오든지 하여 겨우 연명이나 하는 것이다. 그러노라니 쇠털같이 허구한 날 그 실내(室內)의 고심이야 형용할 말이 없을 것이다. 이런 샌님의 생각으로는 청렴 개결(淸廉介潔)을 생명으로 삼는 선비로서 재물을 알아서는 안 된다. 어찌 감히 이해를 따지고 가릴 것이냐. 오직 예의, 염치(廉恥)가 있을 뿐이다. 인(仁)과 의(義) 속에 살다가 인과 의를 위하여 죽는 것이 떳떳하다.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를 배울 것이요, 악비(岳飛)와 문천상(文天祥)을 본받을 것이다. 이리하여 마음에 음사(淫邪)를 생각하지 않고, 입으로 재물을 말하지 않는다. 어디 가서 취대(取貸)하여 올 주변도 못 되지마는, 애초에 그럴 생각을 염두에 두는 일도 없다.
겨울이 오니 땔나무가 있을 리 만무하다. 동지 설상(雪上) 삼척 냉돌에 변변치도 못한 이부자리를 깔고 누웠으니, 사뭇 뼈가 저려 올라오고 다리 팔 마디에서 오도독 소리가 나도록 온몸이 곧아 오는 판에, 사지를 웅크릴 대로 웅크리고 안간힘을 꽁꽁 쓰면서 이를 악물다 못해 박박 갈면서 하는 말이,
"요놈, 요 괘씸한 추위란 놈 같으니, 네가 지금은 이렇게 기승을 부리지마는, 어디 내년 봄에 두고 보자."
하고 벼르더라는 이야기가 전하지마는, 이것이 옛날 남산골 '딸깍발이'의 성격을 단적(端的)으로 가장 잘 표현한 이야기다. 사실로는 졌지마는 마음으로는 안 졌다는 앙큼한 자존심, 꼬장꼬장한 고지식, 양반은 얼어 죽어도 겻불을 안 쬔다는 지조(志操), 이 몇 가지가 그들의 생활 신조였다.
첫댓글 ‘딸깍발이’란 것은 '남산(南山)골 샌님'의![별](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_25.gif)
명이다. 왜 그런 ![별](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_25.gif)
호(別號)가 생겼는가 하면, 남산골 샌님은 지나 마르나 나막신을 신고 다녔으며, 마른 날은 나막신 굽이 굳은 땅에 부딪쳐서 딸깍딸깍 소리가 유난하였기 때문이다, - 평소에 그 용어가 생소했는데 이제사 알게 되었네요. 일제시대 일경에 의해 큰 고초를 당하면서도 [우리말 사전]에 애착을 보이며 정신적인 독립운동을 지속한 이희승 선생 외 여러 선각자들의 애국정신을 본받고자 합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는 국어와 국어사전은 거의 거들떠 보지도 않고 영어 등 외국어 사전과 그 언어들이 대우받고 국어는 홀대받는 현실 속에 아름다운 우리말이 사라져 감이 안쓰럽습니다
그러하기에 요즘 청소년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욕과 상스런 말, 천박한 언어가 많아져 가고, 국어 대신 인스턴트 문화와 외국어 공부에 치인 나머지 깊은 사고력이 저하되어 자신의 생각을 글로 표현하는데 서툰 젊은 이들이 증가하는 현상은 참으로 유감이 아닐 수 없습니다. 형님의 생각 깊은 유익한 글에 감사 드립니다. 중국발 공해먼지 조심하시고 늘 건강 하시기 바랍니다. 3월 6일 낮에 책방에 갈 것 같습니다.
요즘 선인들의 글을 읽으며 우리가 얼마나 행복한 세대인가 실감하곤 합니다. 노력만 하면 먹을 것 입을 것 걱정은 안해도 좋은 사회에서 좌니 우니 입맛에 맞지 않는 상대는 얼마든지 욕을 해줄 수 있고, 그걸 표현할 수 있는 한글을 마음껏 향유하고 있으니 100년 전의 사람들이 본다면 깜짝 놀랄만큼 이상 사회에서 살고 있는 셈입니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당연한 듯이 누리고 있는 이러한 세상을 만들어 준 선인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잊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공기를 값없이 숨쉬고 있지만 그게 없으면 큰일이 나는 것처럼, 이런 환경을 이루어주신 분이 없었으면 어떤 사회에 살았을지 생각지 않고 있었으니...
@이피터 당연한 듯이 누리고만 있었던 모든 것에 고마워 할 줄 모르는 사람은 되지 말아야 한다고 다짐을 해봅니다.
선인들이 우리에게 몸으로 교훈이 되어 주신 것처럼 우리도 아이들에게 못난 모습은 보이지 않아야 할 텐데....
가게에 오는 아이들을 보면서 진작 자각하지 못한 자신을 탄하고 있습니다.
언제든지 방문해 주세요. 쓴 커피 한잔은 항상 대기하고 있습니다.
몸이 안 좋아 답글이 늦었습니다. 몸살인 듯싶어 약을 먹었는데 좀 나은 것 같네요.
이피터 님도 환절기 건강 조심하세요. 요즘 마스크 쓰고 다니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한글날 개정과 국어대사전편찬과정
조선어학회사건을 자세히 말씀해주신 과하객님께 감사드립니다...
딸깍발이...갸우뚱하게 하는 단어였는데
이제야 알게 되었군요..
글을 읽는 내내 가슴이 답답함을 느꼈고
일제강정기를 버티어 낸 많은 분들이
우리역사발전에 기여했다니
감사한 일이지요...
한편에선 친일을 논하기도 하지만....
그시대에 생존을 하기위해선 불가피했음을..
벽공...
새파랗게 고인물이 만지면 출렁일듯...
이 싯구하나가 푸른 하늘을 이렇듯 아름답게 표현할수 있다는게 신기할 따름...
수필 딸깍발이를 읽고싶군요...
과하객님...긴 글에 또한번 감사드립니다..
우리 한글 정말로 뛰어난 글자지요. 몇 줄 문장으로 온갖 사물의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있는 우리 글의 우수성에 저도 늘 감탄하고 있습니다.
이희승 선생의 수필 '딸깍발이'를 읽으면서도 '왕조시대의 가난한 선비들을 참으로 절묘하게 표현하셨구나'하고 감탄을 하였는데, 선생이 살아오신 시대가 우리 역사상 가장 어두웠던 때였다는 데 생각이 미쳐 더욱 마음이 아팠습니다.
목숨을 걸고 지켜주신 우리 한글.... 우리도 잘 지키고 가꾸어서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할 텐데....
이희승 선생의 글을 옮긴 것 뿐인데 제가 염치없이 칭찬을 받았습니다. 선생의 몫까지 감사 드립니다.
과하객님의 위 글을 대하며, 새삼 한국말사전을 만들기 위해 갖은 고초를 겪으신 여러 어르신들께 삼가 경의를 표합니다. 그리고 좋은 자료를 올려주신 과하객님의 안목에도 깊이 감사드립니다. 현재 한국어를 캄보디아 사람들에게 가르치면서 다시금 한글의 우수성을 실감하게 됩니다. 기본자모음 24개만 익히며 한글은 그 즉시라도 읽을 수 있고 영문과 같은 속도로 타자가 가능합니다. 중국어는 언어의 특성상 타자속도가 엄청 늦습니다. 여기 캄보디아말은 자모음 합쳐 무려 77개라 1년 반이 넘어가는데도 현지어를 읽는 게 어렵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언어도 반 년지나면 읽는 게 가능한데 말이죠.
위에 소개된 이희승 선생의 수필 <딸깍발이> 너무 재미 있습니다. 그리고 참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짠합니다. 글쓰기에 관심이 많은 저에게 좋은 가르침을 주는 명작입니다. 다시 한 번 과하객 님의 안목에 고개 숙이고 세상에 알려주심에 감사합니다.
멀리 캄보디아에서도 한글을 배우는 분들이 있군요. 가르치시는 밝은하늘 님의 모습이 아마도 이 시대의 딸깍발이가 아닌가 싶습니다. 길이 험해도 꼬장꼬장 고집을 피워 앞으로 나가고, 곁불은 쬐지 않는 선비정신....
3.1절을 맞아 때마침 구하게 된 일석 선생의 회고록을 옮겨보면서. '내가 참으로 많은 은혜를 입고 있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런 고초를 겪으시면서도 원고를 보존하여 결국 우리말큰사전의 편찬을 이루신 선인들이 계신데, 조금만 힘든 일이 있어도 엄살부터 부려보는 소심쟁이.... 더구나 그분들이 이루신 한글을 원없이 사용하면서....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수필 '딸깍발이'는 한글로 썼기에 더욱 읽는 맛이 나는 것
@밝은하늘 같습니다. '딸깍발이'라는 낱말을 다른 나라 말로 번역할 때도 같은 맛이 날 수 있을까 싶기도 하구요. 역시 우리말은 우리 글로 표현할 때 제맛이 살아나지 싶습니다.
우리 한글의 우수성 많이 전파해 주세요. 일제 하에서 일석 선생과 조선어학회 어른들이 우리말큰사전을 편찬하여 정신적 독립운동을 하였듯이, 한글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는 것은 곧 애국의 길이 될 것입니다. 달리 애국이 따로 있을까 싶어 저도 어제는 종일 3.1절 이야기를 했드랬는데, 밝은하늘 님도 한글을 가르치시면서 같은 기분이실 듯 합니다.
과하객님.... 아주 아주 오래전에 읽었던 허생전의 허생도 딸깍발이 남산골샌님 출신으로 기억나는데 맞습니까?
그렇군요. '허생전'의 주인공 허생도 남산골샌님이었지요. 아마 원조에 가까웠던 걸로 기억하는데 저도 오래 전에 읽었던 거라 깜박하고 있었습니다. 허생이 10년 공부를 작파하고 남산골 오막살이에서 하산하여 조선의 재물을 좌지우지하는 내용으로 기억하는데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암튼 저자인 연암 박지원은 '양반전' '호질'등 풍자소설을 잘 썼다던데 왕조시대에 그러한 문학이 있었다는 건 참으로 고마운 일입니다. 더불어 깨우쳐 주신 대머리총각 님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한자도 우리글입니다
옳습니다. 이번에 전문서적을 하나 구하여 찾아보니 한자의 원류도 동이족에 있다고 되어 있더군요. 지금이후 님의 글에 대해 해답을 찾은 덕택에 알게 되었으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답글이 늦어 죄송합니다. 무조건 옳다 그르다 할 수 없어 책을 찾아보느라고 그랬으니 너그러히 용서하세요. 좋은 공부를 시켜주셔서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