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몽주, 정도전, 이방원
정몽주하면 제일 먼저 아래 시조가 생각난다.
'이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넊이라도 있고없고
님향한 일편단심 가실길이 있으랴'
단심가라고 불린다.
중고 시절 국어 교과서에도 나와
너무 유명해 지금도 외울 수 있을 정도로 눈에 익다.
십대 시절 첫사랑의 지고지순한 사랑을 표현할 때도
써 먹을 수 있을 만큼 멋진 시조이다.
솔직히 이런 멋진 표현을 고려말 유학자가
정말 했을까 할만큼 정몽주가
진짜 쓴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스럽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서로 엮인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와같이 엮어 백년을 누리리라'
이방원이 아버지 뻘 되는 정몽주를 설득하기위하여
정몽주를 살해하기 직전 정몽주 앞에서 읊었다는 '
하여가' 라는 시조이다.
이방원이 정몽주를 조영규에게 살해하라고 지시할 때
나이는 25세였다. 25세의 나이인 이방원이
세상을 달관한 듯한 저런 멋진 시를 읇을 수 있었을 까?
이 시조 또한 이방원이 직접 지었다는 것도 의문스럽다.
당시 정몽주는 57세였다. 즉 30살이 넘게 나이 차가 있었는데
서로 둘이 앉아 저런 시조를 읊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야사에서 보면 정몽주가 이방원 앞에서
단심가를 읊고 죽임을 당할 줄 미리 알았다 한다.
그래서 선죽교 지나기 직전 주막에 쉬다가
다시 말에 오르면서 거꾸로 말을 탔다.
주막 주인이 말을 왜 거꾸로 타시냐고 하니 정몽주가
" 내가 저 다리 건너기 전 죽을 것인데 나의 놀라는
모습을 그들에게 보이기 싫어 이렇게 거꾸로 타네"
했다고 한다.
이런 야사와 함께 이 시조들도 정몽주가
죽은 후에 후세 사람들이 만들어 낸 것 아닌가 한다.
고려사등 공식 역사서에도 이 시조들은 나오지 않는다. '
청구영언'이라는 시조 모음집이나
정몽주가 죽은 뒤에 나온 '포은집'에만 나온다.
위화도회군까지는 정몽주, 정도전, 이방원은
쿠데타 동지들이었다. 그들은
위화도회군 이후 우왕의 아들 창왕을 옹립하고나서
막바로 창왕을 '신돈의 씨'라고 주장 하면서
창왕을 폐위시키고 공양왕을 옹립할 때 까지도
같은 길을 가고 있었다. 그러나 거기까지 였다.
정몽주는 정도전, 이방원과 너무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정몽주는 고려를 개혁하여 유교국가로 만들어 가는데는
정도전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으나
고려를 멸하고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는데는 반대했다.
즉 정몽주는 고려 왕조를 유지하는 범위안에서
개혁을 천천히 해나가고자 한 온건파 사대부이고
정도전은 고려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왕조를 세워야 한다는 혁명파 사대부였다.
공양왕 즉위이후 정몽주와 정도전은
이런 생각으로 서로를 견제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도전은 정몽주를 이색 문하에서
같이 동문수학을 한 존경하는 친구이자
선배로 깍듯이 대우하고 있었다.
정몽주 또한 한 때는 후배인 정도전에게
[맹자]를 선물로 보내주며
학문을 권장했을 정도로
두 사람은 서로 존경하고 의지하는 처지였다.
정도전은 어떻게 해서든지 이런 정몽주를
설득하여 함께 가고 싶었다.
이성계 또한 정도전과 같은 마음이었다.
조선건국이 조금 늦어지더라도
백성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정몽주등 온건 사대부들을
설득하여 같이 가고자 했다.
하지만 정몽주 쪽에서 먼저 손을 쓴다.
정몽주쪽에서 보기에 이성계의 세력은
너무 커지고 있었다.
더욱이 이들 신진 세력들은
이성계의 명망을 업고 새로운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
정도전, 조준, 남은등은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을 보인 것이다.
이때 정몽주는 소외되고 있었다.
정몽주는 현실개혁을
도모하되 온건한 방법을 택하려 했다.
고려를 유지하면서 고려를 유교국가로 만들어 가려했다.
정몽주에게 그런 기회가 왔다.
1392년 세자가 명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이성계는 세자를 마중하러 황주로 가는 길에
해주에서 사냥을 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부상을 당했다.
이 소식을 들은 정몽주는 천재일우의 기회로 여겼다.
정몽주는 그의 세력들인 대간에 말했다.
“이성계가 말에서 떨어져 지금 병세가 위독하다.
그의 수하를 먼저 제거한 뒤에 이성계를 없애야 한다.”
이에 대간에서는 정도전를 비롯하여
조준, 남은 등을 탄핵하여 귀양 보내고
이어 죽이려는 계획을 세웠다.
정도전은 정몽주가 죽을 즈음,
예천의 감옥에 갇혀 있었다.
정도전은 정몽주의 탄핵을 받고
벼슬이 떨어져 귀양을 와있었고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이때 반전이 일어난다. 이방원이 나선 것이다.
이방원은 부상당한 이성계를
개경으로 모시고 온다.
그리고 이방원과 이성계의 동생 이화,
사위 이제 등이 휘하 장사들에게 외쳤다.
“이씨가 왕실에 충성하는 것은 온 나라 사람이 다 아는 바이다.
지금 몽주가 모함을 하여 악명을 덮어씌우니 후세에
누가 이를 알아 분별하리요.”
그러고는 정몽주를 제거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때 이성계가 정몽주 제거에 동조했는 지에는 여러 설이 있다.
공식 역사서에는 이성계가 이방원이
정몽주를 죽인 것에 대해 이방원에 불같이 화를 내며
정몽주 죽음을 애도했다고 나온다.
어쩠든 이성계의 조카사위 변중량이
이성계가 개경으로 돌아와 정몽주를 죽이려 한다며
정몽주에게 알린다.
이에 정몽주는 이성계의 의중을 떠보기 위해
이성계의 집으로 찾아간다.
정몽주를 맞은 이성계는 전과 다름없이 정몽주를 대해주었다.
이때 이방원이 정몽주의 심중을 떠보려고 하여가를 읇자
정몽주는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라는 단심가로 대답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이 시조는 그때 부른 것이 아닐 것이다.
그럴 상황도 아니었다.
정몽주가 이성계 병문안을 마치고 돌아간다
하자 이방원은 이때를 놓칠 수가 없다 생각하고
조영규 등 장사 대여섯 사람을 급히 보내
선죽교에서 그를 때려 죽였다.
이 사실을 들은 이성계는 짐짓 진노한 척 했으나
본심은 달랐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한때 쿠데타 동지를 죽였다는 소리를 듣지 않기위해
이방원에게 정몽주 살해에 대한 독박을 씌웠는지 모른다.
그 후의 일을 보면 더 그런 추측이 확실해 진다.
정몽주는 역적으로 몰려 목은 저자에 내 걸렸다.
그리고 남은 정몽주의 세력들도 모두 제거됐다.
정도전등도 풀려나서 다시 권력의 핵으로 복귀했다.
그리고 이성계를 떠받들고
급진적 개혁을 단행하면서 권좌를 누리다 기
어코 고려를 멸하고 조선을 건국한다.
정몽주의 죽음은 표면적으로는
이방원의 독자행동으로 이루어졌지만
그 배후에는 이성계, 정도전 등이 있었서 가능한 것이다.
권력 앞에는 적과 동지도 없고 또 영원한 동지도
영원한 적도 없는 것은 고금이 다 같지 않은가?
정몽주의 세력이 제거 되자 정도전등은
거칠 것 없이 이성계를 왕위에 나갈 수 있도록 한다.
그리고 그 해에 이성계는 왕위에 오르고 공신들을 발표 한다.
그런데 그 일등 공신에서 이방원은 제외 된다.
또 다른 비극이 시작 되고 있었다.
이어서 '1차왕자의 난' 편이 이어집니다.
마지막 사진은 이방원 상상초상화 입니다.
내가 보기엔 이방원 이미지에 가장 근접하는 것 같습니당.^^♡