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의 집
김 희 숙(2021.4. 신인상. 부산)
매화는 이미 졌고 돌담 귀퉁이에 개나리와 진달래 꽃봉오리뿐이다. 도시는 거리마다 봄꽃이 축제를 열었다. 산사의 꽃도 피었으리라 기대했는데 때를 못 맞추었다. 산속의 봄은 꽃잎을 여닫는 시간이 다르다.
사월에는 선암사 벚꽃이 꽃불을 밝힌다. 응진당과 원통전 사이 겹벚꽃이 피면 진분홍 꽃길이 솜씨 좋은 화가의 수채화 한 폭 같다. 분홍길은 몽환에 빠져 그림 속을 거니는 착각마저 일으킨다. 그 신비한 경험 때문에 봄이 깊어 가면 선암사가 눈앞에 아른거린다. 꽃이 난만하면 어느 방향에서나 그럴싸하게 사진 속으로 들어온다. 그러나 벚나무는 휑하니 빈손이다. 바람만 가득한 길을 향해 애꿎은 카메라 셔터만 눌러댔다.
지나가던 스님 한 분이 손짓을 한다. 너른 절 마당에는 우리 일행과 휴대전화로 사진을 찍던 부부 두 사람뿐이다. 모두들 얼떨결에 쫓아 달려갔다. 스님은 응진당이 있는 칠전선원 안으로 들어가더니 달마전으로 성큼성큼 앞서신다. 평소에는 스님들의 수행 공간이라고 일반인 출입을 금하는 곳이다. 우리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뒤따른다.
달마전에 발을 내디디니 어두운 부엌이다. 벽을 따라 장작더미가 쌓여 있고 차를 덖었을 법한 큰 가마솥이 놓여 있다. 고개를 돌려 살펴 볼 겨를도 없이 부엌을 가로질러 앞으로 더 걸어간다. 어둠이 눈에 익기도 전에 맞은 편 문 앞에 도달한다. 거리낌없다는 듯 단숨에 밀어젖힌 문 사이로 밝은 빛이 훅 안겨온다. 문 밖에 상상조차 해 보지 못한 광경이 나타났다. 울타리 너머에 초록의 야생 차밭이 대초원처럼 펼쳐져 있고, 기역자형 처마 아래 오래된 툇마루가 반질거린다. 대나무 바지랑대가 걸친 빨랫줄에는 승복 한 벌이 바람 따라 살랑대며 한껏 한가로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야트막한 돌담 위로활짝 핀 올벚나무 꽃잎이 날리더니 하롱하롱 공중에서 노닌다. 사진 속에서나 보던 풍경이 밖으로 나왔다.
달마전 뒤뜰에는 크기와 모양이 같지 않은 돌그릇 네 개가 놓여 있다. 자연석 위에 통나무와 대롱을 연결해 물을 흘러내리게 했다. 넘실대는 석함에도 연분홍 꽃잎이 내려앉는다. 담 아래로 넘어 온 물은 네모 모양의 가장 큰 돌그릇을 만나 깊은 물함을 만든 후 대통을 거쳐 아래로 간다. 두 번째 돌그릇은 처음 그릇보다 낮고 돌의 둘레가 투박한 타원형이다. 위쪽이 반듯하지 않아서 물이 차오르다가 옆으로 흘러넘치기도 한다. 넘치던 물골 따라 돌 색깔이 검게 변해 있다. 다시 더 전진한다. 이번에는 제법 반듯한 둥근 돌그릇이 기다린다. 수각은 아래로 갈수록 작고 낮아진다. 세 개의 그릇은 나란히 앉았는데 맨 끝 그릇은한쪽으로 비스듬히 놓였다. 네 번째 돌은 깊이도 없으며 모양도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흐릿하다. 작은 바가지로 몇 번 떠내면 없어질 물의 양이다.
수각의 물이 흘러내린다. 물줄기는 통나무를 지나 첫 돌그릇에 떨어질 때 한 번 꺾인다. 세 개의 석함은 일직선으로 있어서 물도 아래로 직진한다. 그러나 마지막 대통은 방향을 다르게 두었다. 급기야 물줄기는 휘어지며 움직인다. 모든 돌그릇을 나란히 놔둘 수 있었으련만 네 번째 그릇을 옆으로 놓아 물길을 비트는 이유가 궁금해진다.
살아온 내 생도 저랬을까. 고향을 떠난 타지의 생활은 외롭고 힘겨웠다. 명리학 공부를 하느라 삼년간 지하도 생활을 경험했고 아이들에게는 엄마만 같이 찍힌 졸업사진을 남겨주었다. 팔팔한 젊은 나이에 암이라는 불청객과 싸우기도 했다. 다른 이들은 잘도 나아가는 것 같은데 나만 자꾸 비껴나는 삶이었다. 지름길은 없었고 넓고 훤한 길은 내 것이 아니었다. 번듯한 길이 아닌 샛길로 밀려난 작은 돌그릇이 아웃사이더 인생의 내 모습 같다.
되돌아보면 굽이굽이 돌아온 시간들이었는데 그 안에서 얻는 것도 많았다. 굽어 꺾인 생활을 이겨 내려 글을 쓰기 시작했다. 글에서는 글쓴이의 살아온 세월이 느껴지고 생각과 가치관도 알 수 있다. 내 글에는 쉬어가는 여유와 채우고 비우는 자연스러운 이음이 부족하다. 바쁘다며 주변을 바라보지 못했기에 세밀한 묘사가 되지 않고, 긴장하며 살아왔기에 문장은 뻣뻣이 경직되어 있다. 생의 모퉁이를 돌때마다 놓여 있었을 세상의 경치를 제대로 담지 못했고 오므리기에 급급해 펼치는 법을 잊었기 때문이리라.
수각은 청정한 물을 담는 물의 집이다. 쓰임에 따라 다르게 사용한다. 가장 위쪽 신성한 물은 부처님께 올리거나 찻물을 달인다. 그 다음 물은 대중이 먹는 물이며 세 번째 둥근 함의 물은 쌀이나 과일을 씻고 밥을 짓는다. 맨 나중에 휘어져 내려온 물은 손발을 씻고 걸레를 헹구는 허드렛물로 이용한다. 수각의 물은 담기고 쓰이다가 자연으로 돌아간다.
돌아앉은 돌그릇이 만드는 물의 곡선에 직선의 삶을 원하던 나를 비추어본다. 그릇끼리 연결해서 물이 지나게 하는 대통은 채워 넣는 것과 내보내는 것을 보여준다. 지금의 나는 조금씩 비워도 되련만 아직도 내려 보내는 것이 서툴고 여전히 담기에만 분주하다. 마지막 돌그릇의 허드렛물만큼이라도 누군가를 위해 쓰인 적이 있었을까. 내 삶만 굴곡지다 여기며 다른 이들의 꺾인 곳을 쉬이 돌아보지 못했다.
스님께서 문고리를 풀어 여러 명의 고승을 배출한 방안을 구경시켜 주신다. 선방을 살피며 맨 끝의 돌그릇이 비스듬히 앉은 이유를 미루어 짐작해본다. 굽은 물줄기처럼 조금 비껴 앉는 일도 스님들의 공부법 중 하나이지 않을까. 수행공간을 기꺼이 열어주신 배려로 환하게 밝힌 꽃불 대신 풍경 같은 물의 집을 만났다. 때로는 인생이 계획대로 되지 않아도 살아볼 만한 날들이다.
첫댓글 김희숙 선생님. 2021년 4월 수필과비평 신인상 수상과 등단을 축하드립니다. 선암사 수각을 보며 '돌아앉은 돌그릇이 만드는 물의 곡선에 직선의 삶을 원하던 나를 비추어본다'는 구절이 가슴에 남습니다. 늘 건강하시고 늘 행운 가득한 날 되시길 바랍니다.^^
@@@신인상 등단 작품은 원고 도착 순서로 올리고 있습니다.
김희숙 선생님 , 수필과비평 신인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선암사 수각이라는 대상을 통찰하고 작품으로 승화시키는 능력이 신인답지 않습니다. 건필하세요.
김 희숙 선생님 축하드립니다.
김희숙 선생님, 열심히 습작한 보람이 있습니다. 내공이 탄탄해졌으니까 더욱 문채형형하리라 기대합니다^^
김희숙 선생님 등단을 축하드립니다.
좋은 글 감사히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